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구례 최고의 명당이라는 토지면 오미리에서 지리산 품속으로 차를 돌려 닿는 곳이 ‘문수리’인데, 저수지 위쪽의 상죽(웃대내)·중대(영암촌)·불당·밤재 등이 문수리에 속한 마을들이다. 노고단(1507m)∼왕시루봉∼형제봉을 삼각점으로 생성된 이 골짜기의 넓이는 약 2660㏊. 따라서 예부터 좁고 긴 계곡과 동·북·서로 막힌 산자락 때문에 사람이 숨어살기 적당했고, 그것이 또 문수리 일대를 ‘피의 전장’으로 전락시켰다.
●사람 숨기 적당한 지형이 주민에 고통 안겨
당시 구만들을 거쳐 문수골로 숨어든 주민들은 경찰 추산 2000여명. 낮과 밤으로 이념을 달리하며 살아야 했던 문수골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는 지옥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마을 주민들이 희생된 것은 물론 동네도 급격히 쇠락해 간다. 구례군 토지면 주민들은 1948년부터 약 7년의 세월을 전쟁 속에서 보낸 셈이다. 다시 이념이 갈리고 전쟁이 난다면 그때 또 지리산은 반란군을 품어줄 은신처가 될 것인지, 그때도 이 산은 그들을 잡아내려는 토벌대의 총성과 그 총성 속에 쓰러진 수많은 젊은이의 피로 물이 들 것인지, 이제 문수골은 과거의 일 따위는 잊은 것처럼 한없이 고요하고 청명하다.
문수사로 이어지던 도로 우측으로 ‘영암촌’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를 따라 내려서기 전에 조금 더 직진하면 폐교된 문수초등학교가 보이고, 그 앞에서 내려다보는 영암촌의 모습이 제법 아름답다. 영암촌에서 태어나 여태껏 아픈 곳 없이 건강하다는 조삼남(87) 할머니는 “타지에선 데려갈 총각이 없어 고향인 이 마을에서 혼례를 치렀다.”고 너스레다.“한때는 35가구쯤 되었던 마을이 여순사건 때 많이 사라졌다.”며 지금도 한숨을 쏟아낸다.“14연대 반란군이 먼저 들어오고 그 후에 군인들이 들어왔지. 바위틈에 숨어서 겨우 목숨을 붙였응께.”
“물 좋고 산도 좋지만 노인들은 불편해. 버스가 없어서 택시를 타야 하거든. 병원비보다 택시비가 몇 배는 더 비싼께. 노인들이 차를 운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몇 해 전만 해도 다랑이논에 농사도 지었고, 기계가 들어갈 수 없으니 소로 밭을 갈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 땅을 경작할 사람도 없어 경작지라야 텃밭 정도가 고작이다. 작년 추석 즈음엔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방사한 반달가슴곰이 내려와 이곳에서 생포되기도 했다. 도로 끝에 자리한 문수사에선 불자가 방생했다는 곰을 키울 정도니 이래저래 산이 깊긴 깊은 모양이다.
●봄엔 산수유·여름엔 피서인파로 북적
영암촌 곳곳에 멋지게 들어선 집들은 예상대로 외지인들의 별장이다. 번창하던 마을이 주민들 의지와는 상관없이 피바다가 되기도 하였으니, 이 마을에 다시 집이 들어서고 사람이 드나드는 건 차라리 반가운 일일지도 모른다. 봄이면 마을 곳곳에 핀 산수유 꽃을 찍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모이고, 여름엔 계곡을 찾아든 피서 인파로 북적이고, 가을엔 밤과 감을 수확하는 손길로 바쁘고, 겨울이 되어야 그나마 조금 한가해지는 작은 산골마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선 노고단 너머로 짧아진 하루해가 황급히 저물고 있었다.
●교통편
전남 구례까지는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과 용산역을 이용한다.19번 국도를 지나는 군내버스는 있지만 문수리까지 들어가는 버스는 없다. 구례읍에서 영암촌까지 택시비는 1만원 안쪽.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호남고속도로 전주IC나, 대진고속도로 장수IC,88고속도로 지리산IC 등에서 남원으로 간 다음 전주∼순천간 4차선 산업도로로 들어서 구례로 진입한다. 남해고속도로의 경우 하동IC를 경유해 구례로 갈 수 있다.
글 사진 황소영 월간 마운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