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水 天下/지리산 마을

묘향산(妙香山)

초암 정만순 2021. 8. 5. 14:24

묘향산

 

 

 

높이 1,909m. 묘향산맥의 주봉을 이루며 예로부터 동금강(東金剛)·남지리(南智異)·서구월(西九月)·북묘향(北妙香)이라 하여 우리 나라 4대 명산의 하나로 꼽혔다.

또한, ‘수이장(秀而壯)’이라 하여 산이 빼어나게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한 모습을 지닌 명산으로 알려졌다.

 

일명 태백산(太白山 또는 太佰山) 혹은 향산(香山)이라고도 한다.

묘향(妙香)은 불교용어로 기향(奇香)을 말하는데, 이것은 《증일아함경 增一阿含經》에 나오는 말이다.

묘향에는 다문향(多聞香)·계향(戒香)·시향(施香) 3종이 있으며, 이것은 역풍·순풍이 불 때 반대 방향에도 냄새를 풍기는 수묘(殊妙)한 향기를 말한다.

 

이 산에는 향목·동청(冬靑) 등 향기로운 나무가 많아 고려시대 이전부터 묘향산이라 지칭하였다.

태백산에서 ‘백(佰·白)’자의 유래는 광명(光明)·양명(陽明)을 뜻하는 ‘붉’자에서 나왔으며, 이 산은 백두산의 장백산맥 줄기가 남으로 낭림산맥으로 내려와 서남쪽으로 달리는 묘향산맥의 주봉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우리 조상의 신앙적인 대상으로 숭배되었다.

 

여영난 작 '묘향산 폭포들'

 

역사와 문화유적

 

 

선사시대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기 古記》에 옛날 환인(桓因)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 환웅(桓雄)이 인간 세상에 뜻을 둔 것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인간 세상에 내려가 다스리게 하니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神壇樹) 아래 내려왔다고 하였는바, 일연(一然)은 이때의 태백산을 묘향산으로 비정하였다.

이로 볼 때 늦어도 고려 중기 이후 묘향산이 단군 신앙과 결부되어 우리 민족의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행인국(荇人國)이 태백산의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바, 고전(古典)에는 이 태백산이 묘향산으로 추정되어 왔다.

 

읍지(邑誌)에 의하면 신라 시조인 혁거세와 같은 시대에 건국되었으며 서기전 18년 고구려동명왕이 장수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를 보내어 행인국을 치자 왕은 패하여 석굴에 피하였다가 잡혀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그 석굴을 국진굴(國盡窟)이라 하며, 굴은 보현사 동쪽 4리에 있었다 한다.

1012년(현종 3)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개경을 침입하였을 때, 강감찬(姜邯贊)·강민첨(姜民瞻)이 배후인 영변에서 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12세기말 농민반란이 빈발하던 시기에 조위총(趙位寵)의 잔당으로 불리는 농민들이 1177년 9월 묘향산에 웅거하여 1년 이상 싸웠다.

1216년(고종 3) 거란의 금산(金山)·금시(金始) 두 왕자가 장수 아아(鵝兒)와 걸노(乞奴)를 보내어 수만의 병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여 들어오자 김취려(金就礪)가 이끈 고려 군사들은 거란병을 추격하여 묘향산까지 진격한 바 있으며, 이때 거란병들이 보현사를 불태우자 관군은 그들을 참획(斬獲 : 잘라 죽이거나 생으로 잡는 것)하였으며 묘향산 서쪽에 있는 남강(南江)에서 크게 무찔렀다.

 

조선 시대의 묘향산에 대한 역사에서 가장 저명한 것은 휴정(休靜)과 관련하여 조선 승병의 근거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1592년(선조 25) 왜적이 침입하자 절에 있던 73세의 고령인 휴정은 전국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승(義僧)이 일어나도록 독려하였다.

휴정은 유정(惟政)을 중심으로 한 금강산의 의승과 처영(處英)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의 의승이 일어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묘향산을 중심으로 의승을 모아 평양전투에 직접 참가하기도 하였다.

또한 선조로부터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의 승직이 주어졌으나, 제자인 유정에게 물려주고 다시 묘향산에 돌아와 입적하였다.

다비(茶毘) 때 나온 그의 사리는 보현사와 안심사 그리고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등지에 모셔졌다.

 

묘향산은 그 산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찰을 가졌던 것으로 유명하다.

묘향산에는 360여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화생(化生)하였다는 단군굴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의승을 일으켰던 휴정과 유정의 원당(院堂)이 있으며, 이 산의 동남쪽 영변군에는 보현사·윤필암(潤筆庵)·안심사(安心寺)·금강굴(金剛窟) 등이, 북쪽인 희천군에는 원명사(圓明寺)·광제사(廣濟寺) 등이 있는데 이들은 고려 시대부터 있었던 대표적인 사찰이다.

 

보현사는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사비(寺碑)에 의하면 1042년(정종 8) 화엄종의 승려 탐밀(探密)과 굉확(宏廓)에 의하여 절이 창건되었다. 언전(諺傳)에는 행인국이 도읍한 유지라 한다.

이곳에 옛날 보현보살이 머물렀다는 설화에 따라 보현사라 하였다 한다.

그 규모는 고려 말에는 240여 칸에 달하였으며, 1761년(영조 37) 실화로 절이 모두 불타버리자 남파(南坡)·향악(香岳) 두 대사가 다시 중창하였다.

이곳에는 석가여래상을 비롯하여 양대보살상·16보살상이 있어서, 보현사에는 극락전과 함께 나한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그 밖에 석가여래사리부도비(釋迦如來舍利浮屠碑)가 있어 사리 봉안의 내력을 적고 있으며, 원준(圓俊)의 부도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편양대사비(鞭羊大師碑)·풍담대사비(楓潭大師碑)·영암대사부도비(靈巖大師浮屠碑)·월저대사비(月渚大師碑) 등이 있어 보현사에서 배출된 승려들의 행적과 업적을 적고 있다.

또한, 보현사는 휴정이 입적한 곳으로도 유명하며, 그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

건물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정면 9칸, 서측면 5칸, 동측면 4칸의 관음전, 정면 5칸, 측면 2, 3칸의 축성전 및 천왕문, 만세루 등이 있다.

보현사는 6·25사변 당시 소실되었으나 근년에 복구된 것으로 전해진다.

대웅전 앞에는 높이 8.58m의 8각 13층석탑이 서 있으며, 연꽃무늬 등을 아로새겼다.

이 탑은 휴정이 보현사에 주석하던 당시인 1573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소장 유물로는 1251년(고종 38)에 완성된 제3차 팔만대장경 판본의 일부가 전하고 있다.

묘향산보현사비는 보현사 내에 있으며 보현사의 사적을 적어 놓았다.

사적에 대한 기록으로는 보현사비의 비문이 《조선금석총람》에 수록되어 있다.

보현사사적비는 1141년(인종 19)에 건립된 것으로 비신은 높이 2m, 너비 1.1m, 자경은 2.7㎝, 제액(題額)의 자경은 10.6㎝로 되어 있으며, 서체는 행서이다.

비수는 없고 4각형의 받침돌 위에 세워졌다.

비문은 김부식이 찬하였고, 머리글자의 전서(篆書)는 인종이 친히 쓴 것이며, 글씨는 문공유(文公裕)가 썼다.

그 뒷면에는 비가 세워질 때까지의 12명의 역대 주지와 역사에 참여한 승려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보현사석탑은 건립 연대가 1044년(정종 10)으로 추정되며, 9층석탑으로 높이는 6.3m이다.

제2층 탑신에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자경은 3㎝로 해서체이다.

이 명문에는 “고려 황제폐하의 덕은 하늘과 땅과 같고 밝기는 해와 달과 같아서 백성이 불길처럼 번성하고 있다.”고 쓰여 있다.

 

보현사의 서쪽에 있는 안심사는 사원 건립의 역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고려 시대에 이미 건립되어 있었으며 탐밀이 처음 와서 창건하였다고 한다.

인도의 승려 지공(指空)과 그 제자인 고려 말 고승으로 1365년(공민왕 14) 왕사(王師)가 된 나옹(懶翁)이 이 사찰에 머물렀던 인연으로 두 승려의 문도인 각지(覺持)와 각오(覺悟)에 의하여 그들의 사리부도가 세워졌다.

이 부도의 건립 과정에 대하여는, 이색(李穡)이 비문을 쓰고 1384년(우왕 10)에 세워진, 묘향산안심사석종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비석은 높이 2.5m, 너비 60㎝이며, 뒷면에는 나옹의 제자 명단과 당시 안심사에 보시한 신자 명단이 열기되어 있는바, 이에는 이성계(李成桂)·조민수(曺敏修)·임견미(林堅味) 등 고관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안심사는 우왕이 세자의 복을 빌기 위하여 발원한 사찰이다.

고려 말기의 불교 신앙 현상을 살피는 데 있어 이 비석문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고려 말부터 조선 말 사이에 이루어진 44개의 부도가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부도 사이에는 16개의 비석도 있다.

상원암은 1580년에 재건된 것으로 전하며 묘향산 중에서도 가장 경관이 빼어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 2익공 팔작지붕의 본전과 칠성각이 있다.

상원암에는 조선 시대의 뛰어난 건축술을 보여주는 길이 12m의 액방(額枋)이 건물 전면을 가로지르고 있다. 또, 현판의 글씨는 김정희(金正喜)의 친필로 추정된다.

윤필암은 이색이 지은 〈향산윤필암기 香山潤筆庵記〉에 의하면 고려 말에 나옹의 사리를 모시기 위하여 나옹의 제자 승지(勝智)와 각청(覺淸)이 세운 절이다. 절의 규모는 크지 않았던 듯하다.

《동국여지승람》의 불우조(佛宇條)에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후 이 사찰은 확장된 것으로 생각된다. 단군굴은 묘향산 향로봉의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동굴로 높이 4m, 너비 16m, 길이 12m이다. 이곳에서 곰이 사람으로 변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환웅이 이들에게 신령한 쑥 한줌과 마늘 스무 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고 하였다. 범은 이것을 참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으나, 곰은 이를 참아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웅녀는 혼인해주는 사람이 없어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배게 해달라고 축원하였더니, 환웅이 잠시 변하여 혼인을 하여 아이를 낳으니 이가 곧 단군이라 한다.

단군굴은 《삼국유사》의 단군 탄생처와 관련되어 단군 숭배지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단군이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는 단군대와 과녁으로 쓰였다는 천주대가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사고(全州史庫)에 소장되었던 역대 실록은 일단 정읍 내장산(內藏山) 용굴암(龍窟庵)으로 옮겨졌다가 더욱 험준한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겨졌다. 그 뒤 다시 정읍현을 거쳐 왕의 행재소인 해주로 옮겨졌다. 그러나 실록의 안전문제가 대두되자 1597년(선조 30) 멀리 묘향산의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610년 영변객사로 옮겼으며, 1603년 강화도로 옮겨 이 전주사고본을 재인쇄하여 새로이 5본(本)의 실록을 만들었다. 1605년 새로운 소장처의 하나로 묘향산이 선정되었으며, 1606년 신인본(新印本)을 두어 사고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뒤 묘향산사고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시 실록의 안전문제로 무주 적상산(赤裳山)으로 옮기자는 의논이 일어났으며, 후금(後金)의 위협이 가중되자 1633년 적상산성 내 사고를 마련하고 실록을 옮겨 위난을 피하였다.

 

 

문학예술에 나타난 모습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묘향산의 면모는 고대 신화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묘향산은 일명 태백산이라고도 하는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태백산을 묘향산이라고 부른다(卽太伯今妙香山).”고 주석해 놓은 데서 확인되며, 《연려실기술》 별집 권16 지리전고(地理典故)에도 같은 내용이 전한다.

이 묘향산은 단군신화가 펼쳐지는 가장 중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신비스러운 존재로 일컬어져왔다.

곧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 천제인 환인의 허락을 받아 인간 세상을 다스리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묘향산의 정상에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산에 있는 신단수 아래서 신시(神市)를 열어 정사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우리의 민족적 기원으로 해석되고 있기도 하다.

고대 신화시대에 있어서의 산은 일반적으로 신이 그 정상에 내려와 거기에 깃들여 사는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신화 속에 등장하는 산은 대부분 이러한 의미를 지녔다.

이와 같은 성격의 산들을 일컬어 명산[神山]으로 칭하였는데, 이 명산으로 불린 산은 예사의 산들과는 다른 독특한 모습과 주위의 환경들이 있었다.

예컨대 그 정상에 우뚝 솟아오른 바위가 있어야 하고, 또 정상 주위에 널찍한 바위 내지 평지·동굴·옹달샘 등이 있어야 하였다.

이러한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음으로 해서 그 산은 영험시되고 외경(畏敬)의 대상이 되었다.

묘향산도 이 명산들 가운데 하나였다.

신화 세계에 있어서는 신격과 인간,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우뚝이 치솟은 산봉우리, 특히 그 정상이 교류장소로 생각되었는데, 환웅이 묘향산 정상에 내렸다는 것도 이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묘향산은 말하자면 신산으로서 신성, 영험시되던 신앙적 대상물로서의 상징성을 지녔다 하겠다.

요컨대, 고대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묘향산은 신화 특유의 사고 방식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성격을 띠고 있다.

신화적 사유의 대상물이었던 묘향산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그 신화적 사유방식에 변화가 오고 합리적 사유방식이 팽배해짐에 따라 보다 현실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묘향산은 특히 승려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문헌 기록들을 통하여 전해오는데, 다분히 민담적인 차원에서의 형태로도 널리 유포되었던 것 같다.

그 몇 예를 들어보면, 먼저 《동문선》 권64에 있는 김부식의 〈혜음사신창기 惠陰寺新創記〉에는 절을 짓게 된 내력 가운데, 고려 예종 때 호랑이의 피해가 심한 어떤 교통 요지에 그 호랑이의 피해를 없애고 원활한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절을 세우게 되었는바, 그 부역을 맡을 이들로서 자진 동원된 이들이 묘향산 승려들이었다는 것이다.

민간의 부역을 없애고 선행을 한다는 뜻에서 규합된 이들은 처음에 그 일을 제안한 승려가 일부러 묘향산을 찾아가, “옛날 스님들은 곤란한 처지에 빠진 것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하지 않는 희생정신을 발휘하였는데, 누가 나를 따라 저곳에 가서 일을 해보겠는가?” 하고 말하자 모두들 쾌히 응하여 절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볼 때 묘향산이 특히 나라의 곤란함을 보고 희생정신을 발휘한 승려들의 수도처로 표상되었음을 알 수 있겠거니와,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 권24의 기(記)에도 “비구인 학주(學珠)는 참으로 거짓 없이 성실한 자이다. 그는 일찍이 묘향산 보현사에 거하여 초의(草衣)를 입고 한가히 앉아 홍진을 멀리한 지 오래였다.

 

보현사

묘향산에 위치한 사찰로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40호다.

968년(고려 광종 19)에 창건되었고, 우리나라 5대 사찰의 하나로 꼽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보현사는 세속을 떠나서 진리를 탐구하는 집결장소이다.”라고 한 데서 보듯,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의 은거지로 이름났던 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이끌고 왜적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던 휴정과 유정이 바로 이 묘향산에서 수도하던 승려였음을 상기시킨다.

《대동야승》 권36 재조번방지 권2에는 특히 서산대사의 의거에 대한 한시가 전한다.

그 한 구절을 보면, “끼쳐온 은택은 다같이 입었으니/나라생각은 유·불이 다를 소냐/묘향산 휴정대사를 보아라/계율의 칼 휘두르는 곳에 장삼이 가볍도다(由來恩澤曾均被 却喜儒禪不異情 請看香山靜老宿 戒刀揮處衲衣輕).”라고 하여 그 충의정신을 높이 기리고 있다.

 

또한, 조선 시대에 지어진 군담소설로 널리 알려진 〈임진록 壬辰錄〉에도 당시 서산대사의 행적을 “임진란이 일어나고 왜적들이 평양성을 점령하여 임금이 의주로 몽진(蒙塵)을 하자 나라를 위하여 왜적을 물리칠 결심을 한 서산대사는 묘향산에 있는 중 일천오백명의 제자들에게 활쏘기·창쓰기·칼쓰기를 가르치고 병서도 대강 가르쳤다.

팔도의 승병을 일으킬 계획인 것이다.”라고 서술하여 묘향산 승려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 밖에도 묘향산과 고승들이 관련된 민담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문헌에 전한다.

주로 묘향산에서 어떤 범상치 않은 중을 만났는데, 비록 스스로 남루한 걸객 노릇을 하지만, 형용이며 행동거지가 범속한 중의 그것이 아니어서 이상히 여기고 후일 다시 찾아가 보니,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식의 이야기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대동야승》 권23 해동잡록 6의 《소문쇄록 謏聞瑣錄》과 권13의 《용천담적기 龍泉談寂記》에 정희량(鄭希良)과 관련된 일화로 전해져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동야승》 권23 해동잡록 6의 〈척언 摭言〉에서는 유명한 복술가 김륜(金倫)이 젊었을 때 묘향산에서 그 신통력을 공부하였다고 하였다.

이로써 볼 때 묘향산은 또한 고승들이 은거하던 곳 또는 오묘한 이치를 수도하던 곳으로 상징되고 있음을 알겠다.

이 점이 신화시대 사유방식의 일면인 영험과 신비로서의 명산사상과 다소 통하는 면이라고 하겠다.

한편, 묘향산은 북쪽의 절경으로서도 매우 유명하였음이 확인된다. 《

속동문선》 권16에 전하는 김종직(金宗直)의 〈석계징유지리산서 釋戒澄遊智異山序〉에서는 “서방의 성인으로는 석가보다 더 높은 이가 없고, 동쪽의 산으로는 두류산[智異山]보다 더 높은 곳이 없다.”고 말한다.

다음에 덧붙여 “우리 나라에서 산을 구경하는 사람도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금강산은 동쪽에 웅장하고, 묘향산은 북쪽에 웅장하고, 구월산은 서쪽에 웅장하지만, 남쪽의 두류산에 오르게 되면…….” 이라 하여 산 구경하면 북쪽의 경우 묘향산임을 말하고 있다.

 

같은 이야기가 그의 〈유산록 遊山錄〉에도 전하는데, 이 경우에 있어서의 묘향산은 절경으로서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유람지로 상징되고 있다.

이렇듯 절경으로 상징된 묘향산은 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과 유적들 및 명승지로 우리의 가사문학 작품 속에서 그 세부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묘향산을 대상으로 하여 그 전체적인 면모를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는 〈향산별곡 香山別曲〉과 〈향산록 香山錄〉을 들 수 있다.

이 두 가사작품은 아직까지 그 작자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향산별곡〉의 경우 백광홍(白光弘)이 지었다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먼저 〈향산별곡〉을 보면 그 문장이 진부하지 않으면서 자유자재로 옮겨지는 붓끝과 화려하고 도도하게 흐르는 문맥이 매우 친밀감을 준다. 전체 330구로 되어 있으며, 묘향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각 사찰의 사적들을 중심으로 노래하고 있다.

작자는 작품의 서두부에서 “어젯밤 비가 개니 사산(四山)의 봄빗치라/청풍각 낫잠깨야 춘복(春服)이 거의이니”로 시작하여 유람에 따르는 행장을 갖추었음을 말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그 이름난 경치를 차례로 노래하게 되는데, 특히 묘향산을 잘 그려내고 있는 부분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석경의 막대쇼래 오나이 어대중고/묘향산 봄풍경을 너다려 무러보자/시절이 삼춘이오 피나니 뫼꼿치라/봉봉이 푸른 빗츤 봉래산 금광초오/골골이 흐르는 물은 무릉의 낙화로새”라고 읊은 부분인데, 묘향산의 흥에 겨운 경치를 금강산의 한 모습과 무릉도원을 연상하는 가운데 술회하고 있다.

그리하여 작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긴 시내 진안개에 동문(洞門)을 다시나셔/말잡고 도라보니 만학천봉이 구룸빛 뿐이로다.”라고 하며 묘향산 유람을 마치는 담담한 감회를 시적인 여운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이렇듯 〈향산별곡〉은 묘향산의 사찰·정자·시내를 중심으로 하여 명승·유적들을 차례로 묘사하면서, 꽃피는 봄의 화사한 풍치와 그 속에서의 흥건한 정서를 4음보격의 가사 율문을 통하여 잘 형용하고 있다.

특히, 그 풍경의 사실성(寫實性)과 정서의 무르녹음은 가사의 성격을 십분 살려 유연한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여기에서의 묘향산은 산이 지닌 유적·고사·인물들을 통하여 절경으로서, 그리고 단군·휴정 등의 행적을 간직한 면모들로서 북쪽 최고의 명산임을 실제 확인할 수 있게끔 해주고 있으며, 이 점이 묘향산이 풍기는 상징적 의미로 부각되고 있다 하겠다.

〈향산록〉 역시 묘향산의 절경을 노래한 유람 기행가사이다.

작품 서두부에서 우리 나라 산악의 흐름과 묘향산의 지리적 배경을 “천지 개벽하고 산천이 생겨시니/오악은 조종이오 사해난 근원이라/백두산 일지맥이 동으로 흘러나려/묘향산 되여시니 북방의 제일이라/일국지 명산이오 제불지 대찰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북방의 제일’임과 ‘일국지 명산’, 그리고 유명한 보현사가 있음으로써 ‘제불지 대찰’임을 밝힌 다음, “평생의 먹은 마암 향산보쟈 원이더니/춘삼월 호시절의 친구벗과 기약하고/행장을 급히 차려 낙양성 버들길노/청려장 들너집고 북향산 차자가니”로서 기대에 찬 묘향산 구경의 행장과 들뜬 기분을 노래하였다.

그리하여 산 속 절경들을 하나하나 노래하게 되는데, “계변(溪邊)의 우난 새난 춘흥을 노래하고/암상(巖上)의 픠난 꼿츤 원객을 반기난듯”에서의 자연물의 조화로운 공간, “남산의 웃난 꼿츤 춘색을 띄여잇고/청계예 맑은 물은 경광(景光)이 야거난듯”에서의 꽃과 시냇가의 아름다운 풍경을 읊은 것 등은 그 대표적인 묘사이다.

작자는 그 형색들에 대하여 또한 “선인(仙人)의 조작인디 인간재조 아니로다.”라고 감탄하였으며, “오날날 친견할 줄 엇디하야 아라시리” 하며 감격해 하였다.

그렇듯 절경인 묘향산을 완상(玩賞)하고 떠나는 마지막 부분에서 작자는 “진토의 걸닌 몸이 세연(世緣)이 미진하야·두견성 한 소래예 고향생각 절노난다·명산을 하직하고 고향으로 어셔가쟈.”고 하여 다시 현실 세계로 그 시선을 돌려 여정을 마치고 있다.

이와 같이, 〈향산록〉 또한 기행가사 특유의 여유있고 담담한 정서의 술회 속에서 봄의 정취와 유람의 즐거움을 묘향산 골골의 정경들을 통하여 차례로 노래하였다.

그 여정에 등장하는 사적(史蹟)·경관(景觀)·인물들은 〈향산별곡〉과 매우 비슷하며, 그런 의미에서 묘향산이 상징하는 의미 역시 〈향산별곡〉과 흡사하다고 하겠다.

 

한편,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당대의 문제적 인물들을 새롭게 조명하거나 시대적 삶의 애환을 그린 현대소설 가운데도, 묘향산이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른바 대하소설로 알려진 황석영(黃晳暎)의 〈장길산 張吉山〉이나 박경리(朴景利)의 〈토지 土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장길산〉에서는 장길산과 입국(立國)의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구월산에서 첫 모임을 가진 이후 역질과 흉황과 침학과 굶주림의 고통에 놓여 있는 백성들을 구하고자 각 지역별로 조직을 확산, 정비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묘향산은 그들의 중요한 하나의 거점, 곧 북쪽 산채로 등장하고 있다.

또한, 장길산의 출생 신분과 내력을 밝혀 가는 가운데, 그가 아버지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명근스님을 만나러 가는 가운데 묘향산이 서술되며, 명근스님을 만나 직접 그의 아버지임을 확인하게 되는 과정에서 명근스님으로부터 “허 잔망스러운 것, 묘향산에 와서 묘향산을 못 보는 놈이로다. 그런 놈이 어찌 무엇을 새로 바꾸겠단 말이냐!”는 나무람을 듣게 되는 상황에서도 묘향산이 드러난다.

그리고 묘향산을 내려오면서 서술되는 대목인 “길산이 묘향산 내원계곡을 돌아 내려오는데, 향상천 긴 물은 이리 굽고 저리 굽어서 폭포로 탕탕되어 흘러내리고 때로는 탕수로 되어 용용 솟구치나니 이들 물소리가 한없이 노래하는 듯하였다.”라든가 “묘향산의 산허리를 감돌고 있는 향단목과 사철나무들은 울울창창한데 길산이 꽉 막힌 가슴을 열어 터뜨리며 외쳐서 부르면 만산봉우리가 아우성치며 그에게로 되돌아 치달려 내려올 것만 같았다.” 등에서 보듯, 그 은밀한 도모의 거점이 되기도 한다.

또는 세속을 떠난 노승의 은거지로서, 또 아니면 ‘묘향산에 와서 묘향산을 못 보는 놈’에서 보듯, 그 이름에서 마저 풍기는 오묘한 초탈의 세계, 그리고 길산이 그의 심리적 격정과 가슴에 쌓인 정한을 묘향산의 자연경물들을 통하여 쏟아놓는 경우의 정서적 대응물로서 서술되는 예 등 다양한 모습으로 형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마지막에 인용한 부분에서의 세부 풍경묘사는 가히 기행가사에 보이는 경관묘사와도 매우 상통하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토지〉에 등장하는 묘향산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복형(異腹兄)의 아내인 별당아씨를 좋아하여 그녀와 함께 밤을 틈타 도망하게 되는 환이가, 도망가는 도중 별당아씨가 병들어 죽게 되자 그녀의 시신을 묻는 곳이 바로 묘향산임을 말하는 부분이 있다.

작자는 묘향산을 하나의 단순한 지리적 배경으로서만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허무와 비애를 가장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북쪽 끄트머리의 외진 산으로서, 그리고 역시 이름에서 풍기는 다분히 추상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특별히 묘향산을 그 줄거리의 배경으로 등장시키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그러한 면모는 특히 “이튿날 저녁에 환이가 제가 입은 저고리를 벗어 시체를 싸고 이름조차 기억하기 싫은 북쪽 끄트머리 어느 깊은 골짜기에 여자를 묻었다. 얼음같이 싸늘한 달이 능선 위에 댕그마니 걸려 있었다. 꺼무꺼무한 능선과 맞붙은 하늘을 그 푸른 은빛나는 하늘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평안도 묘향산 근처 주막에서 연추로부터 돌아오는 이동진을 우연히 만난 것은 별당아씨가 죽은 지 두달 후의 일이다.”라고 한 부분에 잘 드러나 있다.

그 허무와 비애의 심정이 묘향산의 밤 분위기와 함께 잘 드러나 있으며, ‘두 달’에 걸쳐 그 시름이 이어진 것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이로써 보면 묘향산은 또한 그 이해하기 어려운 인생의 간난(艱難)에 대한 추상적 의미를 역설적으로 대변하는 지리적 공간으로도 표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묘향산은 문학작품 속에서 신화적 사유 대상물로서의 산이 지닌 의미와 함께 민족 신화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후대 사유방식의 변모와 역사적 추이에 따라 고승대덕들이 은거하는 산으로서 나라의 위난에 희생정신을 발휘한 승려들의 집결지 내지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려는 이들의 수도처로서, 또는 북쪽 절경으로 꼽히는 유람지로서 그 세부적인 모습과 함께 시가문학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또한, 역사현실 속에서 뜻을 도모하는 이들의 웅거지, 현실을 초탈한 세계, 그리고 인생의 비애와 허무를 표상하는 추상적 공간으로서의 배경 등으로 상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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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영난 작 '묘향산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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