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젖
위암에는 염소젖이 최고의 치료약이오
강진의 숨은 명의 김명식 옹
“위암에 염소젖을 먹으면 낫는다고 하면 세상이 다 웃을 일이지만 그것이 틀림없는 약이오.
위암 말기로 다 죽게 되어 눈이 희멀건 하니 사람을 못 알아보고 불러도 대답이 없어. 간신히 숨만 헐떡헐떡 몰아 쉴 뿐이라. 지금이라도 염소젖을 구해서 한 번 먹여 보자, 그렇게 우겨서 급히 염소젖을 구해다가 데워서 떠 먹였어. 그런데 숨 넘어가기 직전이라 목구멍에 넘어가지를 않아요. 두 숟가락을 먹이는 데 한 시간이 더 걸렸어. 밤새도록 조금씩 떠 먹이고 다음날 아침에도 먹이니 환자가 정신을 차렸어요. 염소젖을 몇 숟갈씩 넘기다가 이틀 뒤에는 반 컵씩 마시고 밥도 조금씩 먹어요. 그 뒤로 환자가 염소젖만 먹고 병이 완전히 나았소. 염소를 한 마리 사서 젖을 받아먹고 그 염소가 새끼를 낳아서 새끼가 어미만큼 자랐는데, 그 염소를 등에 업고 은혜를 갚는다고 내 회갑잔치 때 찾아왔어요. 그 뒤로 20년을 더 살다가 작년에 돌아갔소.”
우리나라 땅 남쪽 끝의 한 자락인 전라남도 강진은 고려청자의 오묘한 비색을 탄생시킨 찬란한 도자문화의 고향이며, 시인 영랑 김윤식이 태어난 문학의 고장이기도 하다.
강진군 칠량면 송정리 송촌마을.
야트막한 산이 마을 뒤룰 둘렀고 앞으로는 질펀한 들이 펼쳐지고 냇물이 산을 돌아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이다.
이 남녘 땅 외진 마을의 한 초라한 집에 은거하는 김명식(金明植 : 73세) 옹은 어려서부터 전통 의술을 공부하여 신기(神技)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그 뜻을 크게 펴 보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사는 이 시대 마지막 선비의 한 사람이자 숨은 명의다.
신기에 달한 의술
김 옹은 용약(用藥)의 달인이다. 침이나 뜸을 쓰지 않고 오직 약을 써서 못 고치는 병이 거의 없다. 화타, 편작이 살아와도 손을 쓸 수 없을 것 같은 환자를 약 몇 첩으로 고칠 수 있을 만큼 신기(神技)의 의술을 지녔다.
“요즘은 서양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라. 그런데도 대학병원 같은 데 가면 못 고치고 쫓겨 나오는 환자가 많아요. 이를테면 폐농양 같은 거 이걸 요새 이름으로는 폐암이라고 하는데 촌늙은이인 내가 이런 걸 고친다면 누가 믿겠는가. 요새 첨단의학에서는 수술이 능사(能事)인줄 알고 또 항암제나 항생제 같은 거 많이 쓰는데, 그런 걸로 안 되는 것을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고치는 것이 한의학이라. 내가 병원서 포기한 폐농양 환자 여남은 명을 고쳐 보니 잘 나아요. 그런가 하면 좌골신경통이다, 디스크 관절염 이런 거 서울대학교 병원 같은 데서 수술도 못한다는 사람이 간혹 소문을 듣고 오는데 그런 것도 별로 어려운 게 아니오.
또 습관성 유산으로 10번 이상 유산을 한 여성이 있어 이 여자가 임신한 것을 알고 병원에 달려가 치료를 받아도 역시 유산이 되는 거라. 이 여자의 친척 되는 이가 찾아와서 좀 고쳐 달라고 부탁하기에 약을 지어 줬더니 유산이 되지 않았어. 부녀자는 아들을 낳지 못하면 그것이 일생의 한이 되는 것이라.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중학생이 되어 찾아왔는데 그 아이가 공부를 잘 해서 전교에서 1등이라. 이런 데에 의원으로서 보람을 느끼는 것이오. 고도로 발달한 현대의학이 수술하고 인체를 해부하는 데에는 전통의학보다 우월하다고 하겠으나 경험으로 병을 고치는 데에는 옛사람들의 의술이 더 앞서는 법이오.”
김 옹은 강진군 군동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항일독립운동가였다. 아버지는 학생 소요에 가담한 죄로 일본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어 많던 재산을 다 날리고 고생을 많이 했다. 그 덕분에 김 옹은 정규 학교 교육이라곤 받은 적이 없고 서당에 다니면서 2년쯤 한문을 공부했다. 그런 다음에 의원이 되기로 결심을 하고 그 일대에서 명의로 이름 높던 최동열이라는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의술을 배웠다. 최동열 선생은 옛 의서를 체계적으로 깊이 있게 공부한 분으로 그의 외숙이었다.
외숙한테 의술을 배우다
“최동열이라는 분은 이름난 학자집안에서 나서 구시대의 의서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이라. 그 분이 의서를 공부하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어요. 그 양반이 열 서너 살 무렵이었을 거요. 어렸을 적에 소아마비에 걸려서 외조부가 이걸 고치려고 유명한 의원은 모두 가마로 모시고 와서 치료를 하게 했어요. 근처에 침을 잘 놓는다고 유명한 사람이 있어서 침 몇 방이면 고칠 것으로 기대하고 모셔다가 침을 맞았는데 두 달을 맞아도 조금도 효과가 없어. 그 밖에도 온갖 좋다는 것은 다 써 봤으나 백약(百藥)이 무효라.
그런데 외조부 집 사랑채에는 지나가는 과객(過客)이나 온 사방에서 온 식객들이 가득했는데 그런 식객 중에 장흥 관산에서 온 젊은 사람이 하나 있는데, 이 사람은 늘 한쪽 구석에서 바둑만 두고 있는 거라. 외조부는 자나깨나 하나밖에 없는 외동아들 병신 면하는 방법 없나 하고 꿈에 선몽이라도 봤으면 하고 근심이 태산같고. 그런데 이 관산에서 온 젊은이가 의서를 많이 읽었다는 소문을 들은 거라. 그래서 아들을 한 번 보이고 화제(和劑)를 내 달라고 부탁을 했어.
그런데 의술을 제대로 배운 이는 묻기 전에는 죽어 가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말을 해 주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 병과 약의 세계는 깊디깊은데 단견(短見)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의술이라는 것은 까딱 잘못하면 사람을 잡는 것이 아닌가.
외조부가 이 젊은이한테 화제를 내어 달라고 부탁을 하니 그 병에는 이 처방을 2제 먹이면 나을 것이오 하고 순순히 화제를 써 줬어요. 그런 다음에 젊은이가 부탁하기를 2제를 먹고 나서 소아마비가 풀리면 환도혈에다 외대가리마늘(통마늘)을 다져서 붙이고 청포(靑布 : 쪽물로 염색한 천)를 덮은 다음 그 위에 쑥으로 뜸을 열 댓장 떠 줘야 종기가 나지 않을 것이오 하는 거라.
그런데 이 젊은이의 말이 평생을 글을 읽어 온 외조부한테는 미덥잖게 들렸던 모양이오. 평생을 의술을 공부한 의원들이 지어 준 약도 모두 효과가 없었는데 그깟 몽학(蒙學)선생이 써 준 화제로 낫겠냐 하고는 처방을 무시해 버린 거지. 물론 그 젊은이한테는 고맙다고 정중히 인사를 하고 그 처방은 서랍 속에 넣어 두었어요.
그러고 한 달이 지나니 봄이라. 얼음이 풀리고 풀잎들이 파릇파릇 돋아나는데 아들을 서당에 보내려니 이제 병이 더 깊어져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라. 아이는 머리가 좋아 공부에는 막히는 것이 없는데. 시일은 가고 병을 고칠 방법이 없으니 답답하기가 이를 데 없어. 어느 날 마루에 앉아 있으려니 문득 그 젊은이가 준 화제가 생각났어. 다른 건 다 해 보았지만 그건 해 보지 않았으니 한 번 해 보기로 작정을 했소. 그래서 그 화제대로 약을 한 제 지어서 먹이니 거짓말 같이 효과가 있어 거의 다 나아 버렸어요. 다시 한 제를 더 먹이니 완전히 나아 멀쩡한 사람이 됐어요. 정말 꿈 같은 일이 아닌가. 그러나 마늘을 다져 놓고 뜸을 떠야 한다는 대목은 자세히 듣지 않았으므로 뜸을 뜨지 않았어요.
아들이 낫자 화제를 준 젊은이한테 보은(報恩)을 해야겠기에 명주 한 필하고 한산모시 한 필을 사서 은혜를 갚으려고 외조부 내외가 관산으로 갔어. 한 삼십리쯤 되는 거리인데. 가다가 보니 길 옆에 있는 산에서 장례를 치르기에 그냥 지나가려고 하다가 누가 돌아가셨기에 장례를 지내느냐고 한 번 물어봤어. 그랬더니 젊은 사람이 죽어서 안 됐다면서 이름을 말하는데 죽은 사람이 바로 그 화제를 준 젊은이가 아닌가. 어이가 없어서 장례를 마친 그 집으로 찾아가서 감사 표시를 하고 왔어요.
그런 뒤로 과연 그 젊은이가 예언한 뒤로 환도혈 부위가 마치 바가지를 엎어놓은 것처럼 붓고 열이 나더니 종기가 크게 났어요. 병문안을 온 사람들이 차라리 병신으로 살았으면 더 나을 것을 이제 종기로 죽게 되었다고 할만큼 종기가 크게 났는데 아무튼 그것은 파종(破腫)을 해서 고름을 빼고 나니 완전히 나았어요.
그렇게 아들의 소아마비를 고치고 나서 외조부가 생각을 해 보니 화제를 준 젊은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데 그 은인은 이미 죽고 없어. 그래서 아들을 불러 놓고 이야기를 했어요. 경서(經書)를 읽고 학문을 하는 것이 몽학선생에 불과하지 아니하냐, 그런 것보다 훌륭한 의원을 만나 의서를 읽고 의술을 배워서 어려운 병으로 신음하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니 너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 의술을 배워라, 병신이 되었던 너를 구해 준 의술이 가장 훌륭한 학문이 아니냐, 이보다 더 나은 학문이 어디 있겠느냐 그렇게 설득을 해서 외숙이 의학을 공부하기로 한 거라.
그러나 의서를 제대로 공부한 이는 그 때도 드물었어요. 6-7년 동안 이름난 의원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했어요. 그러나 의술이라는 것이 글만 읽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을 쌓아야 되는 것이라. 의서에는 달통했지만 경험을 많이 얻을 기회가 없어요. 그렇다고 요새 사람들처럼 내가 공부를 많이 했노라고 자랑을 하고 다닐 수 없고. 그래서 시골에서 농사를 한 백마지기쯤 지으면서 의학에는 별 흥미를 못 두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상처(喪妻)를 하고 집안이 파산을 하자 약장(藥欌)만 달랑 들고 도시로 나갔다가 서울로 갔다가 지방으로 갔다가 여기저기를 다니며 떠돌이 의원노릇을 몇 년 했어요. 그러다가 결국 강진 병영면에 와서 개업을 했어. 거기서 병 잘 고치고 돈 잘 번다고 소문이 사방에 났지만 실제로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의원들이 보통 인삼을 쓸 때 싸구려 미삼(尾蔘)을 사서 쓰는데, 이 분은 개성인삼 중에서 최고 상품을 주문해서 쓰니 약 팔아서 돈을 벌어봤자 늘 적자라. 약값이 10만원이면 인삼 값이 9만원이니 뭐가 되겠는가. 여기서 마포(麻布)를 배로 실어 개성으로 보내고 인삼을 수십 편씩 주문해서 약 지어주기를 평생동안 했어요. 또 어려운 환자가 있으면 돈 안 받고 고쳐주기도 하고. 남들이 못 고치는 병은 깊이 연구를 해서 꼭 고쳐 주었고. 이런 것이 이 분의 음덕(陰德)이라. 이러면서 이 분은 평생을 굶고 살다가 나중에 순천에서 돌아갔어요.
나는 이 선생님 밑에서 7-8년 배웠어요. <동의보감(東醫寶鑑)>, <방약합편(方藥合編)>, <의학입문(醫學入門)> 같은 의서 공부를 충실히 했어요. 좋은 의서들이 많지만 의술의 이치를 배우려면 <의학입문>을 많이 보아야 하는 거라.”
지역 명의와 실력 대결에서 이기다
김 옹은 스승한테 의술을 배운 뒤 23살이 되었을 때 약방을 열고 의원노릇을 시작했다. 그 무렵은 현대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요즘 같으면 종합병원이나 대학병원에 가야 할 환자들이 모두 의원한테 몰려들었고, 시골 한 귀퉁이에 살더라도 병을 잘 고친다고 소문이 나기만 하면 문전성시를 이루기 마련이었다. 그는 의술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나이가 젊었던 탓인지 찾아오는 환자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러이러한 병을 잘 고치니 나한테 오시오 하고 선전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젊었을 적에 요 너머 강진군 대구면에 방성진이라고 하는 유명한 의원이 살았어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는데 그 집은 항상 손님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어요. 방약국이라고 하면 인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그 양반의 실력이 얼마나 높은가 하고 내가 세 번을 실력을 겨루어 본 일이 있으니 그 얘기를 좀 하겠소이다.
마침 그 때에 한 정신병 환자가 방약국을 찾아왔어. 환자는 시집 온 지 얼마 안 되는 새댁인데 갑자기 정신이 이상해졌어. 울다가 웃다가 소리를 지르고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중얼거린다는 거야. 시댁에서는 병원에 가거나 의원한테 가지 않고 먼저 무당한테 데리고 가서 굿을 했어요. 굿을 한 번 하면 나락 한 섬 값이 드는데 굿을 수십 번 해도 효력이 없어요. 그래서 방약국에 와서 약을 지어 먹었는데 두 달 석 달, 아니 6개월을 먹어도 아무 효과가 안 나는 거라. 그래서 그 새댁이 세간살이를 못하고 영 못 쓰게 되었다고 소문이 났어요.
그 때 나는 시골에서 간판도 없이 약방을 하고 있는데 그 미친 새댁을 한 번 치료해 보지 않겠냐고 문의가 들어왔어요. ‘환자가 나한테 오면 한 번 해 보겠소’ 하고는 일부러 약방에서 20여 리 떨어져 있는 환자가 사는 마을에 가서 소문을 한 번 들어 봤어. 미친 사람을 고치려면 그 발병 동기를 구체적으로 알아야 하는 거라.
며칠 뒤에 환자의 시숙 되는 이가 새댁을 부축해서 왔어. 보니 발에다 뜸을 얼마나 떴는지 걸음을 못 걸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하며 난리를 치니 사람이 곁에 가지도 못할 지경이라. 시숙한테 발병할 때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상세히 물어봤소.
때는 여름 장마철이라 비가 온 뒤에 새댁이 마을 아낙 네댓 명과 산에 도라지를 캐러 갔어요. 서로 흩어져서 도라지를 캐다가 풀 속에서 산손님이 죽어서 시체가 반쯤 썩어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오. 그 때는 빨치산 잔당이 산에서 살다가 굶어서 죽거나 총을 맞아 죽는 경우가 더러 있었어요. 남자라도 그걸 보면 놀라 자빠질 것인데 갓 시집 온 새댁이 그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겠소. 소리를 지르며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쳤소. 물론 그 시체는 가까이 있던 이들이 흙과 돌 같은 것으로 대강 덮어 주었소이다.
그런데 3-4일 지난 뒤부터 새댁이 좀 이상해졌소. 물동이를 이고 친정 간다고 하며 집을 나서는가 하면, 바느질 도구를 들고 물 길러 간다고 하고, 혼자 깔깔 웃다가 노래를 부르기도 하니 시댁에서는 고민이 많아요. 그 무렵만 해도 무속이 성하던 시절이라 무당한테 희망을 걸고 무당과 점장이가 시키는 대로 별 짓을 다 했소. 어느 점장이한테 물으니 그 시체에 옷을 입히고 관에 넣어 장례를 잘 치러서 좋은 자리에 묻어주면 나을 것이라고 해서 그렇게 해 주었고, 그렇게 해도 안 나아서 딴 데 가서 물어봤더니 그 시체를 도로 파내어 본래 있던 대로 해 주라고 해서 또 그대로 해 줘도 소용없고.
그래서 방약국한테 약을 6개월 먹다가 나한테 왔는데. 농촌에서 많지도 않은 살림에 소 팔고 논 팔고 해서 쪽박 차게 된 처지라. 내가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나서 약을 2제 지어 주며 이 약 한 제를 먹으면 정신병이 나을 것이나 2제를 먹어야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소. 그 때 약 1제 값이 쌀 한 섬 값이었소. 그런데 돈이 없으니 중간에서 환자를 나한테 소개해 준 이가 약값을 한 달 뒤에 반드시 갚도록 자기가 보증을 할 터이니 외상으로 달라고 간청을 해요. 그래서 그렇게 하라고 하고 약을 주어 보냈소.
그러고 나서 2주 뒤에 집안 아주머니가 장에 갔다가 그 새댁네 사람을 만났는데 약값을 전해 드리라고 하더라면서 돈을 받아 왔어요. 한 달 뒤에 갚기로 한 것을 보름만에 갚은 것이라. 그 새댁이 나았는지 궁금해서 사람을 시켜 한 번 가 보고 오라고 했더니 20릿길을 걸어서 가 보고 와서는 그 새댁이 다 나아서 멀쩡하더라고 해요.
그런데 약을 먹는 데 문제가 좀 있었어요. 약에 인삼이 들어 있으니 시어머니가 그걸 보고 미친 병에 인삼이 들었으면 열이 올라 더 해롭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던지 인삼을 빼 버리고 달여 먹인 거라. 이걸 안 새댁의 남편이 시어머니한테 ‘이 사람은 내 일생의 동반자로 같이 살아야 할 사람이고 아무려면 의원이 해로운 것을 주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 일에는 어머니가 참견하지 마시오’ 하고 우겨서 약을 그대로 먹게 했어요. 처음에 인삼을 빼고 먹이긴 했지만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오. 새댁은 약을 한 제를 더 먹고 그 뒤로는 일체 탈이 생기지 않았소.
그 일로 나는 방성진 선생의 의술이 어느 정도인지를 나름대로 파악했소. 두 번째 실력을 서로 시험한 것은 암환자였소. 그 때는 지금처럼 많지는 않아도 암환자가 드물게 있기는 했소이다. 우리 동네에서 암환자가 생겼는데 나이가 50이 넘은 사람이라. 옛 의서에 보면 50이 넘어서 발병한 암은 고치지 못한다고 했어요. 나름대로 써 볼 처방이 없던 것이 아니지만 일부러 방약국한테 보냈어요. 방약국에 가서 약을 지어 온 것을 좀 보자고 해서 보니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 하고는 달라. 허방을 짚은 거지. 이 분이 입으로만 명의로군 하고 혼자 생각을 하고 있을 수밖에.
그런데 환자는 날이 지날수록 병은 더 심해지고 음식도 못 먹게 되니 온갖 좋다는 짓은 다 했어요. 그 때 포도당이 최고 가는 약이라고 포도당 주사 놓으러 다니는 이가 있었는데 그 주사를 열심히 맞고. 또 똥을 빼내야 한다, 그래서 변비를 고친다면서 비눗물 풀어서 먹이기도 하고. 시집가서 나가 사는 딸은 사위 데리고 와서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야 한다고 울고 있고.
내가 환자의 사위를 불러 얘기를 했어요. 세상을 살면서 생명과 재산은 둘 다 소중한 것이네. 그런데 보아하니 생명과 재산을 둘 다 잃게 되었네. 그러나 잘 하면 하나는 건질 수 있을 걸세. 옛말에 죽을 병에는 약이 없다고 하였네. 자네 장인의 병은 위암인데 백약이 무효라, 고치느냐 못 고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은 제 명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네. 자네 장인은 목숨이 며칠 남지 않았어. 지금 약을 쓰면 고칠 수는 없으나 사는 동안 고통 없이 지낼 수는 있을 것이네. 지금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한다고 해서 살 수가 있을 것 같은가. 아마 낫기는커녕 이틀이면 온 집안이 망해서 거지가 될 걸세. 환자한테 딸린 가족이 많지 아니한가. 늙은 노모가 계시고 아들딸도 넷이나 되지 않은가. 사람 잃고 집안 망하지 말고 내 말을 듣게 하고 설득을 해서 약을 한 제 지어 주었소. 과연 환자는 그 약을 먹고 별 고통 없이 지내다가 며칠 뒤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소.
이처럼 나는 약방을 하면서 좋은 자료와 경험을 축적해 왔소. 농촌에서는 소문이 빨라요. 내 약을 지어 간 이가 나았는지 안 나았는지 금방 온 사방에 소문이 퍼져요. 내 약을 먹은 사람이 몇 퍼센트나 효험을 보는지 금방 알게 되는 것이라.
소아마비를 고친 이야기
세 번째 방약국과 실력을 겨룬 것은 소아마비 환자였소. 내 셋째 재매의 딸과 친하게 지내는 열 다섯 살 동갑내기 아이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계모라. 이 계집아이가 어느 때부터 걸음을 못 걷게 되어 학교에 가는데 업고 가더라고 해요. 그 무렵 나는 농사일은 안 배웠으니 못하고 한가하게 유유자적하며 글이나 읽고 있던 중이라서 병 치료에 대해서 연구할 시간이 많았소. 그 계집아이를 보니 다리를 못 쓰고 있기에 너 어디 아프냐 하고 물으니 아픈 데는 없다고 해요.
그런데 그 집에서는 방약국한테 약 지으러 간다고 그래. 그래서 약을 지어 온 것을 가서 봤어. 한 제 먹으면 나을 것이라고 했다는데 내가 보니 얼토당토 않은 약이라. 그러나 다 먹게 두는 수밖에 없어요. 그 사람들이 나한테 먼저 묻지 않는 것을 천박하게 자청해서 고쳐 주겠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소. 그러니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게 나은 거요. 그런데 방약국에서 지어 온 약을 아무리 먹어도 낫지는 않고 오히려 더 심해졌소. 그래서 부모들이 약으로는 안 되겠다 하고 침 놓는 이한테 가서 침을 맞았어요. 나는 침을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 침을 맹신하는 것도 큰일이오.
바지게에 사람을 지고 다니면서 한 달 넘게 침을 맞았지만 소용이 없어. 만약 침으로 고치면 내가 침공부를 다시 하겠다고 작정을 하고 관찰을 하고 있었던 건데 역시 효력이 전혀 없어요. 내가 마을 밖에라도 나가려면 그 집 대문 앞을 지나가야 하는데, 어느 날 지나다가 보니 온 식구가 밥상을 가운데 놓고 울고 있어. 못 봤으면 그냥 가겠지만 보고도 그냥 갈 수는 없고 또 식구들이 울고 있는 방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어서 마구간으로 들어갔소. 그랬더니 환자의 아버지가 나와서 방으로 들어오라고 해요. ‘집안에 불편한 일이 있는 모양이지요. 진짓상을 차려 놓고 들지 않고 울고 있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들어왔소이다’ 했더니 집안 사정 얘기를 해요.
약을 먹어도 낫지 않고 침을 맞아도 낮지 않아서 어제 강진읍에 있는 병원에 갔다 왔는데 그 원장이 하는 말이 이 병은 돈이 산더미 같이 있어도 못 고치는 병이다, 미국에서도 못 고치는 병이니 포기하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어디 용한 의원을 만나면 나을 것이라는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아무 희망이 없어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는 거였소. 병신자식을 계모 밑에서 키우려니 그 자식이 얼마나 불쌍하겠소.
내가 아버지한테 물었소. ‘다른 사람 같으면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굿도 하고 조상 무덤이 잘못되어 그런가 하고 이장을 하기도 하는데 그런 것은 안하오?’ 그랬더니 우리는 그런 일은 안 한다고 해요. 그러면 ‘방성진 선생 말고 더 병을 잘 고치는 선생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소?’ 하고 물었더니 들은 적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뛰어난 의원이 나이가 젊고 이름도 없으며 행색이 초라하며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살 수도 있지 않겠느냐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분한테 약을 먹겠느냐고 물었소. 아버지가 대답하기를 그런 이가 있다면 부탁을 해 보겠으나 의술에는 능하나 숨어서 있는 이를 어찌 찾아낼 수가 있겠소, 나는 바깥출입을 많이 하지 않으니 선생께서 좀 추천을 해 주시오 그래요.
그러나 그 때 내 입으로 내가 딸 아이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입을 열면 어떻게 되겠소. 아픈 사람한테 약 팔아 돈이나 받아먹으려고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하지 않겠소. 그래서 어떻게 얘기를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밖에서 딸그락 딸그락 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그 아이가 변소에 가느라 목발을 짚으면서 내는 소리였소. 그런데 그 아이의 몰골이 차마 눈으로 못 볼 형상이었소. 옷은 남루하고 머리칼은 헝클어지고 온 몸이 작대기처럼 말라 완전히 귀신의 형상이라.
그걸 보고 내가 더 이상 겸양지심(謙讓之心)을 보일 때가 아니다 나중에 빰을 맞는 일이 있더라도 입을 열어 약을 먹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작정을 하고 말을 꺼냈소. 나한테 소아마비를 고칠 수 있는 처방이 있으나 나는 경험이 적고 나이가 젊으니 꼭 권하기는 어렵소. 또 댁의 형편이 어려운 것을 내가 잘 아니 약값을 반만 내도록 하고 반은 내가 부담하는 것으로 해서 한 번 약을 써 보는 것이 어떻겠소. 이런 말을 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아이의 계모가 듣고 있었던지 문을 드륵 열면서 의원 선생님, 그러잖아도 선생님한테 약을 지어 달라고 부탁을 하려던 참이었소, 돈은 우리가 다 낼 테니 제발 약을 좀 지어 주시오 하는 거라.
내가 약을 무료로 지어 줄 수도 있었지만 반값이라도 내라고 한 것은 공짜로 약을 주면 약을 먹는 데 소홀할 것 같아서 한 말이었소이다. 그래서 약을 한 제 지어서 주었는데 참으로 탄복할 일이 벌어졌소. 약을 주고 나서 엿새 뒤에 그 집에 들렀더니 부모는 없고 계집아이만 있었어요. 약을 잘 먹느냐고 물었더니 잘 먹는다고 해요. 약이 얼마나 남았냐고 물으니 두세 첩 남았다고 그러고. 아픈 데는 없냐고 물었더니 어저께부터 잠을 못 잔다, 척추뼈 부위와 오금이 얼마나 가려운지 그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거라. 가려운 데를 한 번 보자고 해서 옷을 걷어올려 보니 얼마나 피가 나도록 긁었던지 큰 딱지가 여러 개 생겼어요. 옳다, 이제 되겠구나 틀림없이 나을 거라는 확신이 섰어요.
며칠 뒤에 다시 약을 지어 가서 먹고 나니 절룩거리며 서고 걷기에 방안에 줄을 매어 두고 그 줄을 잡고 걷는 연습을 하게 했어요. 그러고 나서 한 달쯤 지났소. 방안에 있는데 그 계집아이와 동갑내기인 조카가 수녀가 왔어요 하고 소리를 질러. 수녀는 그 계집아이의 이름이라. 무슨 소리냐, 수녀가 어떻게 여기를 올 수 있겠느냐 했더니 틀림없이 왔다는 거라. 들어오라고 하니 그 아이가 들어왔어요. 한 번 걸어봐라 했더니 아주 반듯하게 걸어요. 이제는 달음박질을 해도 안 넘어진다는 거라. 아무도 안 보는 길에서 실컷 뛰어 봤는데 옛날과 똑 같이 뛸 수 있다는 거였소. 그래서 환도혈에 외대가리 마늘을 다져서 소금을 섞어서 깔고 청포조각을 덮은 다음 뜸을 뜨게 했소. 그 아이는 그 날 저녁부터 시집갈 때까지 우리 집에 살다시피 하면서 가깝게 지냈소.”
정신병, 나병, 간질, 불임증, 폐암, 성불구자 치료에 자신
김 옹은 50년 동안 환자를 보면서 수많은 난치병을 고쳤다. 그는 다음에 적은 질병들을 고치는 데는 자신이 있다고 한다.
(1) 불임증과 습관성 유산
(2) 디스크, 좌골신경통, 목디스크
(3) 축농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콧병
(4) 탈모증
(5) 간질
(6) 정신병과 심장질환
(7) 폐농증(폐암)
(8) 현훈과 두통
(9) 악성무릎관절염
(10) 성기능장애
(11) 나병
(12) 소아마비
(13) 위궤양, 위암
(14) 주근깨, 기미
(15) 해수
(16) 중풍, 반신불수
(17) 백설풍
그는 간질, 소아마비, 나병, 성불구, 정신병, 암 등 세상의 다른 어떤 의술로도 치료가 힘든 질병들을 자신 있게 고칠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의 놀라운 의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나병치료법을 공개하다
“나병을 고치는 방법이 옛 의학책에 정확하게 적혀 있어요. 이걸 내가 일제시대 때 공부를 해서 알아냈어요. 내가 경험해 보니 옛 의서에 적힌 것은 거짓이 없어요. 내가 나병을 고치는 비방을 어디에다 전했는가. 30년 전에 <전국한약업사비방집>이라는 책이 있었어요. 거기에 위암과 나병을 고치는 비방을 전했는데. 그런데 기록이 잘못되어 있어서 시정을 하려고 하나 시정할 방법이 없었어요. 일제 때는 나병에 대풍자유라고 열대지방에서 나는 대풍자라고 하는 열매의 기름을 주약으로 썼는데 그걸로는 되지 않아.
나병에는 현삼(玄蔘), 지각(枳殼), 백지(白芷) 각각 2냥, 적작약(赤芍藥), 금은화(金銀花) 각각 1냥, 화마인(火麻仁), 백질려(白蒺藜), 대풍자 각 1근, 독활(獨活) 2돈, 천오(川烏) 1개, 북방풍(北防風) 10냥, 북방풍이라는 것은 우리 나라 바닷가에 자라는 해방풍이 옳아요. 이상의 모든 약재를 모두 함께 부드럽게 가루를 낸 다음 백화사(白花蛇)라고 있어요, 우리 나라에는 없고 중국의 더운 지방에서 나는 뱀인데. 이 백화사를 머리와 꼬리를 떼어낸 것 12냥을 뜨거운 술에 2-3일 동안 담갔다가, 뜨거운 술에 담그는 것은 이놈이 성질이 찬 놈이니 찬 성질을 없애려고 하는 거라. 그 다음에 뼈를 제거하고 증기로 한 번 푹 쪄서 말린 다음 가루를 내어 다 같이 꿀로 알약을 지어 하루 세 번 밥 먹고 나서 복용하되 하루에 4전씩 차 달인 물로 복용하라고 하였소. 그런데 <전국한약업사비방집>에는 백화사가 구렁이라고 잘못 기재되어 있어요.
반드시 낫겠다는 숭고한 믿음으로 약을 만들어 복용한다면 낫게 되는 거라. 나병이라면 모두 천질(天疾)로 여기고 아예 치료를 포기하고 있지만 이건 나를 가르친 스승이 직접 나환자를 고쳐 봐서 확인을 한 것이오. <경험신방(經驗神方)>이라는 의서에 실려 있는 처방이고. 이런 처방이 함부로 나온 것이 아니라 고전 의서를 많이 읽은 이들이 경험과 직관으로 알아 낸 것이 아니겠소.
옛사람들은 과학적인 데이터를 얻는 데는 요즘 사람들보다 부족했겠지만 탐구력은 요즘사람들보다 우수했어요. 나병에는 건성나병, 진성나병, 그리고 버짐과 비슷한 반나병의 세 가지가 있는데 이 모든 나병에 이보다 더 나은 약이 없어요. 아마 1-2년 복용해야 할 거요. 전국 곳곳에 나환자 촌이 있고 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기회가 오면 나환자 전문병원 같은 데에 문헌을 공개할 작정이오.”
김 옹이 난치병자를 고친 이야기는 몇 밤을 새우며 들어도 끝이 없다. 이번에는 위암환자를 염소젖을 먹여서 고쳤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자.
말기 위암을 염소젖으로 고치다
“우리 동서 하나가 장흥군 대덕면에 있는 대덕초등학교 교장이오. 교장노릇을 하고 있으니 여러 가지 사람을 만나서 섭외할 일이 많아 술을 많이 먹어서 위암에 걸려 꼭 죽게 되었어. 일제 때 주정을 배에 싣고 가다가 배가 난파하여 주정이 들어 있는 통이 바다에 떠서 돌아다니던 것을 건져다가 주정을 빼내어 그릇으로 퍼먹은 사람이 많았는데 그걸 먹은 사람이 모두 위장병에 걸렸소이다. 처음에는 위염, 위궤양이다가 암으로 진전되어 죽은 사람이 많았어요.
암이라면 보통 사람들이 못 고치는 병으로 여기지만 내가 늘 권장하는 단방약이 있어요. 그게 다른 것이 아니고 염소젖이라. 염소젖을 100도로 끓이지 말고 손가락을 넣어 봐서 데이지 않을 정도로 그러니까 80도쯤으로 데워서 먹어라, 그러면 낫는다, 이렇게 동서한테 얘기를 해 줘도 듣지를 않아요. 산중에 숨어사는 사람의 말이라고 무시하는 거라.
병이 든 데다가 공부시킬 자녀는 많고 그러니 살림이 더욱 옹색해져서 세간살이를 영 못하게 됐다고 해서 한 번 집에 가 봤더니 좋다는 약은 다 구해 먹는데 약국보다 약이 더 많아요. 몇 번 염소젖을 먹으면 좋을 것이라고 말을 해 줘도 남을 멸시하는 버릇이 있어서 안 들어요. 안 들으니 어쩔 수가 없어 그대로 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집사람이 밖에서 들어오더니 오래비가 곧 죽게 되었노라고 탄식을 해요. 이제 먹기만 하면 토하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다는 거라. 내가 말하기를 그 사람 죽으면 약이 없어 죽는 것이 아니라 괘씸병으로 죽는 것이라고 비문에 써라, 그랬더니 집사람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그래. 그래서 내가 그 사람한테 병을 고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가 멸시 당한 얘기를 했소. 꼭 뺨이라도 맞아야 멸시를 당한 것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 신중히 생각해서 하는 말을 무시하는 것도 빰을 맞은 것이나 꼭 같은 것 아닌가. 집사람이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오래비가 살겠냐고 묻기에 염소젖을 먹으면 살아난다는 말을 해 줬어요.
위암에 염소젖을 먹으면 낫는다고 하면 세상이 웃을 것이지만 그것이 틀림없는 약이오. 집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는 차편도 없는 데를 30리를 걸어서 오빠 집에 간다고 나서는 거였소. 구실도 근사해요. 오래비가 죽어 초상이 나면 장사지낼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거라.
그런데 집사람이 오빠 집에 가더니 사흘이 지나도 오지를 않아요. 아마 오래비가 죽어서 초상을 치르고 오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나흘째 되는 날에 돌아왔어요. 장사를 잘 지냈는가 물으니 야, 염소젖이 참 좋은 약이다, 그렇게 좋은 줄 몰랐다는 소리부터 먼저 해요. 그래서 그간 있었던 얘기를 들어봤어요. 집사람이 재를 넘어 오래비가 사는 마을에 들어서니 마침 언니가 학교 운동장에 서 있었다고 해요. 어째서 여기 있느냐고 물으니 남편이 오늘 안에 죽게 생겼는데 차마 죽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밖에 나와 있다는 거였소. 그래서 언니, 우리 남편이 좋은 약을 가르쳐 줬는데 그 병에는 염소젖을 먹으면 산다고 합디다 하니까 그까짓 게 무슨 대수냐, 지금까지 온갖 좋다는 약은 다 먹었어도 효력이 없었는데, 다 그만두고 가서 임종이나 지켜보자 하고는 두 사람이 집으로 들어갔어. 환자는 눈이 희멀건 하니 사람을 못 알아보고 불러도 대답이 없어. 간신히 숨만 헐떡헐떡 몰아 쉴 뿐이라. 집사람이 지금이라도 염소젖을 구해서 한 번 먹여 보자, 그렇게 우겨서 몇 군데 젖 나오는 염소가 없느냐 수배를 했어요.
마침 큰아들이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관산초등학교 선생으로 있었는데 학생들 집 중에 염소를 키우는 데가 없냐고 물으니 마침 용산 마을 뒤에 염소를 많이 키우는 목장이 있다고 해요. 그래서 급히 거기로 가서 염소젖을 구해다가 데워서 환자한테 떠 먹였어. 그런데 환자가 이미 숨 넘어가기 직전이라 목구멍에 넘어가지를 않아요. 두 숟가락을 먹이는 데 한참이 걸렸어. 밤새도록 조금씩 떠 먹이고 다음날 아침에도 먹이니 아 환자가 정신을 차렸어요. 염소젖을 몇 숟갈씩 떠서 넘기다가 며칠 뒤에는 반 컵씩 마시고 밥도 조금씩 먹는다는 거라.
그 뒤로 이 환자가 염소젖을 먹고 완전히 나았소. 염소를 한 마리 사다가 젖을 받아서 먹고 나중에 그 염소가 새끼를 낳아서 새끼가 어미만큼 자랐는데, 동서가 그 염소를 등에 업고 은혜를 갚는다고 내 회갑잔치 때 찾아왔어요. 동서가 자녀가 9남매라. 그 뒤로 20년을 더 살다가 작년에 돌아갔소.
염소젖이 체한 것을 뚫어준다는 말이 의서에도 있어요. 그런데 이것이 위암에 효력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하느냐,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이 어려운 것이오. 이것을 처음 발견한 이가 우리 외숙이라. 외숙이 강진군 병영면에 계셨는데 마침 제사가 있어 어머니가 제사에 참여하러 왔어요. 내가 스승 밑에 있을 때인데.
진리를 발견하려면 반드시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겠소. 어머니가 제사를 지내러 와서 보니 둘째 조카가 위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거라. 둘째 조카는 장사를 하다가 실패하고 노름에 빠지고 고생을 많이 해서 위암에 걸린 게요. 약이 없으니 앵속각을 달여 먹이며 통증이나 덜어줄 수 있을 뿐인데. 어머니가 제사를 지내러 왔다가 조카가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제사를 못 지냈어. 그렇다고 거기 눌러앉아 있을 수도 없어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나섰소.
그런데 10리 넘게 산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열 십자로 갈라진 네거리께에서 어머니가 가야 할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갓을 쓰고 도포차림을 한 두 노인네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마주 오는 것을 만났소. 좁은 길을 아낙네가 지나치면서 몸을 부딪히는 것이 실례가 될까 봐서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가려고 했더니 두 노인네는 네거리까지 오더니 어머니가 가야 할 길로 방향을 바꾸어 앞장을 서서 가는 것이 아니겠소. 어머니는 마음이 급했지만 노인들을 앞질러 갈 수도 없어서 앞에서 말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뒤따라가게 되었소이다.
그런데 그 때 노인들이 하던 이야기 중에 염소젖이 체한 데는 그만이라고 하는 말을 어머니가 언뜻 들은 거라. 그 때까지만 해도 위암이라는 병명이 없었고 어머니도 조카의 병이 체증이라고만 여겼던 게요. 어머니가 염치없이 노인네들한테 바짝 따라 붙으며 물었소. 어르신네, 염소젖이 체증에 그렇게 좋은 약입니까 하고 물으니 그렇다고 해요. 어머니가 우리 조카가 체증으로 곧 죽게 된 것을 보고 왔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한 번 먹여 보시오 그러는 거라.
어머니는 10릿길을 걸어 도로 돌아와서 외숙한테 체증에는 염소젖을 먹으면 낫는다더라 그걸 한 번 먹여보자고 얘기를 했어요. 외숙이 이름 있는 의원인데 그 말을 믿을 리가 있겠소. 그러나 어머니가 일부러 먼 길을 가다가 돌아와서 이야기를 해 주니 마지못해 한 번 써 보기로 했어요. 급히 수소문을 해 보니 마침 근처에 염소를 키우는 이가 있어. 자전거를 타고 가서 염소젖을 구해다가 따뜻하게 데워서 환자한테 떠 먹였어요. 환자는 이미 의식이 없고 손발에 경련을 일으키며 숨이 넘어가는 중이었소. 목구멍에 넘어가지가 않아 반 컵을 먹이는 데 한나절이 걸렸소. 신음소리도 못 내고 손발을 바르르 떨고 있던 환자가 오후가 되니 경련이 멈췄어요. 그 날에는 한 홉을 먹이고 이튿날에도 한 홉을 먹였더니 일어나서 말을 해요. 젖이 나오는 염소를 한 마리 사서 젖을 계속 먹이니 얼마 안 가서 나아 버렸어.
염소젖이라는 것이 이렇게 신기한 효험이 있는 거요. 그러나 염소젖을 먹일 때 부패한 것을 먹이면 안 돼요. 전에 어떤 이가 신문 쪽을 찢어 들고 헐레벌떡 나한테 뛰어왔어요. 일본에 있는 어느 유명한 교수가 신문에 염소젖에 항암물질이 있다고 발표를 했다는 거라. 그래서 내가 그 사람한테 그랬소. 어째서 일본 놈이 한 말은 열심히 듣고 우리 조상들이 수백 년 전에 쓴 기록은 외면하느냐, 요새 암을 고치는 약을 만들어 냈다고 신문마다 심심하면 떠드는데 서양의학으로는 아마 수백 년 뒤에는 모를까 암을 단번에 고치는 약을 만들기는 불가능할 거요.
한 번은 친구의 부인이 위암으로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내 말을 잘못 알아들었는지 우유를 생산하는 목장에 가서 우유를 가져다가 끓여서 먹어. 염소는 산에다 방목하여 키우므로 순수한 자연식을 한다고 할 수 있으나 요즘 소가 먹는 사료에는 다른 좋지 않은 것이 많이 들었어. 요즘 우유는 우유라고 할 수가 없어요. 염소젖도 완전히 끓이면 항암성분이 파괴되어 버리므로 80도 정도로만 데워서 살균을 해야 하는 거라.
이 부인한테 다시 염소젖을 구해 한 병을 먹이니 토하던 증세가 없어졌어. 며칠 먹으니 꽤 몸이 호전됐는데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것을 부패한 줄을 모르고 먹어서 죽을 고생을 했어요. 냉장고란 것이 장식품일 뿐이지 음식을 보관하는 데에는 별로 쓸모가 없는 물건이오. 이 부인이 염소젖을 먹고 위암이 나은 다음에 냉장고를 불신하여 그 뒤로는 냉장고 없이 살았소.
위암을 염소젖을 먹고 나았다고 하면 누가 믿겠소. 결국 자기가 체험을 해 봐야만 믿게 되는 것이라. 그 뒤에 어떤 사람이 위암에 걸려 나를 찾아왔기에 염소젖을 먹으라고 일러줬더니 그것을 먹고 나았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다 나아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서 암을 고쳤냐고 물으면 발바닥에 부적을 붙여서 나았다고 그래요. 이처럼 자기가 분명히 경험하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는 게요.
그 뒤로 이 방법으로 많은 사람을 고쳐 줬어요. 이런 의술을 내가 스스로 자랑할 수 없으니 누가 염소젖이 어디에 쓰는 거냐고 물으면 그냥 체증에 좋은 것이라고 해 버렸어요.”
성불구자를 고쳐 사위로 삼은 이야기
김 옹의 치료일화 중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가 적지 않다. 이번에는 성불구자를 고쳐 사위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옮겨 적는다.
“요즘 비아그란가 하는 약이 발기부전을 치료하는 약이라고 세계적으로 난리인 모양인데. 이런 것을 오래 복용하면 신정(腎精)이 고갈되어 결국 온갖 잡병에 걸려서 죽게 되어 있어요. 전에 나한테 성기능이 불구인 사람이 와서 고치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어요. 자기가 그렇다는 얘기는 못하고 친구가 그렇다면서 좋은 방법이 없겠냐는 거라. 이 사람이 초등학교 생물실습 선생을 하다가 공부를 더 해서 고등학교 원예선생이 된 사람인데. 결혼을 해야 하는데 발기가 되지 않으니 자살할 마음밖에 없다는 거라. 약을 써서 고칠 수 있겠냐고 묻기에 고칠 수 있다고 했더니 약을 지어 달라고 해요.
그러면 값이 얼마냐 묻기에 아직 만들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10만원은 들어야 할 거라고 했소. 그런데 만들다 보니 10만원으로는 부족해. 그래서 20만원은 되어야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하자고 해요. 약을 다 만들고 보니 30만원이 들었어. 약값이 30만원이 들었다고 하니 어째서 약값이 왔다갔다 하느냐면서 불신을 하고 먹지 않겠다고 하는 거라. 만약 내 병을 고치면 재산의 반이라도 줄 수 있겠으나 약값이 왔다갔다 하니 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느냐는 거였소.
그런데 그 때 스승님인 최선생님한테 혼인할 나이가 된 딸이 하나 있었소. 스승이 말하기를 우리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니 내 딸을 당신한테 주겠소, 딸을 고자한테 주려는 아비가 어디 있겠소. 한 번 믿고 먹어보시오, 이렇게 딸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약을 먹게 했어요. 이 사람이 약을 두 달 동안 먹고 성기능이 완전히 정상적으로 되었어요. 성불구자가 회양이 된 거지.
그래서 이 사람이 최선생의 딸과 결혼을 해서 아들딸을 여럿 낳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소. 그 뒤로 성기능이 없는 사람이나 양기가 쇠약한 사람한테 약을 여러 번 써 봤는데 다 좋은 효력이 있었소. 서울에서 자살하겠다고 준비를 하고 온 사람을 고친 적도 있고. 무릇 한 가지 병을 치료하는 데 확신을 가지려면 적어도 백 번은 심오한 실험을 해 봐야 하는 거라.
이 약은 성불구자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나 신장기능이 약해진 사람한테도 좋은 것이오. 사람이 신장기능이 강해지면 면역력이 강해져서 어떤 병도 침범하지 못해요. 건강식품으로 개발해도 좋을 거요. 비아그라 같은 거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약이라. 한약의 묘리를 아는 사람한테는 양약 같은 것은 약이 아닌 법이오.”
아이 못 낳는 여자 아이 낳게 해 준 이야기
김 옹은 특히 여성의 불임증을 잘 고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성의 생리불순, 냉증, 대하 등 온갖 여성질환을 고치는 데에 능할 뿐 아니라 딸만 낳고 아들을 못 낳는 여성한테 아들을 낳게 해 준 적도 많다.
“나이가 37살쯤 된 여자가 결혼한 지 15년이 되었으나 자식이 없다고 그 시아버지 되는 이가 찾아왔소. 며느리가 바닷가에서 낙지 낚시를 하여 돈을 버는 데, 돈은 많이 벌었으나 자식이 없는 것이 한이라. 동생한테 아들이 셋이나 있어서 그 중에 하나를 양자로 달라고 했으나 주지 않고 얘들 기저귀 같은 거나 빨아달라고 맡기니 속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거였소.
남편이 몇 살이냐고 물었더니 36살이라고 해요. 그러면 약을 써 봤느냐고 물으니 지금까지 몇 백 제는 먹었다고 해요. 형제들이 많아 서울 부산 등에 흩어져 있는데 다들 돈이 많고 낙지를 잡아서 큰 벌이를 하기 때문에 약값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라. 그렇다면 내가 산부인과 의사는 아니지만 한 번 데리고 오면 몇 가지 물어 보고 진단을 해서 약을 한 번 지어 보겠소 했더니 며칠 뒤에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데리고 왔어요.
내가 그 부인한테 지금 이런 형편에 서로 내외할 것도 아니고 병을 고치려는 것이니 부인의 생리상태를 좀 자세히 얘기를 해 주시오 했더니, 대뜸 ‘나 병 없어라우’ 그래요. 그래서 생리하기 전에 생리통이 있느냐 물으니 없다고 하고 그밖에 여러 가지를 물었으나 하나도 이상이 없다는 거라. 나는 틀림없이 이 부인한테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을 하고 시아버지가 곁에 있으니 쑥스러워 대답을 잘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시아버지를 잠시 밖에 나가 있게 한 다음 다시 물었소. 여러 가지를 묻다가 생리가 혹 뭉클뭉클하게 덩어리져서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해요. 속으로 옳다 알았다 하고 왜 그런 증상이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자기는 모든 여자가 다 그런 줄 알았다는 거라.
내가 약을 한 제 지어 주면서 이것을 먹고 낫지 않으면 한 제를 더 먹으시오 했더니 ‘그까짓 것 먹고 된다우?’ 하고 쌀쌀맞게 대답을 해요. 그래도 그 약을 갖고 가서 먹기는 했던 모양인지 얼마 뒤에 전화가 왔소. 생리상태가 좋아졌으니 꼭 한 제를 더 지어달라는 거라. 그 냉혹하기 이를 데 없던 부인이 상냥하게 전화를 하면서 꼭 약을 한 제 더 지어 달라는 소리를 다섯 번이나 반복하는 거였소.
약 한 제를 더 지어서 보냈더니 얼마 뒤에 뜬금없이 부인한테서 왜 먼저와 같은 약을 지어 달랬더니 다른 약을 지어 보냈냐고 항의전화가 왔어. 그 약을 먹고 나서부터 음식을 보기만 하면 속이 뒤집히고 구역질이 난다는 거라. 나는 속으로 짐작되는 것이 있어서 그러면 그 약을 더 이상 먹지 말라고 좋은 말로 달랬어요.
그러고 나서 다음 달에 그 부인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이번에는 생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야단이라. 자연의 법칙은 이렇게 정확하고 엄숙한 거요. 부인은 그 때 이미 임신을 하고 있었던 거요. 그런데 임신을 해 본 경험이 없으니 몰랐던 것이라. 다음 달에 다시 생리가 안 나온다고 전화가 왔을 때에야 그것은 임신을 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을 해 주었어요. 그랬더니 그럴 리가 없다는 거라.
이 부인이 열 달을 채우고 나서 아들을 낳았어요. 나는 소문만 듣고 가 보지를 못했는데 어느 날 장에 갔다가 버스를 타고 오는 데 어떤 아기를 업은 여자가 와서 반갑게 인사를 해요. 내가 보기엔 통 모르는 사람이라. 이 여자가 인사를 하고 나서는 이걸 좀 보시오 하며 업고 있는 아기를 포대기를 걷어내고 보여줘요. 내가 ‘이쁘게 생겼소’ 했더니 내 귀에다 대고 ‘머스마요, 머스마’ 하는 거라. 그 때까지도 나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짐작이 안 가고 혹 정신이 이상해진 여자가 아닌가 여기고 있었소. 그런데 버스가 덕동이라는 마을 앞에 서자 전에 생리가 덩어리져서 나오는 것을 고쳐 준 적이 있는 여자가 이 마을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소. 아기를 업은 여자가 나한테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에야 나는 그 여자가 누군지를 깨닫고 소리를 질러 불렀소. 그 뒤로 그 부인이 아들을 또 낳아서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었소이다.”
정신병 환자의 70퍼센트를 고칠 수 있다
김 옹은 정신병 환자를 치료한 경험이 많다. 정신병자를 100퍼센트 다스릴 수는 없지만 70퍼센트쯤은 약을 써서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신병은 종류가 수십 가지 돼요. 혼자서 씩씩 웃고 침 뱉고 그런 것은 미칠 전(癲) 자를 써서 전이라고 하고, 낮에는 멀쩡하다가 밤에만 발작하는 것도 있는데 이런 것은 호랑이 발톱을 태워서 연기를 머리에 쏘이면 낫는다고 했어요. 또 칼을 들고 사람을 죽이겠다고 덤비는 것도 있고, 자기 성기를 갖고 장난을 하는 것도 있는데 이런 것은 화전(花癲)이라고 해서 치료가 좀 어렵소. 나는 맥은 보지 않고 얼굴빛이나 음성, 그리고 증상을 자세하게 물어서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한 다음에 약을 쓰는데 정신병자의 상당수를 고칠 자신이 있어요.
내가 청량리 뇌병원에 가 보고 원장님한테 편지를 내기도 했는데, 정신병원에서는 그 병이 어떤 원인에서 온 건지 그 가닥을 정확하게 잡아내지를 못해요. 그러니 치병(治病)을 못하는 거지. 내가 판단하기로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의 50퍼센트 이상을 약으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전에 광주에서 연구소를 차렸을 때의 일인데, 어떤 정신병원 원장의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정신병이라. 병원약을 먹이며 치료를 하다가 안 되어 서울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정신병원에서도 몇 달 치료를 하다가 내보냈는데 이 학생이 나한테 간접적으로 약을 받아가서 먹고 나았어요.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이 학생의 아버지가 나를 찾아와서는 우리 조상들이 서울에서 산 적이 없느냐고 물어요. 그런 일이 없다고 했더니 전에 서울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근무할 적에 어떤 정신병 환자를 입원시켜 치료하고 있다가 낫지를 않아서 내보낸 적이 있다고 해요. 그런 일이 있은 지 2년 뒤에 우연히 그 환자를 만났는데 정신병이 말짱하게 나아서 고기장사를 하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병을 고쳤냐고 물으니 서울의 어떤 한약방에서 어떤 노인이 지어주는 가루약을 먹고 나았다고 하는 거라.
그 말을 듣고 이 정신병원 원장이 그 노인이 어디에 사는지 물어서 찾아갔어요. 그러나 노인은 이미 죽었고 자녀들은 전라도 어느 산골로 이사를 갔다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는 거라. 그래서 내가 그 노인의 가족이나 친척이 아닌가 여겼다는 거였소.
정신병원의 원장이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쳤으니 나한테 자기네 정신병원에 와서 환자를 좀 봐 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했지만 안 갔어요. 그런데 휩쓸렸다가는 처방만 빼앗기고 마는 것 아닌가.
나는 정신병을 치료한 경험이 많아요. 일본 육군병원에서 뇌수술을 여러 번 한 사람도 약을 써서 고쳤고 3-4살 때부터 시작된 병을 20살이 넘어서 고치기도 했어요. 고쳐 주면 논을 백 두락 주겠다고 광고를 낸 환자를 고쳐 주기도 했는데 주겠다는 논은 받지 않았어요. 그러나 요즘은 모두 환자들을 큰 병원으로 보내고 나 같은 사람은 시골에서 소외되어 있으니 어쩌다가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이 하나 둘씩 있을 뿐이라.”
김 옹이 쓰는 정신병 치료약은 모두 식물성 약재이다. 먼저 진단을 정확하게 한 다음 증상에 맞게 약을 지어 2-3제 복용하면 대개 낫는다고 한다. 증상이 몹시 심하며 갑자기 발광한 사람은 효과가 빨라 빠르면 2-3일이면 낫고, 증상이 심하지 않으면서 오래 된 사람은 효력이 느리게 나타난다고 한다.
김옹은 간질을 고치는 데에도 자신이 있다. 기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장미회에서 주는 영국인가 독일에서 오는 간질치료약을 수십 년 먹어도 별 효력이 없던 환자를 여럿 완치한 경험이 있다. 한 때는 광주에서 간질과 정신병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간질과 정신병자를 무료로 고쳐 주기도 했다.
“간질은 풍(風)의 한 종류라. 단순히 풍이라고 하면 의미가 모호한데 이건 사악한 기운이라. 풍은 잠을 잘 때 사람 몸 속으로 들어와서 장부를 병들게 하는데 그것이 뇌로 가면 간질이 되는 거요.”
이밖에 중풍이나 중풍으로 인한 반신불수 같은 것도 고친 경험이 많다. 중풍환자가 일본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적도 있고, 강원도나 경상도 같은 데서 찾아오는 일도 있으며, 경희대학교 병원 같은 데서 환자를 보내어 치료를 해 준 일도 있다. 중풍은 발병한 지 3-4개월이 지나기 전에는 치료가 어렵지 않지만 오래 지날수록 고치기가 어렵다고 한다.
골수암을 고쳐 주고 큰 절을 받다
이번에는 뼛속이 곪아 고름이 나오는 악성 골수암 환자를 고친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적는다.
“광주에서 칠량으로 이사 온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인쇄소에 고급용지를 공급하는 일을 하는 장사꾼이라. 이 사람이 자기 빙장어른이 아프니 좀 봐 달라고 하기에 가 봤어요. 가서 보니 요때기를 깔고 자리에 누워 있는데 바싹 말랐고 몰골이 참혹해요. 진단을 해 보니 장질부사를 오랫동안 못 다스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약을 한 제 지어 줬더니 먹고 금방 나았어요.
그러고 나서 한참 뒤에 누가 찾아와서 인사를 하는데 바로 그 젊은이라. 자기 빙장어른을 고쳐 줘서 고맙다는 거라. 그 뒤로 이 젊은이가 더러 전화를 해서 처방을 묻고 환자를 소개해 주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 젊은이가 어느 날 전라북도 영광에 좌골신경통으로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걸음을 못 걷는 환자가 하나 있는데 고칠 수 있겠냐고 물어요. 그렇다면 한 번 와 보라고 했어요.
이 젊은이가 차에 짐을 싣고 가다가 어떤 여자가 찻길 앞을 걸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열 발자국도 못 가서 주저앉고 다시 일어나 대여섯 발자국 가다가 주저앉고 하는 것이 보기에 안타까웠던 모양이라. 차에서 내려서 그 아주머니한테 물었어. 다리가 많이 아픈 모양이지요 하니 그렇다는 거라, 그러면 내가 아는 선생님 중에 어려운 병을 아주 잘 고치는 분이 있는데 그 선생님한테 댁의 병을 고칠 수 있는지 한 번 물어보고 댁한테 연락을 해 주겠소 하고는 그 여자의 연락처를 받아놓고 나한테 전화를 했던 거요.
그 뒤로 여러 날이 지났지만 그 여자는 나한테 오겠다고 해 놓고는 오지 않았어요. 한참 뒤에 이 젊은이가 찻길에서 그 여자를 다시 만났어. 왜 선생님한테 안 갔느냐고 물으니 내가 길도 모르고 몸도 불편한데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 차라리 그냥 앓다가 죽겠소 하더라는 거라. 이 젊은이가 그렇다면 다음 일요일에 마침 내가 그쪽으로 가야 할 일이 있으니 그 때 내 차로 같이 갑시다 하고 약속을 했어.
그래서 다음 일요일에 8톤 트럭에 환자를 태워서 나한테 왔어요. 환자가 허리와 다리가 아프고 걸음을 못 걷는다고 하기에 좌골신경통 약을 지으려고 하다가 뭔가 좀 이상해서 ‘내가 보기엔 좌골신경통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가 아프오’ 하고 물었어. 다리를 보니 뼈와 가죽만 남았고 혼자서는 일어나지도 못해요. 그랬더니 이 여자가 하는 말이 댁이 정말 알기는 아는 것 같소, 나는 순창에 사는데 병을 고치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니오, 골수암으로 서울대 병원에서 한 달 뒤에 수술을 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내가 죽으면 죽었지 수술은 안 받겠다고 버티고 있다가 답답해서 한 번 와 본 것이라고 해요.
내가 약을 한 제 지어 줄 테니 먹어 보라고 권하면서 한 제만 먹고 나으면 다행이지만 먹어도 낫지 않으면 한 제를 더 먹으라고 하면서 재료값만 받고 약을 주었어요. 그런데 골수암에는 효과가 좌골신경통보다 훨씬 빨라. 열흘도 안 되어 거의 다 나아 버렸어요. 열흘만에 이 환자가 다리를 못 쓰는 환자, 절뚝거리는 환자 대여섯 명을 데리고 와서는 산중에 이런 명의가 계시는 줄은 몰랐다면서 큰 절을 몇 번이나 해요. 그 전에는 혼자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밥 짓고 빨래하고 군불 때는 일을 혼자 다 한다는 거라.
그래서 약을 한 제 더 지어줬는데 그거 먹은 뒤로 소식이 없어. 약을 한 제 더 먹어야 마음을 놓을 수가 있을 텐데. 그러다가 한참 뒤에 뜬금없이 전화가 왔어요. 약을 한 제 더 먹어야 되는데 왜 안 먹소 했더니 아픈 데도 없고 돈도 없어 못 갔소 그래.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했소 하고 물었더니 아기가 간질을 하는데 고칠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전화를 했다는 거라. 좋은 약이 있다고 했더니 그 다음날 차를 여러 번 바꾸어 타고 찾아 왔어요. 물론 아기 간질도 약 먹고 나았소이다.”
광주에서 제약회사 운영하다가 실패하다
김 옹이 놀라운 의술을 지닌 채로 시골에서 숨어 지내기만 했던 것만은 아니다. 한 때 자신의 의술로 많은 사람을 구료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광주로 나가 동의제약이라는 제약회사를 운영했던 적이 있다. 제약회사를 차린 다음 ‘옥영(玉英)’이라는 피부미백제를 개발하여 상당한 호응을 얻었으나 유통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고 자금조달능력이 부족하여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20년쯤 전에 광주서 약방을 운영하다가 제약회사를 설립하여 피부미백제를 개발한 적이 있어요. 제약회사를 하면서 31사단 앞에서 동양의학연구소라는 것을 운영했어요. 여기서 간질이나 소아마비, 정신병을 주로 치료했는데 합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간판을 동양의학연구소라고 한 것이었소. 이것은 광주에서 큰 여관을 운영하는 작천 사람 하나가 하숙집을 하나 사서 사업 반 자선사업 반으로 한 번 정신병자들을 한 번 치료해 보자, 이렇게 해서 시작을 한 것이오. 나는 전문의가 아니니 병원이라고 간판을 달수는 없고 정신병을 확실히 고치기만 한다면 치외법권이 가능하지 않겠느냐, 정신병을 고치는 것이 목적이지 환자를 고치기만 한다면 내가 감옥에 가더라도 병을 고친 사람들이 나를 구명해 주려고 애를 쓰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으로 시작을 했는데 막상 시작을 해 놓고 보니 자금도 많이 들고 법적 제한이 너무 많아. 정신병요양소라고도 못하고 동양의학연구소라고만 간판을 건 거요.
그런 다음에 정신병과 간질을 무료로 고쳐준다는 전단을 만들어서 마구 뿌렸소. 운영비를 벌려고 한 것인데 환자를 무료로 고쳐 준다고 했으니 돈을 받을 수도 없고. 재료값은 많이 들어가는데 돈은 한 푼도 못 벌었어요. 그러나 그 덕분에 정신병자하고 소아마비를 여럿 고치기는 했지.
제약회사에서는 ‘옥영(玉英)’이라는 피부미백제를 만들었는데 이것도 실패로 끝났어요. 본래 수십 가지 생약재료를 가루로 내어 물에 타서 피부에 바르도록 되어 있는 약인데 물에 타서 바르는 절차가 복잡하고 또 한약 냄새도 나고 하니까, 여자들이 화장대 앞에 두고 사용하게 하려면 화장품처럼 세련되어야 한다, 이렇게 머리를 써서 화학작용이나 이런 것에 대한 연구 없이 물에 개서 치약처럼 짜서 얼굴에 바르도록 튜브에 넣어 포장을 한 거요.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있었소. 주근깨, 기미가 없어진다고 하니 수요는 폭발적인데 튜브 포장을 한 것이 문제였소. 그 속에 녹두, 찹쌀 같은 식물성 재료가 들어 있는데 방부제 같은 것을 넣지 않았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속에서 발효되어 가스가 생겨 펑펑 터지고 또 안에서 썩어 버리기도 한 거라. 막대한 양이 팔려 나갔다가 몽땅 반품이 들어오니 이거 난리가 난 거요. 제품을 다시 만들어 포장을 하려니 그럴 돈이 없고. 차라리 물에 개어 바르도록 가루로 내보냈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인데. 쇠뿔을 바로잡으려고 했다가 소를 잡는다고 그런 경우를 내가 당한 거요. 결국 사업은 완전히 망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아 고생을 많이 했소. 극도의 좌절을 겪었지요. 그 덕분에 얘들 대학 보낼 나이가 되었으나 대학을 못 보내고 딸은 중학교밖에 못 보내게 됐소. 식자우환이라고 그 때 끼니를 제대로 못 먹을 만큼 살림이 힘들었소. 그 일로 나는 사업을 해서 돈 많이 벌어서 사회에 공헌할 사람은 못 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소.
미국인 의사 카린턴과의 인연
그렇게 좌절을 겪고 나서 동양의학연구소 일에만 힘을 쏟고 있었는데, 한참 환자 치료하느라고 시달리고 있을 때 어느 날 전보가 하나 왔는데 날 보고 빨리 좀 오라는 거라. 보낸 사람이 누군가 하니 잘 아는 교수라. 전에 이 사람의 아들이 갑자기 미쳐서 얼마나 광폭하게 날뛰는지 뒤주에 가두고 문을 잠가도 탈출을 하고 전봇대에 올라가 전깃줄을 뜯어 별 짓을 다 하기도 하고 사단본부에 들어가 무기고를 털어 버리기도 했어요. 이 아들이 또 사고를 쳐서 날 부른 것인가 하고 약속장소로 갔어요.
가서 보니 그 문제가 아니었소. 전에 어떤 정신병에 걸린 미국여자를 고쳐 준 일이 있었어요. 이 환자는 오후만 되면 승용차를 타고 나타나서 약을 받아가곤 했지요. 그 여자를 무료로 고쳐 주었는데 그 여자 치료를 담당했던 미국인 의사가 나를 보자고 한다는 거라. 그 사람들이 나를 보고는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는 사진을 찍어. 이게 어찌된 건가 하고 졸가리가 서지 않아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자고 해요.
어디로 가는가 봤더니 나를 태워서 광주기독병원 흉내과라는 데로 갔는데 거기에서 그 병원의 창립자인 미국이름으로는 카린턴이고 우리말로는 고후범이라는 사람을 소개해서 이 사람과 얘기를 했어요. 고후범이 말하기를 지금까지 선생님이 많은 환자를 무료로 많이 고쳐 줬는데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물어. 내가 대답하기를 당신네 나라에는 사회복지 자선단체 같은 곳이 많아서 정신병자들을 격리해서 치료를 받게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런 것이 아직 없다, 정신병은 가장 위험한 성격의 환자여서 불시에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런 환자를 우리 나라에서도 사회복지단체 같은 데서 수용해서 돌봐 주어야 하겠으나 대부분 그냥 방치하고 있는 것이 우리 실정이다, 나는 배우지 못한 사람이고 돈도 없으나 이 짓 하느라고 논밭 팔고 소 팔아서 식구들이 다 굶어죽게 생겼지만, 일단 정신병자들을 내 의술로 확실히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므로 우선 내 힘으로 이 사람들을 고쳐서 이런 의술이 있다는 것을 알려서 뜻있는 독지가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그랬더니 고후범 씨가 당신의 뜻이 정말 훌륭하다면서 우리가 같이 힘을 합쳐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 보자고 하며 악수를 청해요. 우리는 금방 십년지기처럼 친해졌어요. 이제 내 의술을 제대로 펼칠 기회가 온 것이라고 생각했소. 그런데 그게 잘못되었소.
고후범이 속한 기독교 단체에서 갑자기 고후범한테 휴양명령을 내린 거요. 그 단체에서는 보통 사람을 한 곳에서 5년 동안 일하게 한 다음에 1년 동안 휴양 명령을 내려 푹 쉬게 한 다음 다른 곳으로 전근을 보내는데 마침 고후범한테 휴양명령이 내렸던 것이오. 휴양명령이 내리면 면회도 할 없고 연락도 불가능해요. 이러니 같이 하려던 일을 추진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소.
설상가상으로 고후범이 운영하던 병원 밑에서 정신병원을 운영하던 김재권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사람은 환자한테 약값을 비싸게 받고 있었으나 나는 무료로 고쳤으니 이 사람이 나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던 중에 김재권이가 정신병에 걸린 교회 장로의 딸을 자기네 병원에 입원시켜 오랫동안 치료했으나 낫지 않아 퇴원시킨 것을 내가 밑져봐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약을 한 제 지어서 주었더니 그 환자가 나아 버렸어. 이러니 재권이가 앙심을 품고 나를 무자격자의료행위로 고발한 거요.
그것이 소송이 되어 나는 법정에서 동양의학연구소의 문을 닫고 의료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하고 물러 나왔소. 그 때 고후범이 법정에 나와서 ‘제발 이 사람한테 벌을 주지 말아 주시오, 이 사람은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처벌하면 내가 미국으로 데려가서 의료행위를 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하고 간청을 했지만 판사는 나는 국민의 법을 지키는 사람이라며 그 간청을 무시하고 나한테 벌금 2천 원을 구형했소이다.
나는 이 일이 있은 뒤로 진실이 빛을 보기는커녕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크게 좌절하여 산골로 숨어 버리기로 작정한 것이오. 수십 억을 들여도 못 고치는 병을 돈 몇 푼 들이지 않고 고치는 능력이 있으나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세브란스병원에서 수백 명의 소아마비 환자를 치료하고 있으나 한 사람도 고친 일이 없어. 그런데 내가 치료를 하면 거의 전부를 고칠 수 있으니 우리 전통의학의 힘이 얼마나 우수한가. 그런데 세브란스 병원에는 몇 억씩 희사하는 이가 있어도 나 같은 사람한테는 백만 원도 주겠다는 사람이 없어. 아는 것이 도리어 병이라, 뜻을 이루지 못하니 헛되이 방황만 할 수밖에 더 있겠소.”
신기의 의술 펼칠 수 없는 것이 평생의 한
김 옹은 지금 한가롭게 농사를 지으면서 낮게 엎드려 때를 기다리고 있다. 김 옹의 나이 벌써 일흔 셋. 원대한 뜻을 펼쳐보지 못하고 은거한지 20여 년. 어느 사이엔가 머리칼은 눈처럼 희어버렸다. 평생을 갈고 닦은 의술을 크게 써 볼 수가 없으니 그것이 못내 아쉽다. 숨이 넘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의술을 지녔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펼쳐 보일 수가 없으니 평생의 집념으로 닦은 의술이 무용지물일 뿐이다.
의술을 물려받겠다는 제자도 없다. 양의학이 판치는 시대에 누가 어렵고 곰팡이 냄새 나는 전통의학 책을 배우려 하겠는가. 자식한테 의술을 전하려 하나 그것도 여의치 않다. 평생 경험한 것을 글 몇 줄로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한두 해 가르쳐서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타고난 재능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몇십 년 동안 의학책을 공부해야 하며 또 수십 년의 경험이 쌓여야만 한 사람의 명의가 탄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혼자 힘으로 버티어 온 수천 년 조상들의 혼이 배인 인술의 맥이 끊어질 판이다.
뼈를 깎는 아픔으로 갈고 닦아 온 신기(神技)의 의술이 영원히 사라질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하여 있다. 겨레의 혼이 배인 토종 의술이 되살아나 세상에서 빛을 발할 날은 언제일까. 그 때가 결국 오기는 올 것인가.
김명식 옹은 10여 년 전에 별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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