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에 담긴 삶의 지혜
위기십결과 위기오득
“내가 어떻게 둘 것인지를 시험해보는 한 수! 내 실력을 가늠해보고 있어! 그것도 저기 까마득한 높이에서…”
바둑 만화로 인기몰이를 하며 유럽과 미주에 바둑 보급을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고스트바둑왕(원제: 히카루의 바둑)’의 명대사이다.
체스도 정복했던 컴퓨터가 아직 정복하지 못한 보드게임. 최고 경지에 이른 고수들도 바둑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수의 변화가 무궁무진한 게임. 바둑은 우리 삶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큼 예측할 수 없는 경우의 수와 다양성을 포함하고 있다.
웬만한 게임은 오랜 기간을 견디지 못하고 게임시장과 산업에서 퇴출되는 데 반해, 바둑은 이와 같이 끝을 알 수 없는 신비함으로 4천 년의 유구한 세월을 견디고 현대에 이르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조들이 이 기나긴 역사를 거치며 바둑을 두었으므로, 이들이 남긴 문화적 지적 유산들은 그대로 바둑의 교훈과 어록이 되어 후대에 전수되어왔다.
긴 역사를 통해 전해 내려온 지혜 가운데 바둑의 비결과 이점을 다룬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위기십결(圍棋十訣)》과 ≪위기오득(圍棋五得)≫이 그것이다.
위기십결(圍棋十訣)
서예가 김창동 선생이 직접 쓴 위기십결.
당나라 현종은 '기대조(棋待詔)'라는 벼슬을 두었는데, 이는 바둑의 최고수에게 헌정되는 자리였다. 당시 기대조였던 당나라의 바둑 고수 왕적신(王積薪)이 바둑의 비결을 담은 ‘위기십결’을 지었다. 위기십결은 지어진 지 천년 이상 지났지만 바둑뿐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유용한 잠언으로 전해 내려온다.
不得貪勝(부득탐승) - 승리를 탐하지 말라. (승리에 집착하면 오히려 그르치기 쉽다.)
바둑에서는 항시 평정심을 가지고 최선의 한 수를 추구해야 하며, 이기려는 마음이 지나치게 강하면 욕심이 생긴다. 마음이 흔들리면 통찰의 순간은 오지 않는다. 억지로 이기려는 마음은 물 흐르듯 흘러가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기 쉽다. 평상심의 유지, 이것이 승리의 비결이다.
不得貪勝(부득탐승)
부동심의 대명사로 불리며 세계를 호령했던 이창호 9단은 그의 첫 자서전 제목으로 ‘부득탐승’을 썼다.
‘부득탐승’은 ‘반전무인’과 통하는 말로,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두면 결과가 좋지 않음을 뜻하기도 한다. 부득탐승은 쉽게 실천하기 어려운 경구로, 큰 승부에 명국 없다는 말이 ‘부득탐승’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入界宜緩(입계의완) - 상대의 진영에 들어갈 때 마땅히 완만하게 하라.
상대의 진영에 침입 혹은 삭감을 할 때, 너무 깊이 들어가는 것을 경계한 금언이다. 상대의 세력이 강한 곳에서는 보다 겸허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또한 입계의완은 새로운 분야에 진입할 때 마땅히 완만한 자세를 취할 것을 제안하므로, 비단 바둑뿐 아니라 전 분야에 통용되는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초심자가 새로운 분야에 접근할 때, 관망하는 태도와 신중한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攻彼顧我(공피고아) - 상대를 공격하기 전 나를 먼저 살펴라.
적을 공격할 때는 먼저 나의 결점 유무와 능력 여부를 살펴야 한다.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며, 상대로부터 반격을 당할 여지는 없는지 등을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보통 상대를 몰아치듯 공격을 할 때에는 감정이 앞서기 쉬운데, 이럴 때일수록 냉철하고 비판적으로 자신을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棄子爭先(기자쟁선) -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선수를 잡아라.
돌 몇 점을 희생하더라도 선수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 선수란 주도권을 잡기 위해 먼저 착점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기자쟁선이 강조하는 전략은 ‘버림돌 작전’ 쉽게 말해 희생타를 써서 이익을 보는 것을 말한다.
‘하수는 돌을 아끼고 상수는 돌을 버린다’는 말이 있는데, 소임을 다한 돌은 그 숫자가 많더라도 가치가 적고, 상대를 차단하고 있거나 대세의 요처는 비록 한 점이라 해도 그 가치가 큰 것이다. 전체를 보는 안목이 요구되는 전략이다.
기자쟁선의 실전 사례
중국 스웨 9단(백)과 후야오위 9단의 대국. 상변 백의 코붙임은 이 한 점을 버림돌로 하여 백을 선수로 강화하고 우변 흑돌을 공격하겠다는 전략이다. 이 버림돌 없이 후수로 백을 보강하면 흑은 우변을 살려 즐거운 형세이다. 이 바둑은 백의 기자쟁선 전략이 멋지게 성공하여 백의 완승으로 끝났다.
捨小就大(사소취대) -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눈앞의 작은 이득을 탐내지 말고 대세를 넓게 보며 움직여야 한다. 말은 쉽지만 막상 바둑을 두다 보면 쉽지 않은 것이 ‘사소취대’이다. 작은 이익은 눈앞에 보이는 반면 큰 이익은 비교적 멀리 있어 얻는 데 시간이 걸린다. 미래를 냉철하게 내다보며 작은 이익들을 과감히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와 일맥상통하는 사자성어로 소탐대실(小貪大失)이 있다.
逢危須棄(봉위수기) - 위험을 만나면 모름지기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위험에 처할 경우에는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혹은 버려야 한다.
바둑을 두다 보면 양곤마가 되어 쫓기게 될 경우도 있고, 미생이 여러 개 뜰 때도 있다. 이 미생을 도저히 살릴 가능성이 없거나, 혹은 살더라도 쌈지를 뜨고 삶의 대가를 크게 지불해야 할 때는 오히려 버리는 것이 좋은 선택일 수 있다. 결단의 시기는 빠를수록 이롭다.
愼勿輕速(신물경속) - 신중하라, 경솔하거나 급해지지 말라.
바둑을 경솔하게 빨리 두지 말고 한 수 한 수를 신중하게 생각하며 두라는 조언이다. 감각이 좋은 사람들은 착수를 결정할 때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아 대체로 속기파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빠른 착점은 수읽기의 부재로 인해 착각과 실수를 동반하기 쉽다. 그래서 고수들은, 매 수마다 의미를 부여하며 착점하는 습관을 지닐 것을 조언한다.
動須相應(동수상응) - 마땅히 서로 호응하도록 움직여라.
바둑돌 하나 하나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므로 착점을 결정하기 전에 자기편 돌의 능률과 더불어 상대편의 움직임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행마를 할 때는 모름지기 기착점들이 서로 연관되게, 호응을 하면서 이끌어 가는 방향으로 전개해야 할 것이다. 이미 착수된 돌들도 상황에 따라 역할이 시시각각 변한다. 바둑은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로, 이 흐름을 이해하면 고수가 될 것이다.
彼强自保(피강자보) - 적이 강하면 나부터 지켜라.
주위의 적이 강한 경우에는 우선 내 돌을 먼저 보살펴야 한다. 상대의 집이 커 보인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뛰어들거나 내 돌의 약점이 많은 곳에서 무모한 싸움을 벌이는 것은 바로 패배하는 지름길이다.
勢孤取和(세고취화) - 세력이 고립되면 조화를 취하라.
상대 세력 속에 고립되어 있는 경우에는 신속히 안정하는 길을 찾고, 화평을 구해야 할 것이다. 피강자보와 같은 의미를 담은 경구로, 최후의 승리를 위해 순간의 굴욕이나 웅크림을 감수하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다.
세고취화의 실전 사례
양이(兩李)로 불리는 이창호 9단(백)과 이세돌 9단의 대국. 좌변의 흑 두 점이 공격을 당하는 상황. 이세돌 9단이 어떻게 타개를 할 것인가 주목되는 상황에서, 흑 1, 3으로 두어 상대의 세력이 강한 곳에서 화평을 구했다. 결론적으로 좌중앙의 흑세가 커지면서 흑이 우위를 잡게 되었다.
위기오득(圍棋五得)
또한 바둑을 두면 얻을 수 있는 다섯 가지 이로운 점이 있다고 해서 이를 ‘위기오득(圍棋五得)’이라 한다.
득호우(得好友) - 바둑을 통해서 좋은 벗을 얻는다.
바둑을 두기 위해 마주 앉았으니 이미 좋은 친구요, 또한 서로를 배려하며 한 판의 바둑을 함께 완성해가니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다.
득호우(得好友)
공명정대하게 승패를 다투는 바둑은 승부를 통해 우의를 다지고 벗을 만들 수 있는 매력이 있다.
득심오 (得心悟) – 오묘한 삶의 이치를 깨닫는다.
바둑은 승패를 다투면서도 조화를 이뤄가며 그 과정 속에서 예술과 사유가 발생하니 대국 중에 절로 오묘한 삶의 이치를 터득하게 한다.
득인화 (得人和) - 사람들과 화합할 수 있다.
바둑을 매개로 사람들과 교분을 나누니 저절로 인화를 얻을 수 있다. 바둑판 앞에서는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그 어떤 것도 차별 없이 동등하게 흑과 백으로 마주앉게 된다. 바둑은 이점에서 세계 평화의 도구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득인화 (得人和)
국내에서 열리는 바둑대회나 각종 행사에서 외국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득교훈 (得敎訓) - 인생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인생의 축소판인 바둑을 통해 삶의 지침을 얻는다. 지나간 인생은 되돌려 다시 시작할 수 없지만 바둑에는 ‘복기’가 있어서 자신의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고 반성할 수 있다. 바둑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욱 알차고 풍성하게 살아갈 기회를 얻는다.
득천수 (得天壽) - 바둑을 두면 천수를 누릴 수 있다.
앞의 네 가지를 모두 이룬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천수를 누리는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바둑책인 '기지(碁旨)'를 쓴 반고 (班固)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주 대자연의 음양원리를 원용한 바둑은 상대성을 추구하는 놀이다.
이를 즐기며 체득하는 동안, 인간은 우주 원리에 순응하는 법을 알게 되고
그로써 수명을 늘여 장수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