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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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말처럼 십자가 모양의 십자나무라고 불리는 산딸나무.
예수께서 고난받으신 십자가형틀의 나무는 싯딤가시나무(산딸나무)였다
산딸나무의 꽃말은 "희생" 이랍니다
Dogwood (산딸나무) Dogwood 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전설에 의하면 Dogwood는 키가 크고, 곧아서 십자가 형틀의 재료로 쓰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천한 십자가 형틀 재료로 사용되는 이 가련한 나무를 불쌍히 여기셔서 이 나무에게 명하셨습니다.
"이후로는 가늘고, 구부러지고, 뒤틀려 자라라!
꽃들의 꽃잎 두 개는 길게, 나머지 곺잎 두 개는 짧게 피어나서 십자 모양이 되어라!
각 꽃잎의 바깥 맽끝 가운데에는 적갈색(쇠 놋새깔)과 붉은(피) 얼룩의 손톱자국 모양이 있어라!
꽃 가운데는 가시면류관 모양이어라!
그래서 Dogwwod의 꽃을 보는 사람마다 내가 십자가에서 처형 당했음을 기억하게 나게 될 것이다.
누구도 이 나무를 자르거나 헤치지 못한다.
나(예수)의 십자가형을 기억나게 하는 이 나무를 소중히 여기리라!" 절기 : 사순절, 고난주간
특징
우리나라 중부 이남 어디서나 비교적 잘 자라는 산딸나무는 낙엽 활엽수로서 표고 300~500m 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수고 12m, 직경이 50cm까지 크는 나무로 한라산에서는 해발 1,800m 되는 곳에서도 자란다.
5월 하순부터 6월 상순경에 흰색 순결한 꽃이 매우 아름답다.
꽃잎이 넉 장으로 십자가 모양인데 탐스럽고 청아하여 누구라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이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었다고도 하는데 묘하게도 넉 장의 꽃잎이 십자가를 닮아서 기독교인들이 특히 이 나무를 성스러운 나무로 여기고 있다.
산딸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은 가을에 새빨간 딸기 모양의 열매가 또 있다.
산딸나무라고 이름 지은 것도 산딸기 모양의 열매 때문인데 그 맛이 감미로워서 새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다.
태초에 나무가 생겨날 때 바늘잎나무가 먼저 출현해서 온 지구촌을 덮었는데 이 바늘잎나무는 덩치는 크게 자라지만 꽃이 보잘것없어서 넓은잎나무에 비하여 동물들에게 베풀어주는 것이 비교적 적었다.
그러나 넓은잎나무는 꽃도 크고 꿀도 많을뿐더러 산딸나무와 같이 좋은 열매도 제공해 주게 되니까 넓은잎나무의 출현은 모든 생물들의 진화에도 크게 한몫했으리라고 본다.
새들이 따먹은 산딸나무 열매는 과육은 소화되고 딱딱한 종피가 위액의 산에 의해 자동으로 연화 처리됨으로써 자손을 퍼뜨리는데 새를 포함한 동물들이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
십자가 나무의 재질은 그시대 흔히 구할수 있는 나무 였을것입니다.
로마에서 십자가 형이 간혹 자행되었기 때문에 그 십자가형이 행하여진 곳에서 쉽게 구할수 있는 나무로 했을 것입니다.
무게 또한 나무 재질에 따라 다를겁니다.
동양에서 기원한 처형 방법 또는 고문을 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다는 일, 특히 후자는 메대인과 페르샤인들에 의해 집행된 것으로서 A.D. 1세기경 헬라인과 로마인을 통하여 서양에 전래되었다.
1. 고문 수단으로서의 십자가
십자가는 수직 버팀대와 횡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횡대는 버팀대 꼭대기 또는 꼭대기 바로 아래에 가로 놓여 있었다.
수직 버팀대의 높이는 보통 사람의 신장 정도였다.
수직 버팀대에는 나무받침이나 쐐기가 가설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사형수를 위한 의자의 역할을 했으며, 또한 부분적으로 사형수의 몸을 지탱해 주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수직 버팀대에 발 디딤대가 가설될 때도 있었다.
십자가 처형을 받는 죄수들은 이틀 내지 사흘만에 사망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시한은 의자(라틴어로는 sedile<세딜레> 또는 corun<꼬르누>라고 한다)나 발 디딤대가 있고 없고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손만이 묶인채 매달린 경우 사형수의 혈압이 급격히 줄게 되어 맥박수가 증가되어 때문이다.
보통 사형수는 십자가에서 처형되기 전에 심한 채찍질을 당하였다.
그리고 십자가 형벌이 진행되면 뇌수와 심장에 피가 불충분하게 공급되기 때문에 곧 시력장애가 발생하게 된다.
다행히 사형수가 의자와 발 디딤대를 이용하여 몸을 지탱할 경우에는 피는 어느 정도 상체 순환하게 된다.
손을 횡대(라,patibulum<빠띠불름>)에 고정시키는 대에는 새끼나 못이 사용되었으며 간혹 발에도 못을 박을 때가 있었다.
이러한 고문을 끝내고자 할 때에는 사형수의 다리를 곤봉으로 때려 무릎 아래를 바스러뜨렸다.
이렇게 되면 사형수는 더 이상 그의 체중을 견딜 수 없게 되며 피도 급속히 신체에 순환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곧 이어 심부전증이 발생하게 된다.
사형수의 죄명은 보통 사형수를 처형장소로 끌고 온 정리가 발표하였다.
때로는 사형수 자신이 가져온 판( 라, tilulus <띠뚤루스>) 위에 죄명을 기록할 때도 있었다.
만약 사형수가 그에 대한 횡대를 메고 올 경우에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다른 사람이 이 판을 가져왔다.
후대에 이르러 죄명이나 죄명을 기록한 판은 처형서 십자가에 부착되었다.
2. 로마인의 십자가 처형
십자가 처형 방법을 주로 실시한 자들은 로마인이었다.
로마인에게는 사형수를 십자가에 비끌어 매는 일률적인 방법이 없었는데 이것은 로마법이 십자가 처형을 오직 노예와 노예 신분으로 전락한 사람들에게 실시하도록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 시이저(Augustus Caesar)는 그가 30,000명에 달하는 도망노예를 체포하여 소유자가 나타나지 않은 자들을 모두 십자가형에 처하여 집단적으로 처형하기도 하였다.
크라쑤스(Crassus)는 스파르타쿠스(Spartacus)를 따라 나선 6,000명 이상의 반란 노예들을 체포하여 로마에서 카푸아(Capua)에 이르는 아피아로(the Appian Way)를 따라 이들을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이들의 시체는 이러한 반란에 대하여 경고하기 위해 썩도록 방치해 두는 것이 관례였다.
쥴리어스 시이저(Julius Caesar)는 몸값을 받기 위해 그를 붙잡았었던 해적들을 체포하여 이들을 모두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시이저는 이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목구멍을 먼저 따 버렸다.
팔레스틴의 로마 군대는 셉포리스(Sepporis)성을 함락한 후 바루스(Varus) 와 그의 시리아 군대가 그의 군대를 살해하거나 체포할 때까지 셉포리스성으로부터 갈릴리 전역을 지배하였던 유다스(Judas)의 반란 가담군 2000여 명을 십자가형에 처했었다.
마셜은 로마 시민들의 여흥을 위해 한 도적이 원형투기장에서 십자가 처형을 받는 광경을 묘사한 적이 있다.
네로(Nero)는 기독교인에게 로마를 불태웠다는 협의를 뒤집어 씌운채 많은 기독교인들을 십자가로 처형하였다.
오리겐 (Origen)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한다.
로마의 황제들은 계속해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으며, 이에 따라 십자가 처형은 대부분의 기독교인을 살해하는 방법이 되었다. 끝으로 십자가 처형은 콘스탄틴 황제 치하 시 형벌의 방법으로서는 제국 전역에 걸쳐 폐지 되었다.
이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꿈속에서 십자가의 거룩한 표징을 보았기 때문에 취해진 조처였다.
3. 그리스도에 대한 십자가 처형
예수의 사역은 십자가 처형으로 끝났다.
혹자는 예수의 사역 기간이 3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왜냐하면 욕한복음에서는 유월절에 세 차례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2:13, 5:1, 6:14, 13:1).
그러나 요한복음 5:1절에 나오는 유대인의 절기는 유월절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공관복음서는 유월절을 오직 한번 언급할 뿐이며, 이에 미루어 보아 예수의 사역 기간 동안 유월절이 두 번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은 예수의 공생애에 1년을 더 가산해 준다.
그리고 시이저의 월력에 따르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 연도는 A.D 30년 4월 7일 경이었다.
예수가 지고 가다가(요19:17) 나중에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고 간 십자가는 사실상 횡대(Patibulum)였을 것이다. 사형수는 오직 횡대만을 수직 버팀대가 이미 세워져 있는 처형지까지 옮기는 것에 관례였다.
죄명을 기록한 판을 십자가 위에 놓았다고 하므로 우리는 횡대가 수직 버팀대가 꼭대기에 놓여 있지 아니하고 꼭대기 바로 아래에 가로 놓여져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의 높이는 갈대의 길이로 측정되어 왔다(여기서 갈대란 요한복음 19:29절에서 말하는 우슬초 이다).
갈대의 길이는 약 90cm 정도였을 것이며 십자가의 높이는 이로 미루어 볼 때 210cm 였을 것이다.
로마군병들은 예수에게 마취제로 쓰이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는 이를 거절하였다(막15:23).
예수는 제삼시(오전9시경)에 십자가에 못박혔으며(15:25), 제구시(오후3시경)에 사망하였다(15:34,37).
그의 다리는 관례대로 꺾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다리를 꺾기 전에 이미 죽은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요19:32,33).
유대인들은 그의 죽음이 속히 진행하도록 요청하였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예수는 안식일이자 오순절의 예배일인 그 다음날까지 목숨을 부지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눅23:54).
요한복음에 의하면 로마군병들은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고 한다.
십자가형은 유대인들에 의하여 집행되지는 않았으나, 신명기 21:23절에 규정하고 있는 법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된 자의 시체를 밤새도록 십자가에 방치해 둘 수는 없었다.
예수의 범죄 사실을 기록한 판(titulus)위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요19:19)
유대인들은 십자가 처형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였다(신21:23).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하게 한 가장 심각한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나 십자가는 기독교가 시작될 때부터 복음의 핵심으로 인정되었으며(갈6:14). 보편적으로 용인된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