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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복식 풍습

초암 정만순 2021. 6. 17. 22:29

조선시대의 복식 풍습

 

 

 

 

고려시대에 그 체모를 한층 더 잘 갖춘 우리 민족의 옷차림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은 여러 가지 옷감, 특히 무명 생산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옷을 더 보기 좋고 생활에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 힘썼다.

한편 이 시기에 정부는 통치체제를 끊임없이 재정비하면서 사람들의 옷생활을 이러저러하게 규제한 옷제도를 계속 완비해 나갔으며 유교사상을 널리 유포시키고 유교 이념과 윤리도덕이 사람들의 생활에서 행동준칙으로 되게 하였다.

이러한 사회정치적 환경은 사람들의 옷차림을 구속에 얽매이게 하고 옷생활에 유교사상의 영향이 크게 미치게 하였다.

또한 양반관료들의 옷차림을 비롯한 일부 민족옷이 우리나라 조선사회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게 한 객관적 조건이 되었다. 이 시기 민족옷은 전반적으로 보기 좋게 개조되었으며 그 가짓수도 더 늘어나고 한층 다양해졌다.

남자의 기본 옷차림 구성은 종래와 대체로 같았으나 바지는 온돌방에서 책상다리를 틀고 앉아 생활하는 생활양식에 어울리게 가랑이가 고려 때보다 좀더 넓어졌다.

그러나 넓은 바지는 민첩한 행동에 불편하였으므로 군사들은 여전히 종래의 좁은 바지인 ‘궁고’를 입었다. 남자 웃옷에서 기본을 이루는 저고리도 큰 변화가 없었으나 깃의 형태를 비롯한 부분적인 요소들은 보기 좋게 다듬어졌다. 그리고 ‘저고리’라는 우리말의 고유 이름이 이 시기에 와서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났다.

조선시대 남자의 겉옷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서 특히 겉옷의 종류가 늘어났다.

실례로 두루마기, 소창옷, 중치막, 심의, 도포, 철릭(天翼), 쾌자(快子, 전복) 등의 긴 겉옷들과 마고자, 등거리(背子), 덧저고리 등의 짧은 겉옷들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물론 이러한 겉옷들은 이전 시기에 있었던 겉옷들이 보다 보기 좋게 개조되었거나 종래의 겉옷에 기초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두루마기나 소창옷 등은 삼국시대부터 입었던 기본 겉옷을 보기 좋게 개조한 것이었으며 중치막, 심의, 도포, 철릭 등도 삼국시대 이래로 있었던 소매가 너른 겉옷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또한 쾌자도 종래의 반비를 시대적 미감에 맞게 개량한 것이었으며 마고자, 등거리, 덧저고리 등도 종래의 짧은 겉옷이나 긴 저고리를 더 편리하게 개조한 것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여러 가지 겉옷들 중에 두루마기나 소창옷, 등거리, 덧저고리 등의 겉옷을 한 벌만 입었다.

그러나 양반관료들은 계절에 관계없이 겉옷을 두 벌 껴입었는데 소창옷이나 두루마기를 속에 입고 중치막이나 심의, 도포, 철릭, 쾌자 등을 겉에 입었다.

조선 말기에 와서 신분제도가 문란해지면서 양반통치자들 속에서도 이 거추장스러운 중치막이나 심의, 도포, 철릭, 전복(쾌자) 등을 벗어버리고 두루마기만을 입고 다니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자의 기본 옷차림 구성에서도 변화는 없었으나 개별적인 옷들과 머리쓰개, 신발들은 전반적으로 아름답고 우아한 것으로 개조되고 그 가짓수도 이전보다 더 많아졌다.

여자의 아래옷에는 속에 입는 속속곳, 바지, 단속곳, 두루치기, 무지기 등과 겉에 입는 치마 등이 있었다.

치마는 모두 허리에만 잔주름을 잡고 그 아래는 자연스럽게 펴지게 한 폭치마였다. 폭치마에는 꼬리치마(잎치마), 도랑치마(몽당치마), 앞치마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여자 저고리는 모두 짧은 저고리였으나 시기와 연령, 계층에 따라 길이에서 약간의 차이와 변화가 있었다. 특히 깃의 형태와 도련선, 배래기선 등의 부분적인 요소들이 더 보기 좋게 다듬어졌다. 그리하여 저고리의 윤곽선들이 직선적인 것으로부터 점차 곡선적인 것으로 변해 가면서 보다 여성적인 부드러움을 나타내게 되었다.

또한 옷에 선을 대는 풍습도 계승되어 저고리의 깃과 소매끝동, 겨드랑이 등에 본바탕과 다른 색천을 대는 현상이 생겼다.

이런 저고리를 당시 회장(回粧)저고리라고 하였는데 회장저고리는 여자옷에만 고유한 웃옷이었다.

여자 저고리에는 이밖에도 소매를 여러 색으로 한 색동저고리도 있었는데 주로 여기(기생)들과 남녀 어린이들이 입었다.

여자 겉옷으로는 장옷(두루마기), 활옷, 원삼, 당의, 큰저고리, 배자(背子, 褙子) 등이 있었다.

활옷, 원삼, 당의 등의 겉옷 이름은 조선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이 옷들은 모두 종래부터 있던 특수한 겉옷들을 시대적 미감에 맞게 개조한 것들이었다. 활옷, 원삼, 당의 등은 주로 궁중에서 왕족들과 궁녀들이 입었으나 점차 남편이 관직을 가진 양반부녀자들도 입었다.

큰저고리, 배자 등은 짧은 겉옷으로서 비교적 광범한 계층들 속에서 이용되었다.

이 시기에는 남존여비사상이 생활 속에 더욱 깊이 침투하여 여성들의 옷생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양반부녀자들은 바깥나들이를 할 때 얼굴을 가리는 것을 하나의 예의범절로 여겼는데 이런 폐단으로 인하여 그들 속에는 쓰개치마, 처네, 장옷, 너울 등 여러 가지 형식의 얼굴가리개를 쓰고 다니는 관습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얼굴가리개들은 모두 생산활동과 일상생활에 불편하였으므로 농민을 비롯한 일반 백성들 속에서는 거의 보급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남녀의 머리쓰개와 신발들도 이전 시기의 것을 기본적으로 이어받으면서 당시의 실정에 맞게 개조되었다.

남자의 머리쓰개에는 머릿수건, 망건, 탕건, 유건, 굴건, 갓, 갓모, 휘양(휘항, 풍뎅이), 전립, 패랭이, 사모, 복두, 관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 머리쓰개들은 대체로 고려시대에 있었던 것이지만 조선시대에 와서 그 형태와 재료가 달라지면서 이름이 달리 불려졌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휘양과 같은 일부 머리쓰개들이 새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여자의 머리쓰개에는 머릿수건, 갓, 아얌, 조바위, 남바위, 풍차, 족두리, 화관 등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남녀 머리쓰개들은 계급신분에 따라 쓰는 대상이 규제되어 있었으며 일부 쓰개들은 쓰는 용도까지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여자 머리쓰개보다 남자 머리쓰개가 더 다종다양하게 발전하였는데 이것은 15세기 말엽 성종 통치 때부터 남자들이 어른이 되면 누구나 머리쓰개를 쓰는 것을 예절로 여긴 풍속이 더욱 확고히 굳어지고 머리쓰개도 벼슬 등급에 따라 달랐던 것과 관련된다.

조선시대에는 신발도 그 가짓수가 이전보다 늘어났고 이름도 다양해졌다.

이 시기 치렛거리들은 ‘검소한’ 생활을 장려하면서 지나친 ‘사치’를 반대한 유교사상의 영향과 조선정부에서 금붙이를 생활용품에 쓰지 못하도록 통제하였으므로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치렛거리들은 이전처럼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주로 은, 동, 호박, 밀화, 옥, 산호, 비단천 등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졌으며 그 종류로는 노리개, 비녀, 뒤꽂이, 귀걸이, 단추, 가락지, 장도, 주머니 등이 있었다.

노리개, 비녀, 단추, 주머니 등은 매우 다양하게 만들어져 조선시대의 치렛거리를 대표할 정도로 되었다.

특히 노리개는 독특한 민족적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공예미술적 수준이 매우 높아 그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방불케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밖에도 혼례옷, 상제례옷, 관복, 무대의상 등의 특수한 옷들도 있었다.

남자의 혼례옷으로는 당시 관리들이 입던 사모관대(사모와 띠라는 뜻이지만 사실은 사모, 단령, 띠, 목화 등으로 이루어진 관복 일습을 말한다)가 많이 이용되었으며 여자의 혼례옷으로는 조선시대에 있었던 모든 여자 겉옷들이 다 이용되었다. 상제례옷은 모두 베로 지은 것이었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내려온 풍습이었다. 베옷을 상제례옷으로 입는 풍습이 형성된 것은 조상들이 베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관복은 이 시기에 와서 관리의 기본 정복으로 입는 공복(公服)과 조회 때에 입는 조복(朝服), 제례 때에 입는 제복, 일상복으로 입는 상복, 군복(軍服) 등 여러 종류로 세분화되었으며 벼슬 등급에 따르는 차이도 있었다. 이러한 관복들은 조선 말기로 오면서 점차 간소화되어 갔다.

조선시대에 왕과 왕비가 입는 특수한 면복, 조복, 상복, 적의 등과 왕세자, 왕자, 공주, 옹주들을 비롯한 왕족들이 입는 정복도 화려하게 만들어졌다.

이 시기 무대의상은 모든 종류의 옷들을 예술 종목의 요구와 특성에 맞게 개조하였거나 그러한 옷들을 바탕으로 하여 무대공연에 어울리게 새로 만든 것이었으며 종류도 이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고 다양하게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