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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진골목

초암 정만순 2018. 11. 13. 18:35



대구 진골목

근대 대구의 모습


반월당네거리 주변은 대구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대형 쇼핑센터를 비롯한 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백화점을 비롯해 각종 상가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진골목은 거대한 마천루 사이를 시냇물처럼 흐른다. 한일극장네거리 쪽으로 걷다 중앙시네마 옆 조그만 골목으로 들어서면 만날 수 있다. 골목 초입은 동성로의 번잡한 분위기와는 딴판이다. 마치 시골 읍내의 골목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바닥에는 보도블록이 깔려 있고 시멘트 담장은 칠이 벗겨져 있다. 붉은 녹이 슨 자전거가 벽에 기대어 있고, 양산을 쓴 노인들이 느린 걸음으로 골목을 지나다닌다. 도심의 소음도 진골목에서는 한 풀 꺾인다. 진골목은 ‘긴 골목’이라는 뜻. 경상도에서는 ‘길다’를 ‘질다’로 발음하는데 이 때문에 ‘긴 골목’이 ‘진 골목’으로 불리게 됐다.

1 번잡한 대구 도심에 옛 풍경을 간직한 골목길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신기하다.
2 고딕양식의 계산성당. 프랑스 선교사가 설계했다.
3 미도다방의 약차 한잔.'대구 어르신'들은 미도다방에 삼삼오오 모여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눈다.
4 진골목에서 만나는 2층 양옥건물이 '정소아과의원'이다.1947년 개원 이후 진골목의 상징이 됐다.

대구 유지들이 살던 골목

진골목은 짧다. 100미터 남짓이다. 하지만 골목이 지닌 내력은 깊다. 100년을 훌쩍 넘어선다. 1905년 대구읍성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진골목은 근대 초기 달성서씨 부자들이 사는 동네로 유명했다. 대고 최고의 부자였던 서병국을 비롯해 그의 형제들이 모여 살았다.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 정치인 신도환,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도 진골목에 살았다. 지금 그들이 살던 대저택에는 식당이 들어섰다. 진골목의 종로숯불갈비, 진골목식당, 보리밥식당 건물의 주인은 서병국이었고, 정소아과 건물의 주인은 서병국의 방계 형제인 서병기의 저택이었다. 그런 까닭일까. 골목 양 옆으로 세워진 붉은 벽돌담이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어딘가 위엄이 서려 보인다.

구불구불한 진골목을 따라 걷다보면 ‘정소아과의원’이라는 간판을 단 2층집을 만날 수 있다. 현존하는 대구 최고(最古)의 양옥건물이다. 담벼락 위로 우뚝 솟아오른 소나무가 당시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하다. 정소아과의원 외에도 진골목 곳곳에 들어선 식당과 다방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만, 이 가운데에서도 으뜸은 단연 ‘미도다방’이다. 오래된 골목이라면 으레 울울한 내력의 다방 하나쯤은 가지고 있게 마련. 진골목에는 ‘미도다방’이 있다. 미도다방은 1982년 문을 연 뒤로 대구∙경북 지역의 정치인과 유림, 문인 사이에서 명소가 됐다. 미도다방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 시 한 수 읽고 가자. 미도다방의 단골이었던 전상열 시인이 타계 직전 발표한 ‘미도다방’이라는 시다. ‘종로2가 미도다방에 가면/ 정인숙 여사가 햇살을 쓸어 모은다/ 햇살은 햇살끼리 모여앉아/ 도란도란 무슨 얘기를 나눈다/ 꽃시절 나비 이야기도 하고/ 장마철에 꺾인 상처 이야기도 하고/ 익어가는 가을 열매 이야기도 하고/ 가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도/ 추억은 가슴에 훈장을/ 달아준다/ 종로2가 진골목 미도다방에 가면/ 가슴에 훈장을 단 노인들이/ 저마다 보따리를 풀어놓고/ 차 한 잔 값의 추억을 판다/ 가끔 정여사도 끼어들지만/ 그들은 그들끼리/ 주고받으면서/ 한 시대의 시간벌이를 하고 있다.’

낡은 나무문은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린다. 다방은 그야말로 옛날식이다. 갈색 소파와 나무탁자가 놓여 있고 한 켠에서는 선풍기가 돌아간다. 백발의 노인들이 다방 안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그 사이에 하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성 한 분이 앉아 있다. 미도다방의 주인인 정인숙 여사다. “여기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앉았던 자리고 여기가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 앉아 차를 마시던 자리죠. 미도다방은 유학자들이 많이 드나들어 ‘양반 다방’이라고 불리기도 했죠.” 미도다방은 하루 평균 400여 명이 찾는다. 이 중 200여 명은 매일 출근하는 단골이란다. 미도다방에서 약차 한 잔을 주문해 마신다. 한약 맛이 난다. 쓰면서도 달콤하다.

모퉁이마다 남아있는 근대의 흔적

진골목의 마지막은 대구화교협회와 화교소학교다. 대구에 화교가 정착한 때는 1905년. 대구화교협회는 1929년에 지어진 서양식 붉은 벽돌건물이다. 단단한 모양새가 인상적이다. 화교협회 옆에는 화교소학교가 있는데 중국식 그림과 장식 등으로 꾸며진 것이 이채롭다. 진골목은 여기서 끝나지만 대구의 근대 골목 여행은 계속된다.

화교협회를 나오면 길은 대구제일교회계산성당, 동산 선교사 저택으로 이어진다. 대구제일교회는 대구의 기독교 건물 가운데 가장 먼저 생긴 건물이다. 건물을 가득 덮은 담쟁이덩굴이 아름답다. 멀지 않은 곳에 계산성당이 있다. 프랑스 선교사가 설계한 계산성당은 서울, 평양에 이은 세 번째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서울 명동성당을 지었던 중국인들이 내려와 1902년 지었다고 한다. 스테인드글라스에 서상돈, 김종학, 정규옥 등 초기 대구 천주교 신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시인 이상화가 이 성당에서 영감을 얻어 ‘나의 침실로’를 지었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결혼한 곳도 계산성당이다. 성당 맞은편으로 대구제일교회가 보인다. 교회 뒤편 동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3∙1운동길. 1919년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이 길을 통해 서문시장으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명 ‘90계단길’로 불린다. 계단 끝에는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예쁜 집이 세 채 서 있다. 1900년 초 미국 선교사들의 사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기도 하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배경이 워낙 예뻐 웨딩사진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진골목 반대편에 염매시장 골목이 있다. 대구 서민들의 정서를 흠뻑 느낄 수 있는 골목이다. 진골목 가기 전, 반월당역 14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옛날 재래시장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람 두 명이 겨우 지날 만한 통로를 사이에 두고 떡집과 수육집, 건어물집, 잡화점, 이유식 가게가 늘어서 있다. 염매시장의 ‘염매’는 ‘염가 판매’를 줄인 말이다. 그만큼 저렴하다는 뜻. 가수 현미도 한국전쟁 때 피란 왔을 당시 이곳에서 떡장사를 했다고 한다. 성송자 할머니(78)는 후덥지근한 바람이 나오는 선풍기 앞에서 밤을 깎고 있었다. 성 할머니는 염매시장에서 오십 년 넘게 장사를 시작했다. 스물세 살 때 화장품 노점으로 시작해 과일 행상 등을 거쳐 지금의 가게를 일궜다. 잣, 호두, 멸치, 북어포 등 갖가지 건어물을 판다. 문짝도 없는 가게 입구엔 ‘성주상회’라는 조그만 종이 간판이 걸려 있다. “당시만 해도 염매시장은 제일 컸어요. 대구뿐만 아니라 경북 전역에서 물건을 떼러 왔으니까. 하지만 근처에 백화점이다 마트다 대형쇼핑몰이 생기면서 시장도 옛날 같지가 않아.” 염매시장 건너편에는 대형 쇼핑몰 공사가 한창이다. 진골목에서 살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지금 그들이 살던 자리에 식당이 들어섰듯 언젠가 염매시장 골목도 사라지고 마트나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설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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