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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모든것

초암 정만순 2015. 8. 12. 20:59

지리산 전모

 

 

 

▣ 위치

주소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100번지 

 

▣ 지리산 소개 

 

우리민족의 기상과 혼이 서린 지리산은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으로 불리워 왔다. 신라 5악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도 지혜를 얻는다고 智異山으로 명명되었다 하며, 백두산이 흘러 내려왔다하여 頭流山으로 불리며, 불가에서는 깨달음과 득도의 산이라하여 큰스님의 처소라는 뜻의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불린다.

 

지리산의 정상 천왕봉은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100번지이다.

지리산은 경남의 함양, 산청, 하동, 전남의 구례 전북의 남원시를 사이에 두고 천왕봉~노고단의 지리산맥은 45km에 이르는 장관이며, 그 둘레만도 700km에 달하는 반도의 영산이며 반달곰이 서식하는 자연생태계의 보고이다.

 

▣ 지리산 10경

제 1경 천왕봉일출

사방이 막힘없이 탁 트인 1,915m의 천왕봉에서는 동틀 무렵 끝없이 펼쳐진 회색구름바다 저멀리서 서서히 서기가 어리다가 오색광채의 거대한 태양이 천지개벽의 순간을 알리듯 떠오른다. 천왕일출의 이 거대한 파노라마는 예로부터 3대의 공적을 쌓아야만 맞이할 수 있다 할 정도로 극히 만나기 힘든 경이와 감탄의 장관이다.

 

 

 

 

제 2경 피아골의 단풍

매년 10월 중순부터 지리산 제일의 활엽수림 지대인 피아골 계곡은 단풍으로 물들어간다. 설악의 단풍처럼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한것이 많아 사람들을 압도적인 분위기로 몰고간다. 산도 붉고 물도 붉게 비치며 사람들도 붉게 물든다하여 삼홍의 명소로 친다.

 

 

 

 

제 3경 노고단의 운해

지리산 주능선의 서쪽 최고봉인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구름바다이다. 멀리 남해바다와 섬진강에서 만들어진 구름이 주변의 산야를 가리고 노고단 산허리를 감돌아 흐르면서 마치 속세를 떠난 천상의 세계를 펼쳐보인다. 노고단 주변의 원추리꽃, 진달래, 철쭉들과 어울려 그려내는 자연적 조화가 신비스럽다.

 

 

 

 

제 4경 반야봉의 낙조

심원계곡 건너 서북병풍이 짙은 암영을 드리우면서, 하루의 고된 장정을 마친 태양이 휘황찬란한 황금빛을 발산하며 고요히 사라져가는 모습은 경건한 감동을 안겨준다. 반야봉이 주능선상에서 다소 떨어져 있어 이 황홀경을 접할 때는 호젓함과 함께 사념에 젖어들 수 있는 여유를 갖게한다.

 

 

 

 

제 5경 벽소령의 명월

지리산 주능선의 한가운데인 벽소령에서 태고의 정적과 고요함 속에서 주변의 밀림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벽소령의 명월은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 차갑도록 시리고 푸르다. 맑은 날 밤 창백한 달과 쏟아질 듯 하늘을 수놓는 은하수의 세계는 적막한 느낌이 드는 벽소령의 독특한 분위기와 만나 신비경을 그려낸다.

 

 

 

 

제 6경 세석평전의 철쭉

매년 5월말 6월초에 걸쳐 수십만 평의 광대한 세석고원 일대는 철쭉의 연분홍 빛으로 곱게 치장한다. 막바지 봄날에 접어든 때에 수십만 그루를 헤아리는 철쭉은 결코 뽐내거나 호사스럽지 않게 시야를 가득메우고 꿩들은 한가로이 목청을 돋구어, 고원 특유의 정경이 낭만적이고 목가적이다.

 

 

 

 

제 7경 불일폭포

쌍계사 뒤편 3km의 협곡에 청학봉과 백학봉을 좌우로 한 험준한 협곡속에 높이 60m의 천지를 진동하듯 백척 단애에서 쏟아지는 폭포수는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한다. 이 불일폭포는 빈말로 흩어지며 떨어지는 물줄기가 일단 중간에 고였다가 다시 폭포가 되어 쏟아져 내리는 2단식 폭포인데 온통 바위절벽으로 둘러싸인 주위의 경관이 장관이다.

 

 

 

 

제 8경 연하선경

세석고원과 장터목 사이 연하봉에는 청암절벽이 솟고 철따라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고사목과 어울려지면서 한신계곡을 넘어온 운무가 이 봉우리에 잠시 머물면 신선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날것만 같은 꿈같은 선경이 펼쳐진다. 탁트인 전망, 기암괴석, 주변의 기화요초와 고사목, 온갖 새들의 지저귐이 천연의 조화를 이룬다.

 

 

 

 

제 9경 칠선계곡

일곱선녀가 목욕을 즐겼다는 지리산 최대의 계곡이다. 울창한 원시림이 하늘을 뒤엎고 청아한 옥류는 심연에 잠시 머물면서 포말음을 토해내며 폭포에 쏟아져내려 비경의 연속을 이루어낸다. 태고의 신비한 정적을 간직한 거대한 밀림, 하얗고 반들거리는 암반위로 씻기듯 흘러내리느니 시원하고 맑은 계곡수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 지대이다.

 

 

 

 

제 10경 섬진청류

섬진강은 전북 진안, 장수지방에서 발원하여 기름진 평야지대와 산굽이를 감돌아 하동포구를 통해 남해바다로 흘러드는 300리의 물줄기이다. 지리산 서남쪽을 거쳐 지나갈때에는 그 푸른 강물위에 지리산 산자락을 실어 남국의 흥취를 한층 돋운다. 은빛 백사장도 곱거니와 청류위에 뜬 거룻배는 지리산의 역사와 수많은 사연들을 들려주는 듯하다.

 

 

▣ 지리산 전설 

 

 

벰시골 와운마을의 천년송

실제 8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할아버지 소나무와 20여 미터 사이를 두고 할머니 소나무가 있다.

이를 천년송이라 불렀고, 옛날부터 와운 마을에서는 정월 초사흘(음 1월 3일)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은 (음 12월 중순경부터) 공을 들이기 시작하여 당산 넘어 계곡(일명 산지소)을 깨끗이 치워놓고, 사흘마다 다니면서 목욕하고(음 1월 1일부터는 3일간 날마다) 옷 세 벌을 마련하여 목욕하면서 갈아입고, 목욕하고 와서 갈아입고, 화장실 갈 때 따로 입었다.

음력 1월 3일 아침 제를 지내며, 밥 해 놓은 것을 한지 종이에 싸서 소나무 밑에 묻고, 왼 새끼줄을 꼬아 소나무에 세 바퀴 감아놓고, 동동주를 세 군데에 나누어 뿌린다. 이렇게 하여 정성을 드린 사람은 지금까지 아들을 낳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현재 거문도에 살고 있는 김ㅇㅇ은 그의 부모가 아들이 없어 이 소나무에 정성을 드려 당산제를 준비하던 중 눈이 많이 와서 소나무까지 가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새벽에 일어나면 누군가 소나무까지 가는 길을 쓸어 놓아 이상하게 여기던 중 호랑이가 꼬리로 눈을 쓸어 놓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후, 아들을 낳았으니 그는 현재 큰 부자로 거문도에 살고 있으며, 지금도 일년에 한차례씩 천년송을 찾아와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칠불암과 허왕후 전설

칠불암과 허왕후의 전설도 불교의 남방 전래설과 관계있는 흥미로운 것이다.

가락국 김수로왕과 허왕후는 일곱 왕자가 성불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세상에 나오지 않게 되자 왕자들을 만나 보기 위해 지리산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불법이 엄하여 허왕후조차 여자라고 하여 선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여러 날을 선원 밖에서 안타깝게 기다리던 허왕후는 참다 못해 성불한 아들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그러나 "우리 칠 형제는 이미 출가 성불하여 속인을 대할 수 없으니 돌아가시라"는 음성만 들렸다. 허왕후는 아들들의 음성만 들어도 반가웠으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싶다고 간청하였다.

아들들은 "그러면 선원 앞 연못가로 오시라"고 했다. 허왕후는 연못 주변을 아무리 두리번거렸으나 아들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실망한 허왕후가 발길을 돌리려다 연못 속을 들여다보니 일곱 왕자가 합장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감동한 것도 잠깐, 한번 사라진 일곱 왕자의 성불한 모습은 그 뒤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연못은 그 뒤로 영지(影池)라 불렀고, 수로왕이 이때 머물렀던 곳을 범왕촌(梵王村)으로 불렀는데, 현재는 범왕리(凡王里)로 변해 있다. 또 허왕후가 머물렀던 곳은 대비촌(大妃村)으로 일컬었는데, 지금은 쌍계사 아래 편에 대비리(大比里)로 변해 있다.

 

세석봉 고사목

흔히들 지리산의 표상을 이야기 하라면 제석봉 고사목을 이야기하곤 한다. 물론 제석봉 고사목의 처연함, 그리고 노을이 질 때의 낭만은 지리산의 상징처럼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제석봉 고사목의 사연을 알고 나면 역사의식의 변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제석봉 고사목은 늙어죽은 고사목이 아니라 비명횡사한 횡사목의 잔해이다. 6.25후까지만 하더라도 아름드리 전나무, 잣나무, 구상나무들이 울창하였던 제석봉은 자유당 말기 당시 농림부 장관의 삼촌되는 자가 권력을 등에 업고서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려놓고 거목들을 베어내면서부터 수난을 당한다. 그러다가 후에(이 도벌사건이) 여론 화되고 말썽이 나자 증거를 인멸할 양으로 제석봉에 불을 질러 나머지 나무들마저 지금과 같이 횡사시켜 버렸다.

불법적 도발과 이를 은폐하기 위한 인위적인 방화로 지금의 제석봉이 되었다는 얘기인데 멀리서 제석봉을 바라 보노라면 마치 천왕봉 턱밑에 흉측한 마른 버짐자국이 생긴 것처럼 볼상사납기 그지없다.

자연 스스로의 노쇠과정 속에서 운치나 있을 고사목이 아니라 횡사목이라는 데서 그 어떤 미적 세계도 발견할 수 없는 지리산 임상 수난사의 처연한 기념물인 셈이다. 그나마 몇 그루씩 남아 있던 횡사목들마저 점차 쓰러져가고 있어 결국 얼마 안 가 제석봉 일대는 황무지로 변할 듯하다. 또 비만 오면 물을 머금지 못하고 그대로 흙탕물을 토해내는데 이점 때문인지 장터목 샘과 제석단 샘도 갈수기에는 종종 물이 고갈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결국 지리산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이윤추구에 혈안이 되었던 일부 인간들 때문에 오늘날 지리산을 찾는 수많은 후손들이 더욱 목말라 하고 있어 그 화를 톡톡히 입고 있는 셈이다. 1990년대 초반 제석봉에 어린 구상나무들을 심는 운동이 벌어졌었고, 그 나무들이 일부 자라고 있어 다행스럽다. (출처: 김 명수 저 '지리산')

 

만복사 저포기 전설

남원 시내에서 순창으로 가는 왕정동 도로변에 큰 절터가 있다. 덕유산에서 뻗어내린 교룡산의 줄기인 기린봉 기슭으로, 산자락이 절터를 나지막하게 감싸고 앞으로는 요천이 잔잔히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다.

옛날에는 남원 시가지가 이곳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이 절로 돌아가는 승려가 남원 팔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장관이었다고 한다. 바로 여기가 남원에서는 가장 큰 절이었던 만복사(사적 제349호)가 있던 곳이다.

이 절의 이름을 빌어 매월당 김시습이 살아있는 양생과 죽은 처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한문 단편 소설인 만복사 저포기를 저술했다.

원본은 전하지 않고, 일본 도쿄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그의 단편소설집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려있다. 국내에는 김 집의 한문소설집에 필사된 것이 실려있다. 대강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남원에 양생이란 늙은 총각이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만복사에서 방 한 칸을 얻어 외로이 살고 있었다.

양생은 젊은 아낙네와 처녀들이 모여 탑돌이 하기 전날, 불당의 부처님에게 배필을 구해달라고 빌다가 부처님과 저포(백제때 있었던 윷과 비슷한 놀이)를 하게 되었다. 내기에서 진 부처님은 그에게 탑돌이를 하러 온 처녀와 사랑을 하도록 주선하였는데 그 처녀는 난리 중에 원통하게 죽은 처녀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종녀촌

지리산녀와는 또 다른 비극적인 여인상으로 종녀촌 전설이 있다.

피아골 깊은 곳에 종녀촌이 있었다. 씨받이 여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이 종녀촌에는 성신 어머니라고 불리는 절대자가 많은 씨받이 여인들과 시동을 거느리고 살았다.

성신 어머니는 인근 마을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집이 있으면 종녀를 보내 아들을 낳게 해주고, 그 대가로 먹고 살수 있는 물품을 받아 왔다. 그러나 종녀가 딸을 낳았을 때는 그 아이를 종녀 마을로 데려와 종녀가 될 때까지 키워 성신 어머니께 바쳤다.

종녀의 운명은 어머니에게서 그 딸로 대물림을 했다. 종녀촌을 지배하는 성신 어머니는 성신굴에서 성의 제천을 마음 내키는 대로 펼쳤다. 성신굴에는 성신상을 거대하게 새겨 놓았고, 그옆에는 남근을 새긴 제단이 있었다.

종녀들에게 인내와 체념만을 강요하는 성신 어머니가, 그녀 자신은 성의 욕망을 종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시동들과 불태웠다.

성신 어머니는 종녀들의 무궁한 생산 능력을 빈다는 기원제를 핑계로 성신 제단 앞에서 주문을 외다가, 주문이 춤으로 변해지고, 마침내 그녀가 시동과 욕정을 불태우는 향락을 씨받이 여인들에게 보여 주는 클라이맥스로 이 성(性)의 축제는 막을 내렸다. 종녀들에겐 너무나 잔인하고 가혹한 성의 축제이다.

 

용추쌀바위의 전설

불일폭포는 하동의 명소일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그 풍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천길 낭떠러지에 흐르는 비류가 직하하여 소를 만들었는데 그 소를 용소라 부른다. 용소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아득한 옛날 불일폭포가 생기기 전의 일이다. 불일폭포가 있던 골짜기 물이 곱게 흘러내리던 용소에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이무기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를 것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용소 옆에는 불일암이란 암자가 있어 스님이 수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뇌성이 치고 벼락이 나무를 때리며 무서운 폭풍이 휘몰아쳤다.

산이 쩍 갈라지고, 용소에서는 이무기가 용이 되어 푸른 빛을 발하며 하늘로 솟아오르고, 쿵쾅 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비가 마구 쏟아졌다. 이윽고 비가 멎고 뇌성도 잠잠해지자 불일암 스님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았다.

그랬더니 이제까지 용소 옆에 하나로 서 있던 산은 두 개로 갈라졌고, 곱개 흘러내리던 물줄기가 없어지고 천애 절 벽이 생겨 물이 폭포가 되어 절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스님이 절벽을 내려가 보니 절벽 밑으로는 새로 물길이 나 있고, 폭포수가 떨어지는 절벽에는 큰 구멍이 두 개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에서는 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님은 이는 분명 부처님의 자비가 내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쌀을 암자로 옮겼다. 그 다음날 스님은 다시 그 절벽의 뚫어진 구멍으로 가보았다. 그랬더니 그 구멍에서는 또 쌀이 나와 있었다.

구멍에서 이렇게 계속해서 쌀이 나오게 되자 스님은 이 쌀을 화개장터에 내다 팔기로 했다. 그래서 스님은 그 후부터 하루는 쌀을 구멍에서 옮기고 다음날은 그 쌀을 장터에 내다 팔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장터의 쌀을 사는 아주머니가 스님에게 말했다. "스님! 쌀을 이렇게 조금씩 가져올 것이 아니라 며칠 모아 놓았다가 한꺼번에 가져오시면 수고도 덜고 또 목돈도 될 것인데 무엇 때문에 이러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래 암자로 돌아와 밤새 곰곰이 생각하던 스님은 생각이 여기에 까지 미쳤다. "저 쌀이 나오는 구멍을 더 넓게 뚫는다면 반드시 더 많은 쌀이 나올 것이고, 그럼 장터 아낙의 말대로 큰 부자가 될 수있을것이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스님은 구멍을 더 크게 뚫을 도구를 챙겨서 폭포로 내려 갔다. 그리는 열심히 구멍을 뚫어 전보다 세배나 더 넓게 뚫었다. 구멍을 뚫은 스님은 내일부터는 세배의 쌀이나올 터이니 마음이 흡족했다.

그리고 그러면 부자가 될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밤잠을 설치며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세우다시피 했다.

날이 밝자 스님은 큰 자루를 메고 절벽으로 내려가서는 곧 바로 크게 뚫어 놓은 구멍으로 가 보았다. 그러나 그 곳엔 세 배로 많은 쌀이 나와있기는 커녕 단 한톨의 쌀도 없었다. 스님이 욕심이 그만 쌀이 나오는 구멍을 막아 버렸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사람들은 그 쌀이 나오던 바위를 용추 쌀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변강쇠전 [함양 마천을 지리적 배경으로 한 판소리]

중년 (中年)에 맹랑한 일이 있었다.
평안도 월경촌(月景村)에 계집 하나가 살고 있었는데 얼굴은 춘이월 반쯤 핀 복숭아꽃이었다.

보조개(옥빈)는 어리었고 초생에 지는 달빛이 눈썹 사이에 어리었다.
앵두처럼 고운 입술은 당채(唐彩)주홍필로 찍은 듯하고 버드나무같이 가는 허리는 봄바람에 하늘 하늘, 찡그리며 웃는것과 말하며 걷는 것이 서시와 포사라도 따를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사주에 청상살이가 겹겹이 쌓인 까닭에 상부(喪夫)를 한 것이 징글징글하게 많아 팔자가 센 여자였다.
열다섯에 얻은 서방은 첫날밤의 잠자리에서 급상한(急傷寒)에 죽었고
열여섯살에 얻은 서방은 당창병(매독)에 죽었다.
열일곱과 열여덟에 얻은 남편은 용천병과 벼락으로 각각 죽었다.
열아홉, 스무살에 얻은 서방도 급살로 죽었다.

뿐만 아니었다.
간부, 애부, 새흘유기, 입 한번 맞춘 놈, 젖 한번 만진놈, 눈 흘레한 놈, 손 만져본 놈, 그리고 심지어는 옹녀의 치마귀 상처자락 얼른 대한 놈까지 모두 죽었다.

이렇게 하여 수천명씩 남자들이 옹녀 때문에 죽자 삼십리 안팎에 상투 올린 사내는 고사하고 열다섯 넘은 총각도 다 쓸어버리고 없어 계집이 밭을 갈고 처녀가 집을 지으니 황해도, 평안도 양도민이 공론하기를 이년을 그냥 두었다간 남자 놈은 한명도 없는 여인국이 될 터니이니 쫒아내자고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양 도민이 합세하여 그녀를 서도에서 쫓아내었다.
그때 그녀는 차랑 봇짐 옆에 끼고 머리는 동백기름을 낭자하게 발라 곱게 빗었고 초록 옷을 추스르며 행똥행똥 나오면서 자기 혼자 악을 썼다.

“어허, 인심이 흉악하구나, 내 여기 아니면 살 곳이 없을 줄알고,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남자들은 더욱 좋다더라,”

옹녀는 남쪽으로 가다가 청석관(개성 부근의 좁은 계곡)에서 홀아비 변강쇠와 만났다.
변강쇠는 삼남에서 빌어 먹다가 양서지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들은 서로 만나 말 몇 마디에 뜻이 맞아 바위 위에 올라가서 대사(大事)를 치루었는데 대낮에 년놈이 벌거벗고 익숙한 장난을 하고 있었다.
타고난 양골(陽骨)인 강쇠놈이 옹녀의 두 다리를 번쩍 들고 옥문관을 들여다 보며 노래를 읊었다.

“이상하게도 생겼다. 맹랑히도 생겼다. 늙은 중의 입일는지 털은 돋고 이빨은 없구나. 소나기를 맞았는지 언덕지게 패이었다. 콩밭농사 지었는데 듬북꽃이 비치었구나. 도끼날을 맞았는지 금 바르게 터져 있네, 생수처 온답(溫畓)인지 물이 항상 고이었다.
무슨 말을 할려고 옴질옴질하는 건지 만경창파 조개인지 혀를 빼어 물었으며 곶감을 먹었는지 곶감씨가 장물렸고 만첩산중 으름인지 스스로 잘도 벌어졌네 연계탕을 먹었는지 닭의 벼슬이 비치었고 파명당을 하였는지 더운 김이 절로 난다.
제 무엇이 즐거운지 반쯤 웃고 있구나. 곶감 있고 연계 있고 조개 있어 제사상은 걱정없다'

옹녀가 반소(半笑)하고 갚음을 하느라고 변강쇠의 기물을 어루만지며 한가닥 곡조를 빼어 읊었다.

“이상히도 생겼구나. 맹랑히도 생겼구나. 전배사령(前培伺令) 서렸는지 쌍걸랑을 늦게 차고 군노(軍奴)런가 복떠기를 붉게 쓰고 냇물가의 물방인지 떨구덩 떨구덩 끄덕인다.
송아지 말뚝인지 철고삐를 둘렀구나. 감기를 얻었는지 맑은 코가 웬일인가, 성정(性情)도 혹독하여 화가 나면 눈물난다. 어린아이 병일는지 젖은 어찌 괴였으며 제사에 쓴 숭어인지 꼬장이궁이 그저 있다. 뒷절 큰방 노승인지 민대가리 둥글구나. 소년인사 알밤인지 두쪽 한데 붙어있다. 물방아 절구대며 쇠고삐걸랑 등물 세간살이 걱정없네.”

두 남녀는 서로 뜻이 맞아 부부로 인연을 맺고 각처를 떠돌며
옹녀는 애를 써써 들병장수 막장사를 할 때
변강쇠는 낫부림 넉장기, 갑사꼬리 여사하기, 미골 지패 퇴기질, 호흥호백 쌍육치기, 장군멍군 장기두기, 맞춰먹기 돈치기와 불러먹기 주먹질 고패떼기 윷놀이와 안집 뒷집 고누두기, 의복 전당 술먹기와 남의 싸움 가로막기, 강새암 계집치기, 밤낮으로 싸움질을 일삼았다.

이에 옹녀는 변강쇠를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의 성기 가지고는 동반살이 하다가는 돈 모으기는 고사하고 남의 손에 죽을 테니 깊은 산에 들어가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산전이나 파서 먹고 땔나무나 베어 때면 노름도 못할 터요, 강짜도 않을테니 산중으로 들어갑세.”

그리하여 그들이 들어갈 산을 의논하였다.

“동금강(東金剛)은 석산이라 나무 한그루 없어 갈 수 없고 북향산(北香山)은 찬곳이라 눈 쌓이어 살 수 없고 서구월(西九月)은 좋다하나 산적떼 소굴이라 살 수 없으니 남지리(南智異)가 토후하여 생리가 좋다하니 그리로 찾아감세.”

여간가산(如干家山)짊어지고 지리산중에 찾아가니 깊은 산골에 빈 기와집이 한 채 서 있었다.
임진왜란 때 어느 부자가 지었는지 오간 팔작 기와집으로 다시 사람 산일이 없는 흉가였다.
누백년 도깨비의 동청이요. 묏귀신의 사당으로 있었다.
거친 뜰에는 삵과 여우의 발자취가 남아 있었다.

“수사도는 간 곳마다 선화당(宣化堂)이라 하더니 내 팔자도 비슷하구나. 적막한 이 산중에 내가 올 줄 누가 알고 나를 위해 이런 기와집을 지어놓고 기다렸는가.”

하고 변강쇠는 말했다.

변강쇠는 이곳으로 이사 온 후로는 낮이면 잠만 자고 밤이면 배만 타니 여인이 애끓게 하소연 하였다.
변강쇠는 하는 수 없이 아내의 청에 따라 지게를 지고 담뱃대를 물고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갔다.

“목 긁어 동여지고 석양의 산길 내려올 때 손님보고 절은 하니 품안에 있는 산과(山果) 떼그르르 다 떨어진다. 얼레, 비 맞고 가는 한 손님 술집이 어디 있노. 저 건너 행화촌을 손을 들어 가리킨다. 얼레, 뿔 굽은 소를 타고 단적(短笛)을 불고 가니 유황숙이 보았더면 나를 오죽이나 부러워하리 얼레.”

강쇠가 나무하러 가다가 등구 마천 초군들을 만나 그들의 노래를 모두 들은 다음
제가 보아도 어린 것들과 한가지로 갈퀴나무를 할 수 있나,
도끼 둘러 메고 이봉 저봉 다니면서 그 중 커다란 나무만 한 두 번씩 찍은 후에 나무 내력 말을 하며 제가 저를 꾸짖었다.

“오동나무 벼자하니 요임금의 오현금(五絃琴)이요,
살구나무 벼자하니 공부자(孔夫子)의 강단이라,
소나무 좋다마는 진시황의 오태부(五太夫)요
잣나무 좋다마는 한고조 덮은 그늘이라.
어주축수 애산춘 홍도나무 사랑하옵고
위성조우 읍경진 버드나무 좋을시고
밤나무 신주감이요, 전나무는 돛대 재목이라,
가사목 단단하나 각영문(各營門) 곤장감이요,
참나무 꼿꼿하나 배젓는 대목감이라,
쭝나무 오시목과 산유자 용목, 건팽목 문목은 화목되기 아깝도다.”

이리저리 생각하니 베일 나무 전혀 없다. 산중에 동천맥 우물물 좋은 곳에 점심구럭 풀어 먹은 후에 부쇠를 얼른 쳐서 담배를 입에 물고 솔그늘 잔디밭에 돌베고 누우면서 당음(唐音)한 귀 읊어보네.

“우래송수불(雨來松樹不)에 고침석두면(高枕石頭眠)이 나를 두고 한 말이라 잠자리 장히 좋다.”

강쇠가 잠을 자며 코를 골자 산중이 들썩들썩하였다.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땐 하늘에 별이 총총하였고 이슬이 내리었다 게을리 일어나서 기지개를 불끈켜 뒤꼭지 두드리며 혼자 하는 말이,

“요새 해가 왜 그리 짧은가, 빈 지게 지고 가면 계집년이 방정 떨리.”

사면을 둘러보니 등구 마천가는 길에 어떤 장승이 하나 서 있거늘 강쇠가 반겨,

“벌목 정정 애 아니 쓰고 좋은 나무 거기 있다. 일모도궁 불로소득 좋을시고.”

지게를 찾아지고 장승 선 곳 급히 가니 장승이 화를 내어 눈을 딱 부릅뜨니 강쇠가 호령하며,

“네 이놈, 누구 앞에 색기하여 눈망울을 부릅뜨냐, 삼남 설축 변강쇠를 이름도 못들었느냐? 과거 마천 파시평과 사당놀음 씨름판에 이내 솜씨 사람칠 때 후취덜미 가리딴죽 열두권법 범강장달 허네라도 다들 앞에 떨어지니 수족없는 네깐 놈이 생심이나 바랄쏘'

달려들어 불끈 안고 엇두름 쑥 빼내어 지게 위에 짊어지고 우댓군 소리하며 제집으로 돌아와서 문 안에 들어서며 호기를 장히 편다.

“집안사람 거기 있나? 장작나무 하여 왔네.”

뜰 가운데 턱 부리고 방문 열고 들어가니 강쇠 계집 반기느라 손묵 잡고 어깨 주무르며,

“어찌하여 그리 저물었나. 평생 처음 나무가서 오죽이나 애 썼겠는가, 시장한데 밥이나 자시오.”

방안에 불켜놓고 밥상차려 드린 후에 장작나무 구경차 불켜들고 나와보니 어떠한 큰 사람이 뜰 가운데 누었는데 조관(朝官)을 지냈는지 사모품대 갖춰 입고 방울눈에 주먹코 채수염이 점잖았다.

여인이 뒤로 팍 주저앉으며,

“애고, 이게 웬일인가 나무를 하러 간다더니 장승을 빼어 왔네그려, 나무가 아무리 귀해도 장승을 빼어 땐단 말을 언문책 잔주에도 없는 말, 만일 패어 땐다면 목신동통 조왕동증 목숨 보존 못할테니 어서 지고 가서 제 자리에 세우고 왼발 굴러 진언치고 달음질로 돌아오소.”

“가장이 하는 일을 보고만 있을 것이지 계집이 요망하게 그것이 웬 소린고. 나무 깎은 장승 인형을 패어 땐들 무슨 관계있나. 망할 말 다시는 하지 말라.”

강쇠는 밥상을 물린 후에 도끼로 장승을 패서 군불을 놓고 유정부처 홀딱 벗고 사랑가를 불러가며 개폐문(開閉門) 절판례(絶版禮)를 멋지게 하였다.

이 때에 장생목신 무죄하게 강쇠 만나 도끼 아래 조각나고 부엌속에 탄 재가 오죽이나 원통할 것인가.
의지할 곳 없이 중천에 떠서 울렴. 나혼자 다녀서는 이놈 원수 못갚겠다.
대방전에 찾아가서 이 원정 하소연 하오리다.

노들 선창목에 대방장승 찾아가서 문안을 한 연후에 원정을 아뢰옵기를,

“소장은 경상도 함양군의 산을 지키는 장승으로 신지처리한 일없고 평민 침학한 일 없어 불피 풍우(不避風雨)하고 각수본직(各守本職)하옵더니 변강쇠라 하는 놈이 일국의 난봉으로 산중에 주섭하제 집에 가니, 제 계집이 깜짝 놀라 도로 갖다 세우라 하되 아니듣고 도끼로 꽝꽝 패어 때고 화가 안미칠 때가 없을테니 십분 통촉하여 주옵소서. 소장에 성원하고 후환 막게 하옵소서,”

대방 크게 놀라

“이 변이 큰 변이라. 사근네 공원님과 지지대 유사님께 내 정갈 여쭙기를 요새 적조하였으니 문안일향하옵신지 경상도 함양 동관발괄원정 듣사온즉 천만고(千萬古)없던 변이 오늘 생겼으니 수고타 마옵시고 잠깐 왕림 하옵소서, 동의(同意)작처 하옵시다. 전갈하고 모셔오라.”

대방님 좋다 하고 입으로 묻고 통문 넉장 써서 내니 통문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우통유사는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하고 지초가 불에 타면 난포가 탄식하니 유유상종 환락상구 떳떳한 이치로다. 지리산중 변강쇠가 함양 동관 빼어다가 작파(作破)화장 하였으니 이놈 죄 상경홀작 처할 수 없어 각도 동관에 일체로 발통하여 금월 초사홀 삼경에 노들선창으로 일제취회하여 함양 동관 조상하고 변강쇠놈 죽일 꾀를 각출하여 주옵소서.”

연월일 밑에 대방 공원 유사 벌려 쓰고 칙명하고 양문갑읍 긴장목장 각면 각촌 점막사찰 차비전에 전하게 하였는데
통문 한 장은 사근내 공원이 맡아 경기 삼십사관 충청도 오십사관 차차로 전케하고
한 장은 고양 흥제원 도오간이 맡아 황해도 이십삼관 평안도 사십이관 차차로 전케하고
한 장은 양주 다락원 동관이 맡아 강원도 이십육관 함경도 이십사관 차차로 전케 하였다.

귀신의 조화라 오죽 빨리 전했겠는가, 바람같이 구름같이 경각에 다 전하니 조선의 장승 하나도 빠짐없이 기약한 밤에 다 모여 새남터 배게서서 시흥 읍내까지 빽빽하였다.

“통문사를 보았으면 모든 뜻을 알 터이니 변강쇠 지은 죄를 어떻게 다스릴꼬 ?'

단찬 마천 영상봉에 섯던 장승은

“그놈 식구대로 새남터에 잡아다가 교수형에 처합시다.”

하고 말하였다.

“귀신의 정기라고 토풍을 따라가니 마천 동관 하는 말이 상쾌도 하지만 계집(옹녀)이 말렸으니 죄를 줄 수 없고 여러 동관님네 다시 생각하옵소서.”

하고 대방이 말했다.

“그놈의 집을 에워싸고 불을 지른 후에 못나오게 하면 그놈도 동관같이 화장이 되오리다.”

“그런 놈에게 불을 지르면 제 죄를 제가 모르고 도깨비 장난인가 명화적의 난리인가 의심할 테니 다시금 생각해 보오.”

하였다.

“그놈을 쉬이 죽여서는 설치가 못될 터이니 고생을 실컷 시킨 후에 죽이되 열아흐레 동안 장승 화장한 죄인 줄을 저도 알고 남도 알아 쾌히 징계될 터이니 우리 식구대로 병하나씩 가지고서 강쇠를 찾아가서 강쇠의 정수리에서 발톱까지 오장육부 내외없이 벽에 도배하듯 겹겹이 발랐으면 그 수가 좋을 듯하오.”

해남동관 하는 말에 대방이 크게 기뻐하였다.

“장히 좋소, 그대로 시행하되 조그마한 강쇠 몸에 저리 많은 식구들이 달려들면 많은 데는 족이 들고 빠진 데는 틈이 날 것이니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라 경상 차지하고 오장육부 내장일랑 경기 충청 차지하며 팔만사천 털구멍도 빈틈없이 단단히 잘 발라라.”

이렇게 하여 변강쇠는 조선에 있는 모든 장승들이 가지고 온 수백가지의 병에 드러눕게 되었다.
이 병을 고치기 위해 봉사를 데려와 점을 친 후 봉사는 경채 대신 ‘새큼한 것’을 요구한다. 물론 옹녀의 옥문을 말한다.
함양 지방의 명의를 데리고 오지만 치료가 불가하였다.

결국 변강쇠는 죽고 말았다.
옹녀는 강쇠의 초상을 치루어 주는 이가 있다면 그와 함께 살고자 하였다.
먼저 중이었다.
그러나 변강쇠의 시체를 만지자 말자 그만 죽고 말았다.
초라니 풍각쟁이 마종 떱뜩이들도 옹녀의 새 남편이 되기 위해 변강쇠를 초상치려고 했지만 모두 죽고 말았다.

전설로서의 이 변강쇠전은 무분별한 성문화를 응징하기 위한 이야기로서 오늘날 문란해진 성 문화에 하나의 경고가 될 수 있겠다.

차일봉 전설

 

차일봉은 그 모양이 마치 차일을 쳐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우번대, 종석대, 관음대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는데 정사에 암불이 솟아 있어 자연 전망대로서 구실도 톡톡히 하고 있다.

차일봉 남쪽 천은사 계곡 상류 깊은 곳에 상선암이란 이름난 선원이 있었다.

신라의 고승 우번조사가 젊은 시절 조용한 상선암을 찾아 10년 수도를 결심하고 혼자 수도 정진하기를 9년째 되던 어느 봄날, 절세미인 한 사람이 암자에 나타나 요염한 자태로 우번을 유혹하였다.

여인에게 홀린 우번은 수도승이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여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 여인은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여 아름답디 아름다운 수림 속을 지나쳐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우번은 여인을 놓칠까 봐 산속을 헤치며 정신없이 올라 가다 보니 어느덧 차일봉 정상에까지 오르게 됐다. 그런데 우번을 유혹하던 여인은 간데 없고 난데없이 관음보살이 나타나 우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우번이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니 이는 필시 관음보살이 자기를 시험한 것이라 깨닫고 그 자리에 엎드려 자기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참회하니 관음보살은 간 데 없고 대신 큰 바위만 우뚝 서 있었다.

자신의 수도가 크게 부족함을 깨달은 우번은 그 바위 밑에 토굴을 파고 토굴 속에서 수도하여 후일 도승이 되었다 한다.

우번도사가 도통한 그 토굴자리를 우번대라 부르게 됐으며, 또 우번조사가 도통하던 그 순간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석종소리가 들려 왔다 하여 이곳을 종석대라 부르며, 관음보살이 현신하여 서 있던 자리를 관음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노고단 전설

 

옛날 노인 부부가 자식이 없어 애를 태웠는데, 영산에서 기도를 하면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 든 곳이 노고단이었다.

두 부부는 천 일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가 끝난 날 안타깝게도 천왕봉을 향해 두 손을 곱게 모은 채 함께 숨지고 말았다.

노부부는 바위할매와 바위할배로 변했는데, 그 뒤 이곳을 지나는 산 사람들이 간단한 산제를 지냈다.

또 그 주변에는 할미꽃이 만발한 꽃밭을 이루었고 철쭉꽃, 백합꽃, 나리꽃이 점차 늘어나 단장을 했다고 한다.

 

가루치기 전설

 

흔히 변강쇠가로 알려진 가루지기타령은 마천 추성동의 벽송사를 그 배경으로 한다고 보는 이들이 많은데 목장승을 불쏘시개 감으로 삼았다가 응징을 받아 죽게 되는 변강쇠가의 내용과는 또 다른 이유로 해서 여장승은 머리 부분이 반쯤 타 있어 미묘한 감을 던져준다.

판소리 여섯 마당중 외설적인 것으로 알려져 온 <변강쇠가>에서 벽송사 부근에 사는 변강쇠와 옹녀는 성력을 타고 났으나 "어려서 못 배운 글을 지금 공부할 수 없고, 손재주가 없으니 장인질 할 수 없고, 밑천 한 푼 없으니 장사질 할 수 있나, 밤낮으로 하는 것이 그 짓뿐"인 비참한 가난뱅이였다.

그러던 변강쇠는 "그 중에 할 일이 없으니 오늘부터 지게 지고 나무나 하여 옵소"하고는 나무를 하러 갔다가 힘이 들어 낮잠이나 자면서 보낸 끝에 궁여지책으로 애 안 쓰고 나무하는 방법, 곧 길가에 세워져 있는 장승을 뽑아다가 태연히 땔감으로 써 버리고 만다.

이에 팔도 장승들이 통문을 돌리는 등 수단껏 모여 회의 끝에 변강쇠를 혼내준다는 내용이다.

부당한 대접과 억압을 받는 민중들을 장승에 비유하고 변강쇠를 기층 질서로 풍자해 민중의 염원을 조명해낸 민중문학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벽송사는 칠선계곡 들머리로 아주 고즈넉하고 조용한 절 집이다.

 

걸어나오는 산 전설

 

화개면 정금마을 "노루목"에 얽힌 전설로서 지리산이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오던 중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어느 요망한 여자가 "산이 걸어 나온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지리적으로 고정 불변의 존재인 산이 들판(세상)을 향해 걸어 나왔다는 것은 바로 산의 생명성과 능동성, 지향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지리산의 모성적 토대 위에서 자생력을 회복한 저항과 변혁세력이 새 세상을 꿈꾸며 들판을 향해 내려오던, 나아가 들판문화를 크게 위협하기도 했던 역사들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산은 들을 향해 `열린 공간'이자 또한 들보다 높고 험해서 `닫힌 공간'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들판문화가 강고 하고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때 산은 그 압력을 자연히 받게 되지만 역으로 들판문화가 느슨해져 산 자체의 동질성과 자생성을 확보하기에 이르면 산은 들판문화에 저항하고 나아가 크게 위협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띤다.

이와 같이 지리산은 모성의 산으로서의 모습과 부성적인 산으로서의 모습 양면을 띠는데, 이것을 흔히 `지리산의 이중성'이라 부르며 고 박현채 교수는 `수동성'과 `능동성'이란 말로 정리한 바 있다.

분명 지리산은 정치 사회적인 과도기나 이행기에서 이제까지의 수동적인 모습을 벗고 능동적으로 역사 전면에 나서곤 했다. 또 그러한 역할은 근대로 올라올수록 더욱 큰 비중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세석고원 음양수

 

자녀를 갖지 못한 부부의 슬픈 전설은 세석고원 음양수에도 담겨져 있다.

아득한 옛날 지리산에 제일 먼저 들어온 호야와 연진은 대성 계곡에서 한 쌍의 원앙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나 자녀를 갖지 못했다. 어느날 남편이 산열매를 따러 간 사이 검은 곰이 연진 여인에게 세석고원 음양수 샘물을 마시면 아들, 딸을 낳을 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이 말을 들은 연진 여인은 곧장 음양수로 달려가 샘물을 실컷 마셨다. 그 사이, 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호랑이가 이를 지리산 산신령께 고해 바쳤다. 지리산 산신령은 크게 노하여 음양수의 신비를 인간에게 발설한 곰을 토굴 속에 가두고, 호랑이는 그 공으로 백수의 왕이 되게 했다. 또 음양수 샘물을 훔쳐 먹은 연진 여인에게도 무거운 벌을 내려평생토록 잔돌 평전의 돌밭에서 외로이 철쭉을 가꾸게 하였다.

연진 여인은 슬픔에 젖어 흘러내리는 눈물과 닳아 터진 다섯 손가락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꽃밭에 뿌리며 애처롭게 언제까지나 꽃밭을 가꾸었다.

그녀는 또 밤마다 촛대봉 정상에서 촛불을 켜 놓고 천왕봉 산신령을 향하여 죄를 빌다가 그대로 돌이 되었으며, 촛대봉의 앉은 바위는 바로 가련한 연진 여인의 굳어진 모습이라 전해지고 있다.

 

인걸과 아미선녀 전설

 

옛날 지리산 기슭 마천면 삼정리 하정부락에는 인걸이라는 사내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사냥 길목에서는 하루에 꼭 3차례씩 무지개가 섰다가 꺼지곤 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무지개 아래 소(沼)에서 어여쁜 3선녀가 정성껏 밥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옥황상제의 시녀들이 날마다 내려와 밥을 짓는데 그러던 어느날 더위를 못 참았는지 선녀들이 소에서 멱을 감게 되었다. 이때 인걸은 선녀들의 날개 옷만 입으면 자기도 옥황상제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날개 옷을 훔쳐 오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날개 옷이 돌부리에 걸려 찢어져 버렸다.

옷 찢기는 소리에 깜짝 놀란 선녀들은 놀란 나머지 각자 자기의 옷을 찾아 입었는데 아미(阿美)라는 선녀만은 옷이 없어 인걸이 갖다 준 어머니의 옷을 입고 결국 하늘나라에 오르지 못하고 인걸의 집으로 와서 몇 날을 지냈다.

그 하늘나라에서는 아미 선녀를 인걸과 같이 살도록 허락하고 비단옷과 쌀이 나오는 바위를 하사해 주었다. (이 쌀 바위는 작전도로 공사 때 묻혀 버렸다고 한다) 인걸과 아미는 그로부터 1남 2녀를 낳아 하늘아래 첫 동네에서 정자(지금 하정부락 앞 솔밭 근처에 있는 선유정이 그것이라고 한다)를 짓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인걸이 장난삼아 옛날 찢어진 아미의 날개 옷을 기워서 입혔는 데 그만 아미가 하늘나라로 날아가 버렸다.

 

영원사의 황소목 [문구멍으로 황소가 들어오다]

 

 

영원사는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지리산 중턱인 해발 920미터에 위치한 절이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시대에 지었다고 하며 그 당시 고승이었던 영원대사가 이룩했다고 하여 절 이름도 영원사라고 불렀다 한다.

한때 내지리에서는 제일 가는 이름있는 사찰이라고 했다.
지금은 명성만 지닌 채 초라한 절이 되어 스님 한 분만이 폐허가 된 사찰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이 절의 규모로서는 너와로 된 선방이 9채에 100간이 넘는 방이 있었으며 이 곳에서 도를 닦은 고승이 많았다고 한다.
고승들이 거쳐간 방명록이라고 할 수 있는 보실안록을 보면 부용영관, 서산대사, 청매, 사명대사, 지안, 설파상언, 포광스님 등 당대의 쟁쟁한 고승들이 109명이나 이 곳에서 도를 닦았다는 기록이 있다.

서산대사가 도를 닦기 위해 불제자로 입문할 때 남원군 산내면에 위치한 달궁의 황령사에서 삭발하고 그 후 이곳의 영원사로 들어와 12년간 도를 닦은 곳이기도 하다.

이절을 창건하게 된 내력에 얽힌 설화가 있다.
영원대사가 소년시절에는 범어사에서 동자승으로 있었는데 그의 스승과 제자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정의가 깊었다는 것이다.

영원의 불가 입문 동기는 스승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산속에 들어가 공부를 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는 스승과 작별하고 범어사를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그날 밤 영원대사의 꿈에 ‘길을 떠나더라도 목적지를 향해 떠나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되느니라.’ 하고 계시가 있었다.

꿈을 깨어난 영원은 하도 기이한 꿈이라 스승에게 이야기도 못하고 현몽대로 길을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헤어질 수 없을 만큼 깊은 정이든 스승을 두고 떠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행장을 차려 길을 떠나기는 했지만 스승을 두고 가는 영원의 가슴 속은 어떠했으랴마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마음을 굳게 하였다.

그러나 그 곳을 잊을 수 없어 고개를 넘다가 마지막으로 범어사를 보기 위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 순간 범어사에 있던 스승은 시커면 구렁이로 변하고 말았다.
뒤를 돌아본 자신의 주위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줄도 모르고 지리산으로 들어와 토굴을 만들고 혼자서 불법을 공부하며 8년 동안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자신의 도가 대사의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한스럽게 생각하며 자리를 옮겨 공부해 보려고 토굴을 나와 길을 걸었다.

그 때 풀밭에서 물리지 않는 낚시로 육지에서 낚시를 즐기는 이상한 노인을 보았다. 그런데 그 노인이 풀밭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지껄이고 있었다.

“2년만 더 낚시질을 하면 큰 고기가 낚일 터인데...”

꼭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낚싯대를 놓고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 순간 영원은 번득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이 있어 가던 길을 되돌아 섰다.
다시 토굴로 돌아와 열심히 공부하여 2년을 채워서 십년의 공부를 계속했다.

십년의 각고 끝에 도를 깨친 대사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득도한 대사는 이 기쁨을 스승에게 알리고 싶고 스승을 뵙고 문안드리고 싶었다. 영원대사는 봇짐을 싸지고 범어사로 발길을 옮겼다.

범어사로 돌아온 영원대사는 스승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뒤늦게 그는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헛간에 살고 있는 시커먼 구렁이가 자기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죽을 쑤어 주며 공양을 계속했다.

대사는 구렁이를 볼 때마다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이따금씩 구렁이가 허물을 벗고 사람으로 환생하라는 불공을 드렸다.
그럴 때마다 구렁이는 바위에다 머리를 찧고 스스로 죽어갔다.
결국 구렁이는 죽고 말았다.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며 영원대사는 범어사를 떠나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는 죽은 구렁이의 영혼을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자신의 수도하던 지리산으로 들어던 중 어느 마을 앞을 지나게 되었다.
길에서 들로 나가는 한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대사는 그 부부에게

“열 달 후에 아기가 태어날 것인데 그 아이에게 스승의 혼을 넣어 드리니 그 아이가 일곱 살이 되거든 나에게 데리고 와서 공부를 해야 하오. 만약 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 아이는 명이 짧아져서 일찍 죽고 말 것이오.”

라고 말했다.

“네, 대사님 말씀대로 꼭 시행하겠습니다.”

“잊지 마시오. 내 말을.”

“명심하고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사의 말을 듣고 그 부부는 대사에게 약속을 하였다.

대사는 지금의 영원사 터로 들어놔 절을 짓기 시작했는데 칠년이나 걸려서 완성하게 되었다. 절을 짓는데에도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따랐는지 모른다.

겨우 절이 완성되자 약속한 대로 동자 하나가 절로 들어왔다.
이 동자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였다. 나날이 학문이 늘어가고 있었는데 원래부터 욕심이 너무 많았다.
그는 욕심대로 그 많은 공부를 한꺼번에 하려고 하였다.
대사는 동자를 방 안에 가두고 바깥에서 문을 잠그며 문에다 구멍을 뚫어놓고

“이 문구멍으로 황소가 들어올 때까지 열심히 공부나 하여라.”

하고 일러주었다.

그 후 수년이 흘러 그 동자의 눈이 영롱해지면서 우뢰와 같은 소리와 함께 문구멍으로 황소가 뛰어 들어오지 않는가! 그러자 동자는

“스님, 황소가 들어옵니다.”

하고 소리치며 넘어지는 순간 동자는 득도를 한 것이다.
선생의 일을 알게 된 동자는 자기의 스승이 전생에는 자기의 제자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동자 자신은 전생에 면학 소승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위와 같은 전설로 영원사 부근에는 황소목이라는 지명이 붙게 된 것이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이런 것을 가지고 고찰이라 할 수는 없지만 예로부터 이 곳의 까마귀와 까치도 불경을 외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덕망이 높은 스님들이 영원사를 찾았다고 한다.

600여평의 대지에 부도지가 여섯 개나 있어 오랜 세월에 씻기고 깎여 영겁 속에 영원사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여 주고 있다.

특히 엽송설화 삼십권을 기록했다는 구곡 각운대사의 사리를 보존했다는 상무주암의 필단사리 삼층 석탑이 빛을 발했다는 이야기등도 지난 날의 유서깊은 영원사의 선풍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 우리가 가 보아도 깊은 산속의 절이 도를 닦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영원사가 그 위용을 잃게 된 것은 시대의 영향이라 하겠다.
여순반란사건 및 지리산 공비들과 깊은 연유가 있는데 나라가 혼란한 그 당시에 완전 소실되었다.

여순 반란사건 이후 반란군이 아군의 공격에 쫓겨 이 곳에까지 찾아와 절을 아지트로 삼고 주민들을 괴롭히자 아군이 작전상 불태워 없애버렸다.

지금의 건물은 그후 1971년에 중건한 것이다.

 

선비샘 전설

 

옛날 지리산기슭 덕평 마을에 이 씨 노인이 살고 있었다.

노인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화전민의 자식으로 가난에 쪼들리며 평생을 살았다.

배우지 못하여 무식한 데다 몹시 추하게 생겨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대를 받으며 노인은 한번이라도 남에게서 사람다운 대접, 선비 대접을 받으며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살아 생전 소원을 이루지 못한 그는 마지막 유언으로 상덕평 샘터 위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고, 효성이 지극한 두 아들은 아버지의 유해를 샘터 위에 매장했다.

그로부터 매년 지리산을 찾는 등산객들은 샘에서 물을 마실 때면 반드시 노인의 무덤 앞에 인사를 하게 되니 생전에 그렇게 받고 싶었던 선비 대접을 무덤 속에서나마 받게 되었다. 후일 동네 사람들은 생전에 불우했던 이 씨 노인을 위로하기 위해 이 샘을 선비샘으로 부르게 됐다.

 

장륙전중건 전설

 

화엄사 경내에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각황전이 서있다. 본디 이름이 장륙전 (丈六殿)이었던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인 숙종 25년에(1699) 공사를 시작하여 4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공사의 마무리와 더불어 숙종으로부터 각황전(覺皇殿)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각황전이 건립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다음 설화에 그 어려움이 잘 드러나 있다.

벽암스님의 제자였던 계파스님은 스승의 위촉을 받아 장륙전 중창불사를 시작했으나 어디서 어떻게 지원을 받아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래서 밤새 대웅전의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그대는 걱정 말고 내일 아침 길을 떠나라. 그리고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하고는 사라졌다.

이에 용기를 얻은 계파스님은 다음날 아무도 몰래 절을 나섰다. 한참 길을 가다 보니 간혹 절에 와서 일을 돕고 밥을 얻어먹곤 하던 노파가 걸어오는 것이었다.

스님은 난감하기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간밤에 받은 계시를 지워 버릴 수 없어 그 노파에게 장륙전 건립의 시주를 청했다. 어이가 없기는 노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얘기하면서 하루종일 간청하는 스님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큰 발원을 하였다.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하리니 부디 문수대성은 큰 가피를 내리소서"라는 말을 마친 노파는 길 옆 늪에 몸을 던졌다.

스님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라 멀리 도망쳤다. 몇 년 뒤 걸식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서울에 나타난 계파 스님은 궁궐 밖에서 유모와 함께 나들이하던 어린 공주를 만났다.

공주는 스님을 보자마자 반가워 하며 매달렸다. 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 손을 꼭 쥔 채 펴지를 않았는데, 계파스님 이 안고서 쥔 손을 만지니 신기하게도 손이 쫙 펴졌다. 그리고 그 손 안에 '장륙전'이라는 세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계파스님을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감격하여 장륙전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시주하였다. 이 이야기는 비록 절 밥을 얻어먹는 하찮은 거지라도 청정한 공덕을 쌓아 장륙전 중창에 힘이 되었다는 감동을 주고 있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 공주의 아버지 숙종에게는 딸이 없다. (출처: 답사여행의 길잡이6 지리산 자락)

 

청학동 전설

 

청학(靑鶴)은 중국의 문헌에 나오는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나고 또 운다"는 전설의 새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태평성대의 이상향을 청학동이라 불렀다.

일찍이 <정감록>에서는 "진주 서쪽 100리, (중략) 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십리쯤 들어가면 그 안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고 하였으며, 이를 본 고려시대의 이인로, 조선시대의 김종직과 김일손, 유성룡의 형인 유운용 등이 청학동을 찾아 나선 바 있다.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으니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고 엎드려 수리를 가면 곧 넓은 곳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옥토라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청학이 그 곳에 서식하는 까닭에 청학동이라 부른다. 아마도 옛날 세상에서 숨은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장이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 라고 하였으나 청학동을 끝내 찾지 못하였다고 고백하였고, 김종직은 피아골을, 김일손은 불일폭포를, 유운용은 세석 고원을 청학동이라고 짚어 보긴 했지만 확신을 갖진 못하였다.

현재 지리산에 청학동이라고 불리는 곳은 현재의 청학동 말고도 여러 군데가 있다. 불일폭포 부근, 세석 고원, 청학이골(악양면 등촌리 위쪽), 상덕평 마을(선비샘 아래) 등이다. 말하자면 지리산 곳곳이 청학동인 셈이다.

그런 중에 섬진강 지류인 횡천강을 약 50리 정도 거슬러 올라간 해발 약 800m의 첩첩산중인 청암면 묵계리 학동 마을이 청학동으로 유명해진 것은 그 입지가 전설상 깊은 골짜기와 일맥상통할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외부와 담 쌓고 독특한 생활방식을 고집하며 사는 이곳 사람들의 생활이 매스컴을 타면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동읍에서 진주쪽으로 한참 가다가 횡천에서 묵계로 난 좁은 산골짜기를 따라가면 한참 만에 당도하는데, 포장길 반 비포장길 반으로 이어지는 청학동 가는 길에는 횡천강과 횡천강을 막아 만든 하동댐과 묵계댐, 그 댐으로 인해 만들어진 호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높고 낮은 산들이 곳곳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낸다.

또한 협곡을 끼고 만나는 작은 산간 마을들은 아직도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소위 도인촌(道人村)이라고 불리는 이 청학동에 사람이 살게 된 것은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다. 강대성(姜大成, 1890~1954)이 창시한 유불선갱정유도 교(儒佛仙更定儒道敎)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한국전쟁 이후 이곳으로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었으며, "유불선과 동, 서학을 합일하여 현대문화의 부조리한 면을 배제하고 인의예지의 인간본성을 수양하여 인간윤리를 실천한다" 는 교리에 따라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유교적인 전통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살아왔다.

이들은 머리를 땋거나 상투를 틀고 흰옷을 입고 생활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서당에서 훈장에게 가르침을 받고, 예의범절을 중요하게 여긴다.

80년대 이후 청학동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외부 사람들의 드나듦이 잦아졌고, 어쩔 수 없이 이곳도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 도인촌이라기 보다 관광촌이라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아와 은둔지로서의 청학동 성격은 달라지고 있다. 그러나 상투를 틀고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을 깊은 지리산 속에서 불쑥 마주하게 되는 첫인상은 매우 강렬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한 100년 쯤은 거꾸로 가 있는 듯하다.

비록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전부터 형성된 뿌리 깊은 마을도 아니고, 대대로 전승해 온 독특한 역사가 있어서도 아니지만, 근대화와 서구화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청학동 사람들이 고집스럽게 지키고자 하는 의식과 생활양식은 '전통적인 것에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 같다.

 

우천 허만수와 함태식선생님

 

지리산 산신령으로 널리 알려진 우천(宇天) 허만수님은 그의 나이 33살때 지리산 세석고원에 들어와 초막을 짓고 살면서 지리산 곳곳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샘터를 개발, 보수하는가 하면 숱한 사람들을 안내하고, 구조하는데 반평 생을 바친 사람이다.

산이 좋아 처자식도 버리고 산에 들어와 홀로 살면서 산에서 여생을 마친 전형적인 산악인이었던 허씨가 설치한 나무계단 등이 제석봉~천왕봉 중간에 간혹 눈에 띈다. 지금은 철사다리로 많이 바뀌어졌다

수만명을 헤아리는 많은 사람들을 안내, 구조한 허우천씨는 1976년 6월 어느날 정든 세석의 철쭉꽃을 뒤로 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데 그의 나이 60살이 되던 해였다고 한다. 여러 사람들은 그가 칠선계곡, 혹은 도장골, 또는 신선너덜에서 숨을 거두었으리라는 말만 무성할 뿐 지리산과 늘 벗하던 그의 최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80년 6월 8일 진주산악회에서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추모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에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 산의 품에 안긴 이가 있다. 님은 평소에 '변함없는 산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인생관을 낳게 한다'고 말한 대로 몸에 베인 산악인 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니 풀 한 포기 돌 하나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와한 일이나 산짐승을 잡아가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되돌려받아 방생 또는 매장한 일이 이를 뒷받침 해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랴. 님은 1976년 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 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음인가? 가까운 이들과 따님 덕임의 말을 들으면 숨을 거둔 곳이 칠선계곡일 것이라 하는바, 마지막 님의 모습이 6월 계곡의 철쭉빛으로 피어 오르는 듯하다.

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 자리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살아계신 지리산의 역사 함태식 선생은 노고단의 옛 산장을 관리하셨었다. 털보 함태식 선생은 어떤 때는 지나친 간섭이라고 욕 먹을 정도로 산행질서를 바로잡는 데 헌신하고 노력한 결과 한동안 '조용하고 깨끗한 노고단 시절이 있었다. 아직도 많은 산악인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때와는 달리, 그리고 지금은 새 산장이 들어 서면서 피아골산장으로 좌천, 추방당한 함선생의 처지와는 달리 요즘 노고단은 마치 복작대는 어느 저잣거리를 연상케 한다.

 

지리산녀

 

무엇보다 이 산은 남도 여인들의 정절의 규범인 '지리산녀'의 아름답고도 애틋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지리산녀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의 인물 열녀항에 간단한 기록이 살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리산녀는 구례현의 여자인데 자색이 아름답고, 지리산 아래에서 살았으나 역사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여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백제의 왕이 그 아름다움을 소문으로 듣고, 아내로 맞아들이려 했으나 한사코 따르지 아니했다." 또 같은 내용의 '지리산가'「고려사」가운데의「악지」등에 살려 있는데 그 내용은다음과 같다. "구례현의 한 미모의 여인이 지리산 아래에 살면서 비록 집안 살림은 가난하나 부녀자로서의 도리를 극진히 지켰는데, 백제왕이 그 여인의 아름다움을 듣고 내궁으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여인은 이 노래 (지리산가)를 지어 죽음으로써 맹세하고 따르지 아니했다.

안타깝게도 지리산가의 가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지리산녀'와 지리산가'의 주인공은 동일 인물로, 미모의 여인이 왕의 부름을 뿌리치고 정절을 지킨 아름답고도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이 지리산녀는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된 도미의 처이며, 백제왕은 개루왕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벽송대사(碧松大師) [한 대사의 도 닦은 이야기]

 

 

 

어느 지방 어느 고을을 가나 사찰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있다.
이 이야기도 그러한 류의 이야기라고 하겠다.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가면 벽송사라고 하는 유명한 절이 있다.
이 절을 지은 벽송대사의 행적에 얽힌 전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년전 전라북도 부안에서 부안 송씨 가문의 한 집안에서 송지암(宋芝岩)이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두뇌가 총명하여 열 살 이전에 벌써 사서삼경을 다 읽었으며 스무살이 되던 해 어느 따뜻한 봄날에 조정에서 과거시험을 본다는 방이 붙었다.

지암은 무과에 응시하여 전국에서 모여든 쟁쟁한 무사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장원급제를 하여 장군의 칭호까지 받게 되었다.

그 당시는 나라가 어수선하여 외세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다.
중국의 명나라에서도 자주 트집을 잡아 괴롭혔고 국경의 침범이 심하였다.
조정에서는 또한 북벌 계획을 시도하여 적군과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장군은 혹독한 혹한 속에서 국경지대를 수비하다가 장검을 집고 서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많은 번뇌 속에서 시름하다가 문득 자신의 나아갈 바를 결정짓기 위해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방장산 어디에선가 수도를 하고 있다는 법계정심대사(法戒正心大師)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는 함양군 마천면에 소재하는 지리산에 들어가 수십일 동안 헤매던 중에 드디어 지금의 추성리 광점동에서 대사를 만나게 되었다.

법계정심대사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한 다음 지암은 지금까지 번뇌속에서 방황하던 자신이 걸어 온 그 동안의 경위를 자세히 말씀드렸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가르쳐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드리자 대사는 쾌히 승낙을 하셨다.
지암은 너무나 기뻤다.
그날부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대사의 문하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

그런데 그 당시 법계정심대사는 이미 불문을 떠나 속세에서 부인과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식솔들의 의식주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서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베어다가 싸리 제품인 광주리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으며 그 광주리를 판돈으로 생활을 근근히 해결해 왔다.

대사는 매일 지암을 머슴처럼 부리며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채취해와서 광주리 만드는 것만 가르치고 다른 문제는 일체 언급이 없었다.
지암은 세월이 갈수록 안타까웠다.
이제는 더 이상 이곳에서 머물 필요가 없음을 알고 법계정심대사의 문하에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대상에게 뜻을 전하니 대사는 가고 오는 것은 그대의 자유이니 그대의 마음대로 하라, 하는 대답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지암은 그곳을 떠나 정처없이 또 다른 스승을 찾아서 길을 나섰다.

마천면 의탄리 속칭 살바탕에 이르자 법계정심대사가
‘지암아 너는 도를 받아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서 깜짝 놀라 지암은 그길로 다시 강점에 계시는 대사 곁으로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대사는 눈을 감고 한참동안 묵상을 하더니 갑자기 두손을 놓이 하늘로 치켜 들더니 지암은
'이제 도를 받았느냐?' 하고 물으니 지암은 얼떨결에 자기도 모르게 서슴없이 받았다고 대답을 하였다.
대사는 ‘지암은 이제 도를 받으라’고 다시 소리치며 손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이 시각부터 지암은 물욕과 정욕이 사라지고 만물의 원리를 터득하게 되어 벽송대사로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곳에서 대사가 광주리를 만들었다고 하여 광주리점이라고 했는데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면서 변하여 지금의 광점으로 부르게 되었고 의탄리의 속칭 살바탕에서 광주리점으로 되돌아가 도를 받고 벽송대사가 되었다고 하여 이곳을 벽송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암이 대사로부터 깨달음을 받은 지 삼개월 후에 법계대사가 입적하자 벽송대사는 이곳에 조그만한 절을 짓고 벽송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벽송대사는 이곳에서 도를 닦으며 많은 제자를 교육해서 고승들을 배출시켰으며 70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입적한 대사의 시신을 화장하자 많은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대사의 수제자인 환성대사가 다시 절을 짓고 석탑을 세워 벽송대사의 유품인 염주와 사리 등을 안장하여 오래도록 보존하여 왔으나 6. 25 동란 중 사찰이 소실되고 석탑도 파괴되어 석탑의 사리와 유품도 망실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금대암

지리산에는 전망좋은 8대(臺)가 있다. 이곳 8대를 모두 올라야 비로소 지리산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8대는 금대, 마적대, 문수대, 연화대, 묘향대, 만복대, 수성대, 청신대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종석대, 무착대, 향운대, 문창대, 영신대, 향적대, 옥천대, 서산대, 불일대, 상무주대 등이 있다.
그중 금대는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에 있으며 지리산의 조망이 가장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지리산의 산신은 대부분 여신인데, 금대의 산신은 남신이기 때문에 여신의 정기가 금대에 다 모여든다고 한다. 지리산이 감싸안은 정기를 한몸에 받는 양지바른 명당자리인 것이다.

옛날 도선국사가 지리산을 두루 돌며 수행을 하던 도중 금대에 올랐는데, 그곳의 경치가 너무 빼어나 3일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이곳 금대에는 암자가 있는데 656년 행우조사가 창건하였으며, 도선국사가 나한 전을 지어 중창한 뒤 나한도량으로 이름이 났다. 1430년 천태종 판사도대선사 행호가 인근 안국사와 함께 중창하여 금대사라고 하였다.

현재 건물로는 극락전과 나한전, 금대선원 등이 있고, 유물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동종과 신중탱화 등이 남아있다.

 

▣ 등산코스 

⊙ 칠선계곡코스 : 추성동←1.5km→두지터←2.5km→선녀탕←0.5km→칠선폭포←4.0km→대륙폭포←4.0km→마폭포←3.0km→천왕봉

*소요시간
등정 7시간, 하산 5시간
*총거리
14.0km

 

 

 

수많은 소와 담 그리고 폭포가 엮어내는 지리산 최고 걸작품

 

우리나라 3대 계곡이라면 보통 설악산 천불동 계곡, 한라산 탐라계곡, 그리고 지리산 칠선계곡을 꼽는다. 이에 걸맞게 칠선계곡은 7개의 폭포와 수많은 소들이 모여 빼어난 계곡미를 자랑한다. 특히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 지대로 부르는 마폭포와 천왕봉간의 울창한 수림은 가히 독보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아직은 오염되지 않은 느낌을 받는 칠선계곡 코스는 지리산 계곡 등반로 중에서 가장 길고 험한 곳으로 유명한데 세심한 주의와 충분한 사전준비가 요구된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 길이 비교적 뚜렷한 편이지만 종종 엉뚱한 길로 접어들어 고생하는 경우도 있다. 각 산악회에서 설치한 리본을 확인해가며 등반한다면 무난하다. 비 오는 날에는 미끄러운 바위 비탈길과 계곡 건너는 데 각별히 신경써야 할 것이다. 특히 여름 장마철에는 계곡내에 인공시설물이 전혀 없기 때문에 계곡을 건너는 데 극히 위험함은 물론 겨울철에도 북향의 깊은 골짜기라서 적설량이 많고 기온이 급강하하여 등반의 최악조건을 형성한다. 충분한 장비없이 섣불리 도전하는 것은 절대 삼가하여야 한다. 그리고 여름철 계곡에서 물놀이하다 심장마비로 익사하는 사건도 종종 발생하므로 주의를 요한다.

 

칠선계곡 추성삼거리 벽송사

등반의 시작은 추성마을부터

 

등반기점은 추성마을이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할시는 마천에서 출발한다. 마천에서 동쪽으로 도로를 2분정도 가면 폭 3-4m의 의탄교가 나온다. 몇 년 전 큰 홍수 때 일곱 명의 인명을 앗아간 다리붕괴 사건이 있고 나서 새로 생긴 다리이다. 의탄교를 건너 의평마을을 지나 1km정도 가면 국립공원 매표소가 있는 삼거리 추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광점마을 방향으로 200m정도가면 왼편으로 접속도로가 있는데 벽송사(서암)로 가는 길이며 전용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서 왼편으로 200m정도의 거리에 서암이 있으며 벽송사는 오른쪽으로 1km정도 가야 된다.

조선 중종 15년(1520년) 3월 벽송 지엄대사가 암자를 짓고 개창한 벽송사는 숙종 30년(1704년)에 실화로 불타버린 것을 환성대사가 중건하였으나 6.25때 다시 법당만 남기고 소실되었다.1963년 원응 구환스님이 이곳에 와 이 절을 다시 짓기 시작했으며 1978년 봄에 종각이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을 처음 세운 벽송 지엄대사는 성종 22년(1491년) 4월 허종(許琮) 원수가 지휘하는 여진 정벌군에 당시 27세의 나이로 종군하여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지만 인간을 서로 죽여야하는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계룡산에 입산하여 스님이 되었고 용문산, 오대산, 백운산을 거치면서 57세에 지리산에 들어왔다.

전설에는 지엄대사가 젊었을 때 이조 초기 선계의 지주였던 벽계, 정심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아 도를 깨우쳤다고 전하는데 당시 정심스님이 싸리나무로 광주리를 만들며 살던 곳이 지금의 광점동이라고 한다. 물론 이 전설과 지엄스님이 지리산에 입산한 시기와는 차이가 많이 나 의문의 여지는 있다. 벽송 지엄스님의 문하에서는 그후 서산대사의 스승이 되는 부용, 경성 등 두 고승이 배출되었다.

벽송사는 6.25 당시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었는데 국군이 야음을 타 불시에 기습, 불을 질러 당시 입원중이던 인민군 환자가 많이 죽었다고 전하며 지금도 절터 주변을 일구면 인골이 간혹 발견된다고 한다.

경내에는 보물 474호인 벽송사 3층석탑, 법화경 목판경판과 경상남도지정 민속자료 제2호인 목장승이 있다. 처음에는 절 입구의 진입로변에 있었으나 훼손이 우려되어 경내에 여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다. 절 입구 길가 양편에 마주보고 서 있는 호법대신, 여신등 한 쌍의 목장승은 키가 4m지만 지하에 1m 정도 파묻혔고 다시 뚝을 쌓아 1m가 더 묻혀있었다. 판소리 열두 마당 중 변강쇠가(일명 가루지기 타령)의 무대가 이 벽송사일거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많은데 목장승을 불쏘시개감으로 삼았다가 응징을 받아 죽게되는 변강쇠가의 내용과는 또다른 이유로 해서 여장승은 머리부분이 반쯤 타 있어 미묘한 감을 던져준다. 현재 벽송사까지는 가파르지만 차량이 오를 수 있는 도로가 있다. 서암은 벽송사의 주지스님이 15년전에 이곳으로 옮겨와 주변 경관을 다듬었는데 가히 살아서 볼 수 있는 극락세계이다.

추성 삼거리에서 곧바로 오르면 우측으로 계곡 건너편에 노송이 운치있게 우거져 있는 솔밭이 보이고 감나무와 호두나무가 인상 깊은 추성동마을에 이른다. 여기서 계곡에 가로놓여 있는 나무다리를 건너면 멀리 하봉과 국골의 깊은 골짜기가 신비스럽게만 느껴진다.

논밭 사이로 잘 나 있는 길을 얼마간 오르면 갈림길 이정표가나온다. 여기서 좌측 논둑길과 농수로를 따라 500m 간 곳에 추성 용소가 있다. 직사각형의 시퍼런 소로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가 우렁차고 길게 홈 파인 암반이 기묘하다. 옛날마을에 우환이 있을 때나 기우제 때 돼지를 제물로 바치며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전국 도처에서 몰려든 기도객들이 이곳에 간이천막을 치고 기거하고 있어서 마치 무당촌 같은 느낌이다.

용소로 가는 갈림길에서 등반로는 위쪽길로 오르게 되는데 두지터가 보이는 고개마루에 이르면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곧바로 산비탈길을 가로질러가면 두지터 마을에 도착하게 되며 좌측 내리막길로 덤불숲을 헤쳐가면 모과나무밭을 지나 결국 칠선약수터가 있는 대숲에서 두 길은 만나게 되는데 요즈음은 주로 두지동마을을 경유하여 등정을 하는 경향이다.

두지동 

담배건조소 건물이 우뚝 솟아 있는 두지터 마을에는 매점과 민박을 겸한 칠선휴게소와 산비탈에 호두나무등을 가꾸는 농가 서너채가 있다. 오목한 평지로 사방을 산자락이 감싸고 있는 이곳 지형이 쌀뒤주를 닮았다 하여 두지터로 부르며(일설에 두지터가 가락국 어느 임금이 국골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 식량창고였다는 얘기가 있다. 지형상으로 부르는 의미가 아닌 역사적인 전설 속에서 해석되는 얘기인데, 또 한편으로 광점동에서 2km 들어간 얼음터가 당시 석빙고였다는 그럴 듯한 얘기도 전해온다) 두지터 뒤쪽 창암산 능선을 넘어 백무동으로 가는 희미한 길도 있다.

대숲에서 조금 가면 거대한 소와 기묘한 암반 위로 맑은 계류가 흐르는 계곡을 철다리를 통하여 건너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덩굴숲 우거진 갈지(之)자의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가게 되고 감나무와 잡초속에 묻힌 옛 칠선동 마을터를 지난다. 화전민들의 독가촌 정리방침과 이농 등으로 지금은 한 가구도 살고있지 않다. 칡넝쿨과 잡목을 헤치고 올라서면 길은 평탄해지고 얼마 안 가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넓직하고 평탄한 바위가 나오는데 여기가 전망 좋은 쉼터인 추성 망바위이다. 망바위에서부터는 다소 오르내리지만, 계곡물 소리가 아득히 들리며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숲이 울창한 숲 소로길이다. 옛 숯가마터가 하나 나타나고 어느덧 물소리가 커지면서 계곡으로 나온다. 추성동에서 4km 지점인 선녀탕이다.

 

선녀탕 옥녀탕 비선담

지금은 모래와 돌로 다소 메워진 선녀탕에는 동화와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일곱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곳 선녀탕에서 목욕할 때 평소 선녀들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곰이 선녀들의 옷을 훔쳐 바위틈에 숨겨버렸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옷을 찾아 헤맬 때 마침 사향노루가 자기의 뿔에 걸려있는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주어 일곱선녀는 무사히 하늘나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곰이 바위틈에 누워 있던 노루의 뿔을 나뭇가지로 잘못 알고 선녀들의 옷을 숨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녀들은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향노루를 칠선계곡으로 집단이주시켜 살게 하고 곰은 이웃 국골로 내쫓아버렸다고 한다.

선녀탕의 바로 위에 수심 3-4m, 넓이100여 평 남짓한 옥녀탕이 반긴다. 매끈한 암반으로 흘러내린 맑은 계류가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고, 푸른 하늘을 가려버린 짙은 녹음이 물에 비치는 꿈 같은 경치가 가히 일품이다. 칠선계곡에서 가장 넓고 빼어난 소가 바로 옥녀탕인데 그 옆에는 넓직한 반석도 있어 휴식에는 최적이다.

옥녀탕 위쪽으로도 계속해서 기암과 옥류가 멋진 소를 만들어내 비경의 연속이다.

돌길을 따라 때로는 아찔한 벼랑과 미끌미끌한 바위를 비껴 지나야 하는 다소 까다로운 길이지만 하늘이 그대로 잠긴 듯한 짙푸른 비선담에 이르러서는 피로도 싹 가신다.

비선담 옆 벼랑을 조심스럽게 내려와 벼랑에 올라서면 계곡을 건너게 된다. 야영장터가 몇 군데 있는 산죽밭을 지나 오른편으로 계곡을 건너 낙엽이 두텁게 쌓인 길을 얼마간 가다보면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 어느 쪽으로 가도 계곡을 건너서 다시 만난다. 다시 옛 목기막터가 있었다는 산죽밭을 지나 오른편으로 계곡을 건너게 되는데 약 10분 오르면 계곡가에 조그마한 바위굴을 볼 수 있다. 과거 목기를 다듬던 인부들이 지내던 청춘홀이다. 등산로변에 따로 안내판이 없어 지나치기쉽지만 계곡 쪽 암벽에 보면 페인트로 청춘홀이라 씌어져있다.

청춘홀에서는 점차 경사가 더해가는데 돌밭길을 오르기 전 좌측 계곡을 보면 10m의 와폭이 보인다. 여기서 조금 오르면 우측에 ㄱ자형 바위가 있어 비를 피할 수 있고, 백무 능선에서 흘러내리는 지류와 만나고 5분 정도 간 곳에 칠선폭포 안내판이 나온다. 20m쯤 아래로 내려가서 구경할 수 있지만 그렇게 빼어난 폭포가 아니어서 위에서 내려다보곤 훌쩍 지나치게 되는 곳이다.

칠선폭포에서 다시 10분 정도 가면 좌측으로 계곡을 건너게 되는데 이곳이 중봉과 하봉에서 흘러온 물과 칠선계곡 본류가 만나는 합수골이다. 이곳 일대에는 폭포가 3개 정도 몰려있어 일명 폭포수골로도 불리운다.

칠선폭포, 대륙폭포, 삼층폭포이다. 대륙산악회에서 발견하여 대륙폭포라 이름지은곳은 지금의 염주폭포인 것으로 추정된다.

칠선계곡 최대의 폭포인 높이 30여 m의 대륙폭포는 현재 합수골 좌측계곡으로 50m 들어간 곳에 위치한다. 가히 소(小) 불일폭포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주위는 절벽으로 둘러쳐 있고, 비스듬히 암벽을 스치며 내리쏟아지는 물줄기 때문에 한여름에도 서늘하고 다습한 바람이 감돌아 한기마저 느끼게 한다.

칠선계곡 본류를 따라 얼마간 올라가면 제석봉과 백무능선 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와 다시 만나는 곳이 나온다. 여기서 좌측 본류로 올라가면 3층폭포가 위치하고, 염주폭포는 제석봉 방향 물줄기 쪽에 있는데 마치 층층계단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같다. 3층폭포와 염주폭포는 등산로가 멀리 비껴지나기 때문에 구경하기 힘든데 계곡변으로, 즉 계곡 본류를 따라 오르면 기도객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희미한 길이 있다.


 

 

 

합수골에서 등반로는 대륙폭포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부터 계곡과 먼 산비탈을 올라간다. 3층폭포 옆을 지날 때는 아찔한 절벽 위인데 산죽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이곳을 지나면 3층폭포 위쪽에서 계곡을 건너게 된다. 경사 급한 돌길을 오르면 산죽숲 터널을 걷게 되고 서나무, 노각나무, 단풍나무와 함께점차 아름드리 전나무, 구상나무도 나타난다. 어느덧 경사도 완만해진 등반로를 따라 얼마 가다보면 앞에 삼각굴이 나오며 아름드리 전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이곳에서 왼편으로 계곡을 건너야 한다.

여기서부터는 이제까지 아름답던 계곡이 끝나고 마폭포까지 돌무더기 투성이의 완만하고 볼품없는 계곡으로 바뀌는데 등반로도 완만한 오름길이 한동안 지속되고 천왕봉이 훤히 올려다보이는 노출된 계곡가가 나오기도 한다.

수림상태도 전나무, 잣나무, 구상나무 등 침엽수가 주종을 이루며 다소 까다로운 길과 맞닥뜨리기도 하는데 노출된 나무뿌리와 모난 바위가 걸음을 더디게 한다. 하지만 등산의 묘미는 더욱더 재미가 있으며 울창한 원시림에 분위기는 압도당한다.

어느덧 울창한 자연 그대로의 원시림 속에 하얀 포말로 부서지며 두 줄기의 폭포수가 별천지를 이룬 마폭포에 이르면 別有天地 非人間 싯구 그대로다.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 북변의 깊은 골짜기에 해당되는 이곳 합수골은 지리산의 가장 은밀하고 깊숙한 곳에 해당되는데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에서는 이현상 등 잔존 빨치산들이 이곳 일대에서 마지막 겨울을 버티는 장면으로 그려지고 있다.

마폭포 

마폭포에서 천왕봉까지는 수직 고도차 500여 m, 거리는 3km에 달하는 경사 급한 길이다. 도중에 식수가 없으므로 단단히 준비하고 어지간히 힘든 길이므로 쉬엄쉬엄 올라야하며 마폭포에서 얼마 오르면 좌측으로 깊이 사태난 곳을 지나고 차츰 아름드리 거목 등 원시림이 가득한 숲길로 계속 간다. 전나무, 잣나무는 물론 희귀수목 주목이 많이 눈에 띈다.

음침한 숲속에서는 온갖 고산식물의 향긋한 내음이 코를 찌르고 바위와 나뭇가지에는 이끼가 두텁다. 얼마 오르면 다시 우측에 사태난 곳이 나타나고 쓰러진 거목들이 앞을 자주 가로 막는다.

경사급한 길은 끝이 안 보이는데 천왕봉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경사 60-70도의 바위를 잠시 올라야 하고 어느덧 관목류가 무성해지면서 천왕봉 이정표가 나온다. 새삼 강조하지만 마폭포-천왕봉 구간은 경사가 심하고 체력소모가 가장 심한 곳이므로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적절한 간식을 취하면서 올라야 한다.

장터목이나 법계사까지 남은 거리도 감안하여 체력 안배를 하여야 하고 또 비오는 날이나 강풍이 몰아치는때는 체온유지에도 신경써야 한다. 고산지대이므로 한기마저 느끼게 하는 비바람은 피해야 한다.

 

⊙ 한신계곡코스

제 1코스

백무동←2.0km→첫나들이폭포←1.0km→가내소폭포←0.3km→오층폭포←1.0km→한신폭포←5.7km→세석산장
*소요시간
등정 4시간 50분, 하산3시간 30분
*총거리
10.0km

 

 

 

제 2코스 (한신지계곡)

백무동←2.0km→첫나들이폭포←1.0km→가내소폭포←1.5km→무명폭포←2.5kmkm→내림폭포←1.0km→장군바위←2.0km→장터목산장
*소요시간
등정 5시간 30분, 하산 4시간
*총거리
10.0km

 

 

 

 

한신계곡은

한신계곡폭포 

백무동에서 세석고원까지 험준하면서도 아름다운 계류가 흐르는 인상깊은 10km 계곡등반 코스이다. 과거에 각 산악회의 동계 빙벽 훈련장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여 근래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등반로도 뚜렷하고 세석북변의 경사 급한 오르막길을 제외하고는 그런대로 완만한편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장마철은 물론 겨울철에도 북향의 깊은 골짜기이기 때문에 위험요소가 있다.

첫나들이 폭포를 지나 울창한 나무숲에 감싸여 있는 주위의 경관속에 넓직하고 매끄런 암반 위로 핥듯이 흐르는 계류가 빼어난 소와 폭포를 이루는 절경이 계속된다. 조금 가면 합수부 지점이고 갈림길이다. 좌측은 장터목으로 연결되는 한신지계곡으로 가는 길이며 우측으로 계곡을 건너면 가내소 폭포가 나오고 한신주계곡으로 들어서는 길이다.

겨울철에는 많은 적설량과 추위에 대비할 수 있는 방한장비를 꼭 갖추어야 한다. 몇 년 전부터 산불예방, 조난방지를 위하여 겨울철부터 이듬해 봄까지(대체로 11월 15일 경부터 이듬해 5월말까지) 입산을 통제하므로 이 점도 기억해야 한다.

깊고 넓다는 의미인 한신계곡은 일반적으로 첫나들이폭포 위쪽부터를 한신계곡으로 지칭하고 그 아래쪽 계곡을 백무동계곡으로 부른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백무동계곡은 다음과 같은 네 갈래의 큰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덕평봉 북쪽에서 발원하는 바른 재골, 칠선봉 부근 북쪽에서 발원하는 곧은재골, 장터목 방향에서 흘러내려오는 한신지(支)계곡, 세석 북변의 한신 주(主)계곡인데 이 중에서 바른재골, 곧은재골은 아직도 근접하기 힘든 미지의 계곡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등반 기점인 백무동에서 매표소를 지나면 이정표가 처음 나타난다. 좌측길은 하동바위 코스이므로 곧바로 뚫린 넓은 길을 따라가야 한다. 우측에 야영장이 나타나고 평탄한 오솔길이 이어지는데 폭 3m 정도로, 계곡과 다소 멀리 떨어진 울창한 숲속을 지나가게 되므로 시원하기 그지 없다.

 

첫나들이 폭포 가내소 폭포 오층폭포

울창한 잡목숲 터널을 빠져나올 쯤해서 점차 우렁찬 물소리가 들리며 첫나들이폭포가 반긴다. 여기서 폭포 바로 위로 가로 지르는 철다리를 건너게 된다. 철다리 위에서 첫나들이 폭포를 내려다보면, 높이 20여미터의 시원한 폭포수가 시퍼런 연못으로 곤두박질는데다 위 아래의 수 많은 폭포로 인한 물안개가 많이 되어 피어 올라 가히 환상적이어서 그런지 바람폭포라 불리어지기도 한다.

계곡 우측의 숲길로 난 길을 따라 다시 얼마 안 가 계곡과 접하게 되며 이후로 출렁다리를 좌우로 세 번 건너가게 된다. 짙푸른 수해에 감싸여 있는 주위의 경관 속에 넓직하고 매끄런 암반 위로 핥듯이 흐르는 계류가 빼어난 소와 폭포를 이루는 절경이 계속된다.

한참을 가면 합수지점이고 갈림길이다. 좌측길은 한신지계곡으로 가는 길이며 우측으로 계곡을 건너면 가내소폭포가 나오고 한신주계곡으로 들어서는 길이 나온다. 가내소폭포는 약 15m 높이의 아름다운 폭포이다. 50평 남짓한 검푸른 소가 상당히 수심이 깊음을 단번에 알려 주는데 주변을 기암절벽이 감싸고 있어 아주 멋이 있다.

가내소폭포 좌측 흙비탈길을 올라가면 얼마 안 가 계곡과 만나 이곳을 건너게 된다. 계곡변 숲길을 따라가면 오층폭포 이정표가 나온다. 등반로에서 벗어나 계곡으로 내려오면 다섯개 정도의 대소 폭포가 연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오층폭포라고 한다. 좌측으로는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우거진 절벽이 가로막고 있어 한층 산수의 멋을 더한다.

오층폭포 이정표에서 산죽과 잡목터널을 어렵지 않게 빠져나오면 계곡을 건너게 되고 여기서부터는 다소 벅찬 경사길을 올라야 한다.물론 아름드리 참나무와 갖가지 활엽수들이 우거진 길이지만 비가 올 때면 질퍽거리고 미끄런 길이다. 지능선 고개마루턱에 올라서면 완만한 내리막길이 나오면서 한신폭포 이정표가 서있다.

폭포는 이정표 있는 곳에서 80m 정도 우측 계곡으로 내려가야 볼 수 있으므로 얼핏 지나치기도 쉽다. 약 30여미터의 비스듬한 암반을 흘러 내린 물이 병주둥이 모양의 깊고 가느다란 연못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 볼 만하다.

폭포수는 좌우 20m정도의 암벽사이로 흘러내리는데 무서움이 들 정도로 오싹하다. 한신폭포는 지리산의 그 어느 폭포보다도 태고적 원시림이 하늘을 가린 계 곡 깊숙히 숨어 있어서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으므로 한번쯤 찾아 보기를 권한다.

 

한신 폭포 

담배건조소 건물이 우뚝 솟아 있는 두지터 마을에는 매점과 민박을 겸한 칠선휴게소와 산비탈에 호두나무등을 가꾸는 농가 서너채가 있다. 오목한 평지로 사방을 산자락이 감싸고 있는 이곳 지형이 쌀뒤주를 닮았다 하여 두지터로 부르며(일설에 두지터가 가락국 어느 임금이 국골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 식량창고였다는 얘기가 있다. 지형상으로 부르는 의미가 아닌 역사적인 전설 속에서 해석되는 얘기인데, 또 한편으로 광점동에서 2km 들어간 '얼음터'가 당시z 석빙고였다는 그럴 듯한 얘기도 전해온다) 두지터 뒤쪽 창암산 능선을 넘어 백무동으로 가는 희미한 길도 있다.

노출된 나무뿌리와 모난 바윗길의 급경사를 오르게 된다. 어느덧 거대한 바위 앞을 돌아 조금 오르면 평편한 쉼터가 나온다. 우측으로 멀리 영신봉이 빤히 올려다보이고 폭포 비슷한 것이 있는 곳이다. 겨울철에는 빙벽으로 변하는 이곳에서 단단히 식수를 준비하고 약 2km 남짓한 나머지 급경사 지대를 올라야 하는데 험하고도 험한 돌밭길이다.

 

 

 

 

태고의 정적이 감싸고 있는 울창한 침엽수림 지대를 오르노라면 멀리 백운산, 법화산 등 주변 야산과 백무 능선이 보이고 자주 짙은 운무가 끼기도 한다. 또한 겨울철에는 엄청난 적설량을 기록하면서 나뭇가지에 엉겨붙은 눈들로 인해 멋진 설경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큼직큼직한 야생동물의 발자국도 눈 위에 박혀있어 이곳 일대가 야생동물의 중요 서식지임을 추측케 한다. 갖가지 고사목이 쓰러져 뒹굴고 음침한 숲속에는 낙엽이 두툼하다. 서서히 휴식을 취하면서 오르면 철쭉이 몇 그루씩 나타나다가 갑자기 막혔던 시야가 탁 트이면서 드넓은 세석고원이 후련하게 펼쳐진다. 세석고원 중앙부에 올라온 것이다. 여기서 남쪽으로 200m쯤 철쭉 군락 지대를 내려오면 세석산장이 나온다.

 

한신지계곡은

 

한신 폭포

 

 

한신지계곡은 한신계곡과의 갈림길이 있는 가내소 폭포 앞에서 시작이 되는데 계곡미의 극치인 폭포수를 수 없이 빚어내는 폭포수 계곡이다. 올라오던 등산로를 그대로 따라 오르면 한신지계곡이며 철렁다리를 건너면 가내소 폭포 옆을 지나면서 한신주계곡(한신계곡)을 통하여 세석산장으로 오르게 된다.

 

한신지계곡은 계곡내의 수 많은 담과 폭포들을 구경하면서 장터목 산장으로 오르게 된다.

그러나 요즈음은 지리산에 자연으로 되돌려 보낸 반달곰을 보호하기 위하여 당분간 한신지계곡은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한신지계곡은 장터목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수가 많아 수 많은 폭포와 담.소로 어우러져 있으며 암반을 흘러내리는 맑은 청류를 바라보노라면 그 황홀경에 등산을 하고자하는 마음이 사라질 정도이다. 계곡의 시작부터 폭포로 되어 있으며 그 절경에 심취되어 오르는데 조금 오르면 등산로는 사라지면서 하천바닥을 따라 100m정도 오르다가 오른편으로 건너야 한다. 철 구조물이 있어 찾기가 쉽다.

천령폭포(무명폭포) 내림폭포 장군대
 
여기서부터는 왼편 계곡의 절경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오르는데 등산로는 비교적 잘 되어 있는 편이다. 한참을 오르면 거대한 천령폭포가 나타나는데 전에는 이름이 없는 폭포라 하여 무명폭포라 불렀었는데 지금은 천령으로 함양사람들이 이름을 붙였고 통용되고 있다. 다시 계곡의 폭포수들을 구경하면서 가노라면 온갖 모양의 폭포수 군단들을 지나게 되는데 이름이 없다. 그만큼 한신지계곡에는 폭포들이 많기 때문이다.다시 한참을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계곡이 합쳐지는 합수지점이 나타나는데 왼편으로 올라야 한다.
왼편으로 돌아서서 조금가면 내림폭포가 나타나고 폭포가 흐르는 바위 암벽을 조심스레 올라야 한다. 폭포의 위쪽에서 계곡을 내려다 보면 멀리 지리산의 많은 능선들이 눈에 시원스럽게 들어온다.내림폭포를 뒤로 하고 계곡을 건너면서부터는 등산로가 바윗돌이 많아 억센편인데 주의하면서 등정을 하여야 한다.
조금만 가면 시야가 탁 트이는 큰 암반이 나타나는데 장군대이다. 약 20평정도의 넓직한 바위이다. 장군대에서 계곡을 조망하고 오르게 되는데 여기서부터는 물줄기가 작아지면서 폭포나 담.소는 없고 보통의 등산로와 같으며 숨가프게 오르막을 오르면 주위가 편편해지면서 야영을 했던 많은 흔적들이 나타나고 장터목산장으로 바로 이어지게 된다.
 
⊙ 삼정산코스
삼정리←4.0km→작전도로갈림길←2.0km→능선갈림길←1.0km→주능선갈림길←1.0km→연하천
 
*소요시간
등정 3시간, 하산 2시간 20분
*거리
총 8.0km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서 연하천산장까지 8 km 정도의 지름길로서 거의 절반쯤은 벽소령 작전도로를 따라 가므로 길은 편하고 뚜렷한 편이다.

벽소령 작전도로는 지리산이 또 다시 무장공비들의 은신처나 거점으로 사용하는 것을 방지한다는 군사적 요구에서 60년대 후반에 건설된 도로이나 지금은 도로가 다소 파손이 되고 나무등이 가끔 넘어져 차량통행이 어려운데다가 국립공원의 허가 없이는 차량의 진입이 불가능하다

이 코스는 벽소령 작전도로로 오르다가 연하천 방면으로 오르는 비탈길 등산로를 찾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이고 또한 연하천에서 하산할 때도 중북부 능선길을 가다가 우측으로 내려서는 길을 찾기가 좀 까다롭다. 요즈음은 지리산 자연휴양림을 통하여 골짜기를 통한 지름길로 등정을 하는 경우도 많은데 계곡미를 구경하면서 오르게 되므로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이 경우에는 음정마을 앞 커브길에서 건너편으로 갈수 있는 도로를 따라 가는데 가파른 내리막 포장길을 따라 계곡을 건너면서 자연휴양림 주차장까지 운행한 후 등정을 하면 된다. 또 음정마을을 관통하면서 좌측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자연휴양림 본관까지 간 다음 주차시켜 놓고 계곡으로 올라서면 된다

작전도로를 따라 등정하려면 마천면 삼정리 음정마을 앞의 커브진 광장에 주차를 하여 음정마을을 거쳐 작전도로를 따라 오르기도 하고, 또 작전도로만을 따라서 오르기도 한다.

음정마을입구에서 마을로 들어서지 않고 곧 바로 100m정도 가면 양정마을 입구 삼거리가 나온다.

마을로 가지 않고 곧 바로 200m정도 가면 영원사로 가는 길과 벽소령으로 가는 갈림길이 시작된다.

영원사는 삼거리에서 3km정도 더 가야되며 절 마당까지 자동차의 운행이 가능하며 군데군데 비포장 도로가 있고 폭이 좁으나 영원사에서 바라보는 절경은 가히 산속의 별 천지이다.

이 삼거리에서 1.5km정도 가면 도로를 가로막는 쇠고리 줄이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내려올 계획이면 여기까지 소형 자동차는 운행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등정이 시작되는데 도로가 큰 경사없이 완만하고 폭이 넓으며 산허리 길을 가로지르는 형상이므로 주변의 경관 조망도 매우 훌륭한 편이다.

도중에 두서너번 오른쪽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을 만나게 되며 큰 산 모퉁이를 돌면 주능선 등산로쪽에 바위군들이 우뚝 솟아 있는데 벽소령의 부자바위라고 불리어지며 아버지와 세자녀가 걸어가는 모습과 꼭 빼어 닮았다. 여기에는 애틋한 전설이 있는데 함양군 문화유산 코너 중 전설편의 선유정의 유래를 참고하면 된다.

 

 

 

 

도로를 따라 삼정리에서 1시간 이상 오른 곳부터는 우측을 유심히 살피며 한참 오르면 우측에 샘이 있는데 여기서 바위 옆으로 다시 오르면 산죽이 짙어지면서 능선 위로 올라서게 되는데 중북부 능선이라고 불리는 일명 삼정리 능선길이다 참나무와 잣나무 숲이 울창한 산죽 소로길을 평탄하게 남쪽으로 따라 오르면 진달래도 많이 보이고, 인적 드문 한적한 길이라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약 20여 분 가면 이정표가 나오고 다시 주능선과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다시 20여분 가면 연하천 산장이 나온다.

이 코스는 앞서 말한 것처럼 작전도로에서 우측 비탈길로 접어드는 것이 문제이고 또 연하천에서 하산할 때도 중북부 능선길을 따라가다 우측으로 내려서는 길을 찾기가 좀 까다롭다. 특이한 지형지물이 없는데다가 안개 낀 날에는 방향감각마저 잃기 쉬우므로 연하천에서 동쪽으로 1km 주능선을 타고 오다가 여기 이정표에서 다시 20여 분 거리를 가면 우측으로 산죽 소로길이 보인다. 가파르게 내려서는 길인데 사람이 많이 다닌 흔적이 뚜렷하다.

 

 

 

⊙ 주능선코스

 

노고단산장←4.0km→임걸령←3.5km→노루목←0.5km→삼도봉←2.0km→화개봉←2.0km→토끼봉←3.0km→총각샘←1.0km→연하천←1.0km→삼각고지←5.0km→구벽소령←2.0km→산벽소령←4.0km→선비샘←5.5km→영산봉←0.5km→세석산장←1.0km→촛대봉←3.5km→연하봉←5.5km→장터목산장←0.7km→제석봉←1.8km→통천문←0.5km→천왕봉

 

*소요시간
등정 13시간 30분, 하산 12시간정도
*등정거리
45km

성삼재 고개 노고단산장 ←4.0km→ 임걸령←3.5km→ 노루목 ←0.5km→ 삼도봉 ←2.0km→ 화개봉 ←2.0km→ 토끼봉 ←3.0km→ 총각샘 ←1.0km→ 연하천 ←1.0km→ 삼각고지 ←5.0km→ 구벽소령 ←2.0km→ 산벽소령 ←4.0km→ 선비샘 ←5.5km→ 영산봉 ←0.5km→ 세석산장 ←1.0km→ 촛대봉 ←3.5km→연하봉 ←5.5km→ 장터목산장 ←0.7km→ 제석봉 ←1.8km→ 통천문 ←0.5km→ 천왕봉 

지리산 서쪽의 최고봉 노고단에서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까지 장장 110여 리가 넘는 남한 단일 산의 능선등반 코스 중 최장, 최고의 코스이다.

해발 1,300m-1,900m의 고봉준령을 넘나드는 45km의 긴 장도이기 때문에 체력과 함께 사전준비에 당연히 빈틈이 없어야 한다. 등정, 하산거리까지 합치면 보통 60km-70km가 넘는데 일정상으로 2박3일-3박4일이 다소 벅찰 지경이다. 하지만 능선곳곳에 샘터와 산장, 야영장이 알맞게 위치 하고 등반로도 뚜렷하며 아울러 만약의 경우에 대비할 수 있는 하산길도 중간중간에 많이 있어서 큰 불편은 없는 편이다.

가장 일반적인 등정, 하산코스로는 화엄사계곡 코스, 백무동 기점의 하동바위코스와 한신계곡 코스, 중산리계곡 코스와 법계사 코스, 대원사계곡 코스등이 있다.

이 능선 종주 코스는 지리산의 수 많은 봉우리와 여러 갈래의 지능선, 숱한 계곡을 두루 살펴볼 수 있어 전망이 우선 뛰어나고, 변화있는 등반길과 색다른지형 그리고 유서깊은 사연을 안고 있는 명소가 즐비하여 사시사철 같은 길을 걷더라도 항상 색다른 풍치를 자아내고 상큼한 감흥에 젖을 수 있다.

3~4일간 산과 대화하며 걷는 맛도, 또 완주를 해냈을 때의 뿌듯함도 결코 적지않아 많은 사람들은 고귀하고 추억어린이 지리산 종주산행 경험을 오랫동안 가슴속 깊이 간직하게 된다.

지리산 등반의 대명사격에 해당되고 또 마라톤 산행에 비유되기도 하는 이 주능선 종주는 여러 사정상 대체로 연휴나 휴가철 아니면 찾기 힘든 장거리 산행인데 1980년대들어서부터 이것을 극복하는 하나의 새로운 유형이 생기기 시작 했다. 이틀 사흘씩 걸리는 주능선 종주를

하루 만에 해내는 일종의 기록등반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주능선을 왕복하고 화엄사로 빠지는 약 100km 거리를 무려 15시간대 이내에 수행해 낸 그룹도 있었다고 하는데 보통인으로서는 상상키 힘든 일이다. 하여튼 일반 산행속도보다 몇 배나 빠르고 몇 곱절의 체력소모를 감내한 이와 같은 괴이한 산행도 여러 가능성에 도전하는 나름의 시도라는 점에서 분명 의미와 이유가 있을 듯 하다.

첫 기점 노고단은 옛 신단자리

노고단은 서남방향으로 경사 17~18도로 완만하게 전개된 약 100ha의 고원 지대이다. 해발 1,507m 노고단은 일명 길상봉으로도 불리는데 신라시대 때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봄, 가을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이런 연유로 해서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와 제사를 올리던신단이 있었던 곳이라는 뜻으로 노고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노고단 정상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면 "삼산(三山)과 오악(五岳) 이하의 명산대전에 대사(大祀), 중사(中祀),소사(小祀)의 제사를 나누어 지냈는데...... 중사(中祀)를지내는 오악(五岳)은 동쪽 토함산, 남쪽 지리산(地利山), 서쪽 계룡산, 북쪽 태백산, 중앙 부악(父岳, 지금의 팔공산)이었다"라고 적혀 있어 신라 때부터 지리산을 남악(南岳)으로 지정하여 국가적 차원에 서 제사를 올리던 명산이었음을 알 수있다.

그리고 그 제사를 올리던 곳이 노고단이며 남악사(南岳祀)라고 전하는데 이처럼 나라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제사를 신라가 국가적 차원에서 올렸다고 전하며 그 전통은 고려, 조선조까지 변함없이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산신으로 받들어 모셨는 데 장소는 노고단이 아닌 천왕봉과 휴천면 남호리 쪽으로 옮겨간 듯하다.

조선시대 세조 2년(1456년)에 노고단 남악사가 구례군 산동면 내산리의 평지로 옮겨져 제례가 행하여졌는데 일제시대 에는 이러한 관(官)주도의 남악사 제례가 일체 중지되고 지금 남악사는 1969년에 화엄사 앞으로 옮겨와 구례군 축제 일에 약수(거제수 물)를 바치며 제를 지내고 있다.

신라시대 화랑들의 심신수련장이었다고도 얘기되는 노고단은 일제시대때 미, 호주 외국인 선교사들의 피서용 별장 52동이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여름에도 시원하고 맑은물이 샘솟아 내를 이루며 흐르는 노고단, 후련한 전망과 빼어난 경관 등이 피서지로서 더할 나위없이 좋았을텐데 호텔, 공회당, 교회당 등을 비롯하여 발전소, 영화관, 간이 풀장까지 구비되었다고 전한다.

1948년 여순사건이 발발한 이후 근 한 달간 이상 반란군들이 이곳 별장촌을 근거지로 삼았다고 하여 그후 국군 토벌대가 다시 들어와 점령하면서 빨치산 거점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태워버려 지금은 그 옛 건물 흔적만 공허하게남아 있을 뿐이다. 1948년 12월쯤 별장 건물들이 불타 파괴되면서 이 당시 노고단 주변의 수목들도 때아닌 피해를 입어 지금도 노고단 일대에는 큰 수목이 보이지 않고 싸리나무 등 관목류만이 자라고 있다.

예로부터 노고단 주변에는 종석대, 관음대, 만복대, 집선대, 문수대, 청련대 등 명승지가 산재해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 중에서 종석대, 만복대, 문수대, 청련대의 지명은 지금도 찾을 수 있다. 관음대는 결국 종석대와 같은 것으로 보이며 집선대는 화엄사 계곡 상류 쪽에 지명이 남아 있지만 미심쩍기도 하고 청련대는 노고산장 남쪽 400m 지점 일대의 바위군을 말하는 것 같다. 노고단에서는 또한 전망이 좋아 멀리 무등산이 확연하고 어떤 사람은 맑은 날 한라산까지 보인다고도 말한다.

봄철의 진달래 철쭉, 여름철의 원추리 군락 등이 장관인 노고단의 정상을 올라와보면 주능선의 웅대한 자태와 함께 남쪽으로는 섬진강의 물줄기가 흰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것이 마치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이 느껴진다. 현재 노고단 정상 일대에는 KBS, MBC방송 송신탑과 그 부속 건물이 있고 청학동 도인들이 3일간 공들여 쌓은 거대한 돌탑이 서 있다. 얼마 전까지 통신부대가 상주했으나 지금은 철수하고 없고 옛 막사와 철조망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노고단 고원 중앙부에는 현대식 야영장 및 부대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200명 수용규모의 붉은 벽돌로 지은 3층건물 노고산장이 있다. 1988년 완공된 이 현대식 산장은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직영하고 있는데 난방용 히타와 자판기까지 구비하고 있으며 취사장비, 야영장비 등 거의 모든 것까지 대여 할 수 있다.

 

노고단 산장

노고단 산장 

반란의 산, 반역의 산, 지리산이 어쩌면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했을지도 모를 성삼재 도로라는 문명의 보복행위 때문에 가장 직접적이고 첨예한 변화를 맞이한 곳이 바로 노고단이다.

2차선 관광도로가 노고단 턱밑 3km 아래 지점까지 과감하게 뚫리고 포장이 완료되면서부터 연휴나 휴가철만 되면 도로를 가득 메운 관광버스와 각종 차량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이들 차량을 이용하여 수많은 행락객들이 손쉽게 해발 1,500m의 산정까지 몰려들어 노고단은 어느 여타 유원지와 다를 바 없을 정도다. 지리산 관광 대중화시대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음을 알리는 서곡치고는 너무도 장송곡풍이 아닐 수 없다. 주차장이 모자란다고 아우성치니 대뜸 종석대 발목을 대패질하듯 깎아내리고 위락 시설 부족을 즐비한 가건물 상점들이 대신 메꾸어주는 진풍경이 속출하는 오늘의 노고단은 곧 남한 유일의 해발 1,500m 산상도시일 뿐이다.

노고단산장 우측으로 난 계단길을 오르면서부터 주능선 등정은 시작된다. 좌측에 옛 외국인 별장건물의 앙상한 골격이 보이고 몇년 전 새로 조림한 잣나무가 많이 있는 오르막길을 오르면 점차 진달래, 철쭉이 나타나다가 곧 노고단 고개에 이르는데 요즈음은 지정된 등산로외에는 출입이 되지 않는다. 여성의 엉덩이로 짓궂게 표현되는 반야봉이 드넓은 가슴을 드러내고 심원계곡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에서 오른쪽 산판도로를 따라 20여분 오르면 노고단 정상에 이르게 되지만 등반로는 바로 산기슭으로 내려서서 노고단 북쪽사면을 횡단하듯 가게 된다.

참나무 숲이 울창하여 터널을 이룬 편한 길이 계속되고 약 20여 분 정도 가면 평편한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장승터이다. 1988년 민족통일 대장군민중해방여장군등 장승 2기를 세웠던 곳이다. 당초 임걸령 샘터 남쪽공터에 세우려 했지만 운반의 어려움 때문에 이곳에 세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89년 5월경 누군가에 의해서 전기톱질을 당해 사라져버리고 없다.

하늘을 가린 빽빽한 참나무숲을 잠시 걸어서 나오면 전망이 탁 트이면서 능선 평지길이 나온다. 진달래가 군락을 이룬 곳인데 여기서 잠시 뒤돌아보면 노고단 정상에서 내려오는 희미한 길과 만나는 곳에 돌무더기와 비슷한 곳이 있다. 지난 1970년대초쯤 고교생 3명이 세석에서 노고단을 향해 겨울등반을하던 중 폭설 속에 갇혀 조난당해 결국 그중 한 학생이 동사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비명에 간 학생을 추모하기 위해 지리산악회에서 세운 비목이 있다. 봄이면 진달래가 거대한 화원을 이루는 피아골과 심원골 사이의 이 능선을 비목령(지도상에는 돼지령으로 적혀있기도 하다)으로도 부른다.

이곳은 또한 왕시루봉으로 가는 능선의 섬세한 굴곡과 만복대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피아골과 심원계곡이 장쾌하게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능선길로서 완만한 구상나무숲을 지나오면 가을철 억새가 춤을 추는 돼지평전을 가로지른다.

돼지평전에서 뒤돌아 본 노고단 

초적들의 근거지였던 임걸령에는 맑은 샘이 마치 포근한 엄마 품을 연상시키는 반야봉이 돼지평전 억새밭 너머로 떠받쳐 있는데 돼지평전이란 어원은 마늘모양의 원추리 뿌리를 멧돼지들이 종종 파먹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돼지평전을 지나면 진달래 군락이 다시 한 차례 나타나다가 싱그러운 초원지대인 잘룩한 능선안부를 거치게 된다.

어렵지 않게 구상나무 잣나무숲으로 들어서면 피아골계곡으로 빠지는 임걸령 삼거리가 나오고 평탄한 숲길을 따라 얼마 안가 임걸령 샘터가 이어진다. 조선 명종때의 초적두목 임걸년(林傑年)의 이름에서 유래된 임걸령은 아늑하면서도 맑은 물이 솟아 야영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임걸년에 관한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지만 이곳에 진을 치고 군사와 말을 길렀다고 하는데 실제로 임걸령 부근에서는 마구와 활촉등이 발견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임걸령 샘터에서 피아골 쪽 암벽 밑에는 황호랑이 막터라는 곳이 있다. 옛날 약초꾼 황장사가 겨울에 이곳에서 자다가 기발한 꾀와 용기로 큰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주능선 등반구간 중에서 노고단~임걸령 4㎞가 가장 편한 코스에 속하는데 옛날 화랑들이 말을 타고 달려 화살보다 더 빨리도착했다는 과장된 전설이 있을만큼 순탄한 편이다. 임걸령에서는 다소 경사 급한 오르막길을 올라야 하는데 얼마 안 가다시 평지 능선길이 펼쳐진다. 산죽과 단풍나무, 잣나무,구상나무 등이 울밀한 숲을 가다보면 노루목이 나온다. 노루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이란 의미도 되지만 그보다는 반야봉의 지세가 피아골 방향으로 가파르게 흘러내리다 이곳에서 잠시 멈춰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암두(岩頭)를 이루고 있어서 노루목이라 부른다고 한다. 노루목에서는 좌측으로 반야봉을 오르는 길과 우측의 반야봉 남쪽사면을 횡단하는 갈림길이 전개되는데 우측이 주능선길이다.

사방으로 거침없는 전망, 반야봉

반야봉 

측길을 통해 약 40여 분 오르면 반야봉 정상인데 구상나무숲이 울창하고 진달래, 철쭉이 꽃동산을 이룬 곳을 지나 싱그러운 초원길 등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지리산 3대 주봉(-천왕봉, 반야봉, 노고단)의 하나로서 돌탑과 반야봉표석이 있는곳이 반야봉 상봉이며 그 넘어있는 봉은 중봉이다.

지리산 중앙부에 위치하여 사방으로 거침없는 전망이 아주 좋은 반야봉은 넓은 산자락 속에 숱한 골짜기를 품고 있어 봉우리라기보다는 차라리 단일한 산이라 말할 수 있다.

반야봉 자락 부근에는 희미한 길들이 어지럽게 얼크러져 있지만 찾는이는 드문 편이며 반야봉을 중심으로 한 등반로는 3곳 정도있다. 이 중 심원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데 원시림과 전망 좋은 능선길이며 돌고개로 빠지는 7km 코스와 심마니능선>이라 불리는 반선으로 빠지는 긴 능선코스는 아직은 험로를 헤치며 나가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주능선에서 떨어져 나와 벅차게 올라서 다시 되돌아 내려와야 하는 때문인지 두번 이상 찾기조차 힘들다. 반야봉 주변의 울창한 원시림은 보기 어려운 모습이며 겨울철 흰 눈을 뒤집어쓴 설산의 모습은 장관이다.

삼도봉 

반야봉을 올라 하산할 때는 노루목으로 내려오기 약 300m 전방에서 좌측으로 갈림길이 나 있으므로 거기를 지나 이름 모를 무덤을 거쳐 진달래 군락을 오르면 삼도봉(三道峯)에 도착한다. 삼도의 경계를 이루는 암봉, 삼도봉은 일명 날라리봉으로 적기도 한다.

지리산의 많은 봉우리 이름 중에서 가장 천박한 느낌을 주는유일한 명칭인데 연유는 이렇다.

삼도봉의 바위 모양이 낫날같다 하여 낫날봉이라 하던 것이 와전되어 날라리봉으로되었다고 하고, 달리 삼도봉 주위의 봉우리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어 처음 명명할 때 나란이봉이던 것이 닐리리봉, 날라리봉으로 변했다는 얘기도 있다.

어찌 됐든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설픈 명칭은 달리 부르는게 합당할 듯하다.

삼도봉에서 보이는 전망 역시 훌륭한데 불무장동 능선과 피아골계곡이 내려다 보이고 건너편에 토끼봉이 복스럽게 걸려있다. 삼도봉에서 바위 벼랑 밑을 비껴 내려오면 경사 급한 내리막길이 투박하기 그지없고 어느덧 헬기장이 있는 넓은 공터에 도착한다. 지리산 종주 코스 중 가장 저지대에 속하고 뱀사골계곡 상류에 소금장수가 발을 헛디뎌 빠졌다는 간장소에 얽힌 전설도 있는 걸로 보아 화개장터를 거친 해산물과 소금 등이 운봉, 마천, 산내지방의 내륙 특산물과 함께 이 길을 통해 거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화개재에서 남쪽계곡(칠불사계곡, 연동골)을 따라 희미한 길이 나 있는데 범왕리 목통마을에 닿는 이 길은 뱀사골산장 물품을 나르는 길로 이용되었었으며 북쪽 뱀사골계곡 쪽으로 200m 내려가면 뱀사골산장과 함께 샘터가 나온다. 화개재에서 토끼봉으로 오르는 길은 점차 경사를 더해가는 힘든 길이지만 울창한 구상나무, 전나무숲을 거닐어 진달래 관목지대가 펼쳐지는 정상에 오르면 전망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또 4월말경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진달래가 토끼봉정상을 온통 붉게 물들여 진한 꽃내음에 흠뻑 취할 수 있는곳이다. 뒤돌아보면 듬직한 반야봉과 뒤쳐져 따라올 듯한 노고단이 훤하고 천왕봉, 세석, 명선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연봉의 위용도 가관이다.

토끼봉 정상 

토끼봉이란 명칭은 주변에 토끼가 많다거나 봉우리가 토끼 모양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고 반야봉을 기점으로 동쪽, 즉 24방위의 정동(正東)에 해당되는 묘방(卯方)이라 해서 토끼봉(卯峯)으로 부르는 것이다. 한편 토끼봉은 정상초원에 지보초가 군생하고 있어 일명 지보등이라고도 불린다. 토끼봉 남쪽 능선길을 따라 20여 리 내려가면 칠불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 능선길은 가끔 하산시 지름길로 이용되기도 한다.

토끼봉에서 하늘을 찌를듯 치솟은 구상나무숲을 내려서면 갖가지 잡목숲을 지나 완만한 능선안부에 이르렀다가 고목나무가 쓰러져 나뒹구는 경사길을 오른다. 능선 평지길이 한동안 계속되다가 돌밭길을 서서히 오르면 총각샘 이정표 앞에 도착한다.

이제까지 오던 길은 울창한 수해를 이뤄 더없이 시원하고 청량감있는 행보가 이어진 길이었다.

총각샘은 이정표 남쪽 언덕 너머에 있으며 커다란 벼랑 밑에서 신기하게 샘이 솟아나는데 1970년 지리산악회 사람들이 수소문 끝에 발견한 샘이다. 옛날 심마니 노총각이 처음 알고서 이용하던 샘이었다고 하는데 이 소문을 듣고 재차 발견한 샘이다. 재차 발견한 사람이 지리산악회 노총각 2명이었기 때문에 혹은 심마니 노총각에서 각기 유래돼 총각샘이라 이름 지었지만 명명할 때는 장터목의 산희샘이 여성적이라서 이것과 대비시킨다는 뜻도 있었다고 한다. 총각샘은 갈수기에는 말라버리는게 흠인데 샘터 앞에 공터가 있어 야영은 가능하다. 총각샘으로부터 경사도 있고 힘도 드는 길이 나온다. 미끄러운 바위벼랑을 기듯이 오르면 차츰 완만해지다가 명선봉 부근의 울창한 침엽수림 지대를 지나면 내리막 흙길로 변하고 연하천산장에 이른다. 명선봉 능선길은 하늘을 가린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하여 숲속에서는 낙엽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숲속 평지 연하천에 이르면 마치 요정들의 별세계에 온 듯하다.

해발 1,500m 이상의 고산지대답지 않게 맑고 시원한 물이 계류가 되어 흐르는 연하천은 남, 북, 서 3면이 아늑하게 감싸여 있는 숲속인데 주변에는 야영하기에 적합한 평지가 많고 공터에는 이름 모를 무덤도 있다.

 

연하천 산장 형제봉 벽소령

약 5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연하천산장은 1982년 건립된 15평정도의 아담한 건물이다. 연하천이란 서정적 느낌의 말을 굳이 해석한다면 오묘한 대자연속의 정취어린 샘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여기 연하천과 연하봉등은 지리산악회 명명하였다.

연하천 산장에서 동쪽으로 질퍽거리는 길을 가면 삼정리와 영원사로 가는 북부능선길이 좌측으로 나 있고 여기를 올라서면 전망이 탁 트이면서 삼각고지에 도착한다.

화개면, 마천면, 산내면의 경계점인 삼각고지에는 옛 6.25 당시의 벙커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여기서 내려다보이는 남쪽 계곡이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했다는 빗점골인데 삼각고지와 명선봉 일원에서 전투를 치열하게 벌였는지 몰라도 혹자는 벽소령까지의 능선을 피의 능선으로 부르기도 한다. 앙상한 고사목과 기암이 조화를 이룬 오르내리는 능선길이 한동안 지속되다가 눈앞에 거대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바라보이는 곳에 이른다.

높이 10m가 넘는 두 개의 바위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이 입석바위를 형제바위라고 한다. 옛날 성불수도하던 두 형제가 산의 요정 지리산녀의 유혹을 경계하여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버려 지금의 모습이 됐다는 전설이 있다.

이 바위 옆으로 조금 내려가면 자그마한 동굴이 자리잡고 있는데 연하굴이다. 비박 하기에 괜찮은 관통굴이다.

연하굴에서 두서너 개의 작은 봉우리를 넘나들다가 북쪽사면으로 내려서면 나무뿌리와 모난 돌길이 펼쳐지고 벽소령터로 나오게 된다.

지리 10경 중 벽소명월로 유명한 벽소령(일명 뱁실령)은 화개면과 마천면을 잇는 작전도로가 지나는 곳이다. 종주 등반 코스 중간지점에 해당되는 곳인데 이정표가 1km 이상의 거리를 두고 동편과 서편에 각각 두 곳 있다. 서편의 벽소령을 큰 벽소령, 구(舊)벽소령으로 부르고 동쪽을 작은 벽소령, 신(新)벽소령으로 부른다. 벽소령의 샘, 뱁실샘은 구벽소령 남쪽 소로길을 200m쯤 내려가면 공터에 솟아나고 있다.

최근에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의해 신축된 벽소령 산장은 지하1층 지상 2층 연 건평 135평 규모의 25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산장이다. 계곡 오염과 고산 생태계 파괴 등을 우려한 산악 환경단체들의 건립 반대 시위등 홍역을 치룬 끝에 세워진 것이다.

지난 1970년대초 작전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능선 위로 등반로가 나 있었지만 지금은 넓고 편한 작전도로를 따라갈 수 있다.

잡목이 우거지고 낙석도 많은데 벽소령을 지나는 이 작전도로는 하동군 화개면 신흥에서 마천면 삼정리까지 연장 38km의 비포장도로로서 자동차의 운행이 가능하나 통제하여 다닐 수 없다. 작은 벽소령에서 능선 소로길로 올라 경사진 흙비탈길을 한참 오르면 전망이 트이면서 남쪽으로 깍아지른 듯한 깊은 골짜기가 눈에 선한 봉우리에 다다른다.

세석고원을 벗어나 주능선을 서쪽으로 8㎞쯤 가니 우뚝한 봉우리 하나가 나섰다. 꽃대봉(1,426m)이라는 그 이름은 여순사건 이후 제2병단 빨치산들이 그 봉우리를 뒤덮은 꽃밭이 너무나 아름다와 그렇게 불려왔다고 전한다.

꽃대봉이라는 이름의 봉우리에서 비교적 편한 길을 가다가 덕평봉 남쪽 사면을 돌아 내려가면 넓다란 평지와 함께 선비샘이 나온다. 옛날 선비샘 아래 상덕평마을에는 평생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살아온 한 노인이 있었다. 이 노인의 유언이 죽어서라도 사람 대접 한번 받아보는 것이었는데 결국 아들들이 이 샘터 위에 무덤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뜰 때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므로 결과적으로 이 노인의 무덤에 절하는 격이 되도록 하였다고 한다.

생전에 갖은 고생과 천대 속에서 화전민으로 살아온 한 노인의 애틋한 소망이 실제로 몇 년 전까지 실현되고 있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무덤도 안보이고 샘도 파이프로 연결하여 서서 받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이 씁씁한 전설은 잊혀진 얘기로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선비샘에서 남쪽으로 상덕평을 거쳐 의신마을로 내려가는 약 7km의 지름길이 있다. 자칫 대성골쪽으로 빠지기 쉬우므로 방향을 잘 잡아 비상시 하산길로 이용하면 괜찮은 곳이다.

선비샘에서 덕평봉을 다시 감싸듯 오르면 세석 영신봉까지는 수없이 오르내리는 힘든 구간이 연속된다. 울창한 숲길에다 간간이 대성골이 훤히 트이는 전망 좋은 쉼터도 있고 또 여름철 온갖 꽃들이 만발한 능선안부도 있어 지루한 감은 없고 아기자기한 산행의 맛이 더하다. 한참 가다보면 둘레에 7개의 암봉이 기묘한 조화로 우뚝 서 있는 칠선봉이 나온다. 마치 그 암봉들이 일곱 선녀가 노니는 모습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신봉 촛대봉 연하선경

칠선봉에서 두어 번 암봉을 넘으면 북변의 경사 급한 바윗길이 나타난다. 노출된 나무뿌리에 의지하여 힘들게 이곳을 올라서면 영신봉이 바로 코앞에 다가선다. 영신봉에 오르면 사방이 두루 조망되면서 광활한 세석고원의 전모가 한눈에 들어온다.

꿈 같은 거대한 화원, 세석고원을 지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넓은 세석고원은 그 둘레가 12km, 약30만 평의 면적을 차지한다.

작은 돌밖에 없는 토양지대라 해서 잔돌평전, 세석평전(細石平田)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본식 표기이므로 세석고원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매년 5월말~6월초에 만개하는 수십 만 그루의 철쭉이 장관인 세석의 식물대는 상 중 하 3대(帶)가 뚜렷하여 식물연구의 좋은 교육장 노릇도 하고 있다.

초원지대인 상대, 철쭉군락의 관목지대인 중대, 그리고 구상나무와 굴참나무의 하대가 등고선별로 분포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세석고원의 면모가 드러난 계기는 약 100년전(혹은 300년 전이라는 얘기도 있음) 큰 산불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15세기경 지리산을 찾은 김종직, 김일손 등의 기행문에서도 세석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없는 걸로 보아 타당한 얘기 같다.

세석고원 서쪽사면에 자리잡은 세석산장은 1983년 20평정도로 지었었는데 최근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의해 수용인원 300명을 자랑하는 대규모의 시설로 신축되었다. 지리산의 산장 중 가장 크고 운치가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는 세석산장은 지은지 얼마 되지 않아 내부에 들어서면 나무향기가 은은하며 2층 앞쪽으로는 거림골 코스로 이어진다.

2층은 칸막이가 설치된 가족실로서 5-8인의 단체 가족일 경우 빌려준다. 구 산장은 취사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난 1972년부터 매년 철쭉이 만발하는 시기에 진주산악회 주최로 철쭉제가 열리곤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몰려 대혼잡을 이루고 되레 철쭉이 훼손당하는 부작용이 따르자 폐지되었으며 현재는 자연복구를 위하여 지정된 등산로외에는 다닐 수 없도록 되어있다. 세석산장에서 촛대봉까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폭 1~2m 정도로 잘 다듬어진 길이며 좌우로 철쭉꽃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길이다. 올망졸망한 바위들의 군집체인 촛대봉은 그 바위 모양들이 마치 촛농이 흘러내린 듯하다 해서 그렇게 부르는데 천왕봉이 가까이서 어서오라는 듯 반기며 한신골과 도장골이 시원스럽게 내려다 보인다.

촛대봉에서 잠시 비탈길을 내려서면 기암과 고사목이 어울린 아기자기한 능선길을 타게 된다. 지도상에 나와 있는 삼신봉을 확인해볼 겨를 없이 지나치고 들꽃이 만발한 능선안부(헬기장이 있는 곳)를 지나면 연하선경(烟霞仙境)으로 유명한 연하봉에 이른다. 기암이 솟구쳐 있고 싱그러운 초원 위엔 온갖 꽃들이 화려하게 수놓는 전망도 일품인 곳이다.

연하봉을 넘어서면 평탄한 초지 능선안부를 거쳐 넓고 평탄한 봉우리에 올라서는데 도장골이 길게 패여진 모습이 환하고 남쪽방향으로 지능선이 하나 뻗어 내려가는데 일출봉이라 부르는 곳이다.

장터목산장에서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다소 멀기도 하고 더구나 날씨마저 장담할 수 없는 날이면 괜한 헛걸음이 되기 일쑤여서 아예 포기하기 십상인데 이럴 때 이곳 일출봉을 한번쯤 찾는다면 좋을 듯하다.

장터목에서 20분도 채 안되는 거리에 있고 또 기암과 고사목이 어울린 수려한 경관 속에서 무엇보다 호젓한 분위기에서 일출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일망무제격으로 탁 트여버린 천왕봉의 일출이 차라리 단순하고 산문적인 느낌마저 든다면 이곳 일출봉에서는 좌측에 듬직하게 천왕봉의 암영을 걸어놓고 있어서 더욱 운치가 있다.

일출봉에서 숲길을 걸어 내려오면 옛날 산청군 시천면 주민과 함양군 마천면 주민들이 물품교역을 하던 곳이라는 장터목에 이른다. 5개 방향으로 등반로가 연결되고 더구나 천왕봉을 오르려는 일종의 전초기지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노고단 다음으로 지리산에서는 번잡스러운 곳이다.

장터목산장은 지난 1971년에 처음 세워질 때 지리산장이라는 이름으로 10평 40명 수용의 반 지하식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졌지만 지금은 폐쇄되고 대신 25평, 80명 수용의 새산장이 목조 2층 마루방으로 1986년 문을 열었다. 그나마 폭증하는 많은 등산객을 수용하지 못해, 휴가철은 물론 눈이나 비가 와 야영하기가 불편한 날에는 심하게 붐비는 곳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의해 수용인원 250여 명의 새로운 장터목 산장이 최근 신축되었다. 구산장 건물과는 통로로 연결되며 새 산장을 건축한 후 구산장도 통나무로 새로이 장식하고 97년 준공했으며 침상과 취사장이 같은 건물 내에 위치한 것이 장점이다.

장터목샘(일명 산희샘)은 중산리 쪽 20m 아래에 위치하며 물이 가늘게 흘러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20여분이 안되는 거리에 천왕봉 성모사의 향화를 받들었던 향적사 터가 있다.

 

장터목의 고사목 

장터목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산장 우측으로 경사 급한 돌밭길을 오르는데서 시작된다. 구상나무숲과 기암이 보이다가 어느덧 고사목과 황량한 초원지대 제석봉이 나오는데 6.25 후까지만 하더라도 아름드리 전나무, 구상나무들이 울창하였었으나 자유당 말기 당시 농림부장관의 삼촌되는 자가 권력을 등에 업고서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려놓고 거목들을 베었다. 그러다가 후에 이 도벌 사건이 여론화되고 말썽이 나자 증거를 없애기 위하여 불을 질러 나머지 나무들마저 태워버려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불법적 도벌과 이를 은폐하기 위한 방화로 지금의 제석봉이 되었는데 멀리서 제석봉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천왕봉 턱밑의 고사목 지대는 볼상사납기 그지없다.

자연 스스로의 노쇠과정 속에서 운치가 있는 고사목이 아니라 횡사목이라는 데서 그 어떤 미적 세계도 발견할 수 없는 지리산 임상 수난사의 처연한 기념물인 셈이다. 그나마 몇 그루씩 남아 있던 횡사목들마저 점차 쓰러져가고 있어 결국 얼마 안 가 제석봉 일대는 황무지로 변할 것을 막기위하여 국가에서는 주변에 풀과 나무를 심는등 안간힘을 쓰고 있다. 또 비만 오면 물을 머금지 못하고 그대로 흙탕물을 토해내는데 이점 때문인지 장터목샘과 제석단샘도 갈수기에는 종종 물이 고갈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제석봉 이정표에서 철사다리를 내려서면 좌우로 암벽 비탈길이 고산지대 특유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소위 톱날능선이라 부르는 암봉연릉길이 이어진다. 능선안부를 거쳐 얼마 오르면 칠선계곡 원시림 장관이 눈에 들어오고 통천문에 이른다.

 

고사목과 지리산의 운해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오르지 못했다고 하는 하늘에 오르는 길목, 통천문은 깍아지는 벼랑 속으로 작은 통로가 있어 그 사이를 비집고 오르게 되어 있는데 몇 해 전까지 나무사다리로 힘겹게 오르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철사다리를 타고 갈지(之)자로 편하게 오를 수 있다. 통천문 위로해서 잠시 평탄한 길이 나오다가 거대한 암벽 비탈과 만난다. 우측으로는 사태난 듯 아찔한 낭떠러지이고 그 옆의 튼튼한 쇠줄에 의지하여 스릴있게 오르게 된다.

천왕봉을 오르는 막바지 지점인 이곳 벼랑지대는 8.15해방 직전 엄청난 굉음을 토하며 붕괴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인근의 중산리지역 사람들은 이 때문에 무슨 큰 변고가 있을거라고 믿었다는데 결국 일제가 망하고 우리 민족이 독립을 되찾게 된 일이 그것이었다.

남명 조식(曺植)의 싯귀에 "하늘은 울어도 천왕봉은 오히려 울리지 않는다"라는말도 있지만 천왕봉의 암석이 떨어져 나가면서 천왕봉이 울었으니 그렇게 생각 했음직도 하다. 그후에도 이곳은 여러 차례 붕괴돼 중산리계곡을 너덜지대로 만들어 놓았는데 단순한 자연적 변동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인위적 요인도 작용한 듯하다. 갖가지 기계를 동원하여 암석을 잘라서 캐가는 사람 들도 전연 무관하다고 볼수는 없을 것 같다. 천왕봉 정상은 칠선계곡 등반로와 만나는 곳에 안내판이 있지만 100m쯤 더 가야 한다. 해발 1,915m로 남한에서는 한라산(1,950m) 다음으로 높은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은 하늘을 떠받치는 거대한 암괴로 이루어져 있다. 드디어 천왕봉 사방을 빙 둘러보아도 거칠 것 하나 없는 장쾌한 전망을 가진 천왕봉은 하늘에 닿을 듯 웅대한 기상으로 우뚝 솟아 있는데 행정구역상으로 보면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100번지와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에 해당된다. 천왕봉 정상에는 몇 차례 푯말이 바뀌면서 지금은 "智異山 天王峯 1,915m", "韓國人의 氣象 여기서 發源되다" 라고 각각 양면에 음각된 높이 1m 정도의 타원형 돌비석이 세워져있다.

 

중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천왕봉 정상 서쪽 암괴에 천주-하늘을 떠받치는 기둥-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여기서 조금 내려온 능선 평지(공터)가 옛 성모사당이 있던 자리이고 그 아래 공터가 (지금 철창이 성모상의 복귀를 기다리며 설치되어 있는곳) 옛 산장터이다. 일제시대 때부터 토굴식 석조산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6.25 이후에도 몇 년간 존속되었지만 지금은 자취를 찾을 길 없다. 천왕봉 정상에서는 야영할 만한 공간이 여러군데 있지만 식수가 없고 화장실도 없어 큰 불편이 따른다. 비록 법계사 쪽으로 500m 가파르게 내려간 곳에 천왕샘이 있지만 갈수기에 말라버리기 일쑤다.

 

천왕봉 정산 

천왕봉에서의 하산코스로는 남쪽 법계사-중산리 코스가 가장 지름길로 많이 이용되고 장터목으로 다시 되돌아 내려와 백무동 쪽으로 하산하는 것도 부담없다. 동쪽으로 중봉-써리봉-치밭목산장-대원사코스도 18km로 길지만 잡아볼 수 있고 날씨와 제반 여건만 허락한다면 북쪽 칠선계곡 코스도 택할수 있다. 주능선 대장정을 천왕봉에서의 조망으로 마무리한다. 천왕봉에서 칠선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북쪽을 바라보면 함양읍내 건너 멀리 백운산, 덕유산 연릉이 연자색으로 둘러 있고 가까이 창암산, 법화산이 또렷하다. 중봉-하봉-도리봉 연릉을 넘어 북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감악산, 가야산의 암봉이 희끗희끗하고 동쪽으로는 웅석봉의 기나긴 능선이 성곽처럼 누워 있으며 경호강 물줄기가 아른거린다.

남쪽으로는 첩첩이 요동치며 야산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멀리 남해 바닷가가 어렴풋하게나마 윤곽을 드러낸다. 서남방향으로 광양 백운산이 가물거리고 서쪽으로는 긴 곡선을 그리며 지리산 주능선이 뻗어 있고 반야봉, 노고단도 쉽게 어림된다. 서북방면으로는 인월, 운봉이 부분적으로 드러나며 멀리 성수산이 보이기도 한다.

 

⊙ 하동바위코스

백무동←2.0km→하동바위←1.2km→참샘←0.3km→소지봉←5.3km→제석단←0.km→장터목산장←0.7km→제석봉←0.8km→통천문←0.5km→천왕봉


*소요시간

등정 5시간, 하산 3시간 30분
*총거리
9.0km

백무동에서 오르는 3갈래 등반코스 중에서 쉽게 주능선에 오를 수 있는 가장대표적인 코스이다. 백무동에서 소지봉까지는 작은 계곡을 끼고 오르고 그 이후에는 능선길이라 특출난 명소도 없는 편인데 등산객이 가장 많은 코스이며 장터목에서 하산하는 데는 최단의 지름길인 셈이다.

원래 100명의 무당이 거처하던 골짜기라 하여 백무동(百巫洞)이 원이름이던것이 와전되어 백무동(白武洞)으로 변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지리산 산신인 여신 성모가 천왕봉에 살고 있었는데 그 성모가 남자를 끌여들여 교회(交會)를 해서 100명의 딸을 낳아 세상에 내려보냈는데 이 100명의 무당들이 팔도로 퍼져나간 출구가 백무동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2대 무맥(巫脈)을 지리산 무맥과 개성 덕물산 무맥으로 나눈다. 하지만 덕물산의 무맥이 고려를 고집하다 목숨을 잃은 최영을 신으로 모시면서 퍼져나간 데 비해 시간적으로나 영향으로 보더라도 지리산의 무맥이 보다 근원적 위치에 있다. 이 하동바위 코스는 백무동 등반객의 거의 대부분이 오르고 특히 연휴나 휴가철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려 계속 줄을 잇기 때문에 체증 문제가 대두될정도다. 또 겨울철이나 비가 올 때 길이 미끄럽고 모난 돌도 많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백무동 민박집과 상가지대를 거슬러 올라 매표소를 지나 다리를 건너면 야영지에 도착한다. 앞으로 직진하면 한신계곡으로 가는 길이다. 이정표에서 좌측으로 올라서면 감나무가 있는 외딴 집 마당을 가로질러 철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하동폭포와 앞 철다리 

여기서부터 돌밭길 등반이 시작되면서 우측으로 개울물이 졸졸 흐르고 시원한 숲속을 거니는 과정이 한 시간 정도 계속되다가 앞에 약 10m 정도의 바위 절벽이 가로 막는다.

하동(河東)지방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고 해서 하동바위라고 부르는 곳이다. 이 앞으로 난 출렁다리를 건너면 오르막이 잠시 나오고 짙은 이끼가 낀 돌밭길을 따라 작은 개울을 몇 번 건너는 듯 하다보면 어느덧 참샘에 이른다.

화장실과 야영장이 있지만 다소 지저분하다. 두 가닥의 파이프를 통해 물이 흘러 나오는데 여기서 제석단이나 장터목까지는 5km가 넘는 능선길이고 도중에 식수가 없기 때문에 식수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참샘에서 소지봉까지는 급경사의 힘든 구간이다. 소지봉에서 다시 질퍽거리는 흙비탈길을 오르면 무덤이 하나 나오고 겨우 한숨돌리게 된다. 제석봉-창암산의 백무능선에 드디어 올라선 셈인데 산죽 소로길의 평지를 걷다 간혹 약간의 경사지대가 나오고 헬기장 공터에 도착한다.

등반로는 비교적 완만한 오름길이고 멀리 우측을 바라다보면 연하-세석 능선이 바라다 보인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암이 우뚝 정렬해 있는 모습이 자주 나타나고 침엽수의 거목들도 눈에 띈다.

차츰 경사가 급해지는 길이 한 차례 나오고 드디어 막혔던 시야가 트이면서 망월대가 나타난다. 망월대에서는 제석봉에서 노고단까지의 주능선이 훤하게 보이며 한신계곡과 한신지계곡등이 발밑에 보인다.

관목지대를 조금가면 제석봉 하단부에 도착하는데 제석단 약간 못 미쳐 곧바로 제석봉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 길을 통해 천왕봉을 오른다면 장터목을 거치는 것보다 20여분 단축할 수 있으나 요즈음은 제석봉으로 바로 오르지 않고 산허리를 돌아 장터목산장을 거쳐 제석봉으로 오르는 경향이다.

제석단에서 장터목까지는 구상나무 숲속을 가볍게 노닐면서 당도할 수 있다.

옛날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하는 제석단에 오면 바위 틈에서 시원한 샘물이 솟고 앞에는 넓은 공터도 있어 야영도 할 수 있다. 다만 제석샘은 가뭄 때 물이 자주 마르는 단점이 있다.

이 하동바위 코스는 백무동 등반객의 거의 대부분이 오르고, 특히 연휴나 휴가철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려 계속 줄을 잇기 때문에 체증문제가 대두될 정도다. 또 겨울철이나 비가올 때 길이 미끄럽고 모난 돌도 많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 지리산안내도

 

백두대간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으로 맥을 뻗어내리다가 태백산을 거쳐 남서쪽의 지리산에 이르는 국토의 큰 줄기를 이루는 산맥이다.
이 산줄기를 이루는 주요 산은 백두산(2,744m)을 기점으로 포태산(胞胎山:2,289m), 두류산(頭流山:2,309m) 등 해발고도 2,000m 내외의 고봉으로 이어져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양분한다.
산줄기는 다시 남쪽으로 차일봉(遮日峰:1,743m), 철옹산(鐵瓮山:1,085m), 두류산(頭流山:1,324m), 추가령(楸哥嶺:752m) 으로 이어진다. 또한 동해안을 끼고 금강산(金剛山:1,638m), 진부령(陳富嶺:529m), 설악산(雪岳山:1,708m), 오대산(五臺山:1,563m), 대관령(大關嶺:832m), 두타산(頭陀山:1,563m)을 거쳐 태백산(太白山:1,567m)에 닿는다.
여기서 방향을 남서쪽으로 돌려 소백산(小白山:1,421m), 죽령(竹嶺:689m), 이화령(梨花嶺:548m), 속리산 (俗離山:1,508m)으로 뻗어내린다. 이로부터 추풍령(秋風嶺:221m), 황학산(黃鶴山:1,111m), 삼도봉(三道峰:1,177m), 덕유산(德裕山:1,614m), 백운산(白雲山:1,279m), 지리산(智異山:1,915m)로 이어지면서 산줄기는 끝이 난다.
《산경표(山經表)》에 따르면 한국의 산맥은 1개 대간과 1개 정간(正幹) 및 13개 정맥(正脈) 체계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산줄기[山經]의 개념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제일 굵은 선으로 표시한 것은 대간, 두번째 굵은 선으로 표시한 것은 정맥, 세번째 굵은 선으로 표시한 것은 지맥, 기타는 골짜기를 이루는 작은 산줄기 등으로 나타냈다.
이렇듯 대간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산줄기들은 지역을 구분짓는 경계선이 되었으며, 삼국의 국경과 조선시대의 행정경계를 이루었다. 따라서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자연적 상징이며 동시에 한민족의 인문적 기반이 되는 산줄기라고 할 수 있다.

 

지리산탐방

우리민족의 기상과 혼, 정서, 그리고 애환이 깃들여 우리와 더불어 숨쉬어 온 지리산은 예로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 (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왔으며 신라 5악의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 진다 해서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려 왔다. 지리산은 백두산의 맥이 반도를 타고 내려와 이곳까지 이어졌다는 뜻에서 두류산(頭流山) 이라고 불려지기도 하고 불가에서 깨달음을 얻은 높은 스님의 처소를 가리키는 방장의 의미를 빌어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천왕정상에는 현재 82년도에 경상남도에서 세운 1.5m높이의 표지석이 서 있는데 전면에는 "지리산 천왕봉 1915m" 란 글이 표기돼 있다. 그전에는 진주 산악인들이 남명선생의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이란 글귀를 새겨 표지석으로 세워 두었다.

67년 12월 27일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는 지리산은 주봉 천왕봉(1,915m)에서 노고단(1,500m) 을 잇는 1백리 능선에 반야봉, 제석봉, 촛대봉등 해발 1,500m를 넘는 10개의 거봉이 구름 위에 솟아있고 이들을 호위하듯 해발 1,000m를 넘는 20여개의 높은 봉우리들과 85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서로 어우러져 있다. 용트림하듯 길게 뻗어진 주능선의 길이만도 100리가넘는 지리산은 북쪽을 내지리, 서남쪽을 외지리로 구분하나 잘 통용 하지는 않고 있다.
산릉은 주능선에 15개의 지능선과 15개의 계곡을 배열해 남북으로 흐르는 큰 강과 이어져 바다로 빠지게 연결시켜 두고 있다. 거산의 물줄기 큰 하나는 남강으로 또 하나는 멀리 덕유산 골짜기에서 흐르는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봉우리와 재가 지리산의 위상이라고 보면 지리산의 실질이 되는 계곡은 이들 두 줄기 큰 물줄기를 만나기 전에 강으로 이어지는 계류천을 만든다. 화개천, 연곡천, 동천, 엄천강, 경호강, 덕천강, 횡천강 등 14개의 크고 작은 하천이 그것이다. 이들 하천을 만들기 위해 능선 사이사이에서 옥류청계를 자랑하며 그 하나하나가 비경을 이루는 것이 지리산 12동천이다.

청학, 화개, 덕산, 악양, 마천, 백무, 칠선동과 피아골, 밤밭골, 들돋골, 뱀사골, 연곡골의 12동천은 수없이 아름답고 검푸른 담과 소 비폭을 간직한 채 지리산 비경의 극치를 이룬다.

이들은 또한 숱한 정담과 애환까지 안은 채 또다른 골을 이루고 있는데 혹은 73개의 골을 이야기하고 혹은 99개의 골을 논하고 있을 정도로 무궁무진한 골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봉우리와 능선 그리고 계곡들은 대자연의 섭리와 어우러져 지리10경을 펼쳐 보이니 노고운해, 피아골단풍, 반야낙조, 벽소령명월, 세석철쭉, 불일폭포, 연하선경, 천왕일출, 칠선 계곡, 섬진청류가 그것이다.

지리산의 비경은 또한 3도 5개군 15개면에 걸쳐 484㎢로 광대하게 펼쳐져 있어 동식물의 보고로도 정평이 나 있다. 현재까지 보고된 식물류는 목본식물 245종, 초본식물 519종 등 모두 824종. 이 중 식용식물이 285종, 약용식물이 174종, 독초식물이 14종으로 알려져 있으나 더 많은 연구 여부에 따라 더 있을 가능성이 많다. 수림이 울창해 동물류도 다양해 이미 호랑이 표범 불곰 등은 사라진 것으로 보고 되고 있으나 멧돼지, 반달곰, 사슴 등 짐승 22종과 조류 163종 등 421종의 동물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면 최근에 반달곰 4마리를 방생하였다.

정상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리산 신령을 봉안했던 성모사가 자리해 있었으나 속인들의 끊임없는 욕심으로 자취를 감추고 빈자리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성모상은 훼손된 채 사라졌다가 다행히 한 스님에 의해 찾겨져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으나 제자리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천왕봉의 성모사는 1489년 이곳을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의하면 성모사는 천왕봉 정상에 한 칸 정도의 돌담벽이 있고 담 안의 너와집에 성상이 안치돼 있었다고 전한다.
이 사당은 빨치산에 의해 허물어진 뒤 오늘날까지 노천암대만 남아 처량하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실정이다.

지리산은 가도가도 끝내는 그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는다. 천하제일경이라는 천왕일출과 석양낙조를 빚어내는 천왕봉은3대에 걸쳐 적선을 하지 않은이에게는 천지개벽을 연상케하는 일출 광경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속설과 더불어 반드시 관문을 거쳐 들어오도록 하고 있는것이 그것이다. 천왕봉은 동쪽으로 개천문(일명 개선문), 남서쪽으로는 통천문을 두어 이들 관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거쳐 들어오게 하고있다. 이들 두 관문 이외에 천왕봉을 향하는 길목은 칠선계곡을 거쳐 마천에서 깍아지른 듯한 날카로운 비탈길과 멀리 대원사에서 치밭목~중봉을 거쳐 오를 수 있는 험난한 길 등 두 길이 있으나 모두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듯 해야만 주봉에 닿을 수 있으니 천왕봉은 쉽게 등정을 허락하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5백년전 김종직, 김일손, 이육, 조식 선생 등 선인들의 지리산 기행에서조차 그들의 내면세계 전부를 토해 내고도 모자란 듯 여운을 남겨 두었다. 남명선생은 그의 "유 두류록"에서 무릉도원을 지리산 어느 곳으로 여기고 무아지경에 빠졌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메뇨 나는 옌가 하노라“ 고 읊조렸다.

고려 말 이인로 역시 지리산을 찾아 헤매며 “두류산 멀고 깊은데 저녁 구름 나직하니 신선 사는 곳 어디인지 물을 길 없는데 시냇물에 꽃만 떠내려와 속객을 어리둥절케 하느냐”며 지리의 신비함에 탄복했다.

서산대사는 "지리는 장엄하되 빼어나지 않았다“ 며 수려하기 보다는 장엄 웅장한 남녘의 진산이라고 찬탄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지리산에 절과 암자가 3백50군데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니 가히 지리산은 수도처로서의 적지는 물론 문화유적의 보고라고도 할 만하다. 현재는 역사가 가장 오래된 칠불사를 비롯, 사적 7개소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에는 수많은 한국인의 시상이 발원하는 곳으로 부르며 마음의 고향으로 믿고 있다.

태고적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리산을 둘러싼 선인들의 숱한 답사 기록과 풍류는 나아가 지리산을 매개로한 문학 으로까지 발전했음을 볼 수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고전문학으로 손꼽히는 "춘향전", "흥부전", "변강쇠타령" 등은 모두가 지리산을 무대로 하고 있으며 저변에 깔린 정서는 지리산속의 잠재된 변혁세력과 무관치 않음을 엿 볼 수 있다. "흥부전"의 본무대는 지리산 자락의 운봉여원치에서 함양 팔령재까지로 지금도 "흥부마을"이 있다. 경남과 전북 경계지점을 지나면 바로 나온다. 변강쇠타령은 알려진 대로 거의 지금의 함양군 마천면 일대인 등구,창원이다. 이같은 문학적 배경은 근세까지 이어져 박경리의 "토지", 황순원의 "잃어버린 사람들", 김동리의 "역마"등은 조선말기와 일제의 침탈 과정에서 빚어진 지리산과 한민족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근대화 이후에는 이데올로기의 붕괴와 더불어 빨치산 투쟁을 형상화한 이병주의 "지리산"에서 80년대 이태의 "남부군", 조정래의 "태백산맥"등으로 이어져 지리산과 함께한 민족의 희망과 좌절, 기쁨과 고통, 사랑과 분노가 문학작품을 통해 감동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지리산의 모습은 천의 얼굴을 하면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기에 아직 그 누구도 지리를 다 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멀리 천왕은 1백여리 능선길마다에 변화무쌍함과 아름다움을 숨겨 놓은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지켜봐 온 듯 넉넉함으로 남아 있는 산이다.

[이상 자료출처 : 함양군청]
 
 

 

 

 

 

 

 

 

 

 

 

지리산 [智異山]

높이 : 1915m
위치 : 전남 구례군

특징, 볼거리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지리산은 한국 8경의 하나이고 5대 명산 중 하나로, 웅장하고 경치가 뛰어나다. 그 범위가 3도 5개 군 15개 면에 걸쳐 있으며 4백 84㎢ (1억3천만평)로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남한 제2의 고봉 천왕봉(1,915m), 노고단(1,507m)으로 이어지는 1백리 능선에 주능선에 만도 반야봉(1,751m), 토끼봉 등 고산 준봉이 10여개나 있으며, 85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있다. 정상에서 남원, 진주, 곡성, 구례, 함양 고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주능선을 중심으로 해서 각각 남북으로 큰 강이 흘러내리고 있다. 하나는 낙동강지류인 남강의 상류로서 함양 산청을 거쳐 흐르고 또 하나는 멀리 마이산과 봉황산으로부터 흘러온 섬진강이다.

이들 강으로 흘러드는 개천인 화개천, 연곡천, 동천, 경호강, 덕천강등 10여개의 하천이 있으며 맑은 물과 아름다운 경치로 "지리산 12동천"을 이루고 있다.

청학, 화개, 덕산, 악양, 마천, 백무, 칠선동과 피아골, 밤밭골, 들돋골, 뱀사골, 연곡골의 12동천은 수없는 아름답고 검푸른 담과 소, 비폭을 간직한 채 지리산 비경의 극치를 이룬다. 이들은 또한 숱한 정담과 애환까지 안은 채 또다른 골을 이루고 있는데 73개의 골, 혹은 99개의 골이라 할 정도의 무궁무진한 골을 이루고 있다.

지리산 비경 중 10경 은 노고 운해, 피아골 단풍, 반야낙조, 벽소령 명월, 세석철쭉, 불일폭포, 연하선경, 천왕 일출, 칠선계곡, 섬진청류로 비경을 이룬다.

지리산은 사계졀 산행지로 봄이면 세석 및 바래봉의 철쭉, 화개장에서 쌍계사 까지의 터널을 이루는 벚꽃, 여름이면 싱그러운 신록, 폭포, 계곡, 가을이면 피아골 계곡 3km에 이르는 단풍과 만복대 등산길의 억새, 겨울의 설경 등 계절마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인기명산 [1위]

 

3도 5개 군에 걸쳐 있는 광활한 국립공원 1호 지리산은 산세가 수려한 명산이기도 하지만 어머니 품속처럼 푸근한 산이라 한다. 사계절 두루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한국의산하 연간 접속횟수가 28만으로 2위인 설악산 13만과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7-8월 여름휴가를 이용한 여름산행지로 가장 인기 있다. 여름의 시원하고 수려한 계곡과 산에서 2박 3일이 소요되는 지리산 종주산행이 보편화되면서 이 시기에 가장 많이 찾는다. 또한 지리산은 피아골과 뱀사골의 단풍이 아름다운 단풍명산으로 10월 중순에서 하순사이 단풍산행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신라 5악중 남악으로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5m)을 주봉으로 노고단(1,507m), 반야봉(1,751m) 등 동서로 100여리의 거대한 산악군을 이뤄 `지리산 12동천'을 형성하는 등 경관이 뛰어나고 우리나라 최대의 자연생태계 보고이며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1967년)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되었다.

 

지리산 종주코스
ㅇ화엄사-노고단-반야봉-천왕봉-대원사
ㅇ성삼재-노고단-반야봉-천왕봉-대원사, 중산리, 백무동

 

천왕봉 코스
ㅇ중산리-법계사-천왕봉-제석봉-장터목대피소-중산리(8시간 30분)
ㅇ중산리-법계사-천왕봉-제석봉-장터목대피소-백무동(8시간)
ㅇ백무동-하동바위-장터목대피소-천왕봉-백무동(7시간 30분)
ㅇ백무동-하동바위-장터목대피소-천왕봉-법계사-중산리(7시간)
ㅇ거림-세석대피소-천왕봉-중산리(9시간)

반야봉코스
ㅇ성삼재-노고단-반야봉-피아골(5 시간30분)

피아골 코스
ㅇ직전-피아골대피소-임걸령-피아골대피소-직전(6시간 30분)
ㅇ직전-피아골대피소-임걸령-뱀사골-반선(9시간)
ㅇ직전-피아골대피소-반야봉-노고단-성삼재(6시간)
ㅇ성삼재-노고단-반야봉-피아골(5 시간30분)

뱀사골 코스
ㅇ반선-뱀사골-화개재-반선(7시간 30분)

 

중산리 코스
ㅇ중산리-법계사-천왕봉-제석봉-장터목대피소-중산리(8시간 30분)
ㅇ중산리-법계사-천왕봉-제석봉-장터목대피소-백무동(8시간)

백무동 코스
ㅇ백무동-하동바위-장터목대피소-천왕봉-법계사-중산리(7시간)
ㅇ백무동-하동바위-장터목대피소-천왕봉-백무동(7시간 30분)
ㅇ백무동-한신계곡-세석대피소-장터목대피소-천왕봉-백무동(10시간 30분)

거림코스
ㅇ거림-세석대피소-장터목대피소-천왕봉-백무동(10시간)
ㅇ거림-세석대피소-장터목대피소-천왕봉-중산리(9시간)
ㅇ거림-세석대피소-한신계곡-백무동(6시간 30분)

성삼재코스
ㅇ성삼재-노고단-화엄사(4시간)
ㅇ성삼재-노고단-반야봉-피아골(6시간)
ㅇ성삼재-노고단-성삼재(2시간 30분)

화엄사 코스
ㅇ화엄사-노고단-성삼재(5시간)
ㅇ화엄사-노고단-반야봉-피아골(9시간 30분)

대원사코스
ㅇ대원사-치밭목대피소-천왕봉-장터목대피소-중산리(10시간)

 

산행길잡이

 

지리산은 그 범위가 방대하여 산행코스도 20 개 코스에 이르러 한번 산행에 지리산의 일부를 산행하게 된다. 일정과 어느 코스를 산행지로 잡느냐에 따라 산행기점이 다양하다. 대중교통은 진주, 하동, 함양, 남원, 구례로 가서 시외버스 또는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지리산 동부지역: 경남 진주, 하동, 함양 기점
ㅇ진주: 대원사, 중산리, 법계사 코스
ㅇ하동 : 청학동, 쌍계사, 화엄사 코스
ㅇ함양 : 백무동, 한신계곡, 하동바위, 삼정리, 칠선계곡 코스

지리산 서부지역: 전라 남원, 구례 기점
ㅇ남원 : 뱀사골, 백무동, 바래봉 코스
ㅇ구례 : 화엄사, 주릉 종주코스, 성삼재, 피아골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