飮食 漫步/식객유랑

지리산 맛기행

초암 정만순 2018. 4. 28. 07:55




지리산 맛기행


800여리 산자락에 풍성한 먹거리… 지금은 추어탕과 참게가리장국이 제철  



지리산은 어머니 같은 산이다. 총면적 440.4㎢에 산역(山域)의 둘레가 800여 리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산이다. 그 넓고 깊은 품에 먹거리도 풍성하고 넉넉하게 품고 있다. 경남 산청·하동·함양, 전남 구례, 전북 남원 등 지리산을 끼고 있는 지역별 이름 난 별미를 소개한다.

남원…… 추어탕

남원은 추어탕으로 유명한 도시. 하지만 남원식 추어탕을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요즘, 굳이 남원에서 추어탕을 맛볼 필요가 있을까? 먹어보니 확실히 달랐다. 아무리 곱게 미꾸라지를 갈았다 하더라도 추어탕을 먹다 보면 까끌까끌한 가루 같은 것이 혀에서 느껴지거나 이 사이에 끼게 마련. 남원 '원조삼대할매추어탕'은 그렇지 않았다. 걸쭉한 국물이 크림처럼 매끄러웠다. 미꾸라지와 들깻가루, 된장이 만나 뿜어내는 구수한 감칠맛만 입안에 남았다. 전라도에서 '젠피'라고도 부르는 향신료 초피가루를 뿌리자 환하게 매운맛이 추어탕의 맛을 산뜻하게 끌어올린다.

이 식당 주인이자 남원추어요리협회 유해조 회장은 "남원 추어탕은 미꾸라지가 다르다"고 말했다. 남원에는 여전히 자연산을 쓰는 추어탕집이 많다. 섬진강 지류가 복잡하게 엉켜있어 미꾸라지를 쉽게 얻을 수 있다. 할매추어탕에서는 한겨울 두어 달을 제외하고는 자연산 미꾸라지를 사용한다. 양식이라도 남원에서 양식한 미꾸라지는 다르다고 유 회장은 주장했다. "남원시 기술센터가 알을 부화시킨 미꾸라지 치어(稚魚)를 양식 농가에 거의 원가에 나눠줍니다. 남원 추어탕집에서는 대부분 이걸 사용합니다. 중국에서 5㎝ 정도 키워서 국내로 들여와 양식한 걸 '이식산 미꾸라지'라고 부르는데, 차이가 확연하죠."

인구 8만여 명에 불과한 남원에 추어탕집이 40여 곳이나 된다. 이 중 26집이 추어요리협회에 속해 있다. 추어요리협회 소속 식당에서는 국내산 미꾸라지만을 쓴다. 할매추어탕(원조삼대할매추어탕·063-632-0535), 부산집(063-632-7823), 새집식당(063-625-2443), 합리추어탕(063-625-3356), 현식당(063-626-5163), 친절식당(063-625-5103) 등 솜씨가 막상막하다.

하동…… 참게가리장국·재첩국

봄 녹차·재첩국, 여름 은어 등 먹거리 많은 하동의 가을을 대표하는 맛은 참게다. 민물에 사는 참게는 꽃게나 대게보다 살이 적다. 하지만 게 특유의 달고도 고소한, 입맛을 자극하는 향기는 게 중에서 가장 진하다. 참게 맛을 즐기기엔 흔히 간장을 부어 삭힌 게장을 최고로 안다.

참게장 말고 좀 색다른 음식이 하동에 있다. 하동 섬진강횟집(055-883-5527)은 '참게가리장국'을 처음 개발했다고 알려진 식당이다. 참게를 껍데기째 갈아 들깨, 밀가루, 쌀가루, 검은콩가루 등 곡물·견과류 가루와 함께 끓인 보양탕이다. 죽처럼 걸쭉하고 황갈색인 국물은 그냥 봐서는 참게가 들어갔는지 알기 어려웠지만, 참게 특유의 구수한 향이 난다. 경남 지역에서 추어탕 따위에 즐겨 넣는 방아 잎을 넣는데, 특유의 박하 비슷한 상쾌한 향이 도드라진다.

재첩은 봄이 제철이라고 하나, 가을이라고 맛이 크게 떨어지진 않는다. 맹물에 오로지 재첩만 넣고 끓여 소금으로만 간하고 잘게 썬 부추만 뿌린 재첩국은 투명하면서 푸르스름한 빛이 살며시 돈다. 첫맛은 맑고 심심한 듯했지만 진한 감칠맛이 입안에 오래 여운으로 남는다. 속이 뻥 뚫리듯 시원하고 개운하다. 고추장과 각종 채소를 넣어 매콤새콤달콤하게 무친 재첩회는 공깃밥과 함께 스테인리스 대접에 쓱쓱 비벼 먹으면 속이 든든하고 개운하다. 나루터재첩식당(055-882-1370), 동흥재첩국(055-883-8333), 여여식당(055-884-0080), 원조강변할매재첩식당(055-882-1369) 등 하동에서 웬만한 식당은 다 재첩을 낸다.

구례…… 산나물한정식·다슬기수제비

전남 구례는 대한민국에서 나물을 맛보기 제일 좋은 곳 중 하나다. 지리산 나물의 집산지다. 오일장이 서면 지리산 구석구석 작은 마을에서 아낙들이 나물을 들고 장으로 나온다. 백화회관(061-782-4033)은 구례에서도 나물로 이름 난 식당. 더덕구이, 가죽, 두릅, 도토리묵, 고사리, 토란…. 지리산의 맛을 한상에 올린 느낌이다. '산나물한정식'은 '보통'과 '특'이 있는데, 보통만 주문해도 30여 가지 반찬으로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 특은 여기에 표고버섯, 불고기(또는 육회), 더덕구이, 생선구이, 게장, 달걀찜 등이 추가된다. 곰삭은 전어창자젓이 진짜 별미다. 2인 이상이라야 밥상이 나온다.

구례에서는 흔한 닭고기도 별미가 된다. '양미한옥가든'(061-783-7079) '토종닭구이'는 마늘과 후추, 소금만으로 양념해 구울 뿐인데도 그렇게 맛있을 수 없다. 산닭이라고 해서 특별한 품종은 아니고, 일반 닭이긴한데 지리산자락을 뛰놀며 자라선지 육질이 놀랍도록 탱탱하다. 가슴살도 퍽퍽하지 않다. 숯으로 구워 맛이 더하다. 같은 닭으로 만드는 백숙·닭볶음탕(도리탕)도 잘 하고, 흑돼지구이도 좋다.

우리밀전문식당(061-781-5700)은 구례에서 '대사리'라 부르는 다슬기 국물에 구례산 밀가루로 만든 반죽을 손으로 떠 넣고 팔팔 끓여낸 수제비를 낸다. 우리밀로 만든 수제비는 일반 밀가루처럼 매끄럽고 찰진 맛은 덜하지만, 거친 밀 향이 더 짙은 편이다. 칼국수도 물론 우리밀로 만든다.

함양…… 안의갈비·어탕국수·콩잎곰국

함양군 안의면(安義面)은 갈비찜으로 이름났다. 안의원조갈비집(055-962-0666)은 옛 방식 그대로 갈비찜을 만든다. 갈비를 찬물에 담가 핏물을 빼고 삶아 건져낸 다음 갖은 양념에 서서히 달인다. 심심하면서 달착지근한데, 간장 짠맛이 깔려있다. 갈비탕이 아주 좋다. 갈비탕 맞나 싶을만큼 기름기 없이 투명하고 시원하다. 어탕국수는 함양과 산청에서 즐기는 음식이다. 민물고기를 잡아다 끓인 다음, 체에 뼈를 발라내고 살은 잘게 부수어 국물과 섞고 고춧가루로 슬쩍 간 한다. 시래기를 넣고 푹 끓이다가 소면을 넣고 익히면 끝. 불그스름한 갈색 국물이 의외로 맑고 구수하다. 생선 비린내가 살짝 나는데, 거북하다기보다 오히려 매력적이다. 제피가루(초피나무 열매의 가루)와 방아잎으로 생선 냄새를 잡는다. 조샌집(055-963-9860)은 함양에서 어탕국수로 이름 났다. 식당 이름은 '조씨 생원네가 하는 식당'이란 뜻이다.

경상도에선 콩잎을 즐겨 먹는다. 함양에서는 콩잎을 곰국에도 넣는다. 청학산(055-962-4183) 주인은 "콩잎곰국을 옛날부터 보양식으로 먹었다"고 했다. "부잣집에서는 사골을 고아서 넣어 드셨고요, 서민들은 들깻가루에 넣어 드셨어요." 봄철 여린 콩잎을 따 말려뒀다가 일년 내내 쓴다. 뽀얗게 우린 곰국 국물에 콩잎을 넣고 삶은 쇠고기를 쪽쪽 찢어 얹는다. 콩잎에서 물이 우러나 국물이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 푸른 이파리가 잔뜩 들어 있는 게 미역국 같기도 하다. 살짝 씁쓸하면서도 구수한 콩잎이 곰국과 썩 어울린다.

산청…… 산채정식·흑돼지

산악지역은 음식이 좋게 말해서 소박·담백하고, 야박하게 말하면 먹을 게 없다. 경남 산청은 이러한 산골 음식의 편견을 깬다. 산청군청 앞 춘산식당(055-973-2804)이 대표적이다. 3인분 이상만 주문 가능한 정식대신 비빔밥을 시켰는데도 된장콩잎, 가죽나물, 취나물, 콩비지, 마늘선, 고구마줄기무침, 물김치, 전 등 반찬이 10여 가지나 된다. 멍게에 청어알을 무쳐 삭힌 젓갈, 꼬막 등 바닷가 반찬도 의외로 많다.

비빔밥은 고명도 고명이지만 밥맛이 훌륭하다. 산청 쌀 브랜드 '탑라이스'를 사용한다. 탑라이스는 완전미(完全米) 비율이 95% 이상인데다 단백질 함량이 6.2%에 불과하다. 완전미란 깨지지 않고 온전한 모양을 유지한 쌀이란 뜻. 깨진 부분이 있으면 조리 과정에서 전분이 흘러나와 밥맛이 나빠진다. 영양학적으론 전혀 문제 없으나, 단백질 함량이 높을수록 밥맛이 떨어진다. 국산 쌀은 대개 완전미 비율은 85% 정도이고 단백질 함량은 7%가량이다. 고추장 양념에 버무려 연탄 풍로에서 구워주는 흑돼지 양념구이도 훌륭하다.

지리산 자락에서 키우는 흑돼지들은 맛있기로 소문났다. 산청에도 흑돼지 고기를 낸다는 식당이 많다. 요즘 산청 흑돼지는 '똥돼지'라 불리던 토종돼지는 아니다. 전국 각지의 흑돼지를 모아 개량한 품종이다. 토종 흑돼지는 육질이 좋지만 새끼를 적게 낳고 살이 덜 올라 경제성이 떨어졌는데, 이런 부분을 개선했다는 것. 확실히 흑돼지와 누렁이(055-972-7274)에서 맛본 삼겹살은 쫄깃한 껍질이 붙어 있고 고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