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기의학(運氣醫學)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나라 고유 의학이론인 운기의학에서는 사람이 타고 난 시간(時間)에 따라 체질을 구분한다.
똑같은 질병이라도 사람, 때(시간)에 따라 다른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에서 김태희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태희 원장은 국내 운기의학의 최고 권위자다.
김 원장은 “사람의 체질을 오양(五陽)으로 구분하고, 이를 다시 태어난 날과 비교해가며,
미병(未病·건강하지 않은 몸 상태)의 원인을 찾아낸다는 점에서 운기의학은 우리의 놀라운 문화유산”이라고 설명했다.

운  기의학은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사람의 체질을 구분하는 우리나라 정통 의학이론이다. 역사도 상당히 오래됐다. 이론적 배경을 꼽으라면 조선조 영조가 등극한 1725년, 초창(草窓) 윤동리 선생이 편찬한 <초창결(草窓訣)>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의학계에서 윤동리 선생은 숙종과 영조 시대를 걸쳐 활동한 유의(儒醫)로 알려져 있다. 파평윤씨 가보(家寶)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초창결>에서 윤동리 선생은 운기론(運氣論)을 설명하면서, “사람은 태어난 날에 따라 정해진 체질이 있기 때문에 병의 원인과 치료법도 이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창결>은 초간본 발간일을 기준으로 할 때, 1894년 <동의수세보원>에서 발표된 동무(東武) 이제마 선생의 사상의학(四象醫學)보다 오래됐다.

<초창결>의 이론적 우수성은 1935년 당시 유명한 한의사였던 조원희 선생이 펴낸 <오운육기의학보감>에 재등장하면서 또다시 입증됐다. 조원희 선생은 <오운육기의학보감>에서 기존 운기론에 체질감별법까지 포함시켜, 이론을 한 단계 더 체계화시켰다. 실제로 한국의학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일본인 의학자 미키 사카에(三木榮)는 “조선조에는 운기의학을 전문으로 하는 ‘운기의(運氣醫)’가 많이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내 한의학계에서 운기의학은 비(非)정통 이론으로 취급돼 왔다. 주역의 일종인 사주팔자 정도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국내 운기의학의 최고 권위자인 김태희 김태희한의원 원장은 “운기의학은 사람이 태어난 시각만 따져 치료하는 의학이론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완전히 학문을 호도하는 것”이라면서 “운기의학은 환경, 생활습관, 이전에 앓았던 가족력 등을 파악하는 데 활용되는 중요한 이론”이라고 주장했다. 1987년 경희대에서 한의학 박사학위를 받은 김 원장은 상지대 한의과대 학장과 부속한방병원장, 가천대(옛 경원대) 부속 서울한방병원장을 역임했다.

 
- 김태희 원장은 “생년월일에 따라 구분된 자신의 체질을 알아두는 것이 질병 예방 차원에서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사상의학보다 100년 앞선 의학이론
운기론은 태어난 날짜에 따라 화, 수, 목, 금, 토로 나눈다. 5개 체질을 다시 각 5개로 구분하니, 체질 수는 모두 25개가 된다. 이밖에도 김 원장이 지난 2011년 펴낸 저서 <운기의학>에는 생년월일에 따라 사람을 5운(運)과 6기(氣)로 나눴다. 운기에 따라 사람의 체질은 600가지다.

여기서 말하는 5운이란 앞서 말한 5개 체질이다. 그리고 6기란 풍목(風木), 군화(君火), 상화(相火), 습토(濕土), 조금(燥金), 한수(寒水)다. 이를 위해 생년월일만으로 자신의 체질을 알 수 있도록 120년간의 운기분류조견표를 집어넣었다. 갑자(甲子)에서 계해(癸亥)까지 60갑자 조건표는 조원희 선생의 <오운육기의학보감>에서 그대로 따왔다.

김 원장에 따르면, 사람의 몸에는 기(氣)와 혈(血)이 있다. 기는 전기처럼 우리 몸을 순환하는 것이고, 혈은 기름처럼 우리 몸에 필요한 물질이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혈이 기를 따라가며 필요한 곳에 잘 도달하는데, 이것이 원활하게 돌고 돌지 못하면서 생체 리듬이 깨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특정 체질이라도 매년, 매월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일반인들은 왜 운기의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까. 김 원장은 미병(未病), 다시 말해 아직 병으로 진전되지 않은 질병 요소를 예방한다는 차원에서도 운기의학은 재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태어난 날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듯, 사람의 체질도 한번 정해지면 평생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야 합니다. 아울러 사람의 체질은 우열(優劣)도 없습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는 게 사람 체질입니다.”

결국 운기의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우리 스스로가 건강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이다. 김 원장은 “가령, 화 체질의 아이는 장시간 앉아서 공부하는 게 힘든 체질이다. 또한 선생님이 가르칠 때 서론, 본론, 결론으로 설명하면 끝까지 듣는 게 힘든 성격이라서 결론부터 말하고 왜 그런지 설명해주는 것이 좋다”며 “체질에 따라 공부하는 방법, 아이에 맞는 선생님의 지도 스타일, 몸에 좋은 음식 등이 다 다르다”고 강조했다. 체질에 따른 아이의 특징, 체크포인트를 알려주고 이를 지켜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한다면 집중력은 자연스럽게 향상된다는 것이다. 

 
- 김태희 원장은 진단학 분야에서도 국내 최고 권위자다.

국내 맥학 분야 최고 권위자
김 원장은 국내 진단학 분야에서도 권위자로 꼽힌다. 그중에서도 맥학(脈學)이 전문이다. 그가 쓴 교과서만 해도 여러 권이다. 현재 전국 한의대에서 필수 교재로 꼽히는 <한방진단학>, <변증진단학>(이상 공저)이 대표작이다. 김 원장은 ‘맥(脈)’은 사람의 체질과 질병을 진단하는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에 객관적 지표 등 정확한 진단 표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원장은 ‘송대의학의 학술적 특징’과 ‘내경의 맥진과 후대의가설의 비교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경희대 한의과대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갑자기 김 원장이 한의사가 된 배경이 궁금했다.

“제가 어린 시절 잔병치레를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의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죠. 1972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중국 전통의학인 중의학이 세계 언론으로부터 주목받은 것도 제가 한의사를 평생의 업(業)으로 삼은 이유라고 할 수 있어요.”

김 원장의 진료실은 고서(古書)로 가득하다. 의학이론서보다는 주로 오래된 고문서를 연구하는 데 쓰는 한자 자전(字典) 등이 많다. 그는 진료가 없는 시간마다 틈틈이 시간을 내, 연구에 매진한다. 이러한 학습관은 1975년 경희대 한의대에 입학한 뒤 학내 동아리인 고전독서회에서 회장으로 활동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오고 있다. 고전독서회는 사서(대학, 중용, 논어, 맹자), 삼경(시경, 서경, 역경) 등 동양 사상의 근간이 되는 고전을 수업 전 새벽마다 강독(講讀)하는 모임이다. 

“저에게 학문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을 꼽으라면 딱 네 분이 생각납니다. 첫 번째가 홍원식 교수님으로 저에게는 아버지 같은 분이셨어요. 홍 교수님은 제 진로와 연구 방향에 대해 보이지 않게 도움을 주신 분이죠. 학창 시절 고전독서회 지도교수님이시면서 석·박사 과정 지도교수님을 맡아주신 분이 홍 교수님이셨어요. 두 번째로는 안병국 교수님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에게 학문적 방향을 제시해주신 분이죠. 학창시절 안 교수님 하면 생각나는 게  ‘그래, 그럼 그걸 한 마디로 표현해봐라’는 것이었어요. 어떤 주장에는 반드시 ‘명확성’이 뒤따라야 한다는 걸 강조하시던 분이셨죠. 이종형 교수님도 생각나네요. 구한말 마지막 전의(典醫)였던 청강(晴崗) 김영훈(金永勳) 선생님의 수제자이시기도 한 이 교수님은 환자를 정확하게 진단해 치료하는 법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인생에 중요한 분이 박찬국 교수님이세요. 홍 교수님이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면, 박 교수님은 형 같은 분이셨죠. 오늘날로 치면 멘토 역할을 해주셨다고 할 수 있어요.”

화제(話題)는 자연스럽게 현대 한의학의 위상에서 이어졌다. 김 원장은 한의학에 대한 몇 가지 잘못된 인식이 시장을 왜곡시킨다고 걱정했다.  

“가령, 한약은 효과가 더디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말 심각한 왜곡입니다. 더디게 나타나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먹는 즉시 효과가 나타나기도 해요. 오히려 양방(洋方)보다도 더 빠르죠. 그럼 한의학에 왜 이런 이미지가 생겨났을까요. 저는 그 원인을 한의학의 또 다른 장점에서 찾고 싶습니다. 한의학은 개별 환자에 맞는 맞춤형으로 처방할 수 있는 것이 엄청난 장점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체질이라는 개념이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체질에 따라 다르게 처방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춤형으로 질병을 치료하기 때문에, 한의학에서는 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예전에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는 술집 주인을 치료한 적이 있었어요. 불면증으로 고민하며, 정신병원에까지 가서 보름 동안 입원했는데도 치료가 안 된다며 저를 찾아왔어요. 보름 동안 한숨도 못 잤다며 말이죠. 그래서 제가 열로 인한 불면을 원인으로 보고 청상사화탕(淸上瀉火湯) 5일치를 주었는데, 정말 감쪽같이 완치됐습니다. 또 어떤 환자의 경우 미릉골통(眉稜骨痛) 즉, 눈썹 부위에 칼로 찌르는 듯한 증상을 호소해,<동의보감> 처방에 따라 약 6첩 정도를 써서 완치했던 기억도 납니다.”


- 김 원장(오른쪽)은 “맞춤형으로 병의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한의학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맞춤식으로 치료하는 것이 한의학의 장점
대학병원 원장과 한의대 학장을 역임한 김 원장은 의료행정에 대해서도 분명한 소신을 밝혔다. 

“리더십은 구성원들이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들의 경우에는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 제일 중요하죠.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연구실과 실험실 등의 확충을 도와주어야 해요. 또 직원들이 직장생활을 통해 상당한 이득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금전적인 것과 자기계발에 대한 배려 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대인들은 질병에 쉽게 노출돼 있다. 운동 부족, 과로, 스트레스 등으로 인한 체력 저하는 모든 직장인들의 걱정거리다.

“스트레스는 진짜, 만병의 근원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과잉 영양섭취를 꼽기도 하는데, 기록을 보면 조선 영조 때 도성(都城)에서 소를 하루에 100마리씩 도축했다는 내용이 있어요. 당시 도성 인구를 감안하면,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죠. 다시 말해 과잉영양 섭취 문제는 예전에도 있었어요. 그보다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느냐가 중요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김 원장 진료실 주변을 둘러보니, 키보드 건반에 테너, 바리톤, 알토 등 다양한 색소폰이 진열돼 있다. 진료 의자 뒤편으로는 간이 골프퍼팅연습기구와 목검(木劍)이 눈에 들어왔다. 김 원장은 바쁜 와중에도 짬짬이 시간을 내 악기 연주 등 취미생활을 한다. 김 원장은 한자가 빼곡한 한의학 원서를 보다가도, 이따금씩 기분 전환차 색소폰 한 곡조를 뽑는다. 이것이 그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 김태희 원장은…
1955년 부산 출생, 81년 경희대 한의학과 졸업, 87년 경희대 한의학 박사학위 취득, 89년 상지대 한의과대 교수, 94년 상지대부속 한방병원장, 96년 상지대 한의과대학장, 2004년 대한한의학회 진단학회 회장, 2007년 가천대(옛 경원대) 한의과대 교수 겸 부속 서울한방병원장 원장, 2009년~현재 김태희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