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水 天下/琵瑟山河

가을 산행 - 앞산

초암 정만순 2021. 10. 8. 23:28

 

가을 산행 - 앞산

 

 

 

■ 산행일 : 2021. 10. 07(목) 맑음

■ 산행자 : 초암 단독행

 

 

■ 산행 경로 : 

안지랑골 입구 - 골안골 - 약수터 - 작은무당골 - 공룡능선(코끼리바위) - 앞산 주능선 -

앞산 정상 - 마천대능선 - 큰골주차장

 

 

■ 구간별 대표 풍광

 

● 골안골

 

 

약수터 

 

 

●  작은무당골 

 

 

 

● 공룡능선(코끼리바위)

 

 

 

● 앞산 주능선 

 

 

 

●  앞산 정상 

 

 

 

● 마천대능선

 

 

 

 

◆ 앞산의 지명 유래

 

 

고산골 지명유래

 

고산골의 유래는 신라 말엽 왕실에는 임금의 대를 이을 왕자가 없어 걱정이 컸다고 한다.

애가 탄 왕은 각지의 용한 의원을 모두 부르고 좋은 약을 다 썼지만 왕비의 몸에는 태기가 없었다.

어느 날 밤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서쪽으로 수 백리 되는 곳에 산 좋고 물 맑은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짓고 정성을 다하면 소원을 이룬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왕은 곧 이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고산사라 했고 왕비는 이 절에 와서 백일기도를 드렸는데 곧 태기가 있어 옥동자를 낳고 이듬해 또 왕자를 낳았다.

임금은 대단히 기뻐하여 전국의 죄수를 석방하고 큰 잔치를 여는 한편 고산사에 3층 석탑을 기념으로 세웠다.

그 뒤 고산사에는 자식 없는 부녀자들의 백일기도 행렬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후 이곳을 고산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산사는 임란 때 왜병에 의해 소실되었는데 당시 왜병은 석탑 속에 있었던 보물까지 훔치려 하자 갑자기 벼락이 떨어져 왜병은 즉사하고 상층 일부도 부서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61년 부근에 법장사를 중건하게 되었고 석탑의 잔해를 모아 복원하였으며 당시 고산사가 소재 하였다고 하여 고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삼정골, 용두골 지명유래

 

삼정골은 삼정골 혹은 ‘삼정곡’이라고도 한다.

이곳에 대한 유래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옛날 이곳에 우물이 세 개 있었다 하여 석삼(三), 우물정(井), 삼정곡(三井谷)으로 불렀다 한다.

후삼국시대 왕건과 견훤이 군사를 일으켜 전쟁 중 왕건이 일시 패배하여 현재의 은적사에 몸을 숨겼다가 밖으로 나와 앞산에서 내려오니 우물 세 개가 있었다는 데서 불리어진 것이다.

 

용두골은 수성구 파동 산112번지 일대의 자연부락이다.

현재 용두산 아래의 마을로서 용두산은 용의 머리 형상을 닮았다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라 한다.

 

큰골, 앞산, 성불산의 지명유래

 

큰골은 앞산공원지역 충혼탑 옆을 가리키는데 ‘가는골’에 대응되는 이름으로서 큰골 혹은 ‘큰골짜기’란 뜻이다.

앞산을 안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대구 사람들은 흔히 비슬산, 대덕산, 최정산 등을 앞산으로 부르고 있으나 사실 옛 이름은 성불산 이었다.

 

성불산은 대구시의 남쪽 십리에 있는 관기(官機) 안산으로 비슬산에서 비롯되었다.

관기 안산이란 관청 터의 맞은편에 있는 산을 말하고 관청이란 지금의 중앙공원 자리에 있던 대구 감영을 말한다.

따라서 앞산이라 부른 이유는 감영 앞 쪽에 있는 산이기 때문에 붙여졌거나 안산이라는 말이 앞산으로 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일설에 옛날에는 남쪽을 ‘앞’이라고 했다. 앞산이란 곧 남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남산이라고 했으며, 앞산아래의 마을이란 뜻이다.

 

매자골, 골안골의 지명유래

 

매자골은 매자골의 명칭 유래는 아이들이 죽으면 그곳에 묻었다는 데서 나왔다.

죽은 아이를 매장한 데서 ‘매장골’ 곧 발음편이현상에 의해서 ‘매자골’이라는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골안골은 지명 변경전의 무당골(해방후 무당들이 많이 모여들어서)이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가느다란 골짜기란 뜻으로 ‘세골’ 혹은 ‘가는골’ 이라고 부른다.

 

강당골의 지명유래

 

강당골은 지금의 남구 봉덕 3동 미리내 아파트 남쪽 도로에서 효명초등학교 정문을 지나 아스팔트로 포장된 곳으로 지금은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나 미리내 아파트와 효명초등학교를 짓기 전에는 계곡의 윤곽이 완전히 드러나 지금의 효명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소나무 부근에서 맞은편 산과 연결시켜 저수지 비슷하게 만들어 그 아래쪽에 있는 토지에 관수를 시켰으며 앞산의 푸른 숲과 골짜기의 맑은 물의 풍치를 살려 제방 주위에 ㄴ자 모양의 누각이 있었고 이 누각을 관리하는 별동의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부터 약 60년 전부터는 이 별동의 건물을 강당이라 불렀고 명절에는 윷놀이 등 민속놀이의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평시에는 노인들과 휴식처로 사용되었다.

이 계곡의 상하류에 있는 누각과 별동의 건물의 명칭을 본 따 이 계곡을 강당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달비골,임휴사,대덕산의 지명유래

 

달비골은 왜 ‘달비골’이라 불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달’이란 말은 ‘하늘의 달’이란 뜻과 함께 ‘산’이란 말이고 ‘비’는 ‘바위’란 뜻이니 이를 합치면 ‘산바위’ 혹은 ‘달 같이 생긴 바위’란 말이 된다.

이 곳을 둘러싼 주변 지역의 지명 가운데 ‘월배(月背)’란 지명과 ‘월암(月岩)’이란 지명도 따지고 보면 모두 ‘달비’란 말의 이두식 표현이다.

이 지역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달비골’과 관련된 전설은 고려 태조 왕건때까지 올라간다.

후백제 견훤과의 팔공산 동수대전에서 대패한 왕건이 이곳 저곳을 거쳐 현재의 대덕산 임휴사 자리까지 와 잠시 쉬고 있을 때, 앞으로는 낙동강을 끼고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고 뒤로는 대덕산이 위치해 있었는데, 당시 마침 보름 쯤이었던지 크고 둥근 달이 떠올라 앞을 바라보는 자신의 등뒤를 비추고 고로 등 뒤에서 달이 비추는 골짜기라 하여 ‘달배(月背)골’이라 칭하였는데, 경상도식 호칭이 가미되어 ‘달비골’이 되었다는 설이다.

또 다른 설은 이 계곡의 골이 너무 깊어 달이 뜨면 달빛이 계곡에 비춰진다해서 ‘달비골’이라 불렀으며, 그것어 ‘달배[月背]골’로 변하고 이것이 다시 ‘월배’로 변하여 현재의 ‘월배’란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

임휴사는 달서구 상인동에 소재하고 있고, 대구 시내 대개의 사적이 그러하듯 역시 고려 태조 왕건에 대한 이야기가 얽혀 이는 사찰이다. 과거 고려가 건국될 무렵, 태조 왕건이 팔공산에서 후백제의 견훤과 맞서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패하게 되자 황급히 피신하게 되었는데, 이 곳에 이르러 한숨 돌리고 쉬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임휴사’라는 이 명칭은 이와 같은 왕건의 고사에서 유래한 사찰명이라 전해진다.

 

대덕산은 상인동과 송현동 경계에 있는 산이다.

산의 모양이 달처럼 생겨서 덕기가 있다 하여 ‘대덕산’이라 한다.

‘달비’, ‘월배산’이라고도 한다.

 

안지랑골,안일사,은적사

 

안지랭이를 안지랑이라고도 한다.

현재 위치는 대명 1동 복개도로에서 바로 올라간 곳이며 원래는 왕지렁이(지렁이 아들 견훤)를 피해 왕건이 안전하게 피신하여 돌아갔다 하여 나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후삼국 말엽에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앞산 동북쪽으로 뻗어 내린 골짜기에서 편안하게, 안일하게 지내다가 돌아갔다 하여 안지랑이로 불리어지면서 지금의 앞산 북동쪽 골짜기를 안지랑골 혹은 안지랭이로 명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위치는 앞산공원을 기점으로 그 앞의 안지랑 네거리를 포함한 부근을 말하는데 예전에 앞산공원 앞에 물이 너무 맑고 깨끗하여 병에 효험이 있다고 소문이 나자 여러 피부병 환자와 앉은뱅이가 그 곳에 와서 몸을 씻고 마시고 했더니 병도 낫고 앉은뱅이도 일어섰다고 하여 안지랑(랭)이라 불렀다고 한다.

산중턱의 안일사 역시 안지랑골에 있다고 붙여진 절의 이름이라고도 한다.

 

은적사는 앞산공원내 큰골에 위치하고 있다.

안일사는 은적사와 함께 유서가 깊고 옛 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아 들었다 한다.

이 두 절은 고려 태조 왕건과 연관이 있다.

신라 말 견훤이 신라를 침범했을 때, 나라가 위태롭게 된 신라는 왕건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이에 왕건은 신라를 돕고자 군사를 이끌고 적과 맞섰으나 대패하고 은적사에 몸을 숨겼다.

견훤의 추적을 피해 왕건은 당시 안일사까지 피신하였다. 안일사 뒤에 있는 큰 굴에 피신하기도 하였고 왕이 머물렀다 해서 왕굴이라 부르며, 그와 함께 조금 아래에 장군들이 머물렀다 하여 장군굴이라 하고, 그 밑에 물을 마신 샘을 장군수라고 불렀다.

그 뒤 왕위에 오른 왕건은 처음 몸을 숨겼던 곳에 절을 세우게 하고 절의 이름을 은적사라 하였다.

 

참고문헌 : 대구의 향기, 대구의 지명, 한국의 구비문학 등 다수

 

 

 

■ 사진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