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사 산벚나무
◆ 답사일 : 2019. 4. 2 (맑음)
◆ 답사자 : 초암
부인사
부인사 사적기에는 1928년의 대화재로 전각 전체가 불타고 ‘선덕묘(善德廟)만 남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음력 3월
보름에 선덕여왕 숭모제를 지내왔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자리로 선덕묘를 이전하면서 숭모전(崇慕殿)이라 편액 했다.
고려조에는 팔공산이 불교의 중심지였다.
그 중에서 고려의 국지대보(國之大寶)이자 문명의 상징이었던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과 속장경(續藏經)을 봉안했던 부인사는 교종불교(敎宗佛敎)의 총 본산이었다.
거조사(居祖社)는 보조국사 지눌이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주창하여 고려불교의 혁신을 이끌었던 선종불교의 태두(泰斗)였다.
부인사가 언제 창건됐는지는 알 수 없다.
2008년에 건립된 부인사사적기에는 ‘중악공산(中岳公山) 부인사(符仁寺)는 한국 제일의 호국 대가람이며 불법장흥(佛法長興), 법수장류(法水長流)의 성지다.
선덕여왕 13년(644년)에 일통삼한의 호국도량과 아울러 모후 마야부인의 명복을 비는 원찰 부인사(夫人寺)를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범우고(梵宇攷ㆍ1799년)와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ㆍ1832년), 영남읍지(嶺南邑誌ㆍ1895년)에는 ‘신라 성덕왕(재위 702∼737) 때 창건했다’고 전한다.
일설에 선덕(善德)과 음이 비슷한 성덕왕대로 와전된 것이라고 하나 오히려 ‘부인사(夫人寺)’라는 사명으로 인해 성덕(聖德)이 선덕(善德)으로 와전됐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1989년 이후 3차례에 걸친 부인사지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녹유전(綠釉塼)과 토불(土佛)을 비롯한 출토 유물과 3층 석탑과 석등, 당간지주 등의 석조유물 등이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2대 남해차차웅의 왕비를 운제부인(雲帝夫人)이라 한 예와 같이 신라에서는 왕비를 부인(夫人)이라 호칭했다.
통일신라시대 금당지 주변에서 발굴된 ‘부인사금당(夫人寺金堂)’이 새겨진 암기와는 8세기 이후에 제작돼 즙와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어 신라시대에 ‘부인사(夫人寺)’로 불렸던 사실이 확인된다.
부인사의 기록은 고려 광종 9년(958년), 광양(光陽) 옥룡사(玉龍寺)에 세운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사 경보(慶甫ㆍ869~947)의 통진대사보운탑비(洞眞大師寶雲塔碑)가 가장 오래됐다.
‘대사는 곧바로 부인산사(夫仁山寺)로 가서 삭발하고, 경전을 공부하는 강원으로 들어갔다’는 비명의 ‘학수(學藪)’라는 명칭으로 볼 때 부인사는 신라시대부터 교학의 본산으로 팔공산에서 동수(桐藪), 즉 동화사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부인사(夫人寺)는 부인사(夫仁寺)를 거쳐 부인사(符仁寺)로 절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명종 10년(1180년)에 부인사(符仁寺)란 기록이 처음 나타난 이래 고종 24년(1237년)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부인사(符仁寺), 우왕 8년(1382년)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眞覺國師大閣圓照塔碑)에 부인사(符仁寺), 그리고 정도전의 삼봉집(三峰集)에 부인사(符仁寺)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무렵에 ‘부인사금당(夫人寺金堂)’으로, 12~13세기의 고려 어골문에는 ‘부인지사(夫人之寺)’로, 12~14세기에 ‘부인지사(夫人之寺)’로 새겨진 명문기와(銘文瓦)가 출토됐음이 드러났다.
이같은 사실로 공식문서에는 부인사(符仁寺)로 표기하면서도 일상에서는 부인사(夫人寺)로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 명종 10년(1180년) 6월에 ‘큰 비가 내려 동경(東京) 부인사( 仁寺)의 북쪽 산에서 큰물이 솟아 나와 절의 건물 80여 칸이 물에 잠기거나 떠내려갔으며, 9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종 5년(1202년)에는 ‘동경의 별초군과 운문사(雲門寺), 부인사(符仁寺), 동화사(桐華寺) 승병이 연합하여 영주성(永州城ㆍ영천)을 공격했으나 패했다고 했다.
신종(神宗) 6년(1203년)에 부석사(浮石寺)와 부인사, 쌍암사(雙岩寺) 승군이 연대, 동경의 반란에 호응해 최씨 무신정권에 항거하다 진압돼 국문(鞠問)을 받은 뒤 섬으로 유배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당시 부인사는 대단한 규모의 사찰로 대장경과 사찰의 재산을 수호하기 위해 강력한 승군을 보유하고 있었던 사실을 말해준다.
이규보(李奎報)의 공산대왕에게 사례하는 제문에 ‘적괴들이 모두 사로잡혀 아군에게 목을 바쳤다’는 기록에서 부인사가 여러 사찰과 연합해 최씨 무신정권에 항거를 주도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거란의 대대적인 침입이 있었던 현종(1009~1031)때에 국난극복을 타개하는 방편으로 초조대장경을 조성했다.
현종 12년(1021년) 경 현화사(玄化寺)에서 판각을 시작해 문종 때, 혹은 선종 4년(1087년)에 완성됐다.
초조대장경은 현재 해인사에 봉안하고 있는 재조대장경을 능가하는 엄청난 규모로 통일신라 이래 발달한 고려불교문화의 역량과 고려인의 자주정신과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준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리경을 계승, 발달된 인쇄기술이 집약된 고려 최고의 보물로 개경의 현화사와 흥왕사(興王寺)에 나누어 보관했다.
어떤 연유로 언제 초조대장경이 부인사로 옮겨졌을까? 여기에 관한 문헌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인종(재위 1122~1146)때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의 궁궐이 전소됐고 묘청의 난으로 국내정세가 혼란한 가운데 금(金)의 압력이 가중되는 등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당시 개경에 보관했던 초조대장경은 안전한 곳을 찾아 옮겨야할 처지였다.
통진대사 경보가 수학했던 학수(學藪)이자 신라 이래로 교학의 중심지였고 무애지국사 계응(戒膺)의 문도들에 의해 대장경을 수장(守藏)할만한 역량을 갖춘 영남의 부인사가 가장 적지로 판단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1964년 부인사 대웅전 후방 건물지에서 수습된 석편에 새겨진 ‘覺□如无智’의 명문이 판독돼 이 것이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적사(嫡嗣)였던 계응(戒膺)의 무애지국사비(无智國師碑)로 밝혀졌다.
계응은 당대 제일가는 화엄학의 대종장(大宗匠)이었다.
명종의 총애를 받았던 운미(雲美)는 계응의 법손으로 최씨 무신정권에 의해 파행승으로 추방되자 계응의 문도들이 부인사를 중심으로 강력하게 항거했던 것도 이런 연유였던 것 같다.
산벚나무
산벚나무는 산에서 자라는 벚나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4월 말이나 5월 초에 걸쳐 우리나라 온 산은 이 산벚나무들의 꽃 잔치로 더욱 아름답고 화사해진다.
이때쯤 산에서 뵈는 흰색은 대부분 산벚나무꽃이 드러내는 색이라 보면 된다.
팔공산 남쪽 기슭에 신라 천년고찰 부인사(夫人寺)가 자리잡고 있다.
7세기 중반 신라 27대 선덕여왕에 의해서 창건되었다는 절집이다.
현재 부인사는 대웅전과 일화선원을 중심으로 한 수행 공간인 부인사와,
초조대장경 유허지인 부인사지(址)가 대구시지정기념물 제3호로 구분돼 있다.
초조대장경은 고려 현종 때인 1011년 부인사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1232년 몽골의 2차 침입 때 소실됐다.
이 유서 깊은 사찰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우람한 산벚나무 5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중에서 제일 큰 나무는 둘레 약 3m, 높이 20m나 되는 엄청난 산벚나무다.
이 산벚나무들에 꽃이 피면 함박눈이 내린 것 같은 장관을 이룬다.
목재로서도 산벚나무는 훌륭하다.
최근까지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은 자작나무였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경북대학교 박상진 교수가 현미경으로 재질을 분석해서 밝힌 바, 64%가 산벚나무였고, 돌배나무가 14%였다.
경판의 대부분을 산벚나무로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재질이 균일하고 비중이 0.6 전후로서 너무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각에 최적이다.
또한 산벚나무는 산에서 흔히 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팔만대장경판을 만들 때 사용했으리라.
대부분의 나무와는 달리 산벚나무는 숨구멍이 가로로 배열되어 있어, 멀리서도 다른 나무와 쉽게 구별해 찾아낼 수 있다.
사진첩
부인사 산벚나무는 답사일 현재 꽃망울만 생겼을 뿐 아직 개화하지는 않았다
한 5일 후에는 만개할 겄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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