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水 天下/나는 자연인이다

우리땅 영지순례 - 단석산 신선사마애불

초암 정만순 2022. 1. 24. 18:55

우리땅 영지순례 -

단석산 신선사

 

단석산은 호국불교의 성지

용화향도의 수행처요 삼한일통의 기원처

 

 

 순례 : 

2022. 1. 27 (맑음)

 

 순례로 :

오덕선원 ~ 공원지킴터 ~ 신선사 ~ 마애불상군 ~ 나동정맥능선 ~ 우중골 기도처 ~

공원지킴터 ~ 오덕선원

 

 순례인 : 

초암 독행

 

 

단석산 기운의 구할은 신선사마애불상군이 있는 바위 석굴에 뭉쳐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연으로된 ㄷ자형 수직 암굴에 두 방향으로 기역자형 길이 나있어 드나드는데 불편함이 없고 하늘쪽도 터여있어 채광에도 문제가 없어 엄숙함과 함께 밝고 명랑한 기운이 감돈다

 

 

여기에서 신리의 화랑들이 삼한일통의 일념으로 불보살과 천신께 기도를 드리며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정신을 되새기며 수양하였으니 참으로 영지가 아닐 수 없다

 

 

 단석산 

 

 

 

 

단석산은 높이 827m로, 건천읍 방내리(芳內里)와 송선리, 화천리, 산내면 내일리에 걸쳐있다.

단석산은 경주에서 가장 높은 산(827m)으로 백제에 대한 신라의 국방의 요충지였다.

신라 때 화랑들의 수련장소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김유신이 검으로 바위를 내려쳤더니 바위가 갈라져 단석산(斷石山)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단석산 정상에는 단석이 엄연히 놓여있다

정산 서쪽에 있는 신선사(神仙寺)에는 마애불상군(국보 199)이 소장되어 있으며, 단석산 일대는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에 단석산이 처음으로 나오는데,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하며, 경주 중심지의 서쪽 23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신라의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神劍)을 얻어 월생산의 석굴 속에 숨어들어가 검술을 수련하려고 칼로 큰 돌들을 베어서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斷石寺)라고 하였다."는 일화도 수록되어 있다.

단석산은 삼국통일 이전에는 동쪽 토함산, 서쪽 선도산, 남쪽 남산, 북쪽 소금강산과 함께 신라인들이 신성시해 오악(五岳) 중 중악(中岳)으로 모셔졌다.

 

『삼국사기』에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년(611년)에 김유신의  나이 17세에 고구려·백제·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쳐들어온 적을 평정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홀로 중악(中嶽)의 석굴로 들어가 몸을 깨끗이 하고는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목욕재계하고 천지신명께 적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자, 나흘째 되는 날 난승(難勝)이라는 도인이 나타나 비법서와 신검(神劍)을 주었다고 한다.

이때의 중악을 월생산 또는 단석산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석산에 대한 이와 같은 설화는 이후의 경주 지리지에 지속적으로 기록된다.

 .

이 전설의 사실 여부를 떠나 단석산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벌판의 서쪽에 우뚝 솟은 산으로서 방위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김유신을 비롯한 화랑도의 훈련장이었다고 기록돼 있기도 하다.

 

 

거대한 바위와 전망대가 유난히 많은 이 산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이야기 외에도 우리 전통 고미술사와 종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유산이 있다.

바로 정상 서쪽 아래 비탈에 자리 잡은 신선사마애불상군이다.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10개의 불상과 보살상을 접하면 마치 숨이 멎을 것 같은 감탄과 신비감에 놀라게 되는 이 신선사 마애불상군은 1300여 년 전에 조성된 신라 최초의 석굴사원이기도 하다.

국보 제199호로 지정돼 있을 만큼 누구나 인정하는 문화재이지만 의외로 모르는 이가 많다.

그리고 또 하나 아직까지 국보, 보물, 지방유형문화재 등으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그 정교함과 규모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일명 방내리마애불이 산 6부 능선의 거대한 암벽에 조성돼 있어 찾는 이의 경탄을 자아낸다.

 

 신선사 

 

 

대한불교법화종((大韓佛敎法華宗))에 소속된 사찰이다.

7세기에 활동하던 자장(慈藏)의 제자 잠주(岑珠)가 창건했으며, 김유신(金庾信:595∼673)이 이 절에서 삼국통일을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절이 들어선 단석산의 산 이름은 김유신 설화에서 유래한다.

김유신이 한 노인으로부터 신검(神劍)을 얻어 이 산의 바위굴에서 검술을 닦았는데, 시험 삼아 칼로 바위를 내리치니 바위가 갈라졌다.

이에 산 이름을 단석산이라 했고 뒤에 갈라진 틈에 절을 세워 단석사라 불렀다는 것이다.

 



1969년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신라오악(新羅五岳) 조사단이 바위에 새겨진 명문을 분석하여 석굴의 본래 이름이 신선사였음을 밝혀냈다.

현재 이 석굴은 작은 암자처럼 쓰이고, 50m쯤 아래에 본절이 들어서 있다.

본절의 건물로는 관음전과 산령각·요사채 등이 있다.

 

 

한편 석굴은 동남북 3면이 갈라진 바위로 둘러싸여 있으며, 옛날에는 지붕을 얹어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 불상군을 보호하기 위해 투명지붕을 씌어 놓았다

 

안쪽 벽에 조각된 불상과 보살상은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이라는 명칭으로 국보 제199호로 지정되었다. 불상 조성 양식으로 보아 6세기 유물로 추정된다.

불상·보살상이 8구, 인물상이 2구 있으며, 주민들은 탱바위라고 부른다. 

 

■ 신선사(神仙寺) 마애불상(磨崖佛像) ■ 

 

 

영험한 땅에 세운 절, 단아하고 엄숙한 미륵보살상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경주부(慶州府) 산천(山川) 편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이 산은 본래 월생산(月生山)으로 신라의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을 얻어 월생산 석굴 속에서 검술을 수련하며 베어 놓은 큰 돌들이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라고 하였다”

 

 

단석산 정상 부근 우징골에 있는 상인암(上人岩)이라는 바위는 동남북면에 걸쳐 ㄷ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마치 바위는 위에서 아래로 칼로 내린 친 듯 잘라져 있다.

바위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지 정말 김유신의 칼에 의해 잘렸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바위 면에 다양한 기법으로 조성된 불상들과 남쪽 바위 면에 새겨져 있는 19자씩 20행으로 이루어진 약 380자의 명문에서 각색된 것이다.

 

김유신의 이름이 명문에는 보이지 않지만, 단석산 신선사가 김유신이 몸 담았던 화랑도(花郞徒)과 관련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삼국사기]에는 15세에 화랑이 된 김유신을 사람들이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으며, 17세에 홀로 중악석굴(中嶽石堀)로 들어가 하늘에 맹세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 중악석굴을 신선사로 보기도 한다.

 

1969년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신라오악조사단(新羅五岳調査團)에 의하여 단석산의 상인암(上人巖)은 김유신(金庾信)이 삼국통일의 염원을 신명(神明)에게 기도하던 중악(中岳)의 석굴임이 밝혀졌고, 이 상인암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서 본래의 이름이 신선사(神仙寺)임이 밝혀졌다.

이 절은 자연적으로 된 석굴에 미륵삼존(彌勒三尊)을 중심으로 한 보살상(菩薩像)과 인물상(人物像) 등이 조각되어 있고, 석굴 안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불상의 양식으로 보아 그 조성연대는 삼국시대 말기인 6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국보 제199호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상인암의 마애불상군은 단석산정 바로 아래 서남쪽 몇 개의 거대한 암벽에 위치한다.

남북 삼면에 병풍처럼 ㄷ자형의 석실을 이룬 이 석굴은 암벽 삼면에 10구의 불보살을 조각한 천연의 수도장으로서, 이는 고대 석굴사원(石窟寺院)의 중요한 일면을 오늘에 보여주고 있다.

 

▲ 단석산 신선사 북쪽 바위면 마애불상의 모습

 

현재 하늘을 향하여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바위 위에는, 목조의 지붕을 올렸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원래 커다란 불전(佛殿)이었음을 알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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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애불상 북쪽 바위면 불입상들

 

삼국사기에 보이는 용화향도의 용화는 용화수(龍華樹) 나무를 말한다.

석가모니 붓다의 열반 후, 56억 7천만년 뒤에 도솔천[兜率天]의 미륵보살은 여덟 번째로 인간세상에 태어나 깨달음을 이루어 미륵불이 된다.

 

▲ 미륵불

 

그리고 중생들을 위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세 번에 걸쳐 설법을 한다.

그래서 용화향도는 미륵불을 믿는 불교 신도[향도]로 볼 수 있다.

 

 

향도가 무엇인가?

불상 앞에 향을 피우고 신봉하는 무리를 말하지 않는가?

실제로 신선사 북쪽 바위 면에는 병 향로를 들고 예불하러가는 두 명의 신라 사람이 조각되어 있다.

이들이 바로 용화향도다. 

 

▲ 병 향로를 들고 예불하러가는 두 명의 신라 사람의 조각. 이들이 바로 용화향도다.

 

한편 남쪽 바위 면의 명문에는 미륵석상 1존과 보살상 2존을 조성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들 미륵상은 15세에 용화향도가 된 김유신이 믿고 따랐던 불상이다.

재미있는 것은 [삼국유사]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彌勒仙花 未尸郞 眞慈師)’에 화랑이 미륵의 화신이며, 신선사의 “신선(神仙)”을 원화[原花, 즉 미륵선화(彌勒仙花)]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석산 신선사는 미륵불을 모시는 미륵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명문의 내용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북쪽 바위 면에는 7미터의 불입상이 조각되어 있고, 동쪽 바위 면에는 약 3미터의 보살입상이, 남쪽 바위 면에는 약 2미터의 보살입상이 새겨져 있다.

 

사실 이들 보살상에서는 보살상의 일반적인 특징인 화려한 보관이나 목걸이, 팔찌, 영락 장식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들 보살상을 불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북쪽 바위 면의 불상에 보이는 육계(肉髻)가 없다는 점에서 보살상으로 볼 수 있다.

마모가 심하여 모호하지만, 북쪽 바위 면의 반가사유상이나 통견식의 보살입상에 보이는 보관과 같은 형태였을 것이다.

북쪽 바위의 또 다른 면에는 편단우견식의 불입상 2존과 통견식의 보살입상 1존, 반가사유상 등이 새겨져 있다.

얼핏 보면, 모두 불상 같지만, 통견식 보살상의 보관은 반가사유상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7세기 전반 보살상의 신라식 표현법은 아니었을까?

 

한편 편단우견식 불입상은 경주의 황룡사(黃龍寺) 절터와 영주의 숙수사(宿水寺) 절터[현재 소수서원 자리]에서 발견된 금동약사불입상과 비슷하다.

 

▲ 북면의 반가사유상

 

▲ 남면의 불입상

 

 

● 구간별 대표 풍광

 

◆ 오덕선원

 

 

◆ 오덕선원 ~ 신선사

 

 

◆ 신선사마애불상군 ~ 단석산

 

 

◆ 단석산

 

 

◆ 단석산 ~ 우중공 ~오덕선원

 

▼ 연리지

 

 

◆ 사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