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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東書院 / 銀杏나무

초암 정만순 2018. 2. 8. 09:43




道東書院 / 銀杏나무




 가시는 길



대구에서 화원을 지나 창원, 현풍으로 가는 5번 국도와 대구 수목원 도로를 타고 테크노폴리스 중앙도로를 이용해
현풍고등학교 옆 도로에서 도동서원ㆍ오산리 방향으로 계속 가면 다람재 너머 도동서원이 있다. 

도동서원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한 갈래는 종가에서 구지면 소재지를 거쳐 가고, 다른 한 갈래는 종가에서 왼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가는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거리가 짧지만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한다.

필자는 종가에서 왼쪽 낙동강을 따라가는 산길을 택하였다.

풍경이 좋아서다. 강을 따라 한참 가면 가파른 고갯길이 나오고, 고갯마루 다람재에 오르면 도동서원을 비롯한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낙동강과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 같다.

다람재에는 작은 정자가 있다.

혹시라도 도동서원에 와 보려는 사람은 이 고개 정상까지 와야만 서원의 전체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풍수로 본 도동서원


낙동정맥(洛東正脈)이 경주 윗녘 사룡산(四龍山:685m)에서 가지를 뻗어 주니 이를 비슬산이 받아 남쪽으로 되돌아(회룡:回龍)와서 끝부분인 대니산(戴尼山)이 자리한다.
대니산(戴尼山)은 서북쪽으로 뻗어주다가 갑자기 북쪽으로 머리를 틀면서 떨어지는 중간녘에는 솥뚜겅을 엎어놓은 형상(形象)의 산(一字文星)이 있고, 둥그런 산(山)이 살짝 머리를 내민 것 같은 자리위에 도동서원(道洞書院)이 매김질 되어져 있다.
앞쪽 동북방에서 유유히 흘러오는 낙동강물이 서원(書院)을 감싸안으니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하다.
멀리 고령군 개진면 산과 들도 내안에 들어 선다.
오른쪽 달음재 고개위에서 내려다 본 서원은 한폭의 동양화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자모리에서 물길 보며 산길을 오르면 다람재 정상. 현풍면과 구지면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2층 전망대에서 물길 건너 고령 개진면 들판, 도동서원이 자리잡은 유서 깊은 마을 도동리가 한눈에 잡힌다.
아름다운 강 풍경이다.
고령 땅 개진(개경포)은 강화도에서 뱃길을 통해 합천 해인사로 팔만대장경판을 옮길 때 배를 댔던 포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다람재 전망대 옆엔 조선 전기 유학자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의 시를 새긴 빗돌이 있다.
도동리는 김굉필을 기려 세운 도동서원이 들어서면서 붙은 이름이다.

국내에는 현재 637개 서원이 있는데, 특히 도동서원은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 대상에서 제외된 전국 47개 주요 서원 중

하나다.

조선시대 학자인 한훤당 김굉필(金宏弼·1454~1504)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본받기 위해 세운 곳이다.

퇴계 이황은 김굉필의 학문을 두고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하였으며, 서원의 ‘도동(道東)’이란 사액도 이와

연관된 명칭이다.

이곳은 조선 중기 서원 건축의 특징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공간배치가 잘 이루어져 있으며, 서원의 강당(中正堂)과 사당

그리고 담장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돼 있다.

또한 서원 입구의 신도비와 은행나무를 포함한 공간은 국가지정 사적 제488호로 지정돼 보존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당시 교육기관으로서의 도동서원 입지는 어떠한 터에 자리하여 지금까지 현존하고 있는 명당공간인지를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분석해 보자.

첫째,

도동서원의 터는 낙동정맥에서 분맥한 비슬지맥이 산진처를 이룬 대니산(해발 409m)의 내룡맥이 개장한 곳을 의지하고 있다.

주산의 용맥은 일자문성의 현무봉을 세운 후 다시 중심룡맥이 생룡형태로 뻗어나가 사당으로 입수했고, 강학공간의 중정당에서 지기가 더 이상 흘러나가지 않고 머문 곳을 의지하고 있다.

이러한 공간배치는 산을 의지하면서 일자중심축으로 주요건물들이 자리한 것인데, 용맥을 승생기하여 지기를 받기 위한 터잡이를 한 것이다.

바로 중정당을 받치고 있는 기단속에 4마리의 용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이 혈증이다.

강학공간인 ‘중정당’은 당시 선비들이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과거공부를 하던 곳이므로 등용문의 기를 받을 수 있는 공간임을

말해준다.

혹자는 용의 머리가 앞쪽에 흐르고 있는 낙동강의 수해를 막기 위한 비보로 물의 신인 ‘용’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조선조 유교건축에서 풍수사상이 적용된 것을 배제시킨 논리라고 본다.

둘째,

담장의 공간은 이러한 생기가 바람에 흩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머물 수 있는 역할을 하는데, 담장의 흙속은 양(陽)을 상징하는

원통형과 음(陰)을 상징하는 방정형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쌓여 있다.

이것은 정적인 공간의 정중당과 생기가 분출되는 동적인 기의 공간이 서로 머물도록 나타낸 것이다.

또한 담장은 자연 지세의 경사면을 따라 쌓은 형태인데 이러한 기법은 북향의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수기(水氣)를 수월루의

누각과 환주문을 거쳐 흘러들어오도록 했으며 대문을 건물과 마주하는 중앙에 두어 강학공간으로 지혜의 기가 항상 유입될 수

있도록 공간배치를 하였다.

셋째,

서원이 오래도록 지속성을 유지하면서 명당공간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득수를 하여야 한다.

물은 만물의 근원이므로 서원의 주변지세에 생성된 내수를 얻어야만 정기를 머금고 있는 득수가 된다.

더구나 물길을 가까이서 얻고 외수와 합수를 이룬 경우는 입지공간이 지속적으로 생태공간을 이루게 되는데, 이러한 득수형태는 지기가 연속적으로 터에 영향을 주어 오래도록 현존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도동서원의 입지는 백호자락에서 생성된 계류수와 전면의 낙동강과 합수를 이루었고 청룡자락은 우입좌출하는 물길을

역수하는 지세이므로 명당의 지기를 받는 입지가 된다.

따라서 도동서원이 현존할 수 있었던 것은 명당 터를 이룬 곳에서 지속적으로 생기를 받아 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풍수지리적 명당 입지공간은 문화적 가치가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는 친환경 생태공간을 이룬 곳이다



도동서원






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1454~1504)과 추후에 배향된 한강 정구(1543~1620)를 모신 서원이다.

무오사화갑자사화에서 죽임을 당한 김굉필은 유학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학문적으로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고, 그의 학문이 제자인

조광조김일손과 이언적 이황으로 이어지게 된다.

김굉필은 1610년 동국 5(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을 문묘에 배향할 때 가장 앞서 자리했던 인물이다.   

 김굉필의 외증손자 정구는 1568년(선조 1)  김굉필을 배향한 쌍계서원을 건립하고 1573년에 쌍계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리고, 1604년 현재의 위치에 다시 사당을 짓고, 이듬해 강당을 지어 완공하였다. 

당시의 서원 이름은 보로동서원이었지만 1607년 도동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라는 의미이다.

도동서원은 우리나라 5대 서원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5대 서원 옥산서원,도동서원,소수서원,도산서원,병산서원이다.

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추진중인 9대서원으로 위 5대서원 외에 남계서원(藍溪書院 경남 함양),

필암서원(筆巖書院 전남 장성), 무성서원(武城書院 전북 정읍), 돈암서원(巖書 충남 논산) 등이 있다.

또한 고종 8년(1871)의 서원철폐령의 대상에서 제외된 47개 서원가운데 하나이다.

.

서원은 향교와는 차이가 있다.

서원이 오늘날 사립학교라면 향교는 공립학교이다.


왼편 가장 큰 건물이 중정당이며, 앞에 2동의 건물이 거인재와 거의재이며, 뒷편으로 장판각이 있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 강학 영역은 학문을 닦고 배우던 공간이다. 정면에 보이는 중정당이 원장과 유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강당인데, 그 앞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기거하던 동쪽 기숙사 거인재와 서쪽 기숙사 거의재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또한 강당의 정면 기단에는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 4개와 다람쥐 모양의 동물이 장식되어 있다.

이 4개의 용머리는 서원 앞 낙동강 물이 넘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한 비보책으로 물의 신 용을 상징한다.

그리고 강당 주위 담장은 흙과 기와로 쌓은 맞담으로 형태와 구성이 매우 아름답다.

장판각은 유물과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서원에 들어서면 입구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울창한 나뭇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한강 정구 선생이 도동서원의 사액을 기념하여 심었다고 한다.

평지에 심어진 데다, 오래되어 나무의 형세가 기괴하고 장대하기 그지없다.

은행(銀杏)나무는 싹이 튼 지 20년 이상이 지나야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데 씨를 심어 손자를 볼 나이에 열매를 얻을 수 있다고

하여 공손수(公孫樹)라고도 부른다.

 중국에서 은행나무를 공자의 행단(杏壇)에 많이 심어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본따 문묘나 향교, 사찰 경내에 많이 심었다.

또 천심이 내려지는 신목이라고 하여 악정을 일삼는 관원들을 응징하기 위해 관가의 뜰에 많이 심기도 하였다.


도동서원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건물이 북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도 내시종가로 알려진 임당리 김씨고택 안채도 북향으로 놓여 있는데 매일 임금을 생각한다는 의미이지만 이곳은 배산임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남향을 포기한 것이라고 한다

도동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철학을 충실히 따른다.

즉, 앞쪽에는 후학양성을 위한 강론공간, 뒤쪽에는 선현의 위패를 모신 제향공간을 배치한 것이다.



서원 배치도 


서원을 구성하는 건물들은 반듯하게 설정한 중심축을 따라 수월루(水月樓), 환주문(喚主門), 중정당(中正堂), 내삼문, 사당이
차례로 배열돼 있다. 
중심축에는 이를 명확하게 나타내기 위한 통로와 계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말한 추뉴(樞紐), 즉 만물의 축과 중심성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도동서원의 전체적인 건축 구성과 배치 형식은 우리나라 서원건축 중 가장 규범적이고 전형적이며 건축적 완성도와

공간 구성도 우수하다. 
특히, 1600년대에 건립된 강당과 사당 등 건물들은 당시 서원과 사묘건축을 대표할 만큼 매우 훌륭한 짜임새와 수법을 보이고
있다.

서원 전체가 사적 제4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원을 둘러싼 담과 석물들도 우수하여 이들 모두 보물 제350호로 지정됐다.

경내의 건물로는 김굉필과 정구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祠堂),

원내의 여러 행사 및 학문의 강론장소로 사용한 중정당(中正堂),

거인재(居仁齋)·거의재(居義齋) 외에 수월루(水月樓)·환주문(喚主門)·내삼문(內三門)·장판각(藏板閣)·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서원 강당에는 도동서원이란 편액 2개가 걸려 있다.

처마 아래와 강당내부 중앙에 각각 걸려 있다. 강당 중앙의 편액은 선조가 하사한 것이다.

이 편액 아래에도 단아한 정자의 글씨로 ‘중정당(中正堂)’이란 편액이 같이 걸려 있다.

이외에도 강당에는 오래된 몇 개의 편액이 더 걸려 있다.


강당에서 바라보면 유생들이 기거하던 동·서재가 있는데, 당호를 ‘거인재(居仁齋)’ ‘거의재(居義齋)’라 이름하여 붙인 것이

눈에 들어온다.

서원을 관리하는 분에게 부탁하여 선생의 신도비와 유물전시관을 둘러본다.

전시실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지만, 도동서원, 한훤당과 정구선생을 소개한 내용과 유물이 있어 탐방객들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진입공간의 건축물  


은행나무·행단(杏壇): 유교를 상징하는 나무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가 만년에 큰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모아 놓고 강학을 했다는 행단강학(杏壇講學)’에서 연유한

것이다.

유교와 관련된 건축물 주변에는 반드시 은행나무가 있다.



도동서원 은행나무


도동서원의 주요 건물들


도동서원 내의 여러 건물들을 그 기능에 따라 몇 가지 범주로 묶어 살펴보자.



 수월루(水月樓): 시회(詩會토론·휴식의 공간


1층은 출입문으로 2층은 누마루의 용도로 사용하는 누문(樓門)이다.

필요시 2층 누마루에서 시회·토론·휴식 등을 행했다.

요즘으로 치면 학교의 정원·광장·대공연장·대운동장·학생회관 정도쯤 된다.


 


수월루


 환주문(喚主門): 주 출입문


도동서원 주출입문으로 일반 서원들의 외삼문(外三門)에 해당한다.

하지만 도동서원 환주문은 동문·중문·서문세 개의 문을 갖춘 삼문이 아닌 매우 작은 규모의 일문(一門)이다.

도동서원의 진입공간은 이 환주문에서 끝이 난다.

반면 이 환주문을 넘어서면 새로운 강학공간이 시작된다.



환주문 


강학공간의 건물


강당(講堂): 교실 또는 대강의실

중정당(中正堂)이라 이름 붙은 건물이다

 도동서원의 건축물 중에서 사당과 함께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으로 치면 학교의 교실 좀 더 정확히는 대강의실 정도쯤 된다

 이곳에서 선생과 학생들이 서로 정해진 위차에 따라 자리하여 학문을 연마했던 것이다.   




중정당


 

동재(東齋서재(西齋): 학생들의 기숙사


조선시대 향교와 서원은 요즘의 학교처럼 출·퇴근 시스템이 아니었다.

일 년 중 농번기를 제외하고 적절한 시기를 정해 입원(入院합숙하는 시스템이었다.

따라서 학생들의 숙식을 위한 공간이 필요한데, ·서재가 바로 그것이다.

통상 동재에는 상급생, 서재에는 하급생이 숙식하였다.

 

동재 


서재

 

제향공간의 건물


내삼문(內三門): 사당 출입문 


제향공간인 사당 경내를 출입할 때 사용하는 문이다.

문호(門號·문의 이름)가 있는 여타 서원들의 내삼문과는 달리 이곳 내삼문에는 편액(현판)이 걸려 있지 않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동문과 중문 앞에만 계단이 있고 서문에는 계단이 없다.


 


내삼문



사당(祠堂사우(祠宇): 위패가 모셔진 집


한훤당 김굉필 선생과 한강 정구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건물이다.

매월 초하루·보름날에 분향례, 음력 2·8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거행한다.


 


사당


 증반소(蒸飯所): 제기 보관소


원래는 주요 제수를 장만을 하는 용도의 건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사청에 그 기능을 넘겨주고 제기 보관소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사당과 증반소 

 


기타 부속건물


 신도비각(神道碑閣): 김굉필 선생의 신도비()


 도동서원 은행나무 동쪽에 세워져 있는 건축물로 김굉필 선생의 신도비와 그 비를 보호하기 위한 건축물인 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인물의 업적을 기리위해 세운 비석이다.

 


한훤당 선생 신도비각



유물전시관: 전시관


 도동서원의 연혁과 각종 유물의 복제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장판각(藏板閣): 목판을 보관하는 곳


중정당의 오른편에 있는 작은 규모의 목조건물로 김굉필 선생의 문집인 경현록(景賢錄)의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다른 건물에 비해 통풍과 방습에 강한 구조이다.

 



장판각


 

전사청(典祀廳고직사(庫直舍): 서원 관리사


도동서원의 왼쪽 담장을 경계로 바깥에 위치한 일군의 건물들이다.

서원에 소속된 일꾼들이 기거하며 유생들의 빨래·식사 등 각종 서원업무를 지원·관리하던 곳이다.

또한 향사 때는 전사청이나 제관들의 재계 장소로도 이용했다.



고직사


 

사주문(四柱門):


서원과 고직사를 연결하는 작은 출입문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특징과 도동서원 건축의 파격성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두드러진 특징을 위계성대칭성이다.


외삼문·서재강당내삼문사당으로 가면서 대지 및 건물의 높이·규모·위엄 등이 더해지는 것을 위계성이라

하고, 역시 외삼문·서재강당내삼문사당에 이르는 중심축을 기준으로 좌우가 정확하게 닮은꼴을 하고 있는

것을 대칭성이라 하는 것이다.


도동서원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서원들 중에서 이 위계성대칭성이라는 서원건축의 특징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서원이다.

마치 마분지 접듯 좌우가 정확하게 대칭되는 곳이 이곳 도동서원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완벽할 것 같은 도동서원의 이 대칭성에도 약간의 파격이 보인다.

바로 이 점에 대해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도동서원은 모두 18단으로 되어 있는 석축 위에 세워져 있다.

동방18현의 수를 상징하는 건지도 모른다.

대니산 북쪽 경사면을 이용해 서원이 세워진 탓에 지면이 서원 앞쪽에서 뒤쪽으로 가면서 자연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울기를 조절하기 위해 모두 18단의 석축을 조성하고, 그 위에 서원의 모든 건축물이 올려져있는 것이다.

조금 떨어진 먼발치에서 도동서원을 바라보아도 대번에 알 수 있지만, 실제로 수월루를 지나 환주문 앞에만 서도

전저후고(前底後高)의 경사도를 확인할 수 있다.

 

고개 숙여 환주문을 통과, 뜰에 올라서면 정면으로 높은 기단위에 올라앉은 위풍당당한 모습의 중정당(中正堂)

나타난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매번 이 중정당에 올라 뜰을 내려다보면 괜히 목에 힘이 들어가고 어께가 으쓱해진다는 점이다.

높이 때문인지 아니면 뒤쪽에 있는 중정당의 후광효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째든 저 중정당 마냥 스스로도

위풍당당해지는 느낌은 분명하다.

 

여하튼 중정당에 올라 마루에 걸터앉거나 아니면 기둥에 기대어 서서 뜰과 동·서재, 환주문의 사모지붕과 수월루 지붕

등을 한번 바라보는 순간 대칭성이 떠오를 것이다.

중정당 월대 가운데 서 있는 정료대와 환주문 사모지붕 위 절병통을 잇는 중심축을 기준으로 좌우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틀린 그림 찾기를 한 번 해보자.

그 대상은 동재인 거인재(居仁齋)’와 서재인 거의재(居義齋)’이다.

 중정당 월대에서 내려다본 동재와 서재는 얼핏 한 눈에 보기에는 똑 같은 모양의 건물로 보인다.

그런데 좀 자세히 살펴보면 두 건물의 건축양식에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도동서원이라는 큰 묶음으로 보면 분명 동·서재는 닮은꼴 대칭의 관계에 있다.

하지만 동·서재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 두 건물은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도동서원 동·서재에서 발견되는 대표적 차이점 3가지 정도를 특정하면 다음과 같다.

동재는 방문 앞쪽으로 쪽마루를 두어 편의성을 높였지만, 서재는 그렇지 않다 

동재는 대청 벽면이 나무 판벽인 동시에 창문이 설치되어 있지만, 서재는 흙벽이며 창문이 없다.

동재는 대청 쪽 기둥이 고급 자재인 원기둥인 반면, 서재는 각기둥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동·서재 건축양식의 차이는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 바로 위계성(位階性)’ 때문이다.

 

유교에서는 군신(君臣), 부자(父子), 장유(長幼)’의 예처럼 사람 간의 위계에 분명한 차등을 두었다.

그런데 이러한 유교의 위계성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건축물 등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를테면 중요한 건물일수록 그렇지 않은 건물에 비해 고급 자재를 쓰거나, 건물의 규모를 크고, 높고, 화려하게 

짓는 것 등이 그렇다.

앞서 살펴본 동·서재 건축양식의 차이가 바로 이러한 위계성의 반영 결과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동재와 서재는 서원의 기숙사이다.

동재는 상급생, 서재는 하급생들이 거주했다.

바로 이러한 차이가 동·서재 건물의 건축양식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유교·유학의 한 분야인 예학(禮學)의 경우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기본철학은 친소·원근·귀천(親疎·遠近·貴賤)’에 따라

인간관계에 차등을 두자는 것이다.

하지만 유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모두가 평등한 대동사회(大同社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좀 부자연스럽다.

 유교에서는 모든 사람을 획일적으로 똑같이 보지는 않는다.

가깝고 먼, 친하고 소원한, 귀하고 천함에 차등을 둔 인간관계를 지향한다.

너무 인정 없고 박절한 것 같지만 사실 유교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시종일관 현실이라는 끈을 절대 놓치지 않는 유교의 현실지향적인 실용성 때문이다.

냉정하게 한번 생각해보라. 모든 사람들을 다 똑같이 평등하게 대우한다는 것은 너무 이상적이지 않은가.

현실은 절대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그건 다들 잘 아시지 않은가?

 


◆ 김굉필은 누구

도동서원은 선생의 도학을 계승하기 위하여 1605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외증손 한강 정구 선생이 주도하여 세워졌다.

1607년 선조로부터 ‘도동(道東)’이란 현판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1607년 정구 선생이 추가 배향된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도동서원 이전에 선생을 모신 서원은 쌍계서원(雙溪書院)이다.

쌍계서원은 선생이 돌아가신 지 64년 후인 1568년에 비슬산의 두 골짜기 물이 합쳐지는 달성군 유가면 쌍계리 초곡천 산기슭에 세운 서원이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왜병의 방화로 불타고 말았다.

그 후 선조 38년(1605)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워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이라 하였다.

 2년후 나라에서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으로 도동서원이란 편액을 하사한다.

이로 인해 마을 이름도 도동리로 불린다.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요 학자다.

본관은 서흥, 자는 대유(大猷).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김유(金紐), 어머니는 중추부사 한승순의 따님이다.

그의 선조는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으로 성장하였는데, 증조부인 김사곤이 수령을 지내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게 되면서 이곳을 주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선생은 어려서는 성품이 매우 호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함에 따라 분발하여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주로 영남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처가), 성주의 가천(伽川·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선비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때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운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짐에 따라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됨에 따라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는데,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다.

성균관유생들의 문묘종사 건의가 계속되어 1577년에는 시호가 내려졌고, 1610년에는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하여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앞뜰엔 수령 400년의 거대한 은행나무



한국의 서원과 향교에는 거의 예외 없이 은행나무가 살고 있다.

서원에 은행나무를 심은 것은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서원에서 살구나무 대신 은행나무를 심은 확정적인 이유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살구나무의 ‘행’과 은행의 ‘행’이 같아서 오래 살지 않는 살구나무보다 천년 이상 살 수 있는

은행나무를 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옛날에는 나무를 이해할 때 분류학적인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사정에 따라 간혹 원산지 나무와 다른 이름을 사용했다.

중국의 측백나무를 잣나무, 회화나무를 느티나무로 인식한 것처럼 살구나무를 은행나무로 대체한 것도 일종의 문화적

격의(格義)로 볼 수 있다.

격의는 번역과 같은 의미이고, 한 나라의 문화를 수입할 경우 수입국의 상황에 따라 뜻을 맞추는 것이다.


단풍은 잎이 절반쯤 바닥에 떨어져 주변을 물들일 때 가장 여행의 적기이며 아름답다.

개인적 생각으로 볼 때 11월 보름 전후 찾는게 좋을 듯 싶다

서원 앞뜰에는 1607년 사액을 기념해 심었다는, 수령 400년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기둥 같고 들보 같은 가지들을 사방으로

내뻗고 우거져 있다.

높이 25m, 둘레 8.7m인 큰 나무다.

가지들이 부러질 우려가 있어 시멘트 기둥 5개로 받쳐놓았다.

도동서원의 은행나무는 4백 년에 걸쳐 잘 자랐다.

아름답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크다. 웅장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커다란 나무이다.

이곳 사람들은 서원 입구에 서 있는 이 나무를 그냥 서원목이라고 부른다. 도동서원의 상징이라는 의미다.

나뭇가지는 사방으로 넓게 퍼졌다.

동쪽의 가지는 무려 30미터나 되는 길이로 퍼져나갔고, 남쪽으로 난 가지도 28미터까지 펼쳤다.

남쪽으로 뻗은 가지는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아예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러나 나무는 누워서도 의젓하다. 누운 가지에서는 오랜 세월이 읽힌다.

길게 뻗어나가는 가지를 부러뜨리지 않으려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낮추어간 시간이 생생하게 눈에 보인다.

이곳이라고 해서 큰 바람이 불지 않았을 리 없다. 거센 눈보라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 게다.

그러나 간단없이 다가오는 모든 시련에도 긴 가지 하나 부러뜨리지 않고 가만히 내려앉아 이제는 편안히 누웠다.

남쪽으로 뻗은 가지는 한없이 편안해 보인다.

그러나 북쪽의 가지는 이미 30년 전에 부러졌다. 나무의 전체적인 균형은 깨졌다.

북쪽의 가지도 원래는 다른 쪽 가지들과 마찬가지로 우람했을 것이다.

당시에 부러진 북쪽 나뭇가지를 잘라냈더니 8톤 트럭에 꽉 찼다는 말이 전한다. 그만큼 큰 나무다.

1992년 12월부터 1천 2백만원 의 예산을 들여 토양소독제, 해충 방제를 실시하고 배수로 설치, 생장촉진 제 주사 등으로 치료

업을 실시했다

나무의 생김새는 불균형하지만 묘하게도 불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아마 나무의 크기 때문일 게다.

워낙 큰 나무라 가지가 하나 잘려나가도 도인처럼 넉넉해 보이는 것 같다.

이제 도동서원을 찾는 이들은 서원보다도 편안히 누워 있는 큰 나무를 보기 위해 이곳에 온다.

서원을 지은 사람도, 또 서원에 배향된 사람도 모두 가고 없지만 이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이곳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나무는 ‘김굉필 나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대구광역시 특유의 나무 이름 호명법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도 중요하지만, 나무를 통해 기억해야 할 사람을 우선한 것이다.

답사 때마다 이처럼 사람 이름이 붙어 있는 나무를 만나는 일은 몹시 반갑다. 나무와 함께 금방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어서 좋다.


행단강학(杏壇講學)


유학용어 중에는 행단강학(杏壇講學)’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줄여서 행단이라고도 한다.

바로 이 2-4자에 불과한 행단강학또는 행단이라는 용어에 은행나무의 모든 비밀이 숨어 있다

먼저 행단강학(杏壇講學)’이라는 글자의 뜻을 알아보자. 한자를 살펴보면 살구 행(), 흙으로 쌓은 단 단(), 익힐 강(),

배울 학()’이다.

참고로 중국 한자에서는 자를 살구나무로 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은행나무로 본다.

이를 1차적으로 조합해보면 행단강학이라는 말은 은행나무 단에서 배우고 익힌다는 의미가 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일까?

행단강학이 압축 용어를 오류 없이 정확하게 풀기 위해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중국 춘추시대를 살다간 성인(聖人)

공자로부터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세계 3대 성인 중 한분인 공자는 실상 정치인이자 학자였다.

그는 55세부터 68세까지 13년의 세월 동안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현실에 접목해보기 위해 중국대륙의 여러 나라를 떠돌아

다녔다

 하지만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더 이상 공자의 정치이론은 실현이 불가능했다.

이에 낙심한 공자는 과감하게 자신의 꿈을 접고 고향땅인 노나라의 곡부로 돌아왔다.

하지만 공자는 자신의 학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비록 자신은 그 꿈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실현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를 위해 공자는 2가지 방법론을 선택했다.

하나는 유교경전을 정리하고 편찬하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흔히 6(六經)이라 일컫는 ···예기·악기·춘추를 정리하고, 3,000명에 이르는 제자를 양성했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여기서 드디어 행단이 등장한다.

행단의 등장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 시기에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가 바로 살구나무 아래였기 때문에 행단강학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 곡부에 있는 공묘(孔廟) 대성전 앞마당에는 행단이 남아있다.

이 행단은 송나라 때 단을 쌓았고, 금나라 때 정자를 세웠으며, 현재와 같은 모습의 행단은 명나라 때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국의 행단은 은행나무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행단과는 달리 지금은 측백나무와 살구나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석가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도를 깨쳤고, 예수는 감람나무와 종려나무가지로 움막을 짓고 설교를 했다.

공자는 이미 살펴본바와 같이 살구나무 아래에서 강학활동을 했다.

이처럼 세계 3대 성인들은 하나 같이 특정 나무 아래에서 자신의 이상을 펼쳐나갔다는 공통점이 있다.

실제로 산림욕의 효과처럼 나무에서 방출되는 특정 물질들은 인간의 학습활동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가끔씩 향교나 서원 등에 은행나무를 심는 이유에 대해 은행나무는 병충해가 없으며, 그 아래에 있으면 머리가 맑아지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을 접할 수가 있다.

이 역시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곡을 정확히 꿰뚫은 설명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오늘 이후부터 유교관련 건축물 곁에서 은행나무를 만나게 되면 자연스레 공자의 행단강학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도동서원의 은행나무!

이젠 더 이상 예전의 그 은행나무가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할 수 있으니까...


도동서원 뒷길


서원 뒷산은 아름드리 소나무숲이다.

도동서원 동편 담장 옆 소나무숲길을 따라 10여분 오르면 문·무인석 등 무수한 석물을 거느린 김굉필 묘소가 있다.

위아래로 이어진 3개의 묘 중 가운데 묘다.


도동리엔 김굉필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20여 가구가 모여 산다.

마을에서 건너다보면 오른쪽으로 다람재 능선이 물길에 가로막혀 끊겨 있고, 강 건너쪽엔 작은 야산이 홀로 솟아 있다.

여기에 얘깃거리가 많다. 도동리 주민 서용수(66)씨가 다람재를 가리켰다.

“지따랗게 이래 쪼옥 내리뻗응께네 똑 다람쥐맹이로 생기가 다람재라 카는 기라. 건너짝은 깨구리산이라.”

개구리산 앞 물가에 선담으로 부르는 바위가 솟아 있다. 홍수 때 물이 선담을 넘어서면 마을 안쪽까지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20여년 전까지 도동리엔 나루터가 있었다.

배를 타고 건너가 농사를 짓고, 아이들도 배를 타고 학교에 다녀야 했다.

다람재 능선과 개구리산은 본디 이어져 있던 산줄기였다.

1986년 다람재 길이 뚫리기 전까지 주민들은 능선 끝 물가의 오솔길을 이용해 현풍을 오갔다.

    

다람재 능선 위쪽엔 김굉필이 부친 시묘살이를 했다는 암자(현 정수암)가 있고, 마을 뒤 산자락엔 정구의 제자였던 사우당

김대진이 지은 정자 관수정이 있다. 정자 현판 이름 그대로 물줄기를 내려다보기 좋은 곳이다.





 사진첩


● 이 사진들은 2016.11월에 촬영하였으며 자세한 설명을 위해 인터넷 자료에서 차용한 것도 있음. 


다람재에서 내려다 본 도동서원 


북동쪽을 바라보며 앞으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그 멀리 좌우로 길게 누운 비슬지맥 천왕봉이 우뚝한 학맥을 이어간다.

뒤로는 대니산이 서원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풍수적 길지다. 

배산임수를 고집하며 향배(向背)가 맞지 않자 남향을 포기한 고집이라 하니 선비의 대쪽같은 기개가 살아 있음이라.



노거수 은행나무(김굉필 나무)


은행나무는 대개 하늘로 향해 위로 솟는데, 옆으로 뻗고 아래로 늘어진 수형(樹型)이 초대형 분재를 보는 듯하다.

높이 25m가 둘레 8.7m인 은행나무의 가지를 지탱하기 위해 굵은 시멘트기둥이 5개나 받쳐있다.

 어른 대여섯명이 두팔을 뻗어야 안을수 있는 나무 둘레가 세월의 깊이를 말해준다.

은행나무는 기상 높은 선비를 기르는 최고의 상징으로 서원이나 향교등에 한 두 그루씩 심어져 있으며 열매인 은행은

수양과 학문 성취의 상징이기도 하다.






 

거대한 몸집에 볕이 잘 드는 앞쪽과 그렇지 않은 뒤쪽의 색깔에 차이가 있다.

"기개"를 앞세우고 드러내는 앞쪽은 일찍 쇠하고 알 듯 모를 듯 "은근"으로 인내하는 뒤쪽은 오래 가는가 보다.


서원 앞 은행나무는 장장  400년의 세월동안 풍상을 견더내었으니 그 결과  껍질이 온통 천연의 전서(篆書)가 되고 초서(草書)가 되었음이라.


젖꼭지처름 생긴 유주 3개~~

종유석처름 땅을 향해 자라는 가지는 기근의 일종으로 호흡을 위해생겨난 것인데 은행나무의 특징이기도 하다.


노거수와 청년 은행나무~~



청년 은행나무~~



한훤당 신도비

수월루 앞의 한훤당 신도비.

신도비는 사람의 평생사적(平生事蹟)을 기록하여 세운 비다.


붉게 타오르는 단풍나무.


문경공 한훤당 김선생  500주기 추모비.


전사청(典祀廳고직사(庫直舍): 서원 관리사



수월루

문루인 수월루는 공부하던 유생들이 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풀던 곳이다.
‘물 위에 비친 달빛으로 글을 읽는다’는 뜻이 있는 수월루의 건축적 품격은 서원 내 다른 건물들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난간을 두른  2층 누마루에 오르면 넘실거리는 낙동강물과 은행나무 등 서원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수월루는 도동서원으로 들어서는 첫 관문이지만 조선 말기에 서원을 증축하면서 새로이 세운 정문으로 옛스러움을 잃어 버렸다.

 현재의 누대는 고색창연한 옛 맛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정당에서 전면을 바라보는 맛을 가리는게 흠이다.

초기 수월루는 작은 누각이었다고 한다.
옛 사람들이 왜 누각을 작게했는지에 대해 말이 필요없다. 직접눈으로 보면 답사 초보에게도 보인다.

쓸데없이 큰 수월루로 인해 앞이 답답하다

외삼문과 누각이 올려진 모습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888년 화재로 소실 된 후 1973년 복원한 건물이다

지붕이 높아 자연 경관을 가리고 원래의 건축 형식을 깨는 부조화스런 건축물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많다

수월루와 석축기단, 담장




환주문(喚主門) 

수월루를 지나면 마음의 근본이라 부르는 일각문인 환주문으로 들어선다.

서원 정문인 환주문은 맞담에 세운 규모가 작은 문으로서 사모지붕이다.

환주(喚主)는 ‘내 심성의 주(主)가 되는 근본을 찾아 부른다’는 뜻을 가졌다.

불교에서 선수행 시 화두를 들때 "주인공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문의 이름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문을 들어서려면 갓 쓴 유생이라면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 설수 있는 작은 크기로 나즈막하게 설계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다. 문이 낮고 좁아 동시에 두명이 들어 설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수월루를 지나 오르는 계단길도 조심스럽게 걷도록 높낮이가 높지 않은 대신 넓게 계단이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성스러운

공간으로 누구든 고개숙여 인사하고 들어서도록 만들어 놓은 듯 보여진다.


빗물 누수를 막기 위해 서원에서는 보기 드문 절병통을 올려 놓았다.


편액의 네귀퉁이는 봉황의 머리와 꼬리로 장식하였다.


환주문과 수월루의 뒷모습.



문지방 대신 모란꽃 봉오리 모습의 정지석



중정당에서 바라본 환주문과 수월루.

수월루의 커다란 지붕이 자연 경관을 가리고 있다.




중정당


중정당은 강당 건물이다. 
중정(中正)은 음과 양이 조금도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조화를 이루는 중용의 상태를 말한다.


중정당 기단은 크기와 색깔이 다른 돌들이 빈틈없이 서로 맞물려서 일체가 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로 용두석을

배치하고, 기단 윗부분에는 크기가 다른 꽃송이가 좌우에 나란히 조각되어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수월루를 지나 환주문을 거치면 정면 중정당(中正堂)과 좌우 거의재(居義齋)와 거인재(居仁齋)가 있으며, 뒤편 내삼문을 거쳐

제향을 하는 공간으로 들어선다.

건물 중심인 중정당에는 크기가 서로 다른 돌을 쌓아 기단을 만들었으며, 돌과 흙 그리고 암수 기와를 이용하여 토담을 만들고

기단에 용머리 조각상 4개가 돌출되어 있는데 그 의미가 낙동강 물이 범람하지 않도록 일종의 주술적 의미로 만들었다 전한다.


또한 다른 서원과 달리 기둥에 흰종이를 감아 놓았는데 이 백색의 한지는 상지(上紙)’ 또는 백분칠(白粉漆)’이라고 하는 것이다. 기둥의 위쪽에 둘러져 있다고 해서 상지라고 하는 것이고, 종이가 아닌 흰색 칠을 하는 경우도 있어 백분칠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동서원이 우리나라 최고의 서원, 이른바 수위(首位) 서원임을 나타내는 일종의 표식이다

도동서원이 조선의 서원 중 수위서원이 되는 까닭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기리는 서원이기 때문이다.

과연 김굉필이라는 인물의 위상이 어느 정도이기에 이렇듯 자신 있게 수위서원을 운운하는 것일까

성균관과 향교에는 문묘 또는 대성전이라 부르는 사당이 있다.

이곳에는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위패의 수는 각양각색이다.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고을과 향교의 크기에 따라 ‘27, 39, 133이렇게 세 가지의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전체 위패의 숫자와는 상관없이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 수는 18위로 고정불변이다.

이중 최상위 두 자리는 신라시대 인물인 설총과 최치원, 그 다음 두 자리는 고려시대 인물인 안향과 정몽주이다.

이렇게 총 18위 중 4위를 제외하면 남은 위패 수는 14위가 된다.

그런데 이 14위의 성현들은 모두 조선시대의 인물이다.

바로 이 14위의 조선시대 성현들 중 가장 최상위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인 것이다.

참고로 퇴계 선생의 경우는 5번째, 율곡 선생의 경우는 7번째가 된다.


참고로 이러한 백분칠을 볼 수 있는 곳이 또 있긴 하다.

물론 서원은 아니다. 조선시대 왕릉에 세워져 있는 정자각(丁字閣)의 기둥을 보면 백분칠을 볼 수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도동서원은 백분칠이 기둥의 상부에 있는 반면 왕릉의 정자각은 기둥의 하부에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는 양택과 음택의 분별 때문이다.

왕릉은 신의 세계인 음택이기 때문에 음을 상징하는 아래에, 도동서원 강당은 산 사람들의 세계인 양택이기 때문에 양을

상징하는 위쪽에 백분칠이 있는 것이다

 .


도동서원 현판과 정료대


정면 5칸, 측면 2칸 반 주심포 계통의 맞배지붕을 이은 곳이다.


도동서원에는 두 개의 도동서원현판이 있다.

하나는 선조 때 사액현판으로 내려온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역시 같은 시기에 퇴계 선생의 글자를 모각(摹刻)하여 제작한 현판이다.

현재 이 둘은 모두 도동서원 강당인 중정당(中正堂)’에 걸려있다.

전자는 대청 안쪽 북편 벽면 위쪽에, 후자는 뜰 쪽인 전면 대청 처마 아래에 걸려 있다.

또한 전자는 검정 바탕에 흰 글자인 반면, 후자는 황토빛깔 바탕에 검정 글씨로 되어 있다.

 

현판 앞으로 팔각기둥에 네모난 모서를 다듬어 놓은 석재가 있는데 불을 밝히던 정료대로 대부분 서원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찾아볼 수 있는데 이곳 도동서원은 아래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 중정당 정면 마루 앞 자리에 보행을 방해 할 정도로 가깝게

설치하여 놓았다.

정료대는 행사가 있을때 솔가지, 기름통 등을 이용하여 불을 밝히는 곳이다.



공간의 미



원내의 여러 행사 및 학문의 강론장소로 사용한 중정당(中正堂) 

이 중정당에는 삼강오륜 같은 유교 윤리, 조선의 왕과 왕비의 묘호와 능호 등이 새겨져 있는 다양한 형태의 현판이 걸려 있고,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의 도동(道東)을 붙일 정도로 김굉필에 대한 후학들의 존경심은 대단했다.


도동서원에서 중앙이 된다고 하여 문풍지를 강당 쪽에서 발랐다고 한다.

그래서 강당에서 문 종이가 보인다.

보통은 강당 쪽에서 보면 문살이 보이는데 이것도  일반 서원과 다른 점이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이는 천장을 만들지 않아 서까래가 그대로 노출되어 보이는 천장을 말한다.


마루를 보면 우물 井字 형태의 우물마루이다

우물마루는 사계절이 뚜렷하여 건조수축이 심한 우리나라 기후에 적합한 마루형식이다


 

두개의 현판 중 안쪽에 있는 도동서원 현판은 배대응 작품이며, 중정당은 이관징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중정당에 걸려 있는 여러 현판들






도동서원 강당(중정당) 지붕.

기와를 올릴 때마다 새로 찍어 쓴다.

도동서원 강당(중정당) 지붕. 기와를 올릴 때마다 새로 찍어 쓴다.



중정당 독특한 기단 모습



일반적으로 서원의 건물들은 간소하게 짓는다.

그런데 중정당은 어느 서원에서도 볼 수 없는 높고 화려한 기단을 갖추고 있다. 축대 기단 아래에는 네 마리의 용머리가

삐죽이 조각되어 있고, 축대 좌우 상단에는 조선 왕릉 망주석에서 볼 수 있는 세호와 같은 다람쥐가 조각되어 있다.

그중 한 마리는 위로, 한 마리는 아래로 향하고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조각보를 이어놓은 듯한 석축이다.

네모반듯하게 쉽게 쌓으면 될 석축을 조각보를 잇듯이 섬세하게 쌓아 놓았다.

석축을 보면 사각이 아니라 육각, 칠각, 팔각을 넘어 12각인 것도 있다. 색깔도 제 각각이다.

어떻게 이렇게 다듬어 쌓았는지 장인의 정성과 노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선조는 건축을 할때 일정한 크기의 돌을 재단하여 건축을 쌓는 것이 아니라 자연상태 그대로의 돌을 사용한 건축물이

더러 있다.

경주 불국사 담장에도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았는데 이곳 도동서원은 돌을 퍼즐 맞추듯 재미있게 서로의 공간을 채워가며

만들어 놓았다.

우리나라 돌쌓는 건축양식으로 말하면 다듬돌껴맞춰쌓기에 해당되는 걸까?

강당 중정당의 기단은 150센치로 위엄있게 자리했다.
기단석의 돌들도 제각기 모양이 다르고 색도 다르다.
제각기 모서리 각이 다른 다른 돌을 정교하게 이어 놓은 솜씨가 그저 놀랍고 지혜로움이 묻어나 있다.





용머리

도동서원에서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기단의 갑석 바로 아랫단 면석사이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 4개가 설치되어 있는데, 한개만 예전부터 있던것이고, 나머지 3개는 보강된것이라고 한다.

진짜가 어느것인지 확인하는 것도 서원을 찾는 즐거움의 하나일 것 같네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  

 

중정당 기단부에 다듬돌을 사용하여 올린 후 일정한 간격으로 양쪽 오르는 계단을 내고 중앙을 중심으로 각각 4마리의 용머리를

조각해 놓았다. 그 중 한마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남은 3마리는 물고기를 물고 있다

하지만 정확한 물고기 표현은 아니며 용의 머리부분만 익살스럽게 보인다.

낙동강물의 범람을 막기위한 비보책으로 만들었다 하는데 용의여주를 물고 있는것이 건물 만들 당시 조각상이며, 다른 모습은 용두를 분실한 후 만들어 넣은 것으로 색상이 다르다

  



세호(細虎)와 꽃 


도동서원의 수많은 의장품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누가 뭐래도 세호라 할 수 있다.

도동서원 세호는 강당인 중정당을 오르내리는 동·서 양 계단 옆의 기단부에 있다.

중정당 오르는 계단 옆에 꽃과 세호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세호 그림을 보니 문득 청도 대적사 극락전 건물 앞 기단에 새겨진 거북 모습이 생각간다. 

 그곳에는 어미 거북이 새끼를 데리고 게를 피하는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이곳은 세호와 꽃인데, 가만 바라보니 중정당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세호가 위로 올라가고 왼쪽은 세호가 내려온다.

그러면 이곳 학동들은 중정당으로 오를때 오른쪽으로 올라와 왼쪽으로 내려가는 어떤 법칙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측면에도 계단이 있지만 그곳에는 표식이 없다.


세호(細虎)’는 작고 귀여운 호랑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호는 그 이름처럼 작은 호랑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귀·땅콩·호랑이·도농룡·다람쥐·담비·공룡·외계인등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세호를 이해할 때는 작은 호랑이보다는 상상속의 그 어떤 동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런데 본래 이 세호가 있어야 할 곳은 서원의 기단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일까

 놀라지 마시라. 묘소의 망주석이 본래 세호가 있어야 할 자리이다


한훤당 선생 묘소의 좌편(東) 망주석의 세호



중정당으로 오르는 석축에는 7단의 돌계단이 좌우 두 쪽으로 비껴 놓여있다.

이 좁은 계단 옆에는 각각 다람쥐를 닮은 작은 동물이 꽃송이 문양과 함께 조각돼 있다.
정면에서 볼 때 오른쪽엔 위로 오르는 모습의 다람쥐가, 왼쪽엔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의 다람쥐가 새겨져 있다.

이는 향교나 서원 등에서 동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나오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는 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돌자라


마당 공간에도 독특한 모습의 자라돌을 깔아 놓았다.

서원은 처음부터 풍수에 의한 비보책으로 만든 흔적이 여러곳에서 확인이 된다.

제사공간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만나는 자라돌 처럼 강당 기단부 최고 아래 마당공간에 자라머리와 함께 넙적돌을 이어 만들어 놓았는데 이 또한 화재방비를 위한 비보책이라 여겨진다. 자라의 디자인은 아주 독특하다.

도동서원은 풍수지리적으로 자라형이라고하는데 자라 몸통에 앉혀진 격이라 자라 머리가 없어 돌로 자라 머리를 조각해 강당

앞 마당에 배치하여 자리잡고 있다




생단(省牲壇), ‘생단(牲壇), ‘성생대(省牲臺)



도동서원 중정당, 사우, 고직사 세 건물의 사이에는 빈 공간이 하나 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이상하게 생긴 돌 구조물이 하나 있다.

의자 같기도 하고, 책상 같기도 하고, 아니면 신선들이 두던 장기나 바둑판같기도 하다.

여하튼 이 돌 구조물은 중정당·사우·고직사 사이에서 동선(動線·이동을 나타내는 선)이 제일 많이 겹치는 지점쯤에 서 있다.


이 돌 구조물은 두 개의 돌덩이가 결합된 형태이다.

밝은 색깔의 돌기둥 위에 바둑판 모양을 하고 있는 짙은 자줏빛 바위덩이가 올려 진 형태이다.

그런데 그 모양이 얼핏 보면 정말 돌로 만든 의자나 탁자처럼 보인다.




이름하야 성생단또는 생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한자를 살펴보면 살필 성’, ‘희생 생’, ‘단 단이다. 그러니까 희생을 검사하고 살펴보는 단이라는 뜻이 된다.

희생(犧牲)은 제사에 올리는 제물 중에서 살아 있는 제물을 칭하는 것이다 

 그렇다. 이 돌 구조물은 제향 때 사용될 희생의 품등(品等·품질과 등급)을 검사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다.

통상 서원의 향사절차에는 성생례(省牲禮)’라는 절차가 있다. 말 그대로 희생을 검사하고 살펴보는 예라는 뜻이다. .

향사에는 익힌음식을 올리지 않는다.

옛날에는 이곳에 제물로 바칠 산 돼지를 묶어두고 검사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도살법때문에 죽은 돼지를 올려두고 검사한다고

한다.





중정단 기단 굴뚝


아래 기단 쪽을 유심히 살펴보면 작은 구멍이 하나 보인다.

이것이 도동서원 중정단 기단굴뚝이다. 좌우에 각각 1개씩 모두 2개가 있다

이와 같이 기단에 굴뚝을 설치한 이유를 살펴보면  운해(雲海) 효과설이 있다.

연기를 건물 주위에 머물게 함으로써 인위적인 구름바다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가정집 보다는 사찰이나 정자와 같이 특수한 건축물과 연관이 있음직하다.

실제로 내소사 승방의 옛 기단굴뚝과 오어사의 기단굴뚝이 그러하다고 한다

어느 날. 중정당 아궁이로 불이 들어가면, 뒤편 기단굴뜩으로 몽글몽글 연기가 피어오른다.

연기는 맨 먼저 중정당과 화계를 경계 짓는 좁은 골을 채운다.

골을 가득 채운 연기는 이번에는 화계를 타고 올라 첫 번째 화계를 가득 채운다.

이때 연기가 중정당 양옆으로 흘러내리지 않고 반대로 화계를 타고 오르는 것은, 연기의 습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북향집과 북서풍의 영향도 있다.

이런 식으로 차례대로 화계를 채우면서 오르는 연기는 마치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넘어가는 운해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바로 그 순간 중정당에 올라 뒤편 가운데 창문을 열고 화계를 한 번 바라본다고 상상해보라.

자욱한 운해도 운해지만 그 사이로 탐스럽게 피어난 붉은 모란꽃이 여기저기 머리를 내밀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마치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는 듯한 모습의 내삼문. 선현을 모신 사당건축을 이보다 더 격조 있게 만들 수 있을까!


.

중정당에서 대청 창호에서 앞을 바라 본 전경. 창너머로 환주문과 수월루가 차례로 보인다.


비슬산 줄기 마루금이 아름답다.



동재와 서재  


도동서원은 현풍·구지의 명산인 대니산 자락의 북쪽사면을 이용해 자리한 탓에 서원이 북향집에 가깝다.

그래서 도동서원 뜰에서 강당을 바라보고 서면 절대방위로는 강당은 남쪽, 오른쪽은 서쪽, 왼쪽은 동쪽, 환주문이 있는 등 뒤는

북쪽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건축물의 경우는 사람본위의 방위 곧 예절방위가 적용된다는 점이다.

 

도동서원에 다시 예절방위를 적용해보자.

내가 주요건물인 강당을 바라보고 섰다면 무조건 강당 쪽을 북쪽으로 상정한다.

그렇다면 등 뒤 환주문 쪽은 자연 남쪽이 될 것이요. 오른쪽은 동쪽, 왼쪽은 서쪽이 되는 것이다.

전통건축에서 말하는 동재·서재는 바로 이때 적용되는 것이다.

북쪽을 바라보고 섰을 때 오른쪽이 동쪽이요, 왼쪽이 서쪽이니 당연 오른쪽의 집이 동재요, 왼쪽의 집이 서재가 되는 것이다.


참고로 도동서원의 동재는 당호가 거인재(居仁齋)’, 서재는 거의재(居義齋)’로 편액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은 여기에도 방위의 비밀이 숨어 있다.

유교에서 말하는 오상(五常)에 의하면 인()은 방위로 동()이요, ()는 방위로 서(西)가 되기 때문이다.


강당 앞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기거하기 위해 있는 공간으로 동재와 서재인 거인재(居仁齋)와 거의재(居義齋)가 대칭을

이루며 마주 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을 한 공간으로 앞쪽으로 퇴마루를 만들지 않은 대신 측면에 넓은 마루공간을 두었는데 한칸은

마루방으로 두칸은 온돌방이다.


동재인 거인재의 기둥은 둥글고 서재인 거의재는 사각기둥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가나니 동재에는 선배가 서재에는 후배가 거처하며 선배는 하늘이요 후배는 땅으로 선배를 하늘같이 모시라는 뜻이다.




거인제





 


이 건물은 왼쪽에 있는데 동재이다

보 위에 공포가 몇개 보입니다  손으로 가르치는 부위 3개가 공포다.

양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거의제 - 이 건물은 서원에서 밖으로 보았을 때 西濟[서재]로 오른쪽에 있는데 처마에 밋밋하게 되어 공포가 없다.

음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동재 뒤편

동재는 아궁이도 뒤쪽에 있고, 방문도 앞쪽 뒤쪽 다 있으며,


대청에는 남쪽과 동쪽 두곳에 창문도 달려 있다

 






서재 거의재

온통 흙벽으로 막혀 있을 뿐이다.방도 대청도 모두 흙벽으로 꽉 막혀 있다 

 




 두리기둥(원기둥)을 사용한 동재 대청 기둥




 각기둥을 사용한 서재 대청 기둥 





도동서원 내삼문과 화계





위폐를 봉안한 특별한 공간인 사당 


강당 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이 서 있고, 그 뒤에는 담으로 두른 일곽에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김굉필과 한강 정구(1543∼1620)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 되길 원하는

김굉필의 도학정신을 표현한 벽화 두 점이 있다.

서원 최 상단부분에 위치한 사당은 한휜당과 외증손 한강 정구(1543~1620)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건물로 정면 3칸,

면 3칸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특이하게 중정당에서 올라가는 긴 계단과 그 옆으로 작은 계단이 또 하나 있다.

문이 닫혀 있어 특별한 날이 아니면 보기 힘든 제향공간으로 제향 후에 축문을 태우는 망례위는 일반적으로 석물로 지상에

조성되는데 이곳 도동서원에는 서쪽 담장에 감(坎)이라는 사각 구멍이 있는데 제사가 끝나고 나면 축문을 태우기 위한

특별한 공간이 라 한다.  

보통 제례가 끝나면 바람부는 방향으로 불을 붙혀 재를 만들어 날리는게 보편화 되어 있는데 이곳에만 유일한 방법이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향교나 서원의 경우는 외삼문(外三門)’내삼문(內三門)’이 있다.

삼문(三門)은 말 그대로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이 세 개라는 의미이다.

가운데 중문(中門) ·신문(神門)’을 두고 좌우로 각각 동문(東門)과 서문(西門)이 붙어 있는 형태이다.

삼문이 삼문인 까닭은 동문·서문·중문(신문)’ 이렇게 세 개의 문이 있기 때문이다.


이 중 신문(神門)이라 부르는 중문의 용도가 참으로 묘하다.

중문은 보통 때에는 닫아 두었다가 제례와 같은 의식이 있을 때만 개방을 하는데 실제로 사람들이 출입하는 문은 아니다.

중문은 상징적인 의미의 문으로 사람이 아닌 신들을 위한 () 전용 출입문인 것이다.


그리고 외삼문은 바깥쪽에 있는 삼문, 내삼문은 안쪽에 있는 삼문을 말한다.

좀 더 쉽게 설명해보면 외삼문은 서원이나 향교를 바깥세상과 연결해주는 주 출입문을 말한다.

반면 내삼문은 서원이나 향교 내에 있는 사당 또는 문묘의 경내로 출입할 수 있는 문을 말하는 것이다.


도동서원에도 사당 경내로 통하는 내삼문이 있다.

도동서원의 내삼문은 중정당 뒤편, 바닥 높이보다 약 6m정도 더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유교건축물의 여러 두드러진 특징들 중에는 문과 계단의 사용법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성균관과 향교의 문과 계단 사용법이다.

성균관과 현존하는 남한의 234개 향교의 경우는 출입법에 있어 동입서출(東入西出)’을 원칙으로 한다.

이는 동쪽 문(계단)으로 들어(올라)가고 서쪽 문(계단)으로 나(내려)온다는 의미이다.

이때 동문(동쪽 계단서문(서쪽 계단)은 절대방위가 아닌 예절방위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문을 바라보고 섰을 때 오른쪽이 동문(동계·조계), 왼쪽이 서문(서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서원의 경우는 좀 다르다. 서원마다 제 각각 나름의 출입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원의 경우는 반드시 해당 서원의 유사(관계자)에게 출입법을 물어 출입하는 것이 좋다.

도동서원의 경우는 강당과 사당의 출입법에도 각각 차이가 있다.

강당의 출입법, 곧 중정당의 계단은 동입서출(東入西出)’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동쪽계단으로 올라가고 서쪽계단으로 내려온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당의 경우는 내삼문은 물론 사당 출입시에도 동입동출(東入東出)’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동문(동쪽 계단)으로 들어(올라)가고 동문(동쪽 계단)으로 나(내려)온다는 뜻이다.

이러한 동입동출의 출입법은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도동서원(道東書院)의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도동서원 내삼문의 서문 쪽에 계단이 없는 까닭은 계단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도동서원 사당 출입법에 따른다면 사람의 경우든 신의 경우든 간에 서문은 사용할 일이 없다.

그래서 계단을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양두석과 꽃잎문양

제향공간 입구 계단석에 독특한 디자인을 한 계단돌 하나가 있다.

다른 사원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꽃잎모양의 계단석은 배례석으로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拜禮石의 용도에 대해 색다른 주장이 나왔다.
배례석이 절을 하는 자리가 맞기는 맞는데 배례석 위에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배례석은 향로 등의 의식용 기물들을 올려놓는 시설물이며, 사람들은 그 앞에서 절을 한다는 것이다
한편 배례석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배례석은 사람들이 그 위에서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선채로 합장배례를 하는 용도라는 주장이다

내삼문 앞 계단돌에 새겨진 꽃잎 문양



꽃잎 문양 몇 계단 아래에 박혀 있는 양두석(羊頭石) - 鬼面石


일반적으로 양두석으로 알려져 있으나 여기에 양머리가 있을 이유가 없으며

제 개인적 사고로는 귀면석으로 보여지며

귀면은 부릅뜬 눈으로 사방을 주시하여 언제 어느 곳에서 들어올지 모르는

사악한 무리들을 막는다는 벽사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귀면

귀면


양두석과 함께 3계단 위의 계단에 새겨진 꽃잎 문양이 또렷하게 보인다



만자문


만자 문양은 불교를 상징하는 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길상만덕()을 상징하는 길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만자의 가로선은 삼세()이고 세로선은 시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심의 덕이 삼세시방을 관통해서 종횡무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태극문

 성리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불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계단 소맷돌, 신문 신방목, 서까래 말구, 사당 대문 등에 널리 나타난다.





사당

소수서원 문성공묘(文成公廟), 옥산서원 체인묘(體仁廟),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 병산서원 존덕사(尊德祠),

필암서원 우동사(祐東祠), 돈암서원 숭례사(崇禮祠), 무성서원 태산사(泰山祠), 남계서원, 도동서원’  

위에 열거한 서원들은 속칭 한국의 9대 서원이라 불린다.

그런데 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9개 서원을 보면 유독 남계서원도동서원만이 사당에 이름이 붙여져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까닭은 자세하게 밝혀진 바가없다.


도동서원 사당은 강당보다 6m 정도 높은 지점에 위치한다.

여러 단의 석축을 쌓은 급경사면들은 계단식 정원을 이루며, 그 위에 담장을 두른 독립된 일곽이 사당이다.

사당 마당에 붙어서 ‘증반소’가 잇지만 당장으로 격리하여 사당이 독자성을 유지한다.

넓적하게 가공한 판석으로 기단을 쌓고 기단 위에 전돌을 깔았다.

기단의 솜씨는 세련됐지만, 중정당 기단과 같은 기교는 보이지 않는다.

기둥의 초석은 원형으로 다듬은 정평주초(다듬돌 주초)로 역시 강당의 덤벙주초(막돌주초)와 비교된다.

건물에는 귀솟음이 있고 단청이 화려하여 소박한 강당과는 달리 상징성을 높이고 있다.

측면 상부에 들창이 있어 내부를 너무 어둡지 않도록 조절한다.

사당 내부의 단청은 17세기 창건 때의 것이 그대로 보존되어 흥미를 끌며, 특히 양 측벽상부에 그려진 문인화풍의 산수화가

눈에 뜨인다.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와 ‘설로장송(雪路長松)’을 묘사한 그림으로 작자는 모르겠지만 예사로운 솜씨는 아니다.



 


사당 안 좌우 벽면, 400년 내력의 벽화 두 점

현재 도동서원 사당 내부에 있는 이 벽화를 실제로 보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도동서원은 신들의 영역인 사당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 년에 두 번 있는 향사, 또는 수시로 행해지는 알묘·봉심같은 약식 의례가 거행되는 상황을 운 좋게 만난다면

그들 사이에 섞여 사당 내부에 들어가 볼 수 있다.

 

혹 도동서원을 방문했는데 사당 내삼문이 열려 있으면 조심스럽게 한 번 올라가보자.

눈치껏 잘 처신만 하면 400년 전에 그려진 도동서원 사당 안 벽화를 만나는 행운을 얻을 수도 있다.


사당 내부에서 한훤당 선생 신위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섰을 때 좌·우측 벽면 상부에 각각 한 점씩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두 그림 모두 그림 중에 화제(畵題·그림 제목)가 적혀 있다.

좌측의 벽화는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 우측의 벽화는 설로장송(雪露長松)’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 두 벽화 모두 한훤당 선생의 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며, 작자는 미상이다.

강심월일주선상(船上)’이라는 시를, ‘설로장송노방송(路傍松)’이라는 시를 주제로 한다.

한훤당 선생의 위 두 시를 알아야만 이 벽화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


선상 (船上) 배 위에서

선여천상좌 (船如天上坐) 배는 하늘에 앉은 듯
어사경중유 (魚似鏡中遊) 물고기는 거울 속을 노는 듯
음파휴금거 (飮罷携琴去) 술 마신 후 거문고를 끼고 돌아가니
강심월일주 (江心月一舟) 강 가운데 달과 조각배만 있구나


설로장송(雪露長松) 


노방송 (路傍松) 길가의 소나무

일로창염임로진 (一老蒼髯任路塵) 늙고 푸른 소나무가 길 가에 서 있어
노노영송왕래빈 (勞勞迎送往來賓) 수고로이 오가는 길손을 맞이하고 보내는 구나
세한여여동심사 (歲寒與汝同心事) 추운 겨울에도 너와 같은 마음
경과인중견기인 (經過人中見幾人) 지나는 사람들 중에 몇이나 보았는고




((예감(瘞坎료감(燎坎)

제사에서 사용된 모혈’(毛血·희생의 털과 피), ‘폐백’(幣帛·신에게 올리는 선물인데 보통 천 종류를 사용),
축문’(祝文·제사에서 신에게 올리는 글)불사르고 묻는 장소를 일러 ((예감(瘞坎료감(燎坎)’ 등으로 칭하는데 가장 일반적인 표현이 바로 또는 예감이다.
이것들은 대체로 제사공간의 북서쪽 땅에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유독 도동서원은 땅이 아닌 사우의 북서편(실제로는 남동쪽이다) 담장에 이 감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서원들 중에서 이러한 형태의 감은 이곳 도동서원이 유일하다.

사당 내삼문틈으로 들여다 본 왼쪽벽에 있는 예감


에헤라 좋구나~~


계단식 토석담장과 화계 그리고 향나무.


담장너머 청년 은행나무.


담장


독특한 디자인 담장으로 국내 유일 보물로 지정된 담장이다. 담장은 보물 제350호이다.

도동서원은 조선 선조 원년(1568) 비슬산 자락에 터 잡은 쌍계서원이 임진왜란을 통해 소실되자 1604년 도동서원으로 재건되었으며, 한훤당 김굉필과 외증손 정구를 모신 곳으로 사적 제 488호이며, 서원에는 국내 유일 건물 담장이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면과 가까운 곳은 토석담장으로 큰 돌을 사용하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 그리고 중간에 와편담장 즉 흙과 기와로 장식하였다.






 담장에는 기와를 이용하여 디자인을 연출한 곳이 여럿 있다.

기와로 어떻게 다양한 문양을 만들 생각하였지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담장으로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라면 도동서원

담장에 크게 감동을 하지 못한다.

이게 왜 보물급인가 할 정도로 담장에 특별한 특징이 없다.

가로 기와(암기와)를 놓고 중간 중간 둥근 문양(숫막새)을 넣었는데 이곳 담장이 유명세를 떨치는 것은 다른 지역처럼 특정한

한곳이 아니라 도동서원 전 구간의 담장이 동일한 암기와와 숫막새를 이용하여 꾸몄다는 것이다



김굉필 선생 신도비 쌍귀부


답사를 겸한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씩 희귀한 유물과 마주치는 경우가 있다. '쌍귀부(雙龜趺)'도 그런 것이다.

귀부는 비석을 받치는 받침대를 뜻한다

 대부분 이 귀부는 머리가 한 마리인 거북이나 혹은 용으로 조각되어 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귀부가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로 된 경우가 있다. 이를 '쌍신두귀부'라 부르며 줄여서 쌍귀부라 칭한다.


미스터리한 쌍귀부의 표정을 보기 위해서는 한훤당 선생 신도비각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훤당 선생 신도비(각)   






경주 숭복사지 귀부(崇趺)

      


비석(碑石) 받침으로 쓰인 귀부(龜趺)는 한 마리로 된 것이 보통이나

두 마리로 된 것은 무장사지귀부(무藏寺址龜趺), 창림사지귀부(昌林寺址龜趺),

법광사지귀부(法光寺址龜趺), 숭복사지귀부(崇福寺址龜趺)가 있다.



버스정류장.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은 도가 동쪽으로 온 까닭을 알고 있으리라~~


풍수지리 상 낙동강 건너의 안산(案山)의 모습.



갈대와 억새의 상생조화.



붉게 타고 싶어라




다람재 - 이곳에 올라야 도동서원 전경을 볼 수 있다.




대니산과 낙동강 사이의 자라 등 터에 자리잡은 도동서원.



대니산과 김굉필선생 묘소


대니산(戴尼山)


동양의 인문지리학이라고 할 수 있는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는 생기(生氣), 이른바 지기(地氣)가 최초로 생성되고 저축되어

있는 곳을 산이라고 본다.

그런데 풍수에서 말하는 산()은 우리가 생각하는 산과는 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풍수에서는 평지보다 한 치만 높아도 산이요, 반대로 한 치만 낮아도 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손가락 한마디만큼만 높아도 산이라고 했는데, 논두렁정도면 제법 그럴싸한 산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대니산(戴尼山)은 대구시 달성군 현풍면과 구지면의 주산(主山·408m)으로 동쪽을 제외한 북··남쪽이 낙동강으로 둘러싸고

있다.

대체로 산북(山北)이 현풍, 산남(山南)은 구지이다.

산 정상에 서면 동으로는 현풍 비슬산, 서로는 합천 가야산, 남으로는 창령 화왕산, 북으로는 대구 팔공산 등이 낙동강 물줄기와 함께 조망된다.

본래 이 산의 이름은 태리산(台離山), 대니산(代尼山), 제산(悌山·梯山), 금사산(金寺山)’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쯤 산 이름은 하나로 정리되었다.


 대니산이라는 산 이름이 나타난 것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 출생지인 서울의 정릉, 처향인 합천의 야로, 처외가인 성주의 대가

등지를 거쳐 지금의 도동서원이 있는 도동리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뒷산 머리에 유교의 성인(聖人)인 공자를 이고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산 이름을 머리에 일 대()’, ‘중 니()’,

  ‘대니산(戴尼山)’으로 바꾸어 불렀다


김굉필은 조선 초기 문장(文章·글짓기) 위주로 흘러가던 유학을 경학(經學·유학의 경전을 연구하는 학문)을 바탕으로 하는

실천주의 도학으로 그 물길을 돌려놓은 인물이다.

  다시 말해 시문을 짓는 일보다는 일상 속에서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실천하는 일에 더욱 집중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공자는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정점에 선 이상적인 인간, 곧 유교에서 말하는 성인(聖人)이었다.



김굉필선생 묘소


김굉필은 자신의 증조부 때 처음 인연을 맺은 이곳 현풍 땅에 한동안 우거(寓居·잠시 머묾)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 절충장군 김뉴(金紐)의 묘소를 이곳 도동리 뒷산 대니산 북사면에 조성하고 삼년 시묘를 마쳤다.

이후 김굉필 자신은 물론 그의 아들··손자의 묘소까지 대니산 북사면에 조성되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도동서원 뒷편으로 8백여미터 거리인 8부능선에 술좌진향으로 모셔져있다.

 

선생의 유택은 서원의 좌측 산길을 따라 몇 구비 돌면 대니산 중턱에 동쪽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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