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柱命理 風水地理/풍수지리

다시 돌아보는 사찰과 명당

초암 정만순 2021. 3. 15. 14:46

다시 돌아보는 사찰과 명당

 

 

 

해 하려는 기운 서린 땅 ‘대사찰의 몰락’ 불렀다

 

 


▲ 발굴된 양주 회암사지-

1997년부터 지금까지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양주 회암사지는 왕궁의 구조를 인용한 건물지들이 옛 영화를 짐작케 한다.

 

■산 좋고 물 좋은 신륵사

아늑한 산들에 둘러싸여 명예·권력 모여

앞쪽에 휘둘러 흐르는 남한강 ‘금상첨화’

아름다운 자연 어우러져 ‘천년고찰’ 명성

 

■옛 영광만 남은 고달사지·회암사지

골짜기 안쪽에 잡은 터 “이해 못할 선택”

결국 유학자들의 숭유억불로 인해 ‘폐사’

그나마 천보산 맥 받는 회암사 뒤늦게 빛

 

 

당대의 고승들이 터를 잡았으나 풍수의 기운을 따라 각각 흥망성쇠가 갈렸으니, 쓸쓸히 터만 남은 대사찰(大寺刹)의 옛 영화가 그립구나.

 

지난 2013년 3월 조광선생과 함께 풍수테마기행을 시작한 이래 2년여 동안 취재팀은 경기도와 인천 곳곳을 누비며 양택(陽宅)과 음택(陰宅)을 살펴보았다.

그동안 어느 곳에서는 ‘명당중에 명당’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했고, 어느 곳에서는 잘못 쓰거나 훼손된 터를 만나기도 했다.

 

100여곳의 양택과 음택을 둘러보는 동안 취재팀은 그렇게 다양한 상황을 만났고, 그에 따라 웃기도 하고 안타까움을 삭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제각각 다른 곳들을 둘러보면서도 늘 취재팀을 따라다니며 다시 새겨지고 새겨졌던 하나의 ‘화두’가 있었으니, 첫 여행을 떠나던 날 아침에 조광선생이 던진 “흥망성쇠(興亡盛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짧은 말이었다.

 

크게는 한 나라에서부터 작게는 집안이나 개인까지, 과거의 역사는 물론이고 현재와 미래까지도 풍수를 통해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그동안의 둘러보기에서 만난 음택이며 양택에 모두 한결같이 적용됐다.

당대의 고승들이 창건했다는 여러 곳의 사찰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학문과 깨달음이 깊은 당대의 고승들은 풍수지리에도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찾아가 둘러본 사찰들의 터는 모두 명당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터의 기운을 따라 대사찰들의 운명과 역사가 갈렸으니, “흥망성쇠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말이 고스란히 가슴에 와닿았다.

 

 

■ ‘명당의 교본’ 신륵사

 

 

▲ 신륵사 전경-경기남부에서 손꼽히는 명찰인 여주 신륵사는 명당의 조건을 두루 갖췄다.

 

 

= 여주의 이름난 사찰인 신륵사(神勒寺)는 조광선생이 ‘명당의 기본이 잘 갖춰진 곳’으로 손꼽은 곳이다.

산이 아름답고 물이 좋기로 소문난 여주에서도 고르고 고른 곳에 터를 잡았으니, 오랫동안 이름을 떨쳐왔고 지금도 명성이 자자한 그야말로 천년고찰(千年古刹)이다.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신륵사는 풍요롭게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보며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

 

“신륵사는 청룡과 백호가 아주 좋아요.

풍수에서는 백호가 여성과 부를 상징하고, 청룡은 남성과 명예를 상징해요.

신륵사의 경우에는 백호도 잘 둘러쳐 있지만, 청룡이 더 잘 감싸고 있어서 큰 명성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죠.

게다가 풍수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게 바로 물인데, 신륵사는 앞쪽으로 남한강이 휘둘러 지나가니 금상첨화격이에요.”

 

신륵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 앞에 서면 앞이 트이고 삼면은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기 그지없다.

멀리 앞쪽으로 명예와 권력을 불러들인다는 ‘일자문성(一字文星)’이 길게 이어진다.

일자문성이 마치 낮은 성벽을 둘러친 것처럼 길게 이어지는 장면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신륵사는 그렇게 명당이다.

 

 

■ 골짜기에 들어앉은 고달사지

 

 

▲ 여주 고달사지는 넓은 빈터와 몇개의 유물만 남아 대사찰의 면모를 겨우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 여주에는 한때 신륵사보다도 더 큰 규모를 자랑했던 대사찰이 있었다.

지금은 빈 터만 남은 고달사(高達寺)다.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高達寺址·사적 제382호)에는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대사찰 고달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사적지 면적만도 6만㎡에 달하는 넓은 고달사지는 발굴조사 후 건물터들을 흙으로 조금 높게 덮어 평지와 구분지어 놓았다.

수많은 건물지들과 군데군데 커다란 석조 문화재들이 옛 영화를 짐작케 한다.

최근에 복원해 놓은 원종대사탑비(보물 제6호)만 보아도 높이가 5m가 넘는 대단한 규모다.

 

고달사는 한때는 머물던 승려만도 수백명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폐사와 관련된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채, 이 커다란 사찰은 영광의 시대를 끝내고 말았다.

 

“풍수적으로 볼 때 고달사는 신륵사와 완전히 비교가 되네요.

신륵사가 명당의 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데 반해, 고달사는 어째서 이런 곳에 터를 잡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곳에 자리를 잡았어요.

간단히 말하자면 완전히 골짜기에 절을 지었고, 주변에 좋은 산들도 없어요.

게다가 풍수에서 좋지 않게 보는 규봉(窺峰)이 여럿 보이네요.

규봉이 있다는 것은 넘보며 해하려고 하는 세력이 있다는 뜻이죠.

아마도 폐사의 원인이 그런게 아닐까 싶어요.

같은 불교 사찰이고 비슷한 지역에 있는데, 유독 신륵사는 이어지고 고달사는 몰락했다는 것은 무언가가 달랐다는 뜻이에요.”

 

고달사를 둘러본 후 폐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조선후기 문인 김병익이 남긴 신륵사중수기(神勒寺重修記)에서 “절을 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고적이 명승지로 이름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신륵사라는 절은 고려시대의 나옹이 머물러 있었으며 항상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이고 또한 높은 탑과 오래된 비가 늘어진 것이 예스러워 목은(牧隱)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시로써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조선후기 불교를 탄압하던 시기에 유학자들에 의해 사찰들이 폐사됐으나, 신륵사는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모습에 폐사를 모면했다는 내용이다.

 

 

■ 고달사지와 닮은 회암사지

 

 

▲ 옛 회암사의 역사를 잇는 지금의 회암사가 회암사지 뒷쪽에 천보산을 배경으로 서 있다.

 

 

= 양주 천보산 자락에는 조선시대 최대의 국찰이었던 회암사(檜巖寺)의 터 회암사지(檜巖寺址, 사적 제128호)가 남아있다.

회암사는 여러 면에서 여주 고달사와 닮았다.

두 사찰은 모두 한때 승려와 신도 수천명이 머물 만큼 번성했다가, 조선후기에 갑자기 몰락해 사라졌다.

 

“회암사는 천보산을 주산으로 하고 터를 잡았어요.

하지만 천보산은 한눈에도 돌이 많고 거친 산이어서 풍수적으로 부족함이 많아요.

터가 넓다고는 하지만 고달사지처럼 골짜기가 진 곳에 자리를 잡았고, 토체와 일자문성도 완전하지 않아요.

더욱이 뒤쪽으로 풍수에서 좋지 않게 보는 규봉(窺峰)도 보이니, 회암사 역시 늘 넘보며 해하려는 세력이 있었다고 봐야겠네요.

결국 고달사와 회암사는 풍수적으로 비슷한 조건을 가진 곳에 절이 지어졌고, ‘넘보며 해하려는’ 세력이 몰락의 원인이 된 것 같아요.”

 

그나마 회암사가 고달사보다 나은 것은, 이 절을 만들고 중창하고 지원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승려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대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가 천보산의 맥을 타고 좋은 곳에 자리해 있다는 것이다.

 

회암사지가 늦게나마 발굴이 되고 박물관까지 세워지면서 다시 빛을 보고 있는 것과, 회암사지 뒤쪽에 다시 세워진 지금의 회암사가 점점 번창하고 있는 것도 그로부터 힘을 얻은게 아닐까 싶다.

 

 

도톰한 봉우리 품안은 청룡사… 산 닮은 넉넉함 넘쳐

 

 


▲ 토체와 문필봉, 영상사 등 좋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안성 청룡사.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한 안성 칠장사

임꺽정·어사 박문수 등 이야기 ‘가득’

 

주산 오른쪽에 돌려앉은 이천 영월암

풍수적으로 좌우 균형 안맞아 아쉬움

 

고려초 지어진 국가사적 하남 ‘동사지’

고속도로·송전탑에 기 흩어지는 형국

 

 

오랜 역사를 가진 사찰들이

흥하기도 하고 쇠하기도 하니、

땅이 그리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의 손에 운명이 바뀌기도 하는구나。

 

취재팀은 2년여동안 여러 곳을 다니며 산과 물이 만들어내는 기운을 살폈다.

그중에서도 풍수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음택(陰宅)을 둘러보는데 힘을 쏟았고, 사찰과 주택과 상가 등 양택(陽宅)도 눈여겨 보았다.

여러 인물들을 배출한 집자리들을 살펴보기도 했지만, 각 지역마다 이름난 사찰들도 여러 곳 둘러보았다.

 

역사가 오래된 사찰들은 풍수적으로도 안정된 곳에 자리를 잡은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회암사지와 고달사지를 둘러보며 느꼈던 것처럼, 일부 사찰들은 풍수적으로 부족한 곳에 자리를 잡아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 좋은 봉우리들이 솟은 안성 청룡사

 

안성시 서운면에 자리한 유서 깊은 사찰 청룡사(靑龍寺)는 지금도 많은 신도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경기 남부지역의 명찰(名刹)이다.

고려 원종 6년(1265) 창건되고, 공민왕 13년(1364)에 나옹에 의해 중창됐다는 청룡사는 당초 ‘대장암’이라 이름 붙여졌다.

 

하지만 나옹에 의해 크게 중창될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서기가 가득한 가운데 청룡이 나타나 오르내려, 청룡사라 고쳐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신도들로 북적이는 청룡사를 찾아가 주변을 둘러보니, 웬만한 명당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었던 청룡이나 백호가 거의 없어 의외였다.

청룡과 백호는 터의 좌우를 감싸고 돌며 나쁜 기운이 들어오고 좋은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준다.

때문에 청룡과 백호가 좋은 터는 아늑하고 평온하다.

 

“청룡과 백호까지 잘 감아 돌았으면 명당 중의 명당이 되었겠지요.

하지만 이곳은 청룡·백호가 없는 대신, 주변에 좋은 산들이 많아서 좋은 기운을 끊임없이 전해주고 있어요.

게다가 이런 좋은 산들이 겹쳐지거나 출렁이지 않고 각각의 봉우리들이 하나씩 딱딱 떨어지는 형태여서 풍수적으로 더 좋아요.”

 

조광 선생의 설명처럼 청룡사 대웅전 앞에서 둘러보니 왼쪽 뒤와 오른쪽 앞으로 토체(土體)들이 줄지어 서 있다.

멀리 앞쪽에는 뾰족한 모양의 문필봉(文筆峰)이 서 있어 수양하기 좋은 곳임을 알려주었다.

영상사(領相砂)와 부봉(富峰)들도 여럿 서 있다.

 

덕분에 청룡사는 옛날부터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풍족함을 누려왔다.

천대받던 안성 남사당패를 겨울마다 거둬들여 따뜻하게 돌봤던 것도 이런 풍족함 덕이다.

흉하거나 거칠게 생긴 산이 없이 부드럽고 풍족한 모양의 산들로 둘러싸인 청룡사는 그런 산들처럼 따뜻한 인정을 갖게 된 것이다.

 

 

 

▲ 명당의 요건을 두루 갖춘 유서깊은 고찰 칠장사.

 

 

■ 명당에 자리한 칠장사

 

안성을 둘러 보면서 청룡사와 더불어 가장 기대를 많이 했던 곳이 유명한 고찰(古刹) 칠장사(七長寺)였다.

칠장사는 636년(선덕여왕 5)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고찰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안성지역의 명소이기도 하다.

 

국보 제296호 칠장사오불회괘불탱(七長寺五佛會掛佛幀)과 보물 제488호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는 이 사찰이 오랫동안 얼마나 중요시 여겨졌는지를 짐작케 한다.

 

안성 죽산면에 자리한 칠장사는 경내에 들어서는 순간 묵직하고 안정된 느낌이 든다.

신도들로 북적이는 청룡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이곳에는 칠장사와 칠현산의 이름 유래가 담긴 혜소국사 이야기를 비롯해, 병해대사가 이곳에서 임꺽정에게 무술과 글을 가르친 이야기, 어사 박문수가 이곳에서 기도를 한 후 장원급제를 했다는 이야기 등 책 한 권을 엮어도 될 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특히 어사 박문수 이야기 때문에 칠장사에는 입시 때마다 많은 학부모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칠장사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풍수적으로 명당의 요건을 잘 갖추고 있다.

주산인 칠현산 자락이 팔을 뻗어 좌청룡·우백호를 이루고 있는데, 일부러 깎아 놓은 듯 적당한 높이로 사찰을 품어 안으며 곳곳에서 영상사와 토체와 일자문성(一字文星)을 이루고 있다.

 

특히 멀리 앞쪽으로 그린 듯 삼각형으로 솟아있는 영상사는 조광 선생도 감탄 할 만큼 일품이다.

이런 명당에 오밀조밀 들어앉은 대웅전과 법당들은 더할 나위 없이 푸근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조광 선생은 “전국의 여러 사찰을 다녀봤지만, 이곳 칠장사는 올 때마다 감탄을 하게 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좌우의 균형이 맞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 이천 설봉산 영월암.

 

 

■ 아쉬움 남긴 영월암

 

이천 시가지의 서쪽편에 솟은 이천의 진산(鎭山) 설봉산에는 유서 깊은 사찰인 영월암(映月庵)이 자리해 있다.

영월암은 신라 문무왕때 의상이 창건했다는 사찰로, 대웅전 뒤쪽으로 온화하게 서 있는 영월암마애여래입상(보물 제882호)이 오랜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하지만 영월암의 대웅전은 설봉산의 동쪽편 산비탈에 마애여래입상이 서 있는 작은 언덕을 뒤로 두고 남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대부분의 명당이 주산을 뒤로 놓고 탁트인 앞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과 달리 주산을 오른쪽으로 두고 돌려앉은 모양새다.

 

때문에 오른쪽 위로 솟은 설봉산의 주봉 희망봉이 커다란 백호를 이루고 있고, 왼쪽은 청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내리막 비탈이 되었다.

 

“풍수적으로 볼때 균형이 맞지 않는 형국이지요.

청룡은 명예를 상징하는데, 이처럼 청룡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으니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름을 떨치기 어려울 수 밖에 없어요. 아쉬움이 남는 곳이네요.”

 

 

▲ 각각 보물 제 12호와 13호로 지정된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과 삼층석탑.

 

 

■ 사람이 망가뜨린 하남 춘궁동 동사지

 

하남시에는 한때 일대에서 손꼽히던 사찰이었다가 지금은 흔적만 남은 춘궁동 동사지(桐寺址)를 찾아갔다.

고려 초기에 창건된 동사는 넓은 터에 옛 영화를 짐작케 하는 유물들이 일부 남아있어 지금도 국가사적(사적 제352호)으로 지정돼 있다.

 

지금은 같은 이름을 가진 작은 절이 자리해 있는데, 절 마당에 놓여있는 커다란 초석들로 짐작할 때 옛 동사는 금당의 규모가 경주 황룡사 못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넓은 절터 한쪽에 당당히 서 있는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2호)과 삼층석탑(보물 제13호)도 예전의 위세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비록 절터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뒤쪽으로 주산이 우뚝 서 지켜주고 있는 데다가 좌우로 청룡과 백호가 잘 감싸고 있어요.

주춧돌을 보니 중심 건물이 딱 좋은 자리에 서 있었고, 가운데 커다란 제단이나 부처님을 모셨던 것으로 보이는 8각형 구조물이 있는데 풍수를 잘 따져 자리를 잡은 것 같아요.”

 

하지만 동사지를 둘러보는 동안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 보다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사찰의 바로 앞에 고속도로가 지나고 커다란 송전탑까지 서 있는데다가, 한쪽 옆으로는 고철 처리장까지 있어 좋은 기운이 사방으로 흩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풍수적으로 좋은 곳이라도 길을 내면서 산을 허물고 산에 송전탑 같은 커다란 구조물을 세우면 의미가 없어지는 법이지요.

자연이 만든 좋은 땅을 사람이 망가뜨린 셈입니다.”

 

조광 선생과 취재팀은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동사지를 나서야 했다

 

'四柱命理 風水地理 > 풍수지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동장씨(仁同張氏)  (0) 2021.03.30
양지바른 묏자리  (0) 2021.03.15
해남 녹우당  (0) 2021.02.02
아산 맹씨행단  (0) 2021.02.01
전의 이씨 '구암사적'  (0) 2021.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