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탐방 - 호미곶에서 장군바위까지
포항시 구룡포에 가다
대게의 계절이 다가오면 포항시 구룡포 해안선을빼 놓을 수 없다. 잘 뚫려진 대로를 벗어나 한쪽으로는 동해의 푸른 바다, 다른 한쪽으로는 한적한 해안어촌을 끼고 한참을 달리다 보면, 어느덧마음의 짐 덩어리도 수평선 넘어 훌쩍 달아나 버리고 없다.
청어나 꽁치를 해풍에 말려 겨울철이면 즐겨 먹는 과메기로 유명한 해안길이지만, 해마다 왠지그런 풍경들이 줄어든 것 같아 아쉬움이 느껴진다. 곳곳에 과메기를 만드는 대형 건조장이 생겼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바쁜 우리의 식탁에 오르려니 느긋한 동해 햇살과 해풍만으로는 역부족었던 것 같다.
여행은 구룡포 항에 도착 후 해안선을 따라 호미곶~독수리바위~장군바위까지 찾아가 본다. 일반국도 31번을 따라 이동하는 도중, 해안가의 바위에 달라붙은 해초를 제거하는 사람들과 제주도에서 왔을 것 같은 동해 해녀의 모습도 자주보였다.
신창1리 장기천이 바다로 유입되는 해안가에 바위 전경들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드디어 구룡포항에 도착!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구룡포항
호미곶 전경
대게 경매
대게 가게
구룡포 항은 전국 대게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곳 동해안 최대어항 구룡포 항
지난해 일본의 방사능 광풍으로 수산물 먹거리에 불안했던 마음을 잠시내려놓아도 좋을 대게 잡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러시아산이 담겨졌던 수족관이 국산 대게로 채워지고 있다. 11월 먼 거리 연안 어선을 시작으로 12월 근해저어망 어선이 본격 작업을 하면, 위판장은 대게를 사려는사람들로 붐빈다. 대게는 영덕 강구항이 제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대게의 본거지는 구룡포 항이다. 국내 유통되는 대게의 절반이 구룡포 항에서 경매되어 나간다. 항구로 접안한 배 창고에서 계속 플라스틱에 담긴대게가 올라오면서, 위판장으로 보내기 위해 크별로 등급선별작업을 한후, 위판장에 옮겨지면 대게를 눕혀 줄을 세워 경매를 기다린다. 대게를 사려는 사람은 위판장 경매 물건을 확인하며 경매를 기다리는데, 경매 중계인의 손에 든 종소리가 울리면 곧장 경매가 시작되고, 눈 깜짝 할 사이 경매가 마무리되면서 경매로 구입 결정된 중계인은 서둘러 물차로 직판장에옮기느라 위판장은 정신이 없다.
구룡포항을 떠나 약 12km 달리면 일출이 아름다운 해안 호미곶에 도착한다
유라시아대륙 동쪽 끝자락, 호미곶
선조 때 동서분당을 미리 예언하는가 하면, 1592년 임진왜란을 명종 말기도 예언해서 유명해진 풍수지리학자 남사고(1509~1571)의『동해산수비록(東海山水秘錄)』에 한반도를 두고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백두산이 코에 해당하고 호미곶이 있는 곳을 꼬리에 해당한다는 기록으로 인하여, 지금도 장기반도 끝자락을 호랑이 꼬리로 부르며동외곶(冬外串)·장기곶(長寅串) 즉, 오늘날의 호미곶이다. 호랑이 꼬리부분에 관해 일본은 우리나라의 정기를 막기 위해, 호랑이를 힘없고 어리석은토끼로 비유하여 불렀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일제잔재에 관한 정기회복 운동이 벌어지면서 1982년 경북도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된 후, 지역명에 따라 대보등대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2001년 장기곶으로 불리던 곳을 호미곶으로 복원하면서 호미곶 등대 또는 대보등대로 부르고 있다.
호미곶은 전국제일의 일출지로 유명하다. 하지만 호미곶에서 또 하나의 볼거리로 등대를 꼽고 싶다.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만든 등대는 인천에 이어서 두 번째로 오래된 등대로, 광무5년(1901)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조선에서 청국의 세력을 몰아내고, 러시아를 상대로 한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한국 연안으로 행해 중 호미곶 근처에서 암초를 만나 좌초되었다.
이때 전원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일본은 해운시설이 미비하다는 핑계로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1902년 3월 착공하여 1903년 12월에 준공하여오늘날 등대로 자리 잡게 되면서 국내 유일의 등대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등대는 높이 26m 팔각형으로 불빛이 약 50키로 까지 도달한다.
새천년 기념관은 호미곶 일대 해안선을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든 건물로 포항의 변천사를 다양한 방법으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호미곶을 떠나 해안길을 따라르면 대보항을 스쳐 간다. 대보 항으로 부터해안선을 따라 약 2.6km 정도 더 달리면 독수리형상을 한 바위가 있는해맞이 전망대에 도착 한다.
등대
호미곶 전경
연오랑 세오녀
연오랑 세오녀
예로부터 육당 최남선(1890~1957)이 조선 10경 중하나로 손꼽았을 정도로 일출을 자랑하는 이곳에는고려 초기 박인량(?~1096)이 쓴 설화집 수인전에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신라의 동해 바닷가에서 오손도손 행복하게 가정을 꾸리고 사는 부부였는데, 신라아달라왕 4년에 연오랑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미역을 따로 나갔다가 바위에 올라선 순간, 바위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 일본의 어느 섬으로 가게 되었다. 연오랑이 없어진 걸 뒤늦게 알게 된세오녀는 바다를 찾아가 남편을 그리워하는데, 남편은 일본의 작은 섬에 도착하자마자 보통사람이 아니라며 그곳의 왕으로 추대 되었다. 어느 날 세오녀는남편이 벗어둔 신발이 올려 진 바위를 보고 그곳에올라서자, 세오녀도 갑자기 바위에 실려 떠나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세오녀는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정작 부부가 사라진 신라에서는 해와달이 없어져 버렸고, 놀란 왕은 일관을 불러 점을 쳐보니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가 버렸다고말해 왕이 급히 사신을 보냈다. 사신은 연오랑과 세오녀를 만나 자초지경을 말한다. 이야기를 들은 부부는 하늘의 뜻이라며 돌아 갈 수 없지만, 세오녀가 생사로 가늘게 짠 비단을 내주면서 돌아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다시 해와 달의 정기를 되찾을 것이라일러준다. 사신은 비단을 들고 와 제사를 지내니 정말 해와 달이 밝아졌는데, 당시 제사를 지낸 곳이 영일현(지금의 영인만)으로, 간절곶 해맞이 광장에 두부부의 조각상을 두고 있다.
해맞이공원에는 두 개의 손 모양이 있다. 상생의 손으로 불리는 두 개의 손은 오른손이 바다에 있고, 왼손은 육지에 있으며, 각각 오른손 높이가 8.5m 이며, 왼손이 약간 낮은 5.5m로, 바다와 육지의 시선처리를 위해 높이를 제각기 하고 있다. 또한 왼손 앞에는 20세기 마지막 불씨와 호미곶에서 채화된 새천년 불씨, 남태평양 피지섬에서 갖고 온 불씨로서 영원한 불이 타고 있다.
상생의 손
대보항 주변
독수리 바위
쾌응환호 조난 기념비
대보항 주변 해안, 낙조가 아름다운 까꾸리개
쾌응환호 조난 기념비는 1907년 9월 9일 일본수산강습소 실습선쾌응환(137톤)이 동해안 구만2리 앞 바다에 좌초되면서 교관 1명과실습생 3명이 조난당하였고, 그로 인하여 수중등대가 생겨나자1926년 9월 9일 세웠으나 주민이 훼손하였다. 이후 1971년 재일교포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포항하면 청어를 해풍에 말려 먹는 과메기가 유명하다. 독수리바위가 있는 해안가에 큰 파도가 몰려오면,
청어가 떼로 해안으로 밀려나와 주민이 갈고리로 끌었다는 의미로 까구리개로 부르는데, 해안가콘크리트로 만든 착각을 불러오는 바위가 바로 독수리바위로, 경북포항시 남구 대보면 구만리 해안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최근 도로가새롭게 열리면서 스쳐가기 십상인데, 옛 국도를 이용하여야 만나기가 쉽다. 지금은 동해안의 낙조 전망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해안여행 코스로 대부분 7번국도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지만그건 아니다. 해안선을 따라가는 굵은 혈관은 31번 국도이며, 곳곳에서 실핏줄 같은 지방도와 항구로 가는 소로를 만나게 된다. 특히포항구간에서 만나는 31번 국도를 벗어나면서 시작되는 929 지방도를 따라 여행을 떠나는데, 바다풍경을 원한다면 929번 지방도 중간 중간 마을로 내려서는 해안길로 달려 볼 것을 권한다. 막히면 돌아 나와 다시 929번을 따라 이동하면서 마을길을 들락날락 하다보면, 전혀 낯선 풍경에 감탄을 하게 될 것이다.
'雲水 天下 > 등산 여행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중국지도 한글판 (0) | 2014.02.14 |
---|---|
역고드름이 자라는 땅 (0) | 2014.02.12 |
국토지리원 지도 구입 장소 (정부 지도판매 대행업체) (0) | 2014.02.07 |
차마고도(茶馬古道) (0) | 2014.02.07 |
★국내 숨은 여행지 콕콕 7★ (0) | 2014.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