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이지함 묘
나래 편 鶴이 海霧 뚫고 날아드는 듯…수많은 일화, 土亭秘訣 남긴 奇人
※ 이지함 묘=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함 艸+函)의 묘.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에 있으며, 그의 부모, 형제, 자손 등 14기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토정은 고려말 3은(三隱)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6대손이며, 북인(北人)의 영수였던 이산해(李山海)의 작은아버지이기도 하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서경덕(徐敬德)의 문하로 천문, 지리, 의학 등에 능통했다.
토정이란 호는 벼슬하기 전 마포강변의 흙집위에 정자를 짓고 살면서 스스로 지은 것이라 한다.
상공업 중시 등의 사상으로 오늘날엔 실학의 효시로 불리기도 한다.
토정묘역서 바라본 전경.
삼태봉을 이룬 안산이 아름답다.
마치 한 마리의 학이 짙은 해무를 뚫고 날아드는 듯한 형상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토정 묘.
명당에 얽힌 얘기는 많다.
누구나가 한번쯤은 들었을 법한 얘기들, 어쩌면 한 명당에 하나의 얘기가 전하는 지도 모르겠다.
나라 안의 대명당에서부터 한적한 어느 시골마을의 고만고만한 묘소에 이르기까지 전해지는 얘기는 수없이 많다.
토정이 자기가 묻힐 자리를 찾아 나섰다.
용맥따라 왔지만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산자락에 정확한 지점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근처에서 논을 갈던 노인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토정이 같이 미련한 소야, 한 발만 건너뛰면 될 것을 왜 이리 주춤거리나.’
이상하게 여긴 토정이 이 노인과 선문답 같은 얘기를 주고받다 범상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이에 다시 보니 이미 노인과 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문득 깨달은 게 있어 토정은 지세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건너편 산자락에 찾던 명당이 있었다.
토정 묘에 전해져오는 얘기지만 신빙성은 물론 없다.
실제 토정의 가족묘 터는 어머니상을 당했을 때 처음 정해졌다 한다.
토정이 10대 중반이었을 때다.
이때 다른 곳에 모셨던 아버지 묘를 이장해와 합장을 했다.
토정은 이곳에 택지(擇地)를 한 다음 ‘우리 삼형제의 후손들 중 일품의 벼슬을 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라 예언을 했다 한다.
예언대로 맏형의 아들이 영의정을, 중형의 아들은 판서를 역임했다.
또 다른 얘기도 전한다.
이 자리를 택지할 때 맏형이 ‘이 자리는 자손들 중에 2명의 정승이 나올 것이지만 막내에겐 불리하다’ 고 예언을 했다는 것이다.
토정은 삼형제 중 막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후 조카들은 영의정이 되고, 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토정의 후손들은 이에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보령 앞바다를 바라보는 산자락에 자리 잡은 묘역은 좁다.
그러나 큼직큼직한 묘비들, 그 중 ‘증 영의정’(贈 領議政) 묘비만 3기나 된다.
이것은 그만큼 자손들이 잘 됐다는 얘기도 되겠다.
손녀사위가 되는 한음 이덕형(李德馨)이 언급했다는 ‘처가 산소로 보면 명당발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는 얘기가 실감이 난다.
토정 묘역은 내룡의 기세도 기세지만 보국이 백미다.
좌우의 청룡과 백호는 적당히 환포를 하고, 청룡서 길게 뻗은 자락은 앞면에서 둥글게 묘역을 감싼다.
옥대(玉帶)의 역할이다.
옥대는 예전 벼슬아치들이 관복위에 두르던 허리띠다.
따라서 풍수에서 이런 지세는 벼슬을 상징한다.
바다건너 안산은 세 개의 봉우리가 아름답게 솟아 날개를 편 한 마리의 학이 날아드는 형상을 이룬다.
이런 지세를 삼태(三台)라 한다.
이 삼태봉도 높은 관직을 상징한다.
바닷가에선 음양의 조화가 깨지고, 바람이 거세 명당이 잘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은 세찬 바다 바람을 전면은 삼태봉이, 좌우는 청룡과 백호가 환포로 적당히 막고 있어 기운이 평안하다.
다만 조금 높은 곳에 조성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어쩔 수 없다.
늘그막이 벼슬길에 나서 포천까지 걸어서 부임 하던 날, 아전이 첫 밥상을 성찬으로 차려오자 ‘먹을 게 없노라’ 며 잡곡밥 한 그릇과 나물국 한 대접을 원했던 토정,
그는 힘없고 배고팠던 서민들 편에서 한평생 살다 간 큰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