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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쭉은 봄과 여름을 잇는 가교(架橋). 철쭉의 열반을 신호로 계절은 늦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든다. 이 때문에 철쭉은 봄과의 이별을 알리는 꽃. 자연에서도 이별은 슬픔이다. 종(種)의 1년의 휴지(休止)를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작별을 바래봉 철쭉군락지에서 맞는다면 그 이별도 감미로울 수 있다.
자연에서도 전화위복, 새옹지마 같은 교훈은 유효하다. 철쭉에게 비극은 독성을 품었다는 태생적 한계. 안드로메도톡신이라는 맹독이 꽃과 잎에 깃들었다. 이 핸디캡 때문에 봄꽃의 좌장(座長) 자리를 진달래에게 내주고 '개꽃'이라 불리는 수모를 당했다. 미운 털 박힌 철쭉의 극적인 뒤집기 역사는 197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새마을운동이 본격화 되던 당시 정부는 바래봉 일대에 호주 정부의 기술지원을 받아 면양목장을 조성했다. 당시 방목된 양들은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며 잡목과 새싹까지 모두 먹어 치웠다. 결국 독성을 품었던 철쭉만 살아남아 지금의 군락을 형성하게 되었다.
#산밑·중턱·정상까지 온통 진홍빛 물결
1990년대부터 이 산을 다녔다는 한 등산객은 5월 바래봉을 '꽃불의 도미노'라 부른다. 바래봉은 300m 운봉 마을에서부터 중턱을 거쳐 정상까지 철쭉 군락지를 형성하고 있다. 산 밑에서 정상까지는 약 10℃의 온도차가 난다. 이 기온차가 꽃의 개화시기를 단계화했다. 이 때문에 5월 중순경 바래봉을 멀리서 보면 꽃불이 산 밑에서 타올라 가는 듯한 장관을 연출하는 것이다. 꽃봉오리부터 시든 꽃까지 철쭉의 전 개화과정이 관찰되는 것도 이 곳 만의 특징이다. 산행 출발지는 대구에서 접근이 쉬운 인월로 잡았다. 등산로 초입은 오르막길이 하염없이 이어진다. 덕두산에서 바래봉에 이르는 능선도 초반에 너무 진을 빼서인지 초여름 날씨에 숨이 가빠 온다. 2시간 여를 정신없이 올랐을까 멀리서 인기척이 소란스럽기 시작하더니 잘생긴 봉우리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바래봉 정상이다. 정상석을 넘어서니 갑자기 시야가 확 열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진홍빛 꽃물결이 시신경을 자극했다. 운봉리~팔랑치~부운재에 이르는 꽃길 능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래봉·팔랑치·부운재 '환상의 꽃길' 넓게 펼쳐진 신록의 캔버스 위에 펼쳐진 붉은 꽃자수…. 이런 걸 녹의홍상(綠衣紅裳)이라고 하나보다. 인위적인 보색대비는 강렬한 색감 때문에 표지판이나 단청에서나 쓸 수 있을 뿐이지만 자연에서 보색의 조화는 회화이론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미적(美的) 가치를 만들어낸다. 이곳 군락지는 크게 정상근처, 팔랑치 고개, 그리고 운봉 마을로 내려가는 꽃길의 세 곳으로 구분된다. 정산근처의 군락지가 양(量)이요, 동(動)이라면 팔랑치는 질(質)이요, 정(靜)이다. 정상근처는 한마디로 '꽃 바다'로 부를만하다. 꽃 속에서 떠다니는 기분이다, 나무키가 큰 곳은 성인 키를 훌쩍 넘겨 꽃 터널을 이룬 곳도 많다. 자신을 압도하던 꽃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 쯤 팔랑치 군락지가 나타난다. 여기부터는 작은 길을 따라 군데군데 군락이 있다. 잘 꾸며진 정원 속을 걷는 기분이다. 인파에 시달렸던 연인들은 이제야 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팔랑치의 한적한 꽃길 데이트는 부운재까지 이어진다. 꽃밭에서는 추억담기가 한창이다. 휴대폰이며 디카를 꺼내 들고 관광객들은 추억을 상자 속으로 담고 있다. 형상으로 입력되는 사진도 좋지만 눈에 마음속에 잔영으로 남겨 놓는 것도 좋을 듯하다. 바래봉 산행의 또 하나의 묘미는 지리산 주능선을 한꺼번에 조망하는 것이다. 동쪽으로 천왕봉-제석봉-연하봉-노고단 연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작년 여름 2박 3일로 올랐던 150리 길을 단 몇 초안에 훑어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재미 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지리산 연봉들 지리산 스카이라인 조망산행으로 인근의 삼정산을 들기도 하지만 지리산 대간이 한 봉우리도 막힘이 없이 한눈에 펼쳐지기는 바래봉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마니아들은 지리산 종주능선과 정령치-바래봉을 연결한 지리산 태극종주를 즐기기도 한다. 바래봉 철쭉코스를 가꾸기 위한 자치단체의 노력도 감동적이다. 서부산림청은 2017년까지 10만여 그루의 철쭉을 심을 계획이다. 또 군락지 철쭉이 잘 자라도록 매년 잡초와 잡목을 제거해준다. 남원시도 올해까지 50만 그루의 철쭉을 심었다. 또 산림생태 복원을 위해 철쭉의 생육을 해치지 않는 구상나무와 전나무를 많이 심을 것이라 한다. 자치단체의 이런 노력들이 명품 산행코스를 만들어 내고 이 명성을 따라 관광객들은 산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근래에 조성한 도로변의 철쭉이 완전히 자라면 바래봉은 산 밑에서 정상까지 철쭉벨트가 형성된다. 산 전체가 철쭉군락지가 되는 것이다. 기온·고도차에 따른 단계적 개화가 본격화 되면 다른 곳에서 2주 남짓 그치는 꽃축제 기간이 여기서는 배 이상 연장될 수 을 것있다. 고은 시인은 '사랑을 할려면 5월의 산에서 하라'고 했다. 왜 5월이고 또 왜 산일까? 얼마 남지 않은 5월, 시인의 시상(詩想)을 쫓아 철쭉산으로 떠나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