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의 對話/한국의 숲

이팝꽃 따라 가는 길 - 무봉사 이팝꽃

초암 정만순 2021. 4. 30. 10:12

이팝꽃 따라 가는 길 - 무봉사 이팝꽃

 

 

 

 

■ 무봉사 이팝나무

 

무봉사 이팝나무는 단 한 그루다

절 앞에 서서 남천강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태극나비를 마중하고 있는 듯한 자태이다

 

1945년 이후 무봉사를 찿지 않는 테극나비가 다시 날아 올 그 때를 기다리는 외로운 한 그루 이팝나무의 심상은 고독하기 보다는 갸륵하게 보인다

 

 

 

 

 

 

■ 무봉사

 

 

 

봉황이 춤을 추던 성지, 무봉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773년(혜공왕 9)법조(法照)가 현재의 영남루 자리에 있었던 영남사(嶺南寺)를 순례하다가 큰 봉황새가 이곳으로 날아와 앉으므로, 상서로운 성지라 생각하고 창건하였다.

혹은 고려의 고승 범률국사가 이 절에서 하안거를 하면서 봉황이 춤추는 형국이기 때문에 절 이름을 무봉사로 하였다고도 한다.

그래서 지금의 삼문동 지역에서 봉황이 알을 낳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밤나무를 심어 가려 주었으며, 무봉사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종소리를 울려 봉황을 날게 하였다고 한다.

 

1359년(공민왕 8)영남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무봉암이라 하였던 이 절을 무봉사로 승격시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혜징(慧澄)이 중건하고, 1628년(인조 6)경의(敬儀)가 중창하였다.

1899년(광무 3)경봉(慶蓬)이 중건하고, 1942년에 중수,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 삼성각·종루·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보물 제493호로 지정된 무봉사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무봉사는 밀양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밀양 최고의 명소 영남루와 인접한 탓에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밀양강 상류 쪽 절벽 위에 아랑의 전설이 깃든 아랑각이 있고 계단을 올라서면 우리나라 3대 누각중의 하나인 훤칠한 영남루와 무봉사가 있다.

이곳에 가면 무봉사 참배 후 영남루와 밀양 박물관, 아랑각, 박시춘 생가지 등을 함께 둘러볼 수 있으며 강 아래로 펼쳐지는 대나무 숲과 강가 맞은편 공원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무봉사는 밀양강의 흐름을 산 아래에 두고 그 강 언덕에 우뚝 솟은 영남루와 함게 그림같은 호산경색을 이루어 오랜 옛날부터 중국 악양루의 풍광으로 비유되면서 운치있는 사찰로서 시인묵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좌상을 주불로 봉안하고 있어 그 역사에 걸맞는 사격과 운치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 무봉사 석조여래좌상 

 



무봉사 석조여래좌상의 모습을 보면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손은 항마촉지인을 하였다.

머리는 나발(螺髮)로 보발(寶髮)이 굵은 육계(肉?)를 갖추었고, 양미간에는 백호(白毫)가 있으나 최근 수정하여 새로 만들었으며, 목에도 삼도(三道)가 있다.

얼굴의 풍만함과 길게 늘어진 두 귀는 잘 조화되어 존엄한 상호를 보이고, 법의(法衣)는 통견의로서 그 옷무늬가 유려하고 가슴에 군의(裙衣)를 갖추었다. 전체적으로 손상이 없는 신라 말기의 우수한 불상으로, 광배는 주형광배(舟形光背)로서 화불이 배치된 화염이중윤광(火焰二重輪光)이며, 하부에는 구름모양의 문양이 있다.

특히, 광배에는 5구의 화불이 장식되어 있고, 이 화불도 주형광배에 항마촉지인의 수인(手印)과 합장한 손모양을 하고 있다.

또, 광배 뒷면에도 앙련화(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에 결가부좌한 여래상이 양각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 무봉사 태극나비(무봉사 국성접 )전설

 

 

 

신라말 국운이 기울어 사회혼란이 가중되던 어느 해, 고려 태조왕건이 삼한을 통일하기 직전 후백제 견훤과 밀고 밀리는 격전을 거듭하던 시기에. 어느날 음력2월에 갑자기 한무리의 나비가 떼를 지어 날아와 무봉산을 뒤덮으며 날아 다니다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괴이한 일이 있었다.

 

무봉사를 감싸고 날아 다녔던 나비의 날개는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었기에 백성들은 더욱 이상하게 여겼고,

당시 통일신라는 국론이 분열되는 등 모진 혼란에휩싸여 있었던 때라, 백성들은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런 일이 있은지 얼머 지나지 않아 고려가 건국되면서, 어지럽던 사회혼란은 멈추고 태평성대를 맞게 되었다.

 

그후에도 이 태극나비가 무봉산(지금의 아동산)에 나타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라에 경사가 있었다.

고려 초에는 이 나비를 보호하라는 왕명과 함께 국성접이라 부르게 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나비는 조선5백년과 일제강점기 36년동안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가, 1945년 8월15일 오후 3시쯤 태그나비가 무봉사 법당에 날아 들었으며,그해 8월19일과 10월25일에도 나타났다 한다.

 

그래서 무봉사를 참배하고 나면 경사스런 일이 생긴다고 전한다.

이 태극나비의 전설은 표충비각의 땀과 밀양 얼음골의 신비,만어산의 어산불영경석과 함께 밀양의 4대 신비이 하나로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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