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의 對話/김민철의 꽃이야기

팥배나무

초암 정만순 2018. 12. 4. 12:00



팥배나무


수천개 붉은 열매는 팥 같고 흰 꽃은 배꽃 닮아 팥배나무
열매는 새들의 겨울 양식, 꽃엔 꿀 많아 벌·나비 찾아
척박한 환경서도 잘 자라… 도심 공원에 많이 심었으면

 지난 주말 서울 은평구 봉산 팥배나무길은 아직 단풍이 지지 않은 것처럼 온 산이 붉었다.

나뭇잎은 다 떨어졌는데 조롱조롱 붉은 열매를 단 팥배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뻗은 크고 작은 가지 끝마다 10여개씩 점점이 달려 하늘은 온통 붉은색이다.

등산객들도 "와~" 하는 탄성을 감추지 못했다. 10m가 넘는 나무들은 늘씬하고 단정해 기품이 있었다.

요즘 산에 가면 가장 눈에 띄는 나무가 팥배나무다.

봉산뿐만 아니라 서울 남산·안산·북한산 등에서도 팥배나무가 주요 수종 중 하나이고 제주도에서 강원도까지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나무다.

등산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름을 몰랐어도 사진을 보면 "아, 이게 팥배나무야?"라고 할 정도로 비교적 흔하다.

다만 신갈나무 등 참나무와 경쟁에서 밀려 군락을 형성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봉산에선 큰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는 2007년 봉산 팥배나무숲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팥배나무라는 이름은 열매는 팥을, 꽃은 배꽃을 닮았다고 붙인 이름이다.

 5~6월 배꽃을 닮은 새하얀 꽃이 필 때도 좋지만, 역시 팥배나무는 요즘처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수천 개 붉은 열매를 달고 있을 때 그 진가(眞價)를 볼 수 있다.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꼭 담고 싶어하는 장면 중 하나이기도 하다.

팥처럼 붉고 작은 열매는 올겨울에도 새들의 양식 역할을 할 것이다.

이가 없는 새가 한입에 먹기 딱 좋은 크기다.

봉산 팥배나무길을 지날 때도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 시인은 팥배나무 열매를 새들을 위해 '나무가 마련한 도시락'이라고 했다.

[김민철의 꽃이야기] 조롱조롱 팥처럼 붉은 열매…
/일러스트=이철원


사람들은 팥배나무 열매를 먹지 않지만, 필자는 습관적으로 따먹는다.
시큼한 맛 뒤에 단맛도 살짝 따라와 먹을 만하다.
새들이 먹는 것은 사람에게도 해(害)가 없으니 안심하고 먹어도 좋다.
붉은 껍질을 벗겨보면 약간의 노란 과육이 있고 길쭉한 씨가 몇 개씩 들어 있다.

요즘 산엔 팥배나무 열매 외에도 붉은 열매들이 유난히 많다.
산수유, 찔레꽃, 가막살나무, 청미래덩굴 열매도 붉은색이고, 작살나무 열매 정도만 특별하게 보라색인 정도다.
왜 가을 열매는 붉은색이 많을까. 붉은색은 사람뿐만 아니라 새들에게도 눈에 아주 잘 띄는 색이다.
식물 입장에서는 새들이 열매를 멀리 퍼트려주어야 하니 새들에게 잘 보이는 색을 띠는 것은 당연하다.
새들이 열매를 먹으면 씨앗은 소화시키지 못하고 배설하는데, 식물 입장에서는 씨앗을 멀리 퍼트려주는 것이다.

팥배나무 열매(왼쪽), 팥배나무꽃
팥배나무 열매(왼쪽), 팥배나무꽃


팥배나무 꽃은 5~6월 가지 끝마다 하얗게 모여 피는데 꿀이 많아 벌과 나비가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팥배나무도 아까시나무처럼 꿀을 생산하는 귀한 밀원(蜜源)식물이기도 하다.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처럼 팥배나무는 '곳 됴코 여름 하나니(꽃 좋고 열매 많으니)'다.
달걀 모양 잎에는 규칙적인 물결 구조가 있고 10~13쌍의 입맥이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잎과 꽃으로도 구분하기 쉬운 나무이니 한번 눈여겨보면서 기억해두면 좋을 것 같다.

팥배나무는 숲속 건조하고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란다.
햇볕이 부족해도 잘 자라고, 추위에도 강한 편이다. 그러니 관리하기가 쉽다.
여기에다 봄에는 벌과 나비가, 겨울에는 새들이 찾아오니 도심 공원이나 녹지대에 심기 좋은 나무다.
다만 조경 전문가에게 물어보니 지면에서 첫 번째 가지까지 높이(지하고·枝下高)가 낮은 편이라 가로수로는 잘 쓰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 더. 서울 인왕산 성곽길 윤동주문학관은 하얀 외벽 위에 가지를 드리운 팥배나무가 있어서 운치를 더했다.
특히 뻥 뚫린 제2전시관에서 보는 팥배나무 가지가 일품이었다.
그런데 최근 가보니 팥배나무가 네 그루 모두 베어지고 없었다.
문학관 관계자는 "지난해 봄 말라죽어 베어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자라기 좋은 환경은 아니라서…"라고 말했다.
문학관 설계자가 팥배나무까지 고려해 지은 것으로 아는데 휑한 하늘을 보니 아쉬움이 컸다.
주변 팥배나무들은 잘 자라고 있었다.
이른 시일 내에 다시 팥배나무를 심어 옛 풍경을 되살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