<무맥> |
◇전통무예서 ‘무예도보통지’. |
문화의 전승은 때때로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사람의 생명처럼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고 생사고비에서 역전의 드라마를 쓰기도 한다.
세계에서 하나뿐인 무경(武經), ‘무예도보통지’는 그렇게 탄생했다. 임진왜란을 치르고 무(武)를 천시하던 조선은 비록 사후약방문 격이지만
무술(武術)에 관한 서적을 집대성하기 시작한다. 의주까지 몽진을 갔던 선조는 훈련도감의 한교(韓嶠)에 명하여 ‘무예제보(武藝諸譜)’를 만들었다.
연로한 영조를 대신해서 서무(庶務)를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는 이것을 증보하여 ‘무예신보(武藝新譜)’를 집대성해 낸다.
‘무예신보’에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전통적 종합병장무예인 ‘십팔기’(十八技)가 들어간다. 십팔기란 사도세자에 의해 이름이 지어진 조선의
국기(國技)이다. 사도세자는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비운의 세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15세 때 무거운 청룡도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신체 건장한
무골이었다. 세계에서 하나뿐인 ‘무예도보통지’는 사도세자의 유업을 이어받은 정조가 만들어낸 야심작이다. 그의 일등참모였던 서얼 출신의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그리고 무관 백동수(白東脩)가 실학의 정신으로 일체가 되어 간행한 책이다. 특히 무예실기를 한 몸에 익히고
있었던 백동수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명(明)의 원병이 사용했던 척계광(戚繼光)의 병서인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마치 요즘의 스파이전처럼 몰래 입수하고, 뛰어난 무사 몇 명을 뽑아 명나라 장수들에게 비밀리에 기예를 배워 조선군을
훈련하게 했다. ‘무예제보’는 ‘기효신서’ 중에서 군사 격자기술인 여섯 가지를 당시 조선군사 조련용으로 재편성하고 재창안한 것이었다.
‘무예도보통지’에서 ‘연습지보(連習之譜)’라고 한 것은 조선의 보(譜)를 다시 독창적으로 만들었다는 의미인데 자주성이 배어 있는
대목이다.
‘기효신서’는 중국 절강성 군대가 자주 침범한 왜구와 싸운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의 긴 칼에 대항하여 긴 창을 사용하여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정리한 책이었다. 전쟁은 병사들의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우선 무기체계의 대결이다. 임란 때 명나라는 원군으로 먼저 만주의 기병(騎兵)을 보냈으나 왜군에게 몰살당하고, 이어 이여송이 이끄는 절강성 보병을 파견하여 평양성 탈환에 성공했던 것이다.
비운의 사도세자(장헌세자)는 연약했을 것으로 선입관을 갖게 하지만 실은 군사, 용인(用人), 사형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 영조를 대신해서 일찍부터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힘이 장사였다. 유년 시절부터 군사 방면에 탁월한 소질을 보여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였고 유가와 병가의 책을 두루 읽어 소위 문무쌍전하는 성군(聖君)의 덕(德)을 닦았다. 용모와 성향도 북벌(北伐)계획을 한 효종을 빼닮아 문(文)보다는 무(武)를 더 좋아하고 조정 내의 파벌 다툼보다 북벌에 더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무인 군주의 위엄과 뚜렷한 정치적 견해가 있던 왕세자를 노론의 정파들이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들은 노쇠한 영조 사후의 자구책(自救策)으로 조선왕조 최대의 비극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음모했던 것이다. 이것이 임오화변(壬午禍變)이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무골을 타고난 성군을 잃게 되었다. 사도세자의 피를 이어받은 정조 임금을 끝으로 왕도(王道)는 막을 내리고 세도(勢道)로 이어오다 결국 조선은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사도세자는 14세 때 ‘범이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바람이 부는구나’라는 호방한 시를 지었는데 오늘날 이러한 무인(武人)의 기상을 갖춘 지도자가 요구되는 때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 사도세자에 의해 이름이 지어진 조선의 국기(國技)이자 종합병장무예인 ‘십팔기’ 중에 ‘곤봉’을 국방부 전통의장대가 시연하고 있다. |
‘무예도보통지’가 없으면 정통성 있는 우리의 옛 무예를 알아볼 길이 없다. 다행히 이 책이 전해짐으로써 복원이 가능했던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도 조선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노론과 남인은 당쟁을 일삼았다. 영조의 승하로 간신히 왕위에 오르게 된 세손 정조(正祖·1752∼1800)가 한 일은 소위 실학 혹은 실학운동이라고 부르는 문화개혁이었다. 무엇이 실질(實事求是)이고, 무엇이 나라를 잘살게 하느냐(利用厚生)를 기준으로 문물을 재정비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무사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정조는 활을 잘 못 쏘는, 당대의 걸출한 선비 다산(茶山) 정약용에게 벌을 주어 손에 피가 나도록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정조의 실학운동이 성공만 하였어도 조선은 망하지도 않았고, 도리어 일본보다 적어도 50년은 더 먼저 근대화에 성공하였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도 실은 임란 후 200년이 지나 정조에 이르러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게 하면서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권5에서 권8에 걸쳐 수록한 다음부터 그 이름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이충무공전서’는 정조 19년에 완성되었고, ‘무예도보통지’는 이에 앞서 정조 14년에 완성되었으니 앞다투어 정리된 셈이다. 정조는 문약(文弱)한 나라를 문무 균형으로 바로잡기 위해 무(武)와 관련한 문물을 정리하게 하였다. ‘실학의 왕’ 정조는 왜 무술을 정리하게 하였을까. 그는 무(武)가 가지고 있는 실천의 정신과 과학의 정신을 안 까닭이다.
‘무예도보통지’. 이것은 세계에서도 하나뿐인 무경(武經)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이를 위해서는 사전조치로 ‘십팔기’ 전체나 혹은 그중 대표적 무예인 ‘본국검(本國劍)’이나 ‘예도(銳刀)’의 국내 무형문화재등록이 필수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족보 있는 무예’를 우리 스스로 썩힐 필요는 없다. 세계사적으로 여러 제국과 영웅호걸들이 지나갔지만, 이러한 무경이 남아 있지 않는 까닭은 무술이야말로 근세까지도 국가기밀이었고, 한방(韓方)의 비방처럼 비밀리에 구전심수(口傳心授)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보듯이 당대 기록정신이 세계적으로도 투철하였던 조선은 억무숭유(抑武崇儒) 정책으로 무술과 무신(武臣)을 멸시하였지만 그래도 기록만은 철두철미하게 하였던 것이다. 주로 침략을 당하기만 한 나라가 당시 동양의 무예를 집대성하여 무경을 만들었다는 것은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은 문(文)을 숭상하는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평화애호의 나라’라고 자위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왜, 무(武)를 멸시하고 또 남의 나라로부터 수백 번의 침략을 당하는지, 그게 문제이다. 문치(文治)와 평화라는 말 속에는 우리의 위선이 도사리고 있다. 문치라는 말 속에는 바로 자주와 독립의 마지막 보루가 되는 무(武)를 멸시하고, 무(武)를 내란이라도 일으키는 말썽꾸러기처럼 문화(文化)의 밖으로 내몰아버리는 ‘사이비(似而非) 선비정신’이 있다. 물론 여기에는 사대교린(事大交隣) 외교로 중국의 감시와 조공관계라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내재해 있지만, 우리 스스로도 독립과 자존에 투철하지 못했던 탓도 있다. 바로 그러한 문존부비(文尊武卑)가 가깝게는 일제 식민을 자초한 것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어쨌든 당시 동아시아의 병장무예를 총 정리한 것으로 마치 오늘날 슬로비디오를 보듯이 연속동작을 세밀하게 그림으로써 이를 복원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또 이 책이 ‘통지(通志)’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새로운 분류와 체계화를 시도했음을 천명한 셈이다. 창(槍)·검(劍)·도(刀)·권법(拳法)·봉(棒) 등으로 나누어 자연스럽게 무예의 수준을 따라가게 정리했다.
‘무예도보통지’는 군사들의 격자기술을 다룬 것으로 단거리 무기의 운용을 다룬 책이다. 활과 포(砲)처럼 원거리 무기에 속한다는 것은 취급하지 않았다. 참고로 활쏘기는 동이(東夷)의 후예인 우리 민족의 장기(長技)였는데 특별하게 기록할 것이 아니었고 아예 생활 속에 함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활은 선비들의 육예(六藝)에 들어가는 것이어서 무사들의 무예로 소개하는 데에 부적합하였거나, 아니면 그렇게 심각하게 소개할 거리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온 우리 조상은 이러한 무예의 집대성을 하였지만 여전히 무(武)의 자주성과 실천성을 무시하고 외세가 물 밀 듯이 들어오는 구한말에도 쇄국을 하고 공허한 갑론을박하다가 부국강병의 시기를 놓쳤다. 문을 열어야 할 때 문을 닫으면서 위정척사(衛正斥邪)니 동도서기(東道西器)니 하면서 문화지체현상을 보였다. 무(武)를 천시하는 풍조와 소중화(小中華)라는 허위의식은 결국 식민지 전락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서도 아직 고쳐지지 않고 있다. 아직도 이러한 문화적 고질병은 치유되지 못하고 국가에너지를 좀먹고 있는 것이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
한국에는 숭문(崇文)보다는 상무(尙武)정신이 필요하다. 이는 문화의 균형 잡기, 문화치유를 위해서도 그렇다. 무(武)란 무엇일까. 무라고 하면 으레 전쟁이나 무기·싸움을 떠올리고, 우리 민족은 싸움을 걸어오고 침략한 놈을 “나쁜 놈”이라고 말하는 데에 길들여져 있다. 그런데 역사에서 침략하는 놈이 반드시 ‘나쁜 놈’만은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 힘을 나타내는 것이다. 세계사에서 전쟁이 없던 적은 없고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다음의 강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세계를 지배했던 것이 사실이다. 문화능력이 있는 자만이 세계를 이끌고 지배하게 된다. 요즘 개념으로 보면 문(文)은 문화의 소프트웨어이고, 무(武)는 하드웨어이다. 결국 무(武)의 정신이 약하다는 것은 문화의 하부구조가 약하다는 뜻이다. 이는 하체가 부실한 사람과 같다. 무(武)는 실천과 과학을 배경으로 한다. 생사를 걸지 않으면 안 되고 무기가 강한 쪽이 승리하기 때문이다.
인류문명사에서 발(足)과 무는 머리와 문 못지않게 변화의 원동력이었다. 우리는 흔히 문명사에서 머리만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큰일을 한 것은 발이다. 발이 가면 현실을 바탕으로 실용성과 실천력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머리만 사용하면 탁상공론에 빠지기 쉽다. 현장에 가지 않는 것은 이미 그 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실적 생각 자체를 잃는 것이고, 일의 성패에서 유리한 고지를 잃게 된다. 인류사에서 발로 낯선 이국땅을 밟는 민족만이 진취적이고 생산적이며 세계를 이해하고 나아가 세계를 정복하고 세계를 다스리고 제국을 만들 수 있다. 제국이란 무력을 사용하는 ‘나쁜 나라’가 아니라 결국 세계를 ‘다스리는 나라’이다. 무(武)는 단순히 무술이 아니라 과학이다. 전쟁과 무기의 이면은 바로 과학인 것이다.
박정진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