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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陽書院

초암 정만순 2018. 2. 25. 11:52




梅陽書院


  • 소 재 지: 대구광역시 북구 매천동 46, 대구광역시 북구 매천로37길 48 (매천동) 

    배향인물: 송원기(宋遠器) 송명기(宋命基) 송이석(宋履錫)

    창건연도: 1831(순조 31)

    향 사 일: 매년 음력 12월 13일

                    

    개설

    1705년(숙종 31)에 송원기(宋遠器, 1548∼1615)를 향사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후대에 그의 후손인 송명기(宋命基, 1680∼1755), 송이석(宋履錫, 1698∼1782) 부자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복건과 소실되기를 반복하다 2006년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연 혁

    광해군 때 아헌 송원기(宋遠器)가 사간원으로 있으면서 광해군의 폭정을 간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자 자신의 호를 벙어리라는 뜻에서 아헌으로 고치고 지금의 매남동 지역으로 내려와 후진을 양성 하였다는 데서 매남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고, 매양서원이 매천초등학교 뒤쪽의 매천동에 창건된 것은 1692(숙종 18) 이다. 아헌(啞軒) 송원기(宋遠器)를 기리고 선비가 모여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지어졌다. 1783(정조 7)에는 사림들의 합의로 매헌(梅軒) 송명기(宋命基)와 남촌(南村) 송이석(宋履錫)을 배향하게 됐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1871(고종 8) 매양서원은 허물어졌다. 두 차례 훼철된 후 1886년 재차 복원했지만 다시 소실됐고 2004년 제 모습을 찾게 됐다. 매양서원의 복원과 아울러 아헌 선생을 모시던 사당 상현사(尙賢祠)도 복원됐다. 매양서원의 복원은 문중의 영광으로 그치기보다 지역 문화유산으로 등재돼 강학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는 유림과 지역민들의 권유에 따라 2009426일 기적비(紀積碑) 제막식과 함께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배향인물

    1)송원기(宋遠器, 1548~1615)

    자는 학무(學懋) 호는 아헌(啞軒)이며, 야성송씨(冶城宋氏)이다. 성품이 근엄하고 굳세었으며 효성과 우애를 온건히 갖추었다.

    선조251592년 임진왜란때 명나라 병사가 팔거 칠곡(漆谷)에 진()을 칠 때, 백씨(伯氏) 원도(遠度) 경헌(敬軒)과 함께 사재(私財)와 모곡(募穀)으로 군량미 700석을 지원하였다.

    체찰사(體察使)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공에게 군무십책(軍務十策)을 진정(陣情)하여 활용하도록 하였다.

    선조 311598년 명나라의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아조(我朝)를 무함(誣陷)하자 변무사를 지어 명나라 사신 진어사(陣御使)에게 올렸으며 진어사는 이 변무사를 명나라 조정에 전달하여 이름이 중국에도 드러나게 알려졌다.

    이로 인하여 선조 381605년에 형제분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 광해(光海)2(1610)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봉훈랑(成均館學諭奉訓郞)에 제수되어 출사하였다.

    임금에게 육강소(六綱疏) (1. 정심술(正心術) 2, 입지기(立志氣) 3. 진기강(振紀綱) 4. 용인재(用人才) 5. 득민심(得民心) 6. 수군정

    (修軍政) )을 상소 하였으나 임금이 불윤(不允)하므로 칭병이나 하고 낙향하여 아헌(啞軒)이라 하고 두문불출하였다.

    동강 김우옹 문하를 출입하여 득문(得聞)하였으며 도의지교(道義之交)하여 영남사람에 알려졌다. 광해 7년에 향년 68세로 고종(考終)하였다.

    현재 문집 52책이 남아 있으며 유림의 천거에 의하여 매양서원(梅陽書院)에 향사(享祀)되었다. 대구시 북구 매천동에 매양서원이 있으며 2006년 병술년(丙戌年) 4에 신축건립(新築建立) 복원(復元)되었다. 현재는 지천면 연화리 비올에 후손들이 살았으나 지금은 화물기지로 편입되어 아쉽게도 손실되었다.


    2)송명기(宋命基)

    조선조 숙종 때의 학자이다. 자는 정부(定夫)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며 본관은 야성(冶城)인데 아헌(啞軒) 원기(遠器)의 후손(後孫)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경종(景宗)때 사마시(司馬試)에 학격한 후에도 사환(仕宦)에는 뜻이 없었고, 당시의 선배 학자들과 함께 성리(性理)의 이론을 추구하는데 몰두하였다. 특히 서헌(恕軒) 이세형(李世珩)과의 인심도심(人心道心)사단칠론(四端七論)의 논구(論究)로 화제를 모은바 있으며,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를 저술하여 당시 선비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학행과 덕업으로 세인들의 추중(推重)을 받아 그 아들 남촌(南村) 이석(履錫)과 더불어 칠곡(漆谷)의 매양서원(梅陽書院)에 향사되었다

     



    3)송이석(宋履錫, 1698~178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백유(伯綏), 호는 남촌(南村). 아버지는 생원 명기(命基)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달신(達新)의 딸이다.

    1721(경종 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성시(省試)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향리에서 성현의 학문을 익히는 것을 일생의 업으로 삼고 지냈다. 만년에는 수도산(修道山) 무흘정사(武屹精舍)의 장서각(藏書閣)에 머물면서 그곳에 수장된 정구(鄭逑)의 수택장서(手澤藏書)를 읽는 한편, 그 중에서 본받을만한 요언(要言)만 뽑아서 무흘서각초록 武屹書閣抄錄2권을 편저하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노론 魯論을 중히 여겼고, 퇴서절요 退書節要7책을 비롯하여 심경퇴도언행록 退陶言行錄등 숱한 선인의 글을 수사(手寫)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저서로는 무흘서각초록2권과 남촌선생문집7권 등이 있다.



    내용

    주향인 송원기는 본관이 야로(冶爐), 자는 학무(學懋), 호는 아헌(啞軒)이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문인으로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광

    해군의 폭정을 간하기 위해 육강소(六綱疏)를 올려 상소하였으나 임금이 불윤하자, 병을 칭하고 낙향하여 칠곡 매남(현 대구광역시 북구 매천동)에서 강학하였다.

    문집으로는 『아헌문집(啞軒文集)』이 있으며, 매양서원 봉안문이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후일 추배된 송명기와 송이석 부자는 송원기의 후손으로 모두 소과에 입격하였으나 출사하지 않고 평생 학문에 종사하였다.

    문집으로 각각 『매헌집(梅軒集)』, 『남촌집(南村集)』이 있으며 매양서원 추배 때의 봉안문과 축문이 수록되어 있다.


    서원은 전체 영역이 축대 위에 형성되어 있다.

    전면에 계단을 배치한 양정문(養正門)을 정문으로 하여 강당을 배치하고, 강당의 우측에 단을 높여 사당인 상현사(尙賢祠)를

    배치한 병렬형 배치를 보여준다.

    외삼문에는 양정문, 강당에는 매양서원(梅陽書院), 사당에는 상현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의의와 평가

    매양서원은 주향인 송원기의 입묘(入墓)를 계기로 칠곡에 이주, 정착하여 세거해온 야로송씨 문중의 성장 과정을 잘 보여준다. 조선 후기 칠곡지역의 대표적인 문중서원 중 하나이다.


     1705년(숙종 31) 임란공신 아헌 송원기를 기리기 위해 세운 매양서원 그 후 매헌 송명기와 남촌 송이석이 종향되었다.


     매양서원 강당


     매양서원 현판


     상현사


     상현사 현판


     서원 앞에 서 있는 매헌 송원기의 기적비


    매남마을 전경

     

    임란공신 송원기와 매헌과 남촌을 기리는 매양서원

     

     

    칠곡이 대구의 주거지역으로 급격히 발전하면서 아름답던 전원이 거대한 아파트단지로 변했다.

    그러나 이런 개발 중에도 소외된 곳이 있으니 북구 태전동 태복산 남쪽에 위치한 매남마을이다.

    달성 배씨와 야성 송씨의 집성촌이기도 하지만 임란공신 아헌(啞軒) 송원기(宋遠器, 1548~1615)를 주향하고,

    매헌 송명기(송명기,1680~1755)와 남촌 송이석(1698~1782)을 종향하는 매양서원이 있는 곳이다.

    본관지가 합천군 야로인 야성 송씨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1689년(숙종 15)이라고 하니 지금으로부터 320여 년 전이다.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아헌의 8대조 송구(宋構, ?~?)가 성주에 자리 잡아 오래 세거(世居)해왔는데 아헌 대에 칠곡 고평(지금의 북구 관음동)에 옮겨 살다가 매헌(梅軒) 송명기(宋命基, 1680~1755)가 아버지 송희(宋熙)를 따라 입향함으로 매남 송씨의 1세대가 되었다.

    주향자 아헌은 아버지 송사호(宋師顥)와 어머니 팔거도씨 사이에서 1548년(명종 3) 성주 유촌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숙부 신연공으로부터 커서는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이른 바 성주 양 강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573년(선조 6) 생원, 진사 양 시험에 합격하고 , 1610년(광해군 2) 63세 때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김천찰방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임란이 일어나고 명나라 지원군이 팔거(오늘날의 북구 읍내동 일대)에 주둔했다.

    조선을 돕기 위해 먼 길을 온 군사들이었지만 군량미가 부족하여 곤경에 처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볼 수는 없었던 아헌은 앞장서서 쌀 700석의 모아 그들을 지원했다.

    또한 전란을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든 체찰사 이원익(李元翼, 1547~1634)에게 군무십책(軍務十策)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 때 중국의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파견군의 경리 양호(楊鎬)와의 사소한 마찰로 조선이 일본과 힘을 합쳐 장차 명을 침공할 것이라고 있지도 않을 사실을 황제에게 허위보고하여 조선과 명나라 간에 금이 간 일이 있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항복을 진주사로, 이정구(李廷龜)를 부사로 하여 그렇지 않다는 내용의 변무서(卞誣書)를 황제에게 제출했다.

    이 때 재야의 많은 선비들도 지어 올렸지만 오직 공의 변무서만 채택되어 공의 명성이 중국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공은 군주가 지내야할 덕목 여섯 가지를 강조하는 육강소(六綱疏)와 정구(1543~1620)를 모함한 빅이립의 죄주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찰방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여헌 장현광, 낙재 서사원과 교유하다가 1615년(광해군 7) 68세로 돌아가셨다.

    정구가 '어려서부터 장년과 노년이 되도록 세 번이나 살기 좋은 이웃이 되었고 아울러 친지로 인정함을 후하게 받아서 은혜롭게 나를 좋아함이 이미 깊었고 종유(從遊)가 가장 오래되어서 학문 연마에 서로를 도왔으며 걱정과 즐거움은 반드시 함께하면서 오직 영세토록 기대했는데 오늘이 있을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하고 슬퍼했다.

    선무원종공신으로 서훈되고 동계 정온(鄭蘊,1569~1641)의 계청에 의하여 사간원 헌납(獻納, 정5품)에 증직되었다.

    1705년(숙종 31) 사림의 발의로 그를 기리는 매양서원(梅養書院)이 세워졌다.

    종향자 매헌(梅軒) 송명기(宋命基, 1680~1755)와 남촌(南村) 송이석(宋履錫, 1698~1782)는 아버지와 아들로 모두 아헌의 후손이다.

     

    5세손인 매헌은 1727년(영조 3)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어 당대 고명한 유학자들과 교유하며 성리(性理)의 이론을 추구하는데 몰두했다.

    서헌 이세형과 '인심도심' '사단칠론'을 토론하고 연구하였으며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를 저술하였다.

    높은 학문과 고매한 인격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다.

    6세손인 남촌은 아버지 매헌보다 앞선 1721(경종 1)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 역시 아버지를 닮아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만년에는 김천 수도산 초입에 있던 무흘정사의 장서각에 머물면서 그 곳에 있는 정구가 모아둔 책을 읽으면서 내용 중 본받을 만한 좋은 말을 뽑아 <무흘서각초록> 2권을 편찬했으며 <퇴서졀요>, <심경>, <퇴도언행록> 등 고전을 수사(手寫)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을 기리는 매양서원은 최근 말끔히 복원되었다.

    국난극복에 앞장서고 조선 후기 칠곡지역의 문풍 진작(振作)에 크게 기여한 분들을 기리는 곳인데도 한적한 것은 여느 서원과 마찬가진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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