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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서당 화재 - 고산서당과 보호수

초암 정만순 2021. 12. 23. 13:29

고산서당 (孤山書堂) 과 보호수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 15호인 대구 수성구 성동 고산서당이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불로 피해를 입었다.

2021. 12. 20일 대구소방안전본부와 대구 수성소방서에 따르면 이날 오전 3시57분쯤 고산서당 내 고택 건물 중 가장 큰 본당 건물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소방당국은 차량 20대, 인력 68명 등을 투입해 29분동안 진화작업을 벌여 불을 껐다.

 

고산서당은 퇴계 이황 선생과 우복 정경세 선생이 강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건물은 수성구에서는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서당(원) 건축물이며, 지난해인 2020년 건물 복원사업이 완료됐다

 

<메일신문 사설>

 

퇴계 이황 선생이 머무르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고산서당이 지난 20일 새벽 화재로 잿더미가 됐다.

대구시 지정 문화재 제15호이자 수성구 유일의 문화재 지정 건축물이 허망하게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현장에는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아 경찰과 소방 당국이 화재 원인을 규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지자체의 관리가 이토록 허술했다니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고산서당은 1573년 지어진 이후 퇴계 이황·우복 정경세 선생이 대구 유생을 상대로 강론을 펴던 유서 깊은 공간이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으나 1879년 제자리에 복원됐고 1984년 대구시 지정 문화재로 등록됐다.

그나마 퇴계의 위패는 별도로 사당에 보관돼 이번 화마(火魔)를 피했으나 퇴계가 문구를 정해 줬다는 문액(門額)은 불타 없어졌다.

 

고산서당은 행인의 화재 신고로 소방차가 출동했지만 30분도 채 안 돼 완전 소실되고 말았다.

고산서당은 화재 및 방화 범죄로부터 세심한 보호를 받아야 할 문화유적인데 서당은 물론이고 주변에 그 흔한 CCTV 하나조차 여지껏 설치돼 있지 않은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게다가 고산서당은 소방법상 일반 대상물로 지정돼 있어 소화기만 배치돼 있을 뿐 정기 소방점검 대상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 많다고 할 수도 없는 시 지정 문화재가 이토록 허망하게 사라진 것과 관련해서 대구시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수성구청 역시 고산서당 옆에 전통문화교육관을 건립하고 한옥촌을 조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는데, 혈세 들여 사업 벌이는 데 들어가는 관심만큼 문화재 지키기에도 관심을 뒀느냐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숭례문·내장사 대웅전 소실 사건에서 보았듯 목조 문화재는 한번 불이 나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는다.

대구시와 각 구·군청은 지금이라도 육신사, 도동서원과 고찰(古刹) 등 대구에 산재한 목조 문화재에 대한 긴급 화재 예방 점검에 나서고 재발 방지책도 마련하기를 주문한다

 

 

<초암 소회>

 

참으로 비통한 마음 금할 수 없다

고산서당은 초암이 매년 찿아가 역사의 향기를 느끼고 마음의 고향을 찿은 느낌이 들어 흐뭇한 마음으로 찿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이렇게 참혹하게 역사의 현장이 화마로 인해 사라져 버렸으니 그 어디에서 오롯한 분위기를 맛볼수 있겠는가

설령 복원이 된다해도 고졸한 멋은 이미 느낄 수 없을진데 참으로 슬픈 마음으로 애통할 뿐이다

그리고 본당 뒤편에 우뚝 서있는 보호수 두그루도 온전한지 걱정이다

 

이에 작년 고산서당을 찿아 찍은 사진과 글을 그대로 복사하여 마음에 깊이 새겨진 기념으로 삼고자 한다

 

 

 

 

@ 탐방일 : 2020. 08. 05

 

고산서당

 

소재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 산 22

문화재자료 제15호

 

 

 

1984년 7월 25일 대구광역시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고산서당은 앞쪽으로 남천(南川)과 고산 들녘이 바라다 보이는 성동 서원골 야산자락에 있으며, 정확한 건축연도는 알 수 없으나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이곳에서 강학한 바 있으므로 1500년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뒤편에 퇴계와 우복 선생의 강학(講學)유허비(遺墟碑)와 아름드리 정자나 무가 있어 고산서당의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

 

고산서당은 방형(方形) 토장(土檣)으로 둘려져 있고 건물구조는 납도리 위에 3량(樑)가구로 결조된 간결한 구조로 대량(大樑)은 만곡(灣曲)이 있는 목재와 막서까래를 사용하여 자연스러운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건물의 구조는 3량가(三樑架)로, 막돌 덤벙주춧돌 위 정면 가운데 1주(柱)만 두리기둥으로 하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으로 세운 간결한 민도리집 형식이다.

작은 규모의 소박한 교육공간으로 재건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조선 명종 때에 지방 유생들과 윤희렴(尹希廉)이 재실을 짓고 이황에게 재호(齋號)를 청하여 재(齋)는 고산(孤山)으로, 문(門)은 구도(求道)라고 한 친필을 받았다.

당시 구도라고 쓴 편액은 지금도 남아 있다.

사당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5년(선조 38)에 중건하였다.

1607년(선조 40) 정경세가 대구부사로 있을 때 강회를 열었는데, 이때 당(唐)의 도독(都督) 이성삼(李省三)도 수강하였다고 한다.

1690년(숙종 16)에 서원을 창건하여 고산(孤山)이라는 원호(院號)를 사용하고, 이황과 정경세를 배향하였다. 1734년(영조 10)에 강당과 동재 및 서재를 건축하였다.

1789년(정조 13)에는 문루를 세우고 연안인(延安人) 김재구(金載久)가 기문(記文)을 택하였다.

1822년(순조 22)에는 위패를 잃어버려 개조하여 봉안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된 이후 1879년(고종 16)에 지방 유림들을 중심으로 강학계를 조직하여 옛터에 강당만 다시 중건하여 고산서당이라 편액하였다.

1964년에 중수하였다.

 

과거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왔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었다.

지금은 정일이 없이 1년에 한 차례 지방유림들이 모여 선현을 추모하기 위한 회합을 가지고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1만1000여평, 대지 300평, 임야 7,800평 등이 있다.

 

2020년 5월 준공된 사당에는 퇴계 이황, 우복 정경세 두 분과 함께 유림회원의 천거로 달성십현의 한 분인 동고 서사선 선생을 새로이 추대해 총 세 분의 성현의 위패를 모시게 됐다. 

 

 

복원된 사당

 

고산서당 사당 복원공사는 2015년 12월 고산서당유림회와 수성구청의 양해각서 체결을 시작으로, 2019년 市 문화재위원회의 조건부 승인을 받았다.

2019년 9월 착공해 2020년 5월 준공했고, 새롭게 복원된 사당(묘우)명을 숭현사(崇賢祠)로, 삼문명을 경덕문(慶德門)으로 명명했다.

 

2020녕 5월 고산서당 사당(묘우) 복원이 완료됨에 따라 고산서당유림회 회의를 거쳐, 기존에 모시던 퇴계 이황, 우복 정경세 두 분과 함께 유림회원의 천거로 달성십현의 한 분인 동고 서사선 선생을 새로이 추대해 총 세 분의 성현의 위패를 모시게 됐다.

 

 

 

 

 

보호수 (이황나무, 정경세나무)

 

 

 

이황나무(느티나무)

 

 

정경세나무(느티나무)

 

 

# 동영상

 

 

 

$ 사진첩

 

고산 아래자락

 

고산서당 전경

 

 

정문

 

서당 복원 공덕추모비

 

서당 좌측면

충의추모비

 

고산서당 본당

 

 

구도 편액

 

고산서당 편액

 

우측문

 

 

 

 

서당 뒤편 느티나무 사이로 보이는 복원된 사당

 

 보호수  느티나무

왼쪽이 이황나무  오른쪽이  정경세나무

서당 후면

2020.년 복원된 사당 정문 경덕문

 

사당에서 내려다본 서당

 

사당인 숭현사

 

고산 등산로 입구

서당앞 석단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