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
낙엽 떨기나무이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작약속(Paeonia) 식물 가운데 중국 원산으로서 재배하며, 꽃이 크고 풀이 아니라 떨기나무이므로 구분된다.
줄기는 가지가 갈라지고, 높이 1-2m이다.
잎은 어긋나며, 2번 3갈래로 갈라진 겹잎이다.
중앙의 작은잎은 넓은 난형, 3갈래로 얕게 갈라지고, 길이 7-8cm, 폭 5-7cm이다.
잎 앞면은 녹색, 뒷면은 연한 녹색이다.
꽃은 가지 끝에 1개씩 피며 지름 10-20cm, 흰색, 붉은색 등 여러 가지 색이다.
꽃싸개잎은 5장, 긴 타원형이다.
꽃받침잎은 5장, 녹색이다.
꽃잎은 5장 또는 그 이상이다. 수술은 많다.
가지/목피
높이가 2m에 달하며 가지가 굵고, 줄기의 직경이 15㎝인 것도 있으며 털이 없다.
잎
잎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뉘어지는 2회 우상복엽이며, 소엽은 난형 또는 피침형이고 흔히 3-5개로 갈라지며 표면은 털이 없고 뒷면은 잔털이 있으며 대개 흰빛을 띤다.
꽃
꽃은 양성화로서 5월에 피며 10개 정도의 꽃잎이 있고 지름 15cm이상이고 새로 나온 가지끝에 크고 소담한 꽃이 한 송이씩 핀다. 꽃색은 자주색이 보통이나, 개량종에는 짙은 빨강, 분홍, 노랑, 흰빛, 보라 등 다양하며 홑겹 외에 겹꽃도 있다.
화탁이 주머니처럼 되어 자방을 둘러싼다.
꽃받침잎은 5개이며 꽃잎은 8개 이상이고 크기와 형태가 같지 않으며 도란형으로서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결각이 있다.
수술은 많고 암술은 2-6개로서 털이 있다.
열매
골돌과는 혁질이며 짧은 털이 빽빽하게 나고 7-9월에 익으며 내봉선(內縫線)에서 터져 종자가 나오며 종자는 둥글고 검다.
용도
재배품종들이 많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뿌리를 약용으로 쓰려고 재배하고 있다.
뿌리의 껍질은 해열·진통·진경(鎭痙)·구어혈(驅瘀血)·통경(通經)·양혈(凉血)·소염(消炎)의 효능이 있어 약재로 이용한다.
약성은 양(凉)하고 신고(辛苦)하다.
각종 열성병의 항진기(亢進期), 골증노열(骨蒸勞熱)·경간(驚癇)이나 각종 혈행장애·월경불순·폐경·질타손상(跌打損傷)·옹종(癰腫) 등에 탕(湯)·환(丸) 또는 산제(散劑)로 하여 복용한다.
요즘은 꽃 요리에 이용되기도 한다.
풍성하고 매력적인 꽃이 부귀를 상징하므로 고풍스러운 정원에 잘 어울린다.
모란은 꽃이 화려하고 풍염(豊艶)하여 위엄과 품위를 갖추고 있는 꽃이다.
그래서 부귀화(富貴花)라고 하기도 하고, 또 화중왕(花中王)이라고 하기도 한다.
모란은 장미와 함께 인간이 긴 세월에 걸쳐 만들어 낸 최고의 예술품이다.
그것도 살아 있는 예술품인 것이다.
호화현란(豪華絢爛)한 아름다움과 기품에 있어서는 서로 비견되지만 풍려(豊麗)함으로는 모란이 단연 돋보인다.
모란은 장미에 비해 그 꽃모양이 장려(壯麗)하고 소담스러우면서 여유와 품위를 지니고 있다.
모란은 백화의 왕이라고 할 만큼 그 아름다움을 진중(珍重)하고 있는 나머지 이명(異名)도 대단히 많다.
목작약(木芍藥)을 비롯해서 화왕(花王)·백화왕(百花王)·부귀화(富貴花)·부귀초(富貴草)·천향국색(天香國色)·낙양화(洛陽花)·상객(賞客)·귀객(貴客)·화신(花神)·화사(花師)·화사부(花師傅) 등 극히 귀한 이름들이 눈에 띈다.
또 모란의 품종 이름이면서 모란의 이명처럼 알려져 있는 것으로 요황(姚黃)·위자(魏紫)·일녑홍(一捻紅) 등이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먼저 모란의 이명(異名)에 관한 설명과 함께 모란의 중국에서의 발전과정을 살펴보자.
모란은 가장 중국적인 꽃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모란 문화는 그대로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우리의 꽃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모란의 이명인 목작약은 작약과 비슷한 목본이란 뜻이다.
모란과 작약은 다 같이 그 꽃모양이 장려하고 잎모양이 단정하여 모든 꽃 가운데 뛰어나다고 일컬어져 왔다.
그래서 "앉으면 모란, 서면 작약"이란 말도 생겨났다.
중국사람은 이 두 가지 꽃을 다 같이 사랑하여 나무에 속하는 모란과 풀에 속하는 작약을 접목·교배 등을 해서 친족관계에서 혈족관계로까지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모란을 목작약이라 하고 작약을 초목단(草牧丹)이라고 하기까지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목경해고(木經解故)》에는 "옛날 목작약이라고 하는 것은 모란을 지칭한 것이다. 모란은 처음에는 따로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작약을 빌어 모란의 이름에 사용하였다"라고 하고 있다.
또 《본초강목》에는 모란에서 "당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목작약이라고 불렀다. 꽃은 작약과 비슷한데 몇 년을 지난 그 줄기는 나무를 닮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있다.
목작약이라는 이름도 당나라에서 나왔는데 궁중에서는 현종의 개원(開元, 713~741년) 이전부터 모란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나 천보(天寶, 742~756년) 이후에 민간에서도 모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종전처럼 목작약으로 부르지 않고 모란으로 부르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해서는 수·당(隋唐)시대에 히말라야의 부탄지방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서방의 나라 부탄과 발음이 비슷한 모란(중국에서는 '무탄'으로 발음한다)이란 말을 선정해서 이름을 붙이게 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확인된 것은 아니다.
모란의 원산지는 중국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또 이수동(李樹桐)은 〈당인희애모란고(唐人喜愛牧丹考)〉라는 글에서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9세기 전반 서원흥(舒元興)의 〈모란부(牧丹賦)〉 서(序)에서는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모란을 고향인 서하(西河, 산서성)에서 궁중의 어원에 이식하여 점차 장안에 퍼지게 되었다고 하고 있으므로 모란이란 이름은 무후의 황후시대인 고종조(高宗朝, 649~683년)에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남자인 고종은 꽃이름을 고치는 것과 같은 소소한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무후는 그녀와 대립하고 있던 왕황후(王皇后)와 소양제(蕭良娣, 양제는 황후 아래에 있는 여관의 관명)를 죽이고는 왕씨의 성을 망(蟒, 구렁이)씨, 소씨의 성을 효(梟, 올빼미)씨로 고쳤다.
또 황제가 되고나서 거란(契丹)의 이진충(李盡忠)·손만영(孫萬榮)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들의 이름을 이진멸(李盡滅)·손만점(孫萬漸)으로 고쳐 버렸다.
이로 미루어 목작약을 모란으로 이름을 바꾼 것도 무후일 것이라는 짐작이 가는 것이다.
그런데 모란의 한자 글자를 보면 모(牡, 중국발음 mŭ)는 목(木, mū)와 음이 가깝고 단(丹)은 당나라 황제가 즐겨 복용한 선약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작약의 약을 단(丹)으로 바꾸고 목을 대신한 모(牡)를 합해서 모란(牡丹)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더구나 모(牡)는 남성을 의미하고 단(丹)에는 단심(丹心)·단성(丹誠)의 뜻이 있으므로 술어로서의 모란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는 천하의 남자가 그녀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모란의 자의(字義)를 직접 해석한 당대(唐代)의 사료가 없는 이상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다.
다음 화왕과 백화왕은 말할 것도 없이 모든 꽃 가운데 가장 호화롭고 아름다운 꽃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작약과의 관계를 분명히 해둘 필요가 생겼다.
그리하여 이 두 가지 꽃을 비교해서 풍염농후한 모란에 비해서 약간 순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작약과의 관계를 화왕(花王)과 화상(花相)으로 구별했다.
모란이 백화 가운데 왕이라면 작약은 재상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란이 제1위, 이어서 작약이 제2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화암수록》 〈화품평론〉에서는 "작약은 충실하고 화려함이 화왕(모란)보다 못하지 않으므로 아마도 화왕에게 머리를 숙이고 신하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다음 부귀화·부귀초인데, 부귀란 중국에서는 '재산이 많고 신분이 높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모란은 그러한 성격을 가진 명화(名花)라는 뜻이다.
그것은 꽃이 풍기는 화려함과 덕스럽고 부귀로운 분위기를 나타내는 품격 때문이다.
상객·귀객·화신·화사·화사부 등도 이에 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천향국색(天香國色)은 문헌에 따라서는 국색천향이라고 하고 있는 곳도 있다.
국색은 나라 가운데서 가장 미인이란 뜻이고 천향은 하늘에서 내려진 향기라는 것인데 대단히 좋은 향기라는 뜻이다.
즉 하늘에서 내려진 것과 같은 향기로움을 지니고 나라 안에서 제일 가는 미인과 같이 아름다움을 지닌 꽃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현종이 모란꽃을 감상하며 즐기다가 "모란을 읊은 시 가운데 누구의 것이 가장 훌륭한가"라고 물으니 정수사(程脩巳)가 이정봉(李正封)의 다음 두 구절을 일러 드렸다.
나라에서 으뜸 미인의 얼굴엔 아침에도 술기운이 돌고 國色朝酣酒
천계의 맑은 향기가 밤에 옷에 스며드네 天香夜染衣
이 시를 본 현종은 뜻밖의 생각에 미쳐 곧 귀비에게 거울 앞에서 황금의 술잔을 들고 시의 뜻에 맞는 포즈를 취하게 하고는 만열(滿悅)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모란의 짙고 아름다운 자태를 '국색천향'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다만 이 시의 작자 이정봉은 현종보다 뒤의 인물이다).
《모란보(牧丹譜)》에는 양비취구(楊妃醉毬)·취옥환(醉玉環, 옥환은 귀비의 어릴 때의 이름)·양비심취(楊妃深醉)·태진만장(太眞晩妝, 태진은 귀비가 여도사로 있을 때의 이름)·태진관(太眞冠)·일녑홍(一捻紅) 등 양귀비와 연유한 품종의 이름이 많이 보이는데 이것은 그만큼 모란과 양귀비와의 인연이 깊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일녑홍이란 꽃은 양면(楊勉)이 현종에게 헌상한 모란으로 뒤에 양귀비에게 주어졌는데 화장을 하던 그녀가 무심코 지분이 묻은 손으로 꽃잎을 만졌는데 그후 이 모란은 홍색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종은 이 모란을 일녑홍이라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낙양화(洛陽花)는 낙양의 꽃이라는 뜻이다.
낙양은 동주(東周)·후한(後漢)·위(魏)·서진(西晋) 등이 도읍한 중국의 역사상 가장 유서깊은 도시이다.
이곳에는 옛부터 모란 재배가 성행하였다.
또 요황(姚黃)과 위자(魏紫)라는 꽃이름이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요황은 요가(姚家)에 황색의 아름다운 모란꽃이 있어 그렇게 불렀고 또 위자는 위가(魏家)에 붉은색의 아름다운 모란꽃이 있어 그렇게 부르게 되었는데 그 꽃이 너무 아름다워 후대에 내려오면서 모란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었다.
《화암수록》에도 모란의 이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산림경제》(진고사책)에서는 모란의 천엽자(千葉者)를 경화(京花)라고 하는데 이는 낙양화의 일종이고 단엽자(單葉者)를 천화(川花)·산화(山花)·산단(山丹)이라 부른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심거나 접을 붙이는 것은 추사(秋社) 전후가 좋다고 하고 중추(中秋)를 이 꽃의 생일이라 하는데 이때 이식을 하면 반드시 무성하게 자란다고 하였다.
모란은 중국이 원산지이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많이 개량되었으며 중국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받아온 꽃이다.
그래서 가장 중국적인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란은 수나라 때(6세기)에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서 재배식물로 재배하게 되었는데 그후 당대(7~8세기)에 이르러 크게 유행하였다.
《오잡조(五雜俎)》에는 당나라 고종과 무후(武后)시대에 모란이 처음으로 후원에 심어져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현종의 개원(開元) 연간에는 궁중을 비롯해서 민간에서도 다투어 배양하여 진중(珍重)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장안에서는 5월이 되면 온 도시가 모란꽃으로 가득차고 곳곳에서 품평회나 원유회가 열리고 꽃구경하는 사람이 넘쳤다고 한다.
그 모습을 "장안 사람들은 성을 비우고 나와서 취한 듯 미친 듯 하였다(長安人傾城而出如醉似狂)"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모란이 문학작품에 오르게 된 것은 현종의 개원(開元, 713~741년) 연간 말기에 배사엄(裵士淹)이 분주(汾州, 산서성 근처)에서 백모란을 한 포기 장안에 이식한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 새로운 재배 화목이 그렇게도 짧은 기간내에 최고의 꽃의 지위까지 뛰어오르게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물론 모란꽃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풍려함, 부귀의 품격, 조형적 아름다움이 자연히 관상자를 압복(壓服)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당 현종이 모란을 편애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현종은 또 모란 이외에 풍만염려한 양귀비를 편애했다.
현종은 장안의 흥경궁(興慶宮)에 양귀비를 데리고 나아가 주연을 베풀었다.
흥경궁 정원에는 황제의 권력으로 수집한 수많은 모란이 식재되어 있었다.
현종은 시인 이백으로 하여금 꽃과 미인을 읊은 시를 짓게 하였다.
이 시에서 이백은 명화인 모란과 경국(傾國)의 미인과의 무비(無比)한 풍려(豊麗)를 상찬했다.
이렇게 해서 모란은 드디어 화왕의 지위에 오르게 되고 또 최고의 미인의 상징으로 일반 세인의 진상애완(珍賞愛翫)하는 바가 되었다.
이후 모란은 송나라 때까지 그 왕위를 물려주지 아니하였다.
그런 가운데 모란을 또 유명하게 만든 것은 북송(北宋)의 정치가이자 문인으로 이름 높은 구양수(歐陽脩)가 쓴 〈낙양모란기(洛陽牡丹記)〉이다.
그는 이 글 가운데서 "모란에 이르러서는 굳이 꽃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고 바로 꽃이라고 한다. 그 뜻은 천하의 진정한 꽃은 오로지 모란 뿐이라는 것이다(至牡丹則不名 直曰花 其意謂天下眞花獨牡丹)"라는 최상의 예찬을 헌사하고 있다.
중국인은 모란을 사랑하여 모란꽃 아래에서 죽는 것을 일종의 풍류로 생각할 정도였다.
명대(明代)에 탕현조(湯顯祖)의 희곡 〈모란정환혼기(牡丹亭還魂記)〉는 두보(杜甫)의 딸 여랑이 유종원(柳宗元)의 28대손 유춘경과 모란정에서 환생하여 사랑한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에 "모란꽃 아래에서 죽어 풍류로운 귀신이 되고지고(牡丹花下死做 渾世風流)"라는 시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그러한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 사람들의 모란 애호는 대단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모란 재배가 대단해서 양자강 이북 지방에서는 훌륭한 모란원이 많다고 한다.
이리하여 중국에서 모란은 온 국민의 꽃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중국민족 전체의 번영을 상징하는 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이유로 한때 모란은 당대 이래 중국의 국화였다는 설이 있다.
명대(明代) 북경의 모란 명소로 알려진 극락사(極樂寺) 한쪽에는 국화당(國花堂)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황제가 좋아했던 꽃이라는 의미였고 모란이 정식으로 국화로 선정된 사실(史實)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란이 구미(歐美)에 건너간 것은 화란의 동인도회사가 1656년에 중국에서 도입한 것이 최초이다.
그후 영국·프랑스 등에도 중국에서 모란이 건너갔고 특히 프랑스에서 품종 개량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모란과 작약은 우리나라나 중국·일본에서는 구별해서 취급하고 있지만 구미에서는 양자를 다 같이 피오니(peony)라고 부르고 있다.
구태여 구별할 때는 목성(木性) 피오니, 초성(草性) 피오니라고 한다.
모란이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신라 진평왕 때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는 진평왕 때 "당 태종(太宗)이 붉은색·자주색·흰색의 세 빛깔의 모란을 그린 그림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신라 말엽의 최치원(崔致遠)이 각 사찰과 석대(石臺)를 돌아다니면서 모란을 심었다는 고사도 있다.
고려시대에 내려와서도 모란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문헌에 자주 나타난다.
현종 때에는 대궐 안 사루(紗樓) 앞에 손수 모란을 심었으며 예종은 이 사루에서 모란 시를 짓고 유신들에게 명령하여 화답시를 짓게 하였는데 그 이전 덕종으로부터 숙종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모란꽃을 읊고 신하들은 이에 화답하는 행사가 되풀이되었다고 한다.
의종 때 임춘(林春)의 《서하집(西河集)》에 실린 〈양국준가정홍모란(梁國俊家紅牡丹)〉이란 시에서는 "벼슬하는 집들은 다투어 모란을 심는다"는 구절을 볼 수 있다.
그후 충숙왕 때에는 왕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여 본국으로 돌아올 때 원나라 천자가 진귀한 화초를 많이 주었는데 그 중에 황·백·적·홍색의 모란이 들어 있었다고 하므로 모란은 그때 이미 여러 가지 색깔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고려 중기 이후에는 궁중은 물론 권문세가들이 서로 다투어 진귀한 품종을 집안의 정원에 심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는데 그것이 너무 호화롭고 사치스럽다 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던 것 같다.
《고려사》 〈열전〉에는 기홍수(奇洪壽)와 차약송(車若松)이 어느날 관청에 앉아 모란 기르는 법을 논했는데 사람들이 호화사치를 숭상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 고분에서 발굴된 부장품인 화운개(花雲蓋) 등에서는 모란꽃 문양이 발견되고 있다.
이로 보면 고려시대의 귀족들은 사후에도 모란꽃을 좋아하고 부귀를 누리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고려시대에 그렇게도 대단했던 모란에 대한 애상 열기는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유교사회에서 아취와 고절을 숭상하는 선비들의 꽃에 대한 애상의 열의가 모란에서 매화나 국화로 옮겨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고 넉넉하며 화려하고 농염한 모란에 대한 애호 열기가 쉽사리 가라앉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일반민중의 생활 속에 침투되어 애호의 정도가 더욱 깊어진 면도 없지 않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에서는 모란은 설명의 대상에서 빠져 있다.
그러나 《화암수록》에 실려 있는 그의 〈화목구품(花木九品)〉에서는 1품의 송(松)·죽(竹)·매(梅)·연(蓮)·국(菊)에 이어 2품으로 모란 하나만을 올려 놓았다.
또 《화암수록》의 〈화목구등품제(花木九等品第)〉에서는 모란을 작약·왜홍(倭紅)·해류(海柳)·파초와 함께 부귀를 취하여 2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모란의 품종에 정황색·대홍색·도홍색·분홍색·자색·백색·청색의 여섯 가지 색깔에 120종이 있다고 하였다.
또 모란을 심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특이하게 "모든 꽃은 대체로 봄철에 심는 것이 보통인데 오직 모란만은 입추(立秋) 뒤 다섯 번 째 무일(戊日)을 전후하여 심고 또 접붙이는 것이 좋다"고 하고 있다.
또 같은 《화암수록》의 〈화목이십팔우(花木二十八友)〉에서는 모란을 열우(熱友), 작약은 귀우(貴友)라고 하고 있다.
끝으로 만생모란(蔓生牧丹)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에 적는다.
원래 모란은 덩굴이 지는 식물이 아니다. 따라서 현존하는 덩굴모란도 볼 수 없다.
그런데 《지봉유설》과 《대동야승(大東野乘)》에는 덩굴모란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대동야승》의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란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심고 있으나 아직까지 덩굴로 나는 것은 없다.
함경도 경흥(慶興) 땅에 바로 덩굴로 난 모란이 있는데, 식자들은 생각하기를 여기를 금(金)나라 황룡부(黃龍府)의 땅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부(府)에서 6~7일의 일정밖에 안 걸리기 때문이다.
금나라 사람이 송나라 간악(艮岳)의 화목을 다 옮겨다 황룡부에 심었다는데 이것은 그 종자다.
또 고찰해 보면 송경(松京, 지금의 개성)에 진봉산(振鳳山)이 있는데, 도성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몇 리 안 가서 옛 절터가 있는데, 돌틈에 덩굴로 된 모란이 있다.
붉은것과 흰것이 서로 섞여 나와 돌 위에 뻗었는데, 사람들이 옮겨다 심으려고 해도 그 뿌리가 돌 사이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캐어 내지 못한다. 산불이 나서 매양 타 버리지만 죽지도 아니한다.
위의 기록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러한 식물이 존재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
런데 우리나라 도자기의 무늬 가운데는 모란꽃이 덩굴과 함께 그려져 모란당초문(牡牧丹唐草紋)이라 불려지는 문양이 많다.
그러나 이것을 실재로 있는 덩굴모양을 본따서 만든 문양으로 보기는 어렵고 아마 모란문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또 부귀의 연속이라는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것으로 생각된다.
모란은 예로부터 부귀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설총(薛聰)의 「화왕계(花王戒)」에서도 모란은 꽃들의 왕으로 등장하고 있다.
강희안(姜希顔)은 그의 저서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화목 9등품론이라 하여 꽃을 9품으로 나누고 그 품성을 논할 때, 모란은 부귀를 취하여 2품에 두었다.
이와 같은 상징성에 따라 신부의 예복인 원삼이나 활옷에는 모란꽃이 수놓아졌고, 선비들의 소박한 소망을 담은 책거리 그림에도 부귀와 공명을 염원하는 모란꽃이 그려졌다.
왕비나 공주와 같은 귀한 신분의 여인들의 옷에는 모란무늬가 들어갔으며, 가정집의 수병풍에도 모란은 빠질 수 없었다.
또, 미인을 평함에 있어서도 복스럽고 덕 있는 미인을 활짝 핀 모란꽃과 같다고 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