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水 天下/白頭大幹

백두대간 대장정 제24구간 / 설악산] 르포

초암 정만순 2018. 1. 23. 09:47



백두대간 대장정 제24구간 / 설악산] 르포



대장정의 대미, 최고조의 육체적 피로로 달래고 싶다’
한계령~대청~황철봉~상봉~신선봉~마산봉~진부령 구간
종주 후기
백두대간 개관

한계령이 지닌 매력의 절반은 안개의 몫이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경치가 빼어난 곳을 보면 누구나 갖다붙이는 ‘선경(仙境)’이란 말을 상투성의 나락에서 구해내는 것도 안개다. 안개는, 익숙한 풍광에도 약간의 기시감이나 낯섦뿐 아니라 추상성마저 느끼게 한다. 어쩌면 안개는, 조물주를 대신하여 그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 변덕이 심한 인간들이 조물주의 창조성에 심각한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므로.

갓 떠오른 태양은 별보다 더 많을 안개 입자 하나하나에 빛살을 심고 있다. 윤곽만 보여주는 점봉산 동쪽 기슭의 바위 봉우리들이 은근하다. 한계령의 안개에서 몸을 빼내 설악루로 향하는 계단에 몸을 싣는다. 백두대간 대장정의 대미를 향한 첫 걸음이다. 드디어 설악이다.

한계령에서 진부령까지는 실거리 약 39km로 제법 길다. 하지만 우리는 미시령에서 한 번 끊는 구간 종주의 합리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설악산처럼 자연이 연주하는 절정의 선율은 한 호흡에 감상해야 한다. 마지막 산행의 아쉬움을, 최고조의 육체적 피로로 달래고 싶기도 했다.

▲ 하늘로 솟구치는 기암 사이로 온갖 생명을 품고 있는 설악산. 하나하나가 다 보석 같다.

‘설악을 알면 금강산도 허명’


역시 설악이다. 시작부터 된비알이다. 발바닥은 금방 골산의 고집스러움을 알아챈다. 살짝 언 땅을 밟을 때의 사각대는 소리도 상쾌하다. 계속 곧추서던 산허리는 1시간쯤 지나서야 살짝 낮아진다. 호흡을 가다듬는다. 몸과 산의 리듬이 공명하기 시작한다. 다시 등성이는 서북주릉 갈림길까지 허리를 세운다. 서북주릉을 200m쯤 앞둔 샘터 주위는 지난 여름 큰물 때 난 사태로 옛 모습을 잃어 버렸다. 앞으로 이곳의 물을 믿었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 서북능선에서 끝청으로 향하는 취재팀.
서북주릉 갈림길에 올라서자 비로소 완전하게 설악의 품에 안긴 느낌이다. 이곳에서부터 끝청까지의 선율은 진양조 혹은 안단테. 용아와 공룡 같은 암릉과 기기묘묘한 바위봉우리를 둘러친 아득히 깊은 계곡을 감상하면서 천천히 걷는다. 그렇다고 방심을 할 정도는 아니다. 오르내림의 폭이 크지 않을 뿐 녹록치 않은 바위들이 다리의 근육을 끝없이 긴장하게 한다.

여기서 잠시 설악산에 대한 개관이 필요할 것 같다. 우선 이름의 내력부터 살펴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한가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이듬해 여름에 이르러서야 녹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기록은 양양도호부편에 나오는 것으로 '부 서북쪽 50리에 있는 (양양도호부의) 진산으로 매우 높고 가파르다'는 정도로 간단히 적혀 있다.

이에 비해 인제군편에서는 ‘한계산’이라 칭하고 그 형상이나 특징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한 대목을 보면 이렇다. '봉우리가 절벽을 이루었는데 높이가 천 길이나 되어서 기괴하기가 형언할 수 없고, 새도 날아서 지나가지 못하며, 행인들은 절벽이 떨어져 누르지나 않을까 걱정할 지경'이라며 '그 좋은 경치는 영서 지방의 으뜸'이라고 적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내설악이라 부르는 지역을 인제군에서는 한계산이라 불렀고, 외설악은 양양에서 설악이라 했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산경표에는 ‘설악’으로 표기한 다음 ‘일명 한계산’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한편, 대동여지도를 보면 봉정암 바로 옆 봉우리에 ‘한계산’, 신흥사 바로 위 봉우리에 ‘설악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의 표기를 오늘날 지도에 대입시켜 보면, 한계산은 대청봉이고 설악산은 황철봉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옛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오늘날의 내설악 일대를 인제군에서 한계산이라 하고 대청봉을 주봉으로 봤고, 외설악을 양양도호부에서는 설악산이라 하고 황철봉을 주봉으로 여긴 듯하다. 택리지도 ‘설악’과 ‘한계산’을 각기 독립된 산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금강산에 대한 설명에 이어 두 산을 싸잡아 '남쪽은 설악과 한계인데 역시 돌산·돌샘이며 우뚝하게 뛰어났고 깊숙하게 싸늘하다. 겹쳐진 멧부리와 높은 숲이 하늘과 해를 가렸다'고 한 다음, 한계산에 대해서만 '만 길이나 되는 큰 폭포가 있다. 옛날 임진년에 당나라 장수가 보고서 여산폭포보다 훌륭하다 하였다'고 적고 있다.

옛날에도 설악산은 빼어난 산으로 인식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금강산에 비해서는 상당히 평가 절하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까닭은, 말 타고 ‘유산(游山)’을 즐긴 양반들의 행태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를테면 양반들에게 설악산은 ‘신포도’였던 셈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육당 최남선이 남긴 ‘설악기행’은 대단히 흥미롭다. 한 대목을 보자.

'금강산은 너무 드러나서 마치 길가에서 술 파는 색시같이 아무나 손을 잡게 된 한탄스러움이 있음에 견주어 설악산은 절세의 미인이 골짜기 속에 있으되 고운 모습으로 물속의 고기를 놀라게 하는 듯이 있어서 참으로 산수 풍경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이라면 금강산이 아니라 설악산에서 그 구하는 바를 비로소 만족할 것이다. 설악산은 그 경치를 낱낱이 헤어보면 그 빼어남이 결코 그 아래에 둘 것이 아니지만 원체 이름이 높은 금강산에 눌려서 세상에 알려지기는 금강산에 견주면 몇 천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니, 이는 아는 이가 보면 도리어 우스운 일이다.'

설악산을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나 최남선의 안목에 아주 통쾌해 할 것 같다.




배낭만 아니라면 산길 걷기 최고의 즐거움

▲ 대청봉 오름길. 기묘한 암봉으로 이루어진 설악산 전체 분위기와 달리 원만한 풍광을 보여 주는 곳이다.

끝청까지 부드러운 흐름을 보이던 산줄기는 중청에서 불끈 솟았다가 대청을 오르기 전 부드럽게 허리를 낮춘다. 소청을 왼쪽에 두고 중청 대피소로 흐르는 능선의 결은 설악산의 모든 능선 가운데서 가장 부드러울 것이다. 대청봉까지 가장 쉽게 오를 수 있는 길이 한계령 기점이기는 하지만, 5~6 시간은 필요하므로, 배고프고 지친 사람들에게 그 길은 비단결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중청봉에서 바라본 대청봉의 모습은 대단히 원만하다. 가히 개성 강하고 고집 센 수많은 봉우리를 거두어 안을 만한 군자의 풍모다. 군자의 그늘에서 먹는 점심은 비록 라면이지만 견줄 데 없는 성찬이다.

대청봉에서 희운각으로 내려서는 길은 대단히 가파르다. 통상적인 대간 종주길은 대청봉 정상에서 되돌아 내려와 죽음의 계곡을 오른쪽에 끼고 희운각을 향한다. 하지만 이 길은 통행이 금지된 곳이다. 등산로도 많이 패여 있다. 가급적이면 빈 몸으로 대청봉을 올랐다가 내려와서 소청봉을 경유하여 희운각으로 가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소청봉~희운각 길로 가면 대간 종주가 아니라는 발상은 대단히 유치하고 기계적이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산과 산들이 연이어진 줄기 전체를 말한다. 기슭으로 가든 등성마루로 가든 대간종주로서 의미가 달라질 것은 없다. 다만 종주산행의 특성 상 능선을 밟는 것이 가장 쉽고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소위 마루금만 밟고 가는 것은 99.9% 불가능하다. 말 그대로 그렇게 하려면 공룡릉 같은 경우는 고난도의 암벽등반을 병행해야 한다.

희운각 앞 가야동 계곡의 그 맑은 물살은 여전하다. 하지만 지난 큰물 때 흘러내린 바위들 때문에 계곡의 모습은 예전 같지 않다. 특히 소청봉쪽 등산로 일대는 상처가 깊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의 눈으로 그것을 상처라고 하는 것은 옳은 표현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보는 어떤 빼어난 경치도 수억 년에 걸쳐 그러한 자연현상이 반복된 결과일 것이므로. 다만, 최근의 집중 호우는 인간의 무분별한 자원남용과 환경파괴의 결과이므로 인간의 잘못이 크다 하겠다.

▲ 공룡의 등을 타고 넘는 취재팀.

희운각에서 신선대까지는 1시간 정도 가파른 오르막이 계속된다. 하지만 신선대가 안겨주는 조망의 즐거움을 생각하면 기꺼이 감수할 만하다. 말 그대로 신선대는, 신선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을 최고의 풍광을 펼쳐 보인다. 마침 해가 이울면서 산빛은 푸르스름해진다. 서서히 하늘금이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산줄기 사이의 계곡에는 안개가 차오른다. 겹쳐진 산줄기들은 제각기 다른 존재감으로 산의 깊이를 더한다. 특히 용아릉은 절정의 자태로 내 마음 속에 문신처럼 새겨진다.

신선대에서 마등령까지, 이른바 공룡릉은 이번 구간의 클라이맥스라 부를 만하다. 풍광으로도 그렇고, 끝없이 오르내려야 하는 고통 체감지수로도 그렇다.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배낭 무게만 아니면 산길을 걷는 최고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산의 선율은 자진모리나 알레그로.

산이 어둠 속으로 다 가라앉기도 전에 열사흘 상현달이 화채능선 위로 떠오른다. 간월(看月)을 즐기는 사람들은 흔히 열나흘 달을 최고로 친다. 밝기로 치면 보름달에 크게 뒤지지 않는데, 약간 빈 듯한 모습이 더 좋다는 얘기겠다. 안분(安分)이 되기도 할 것이다.

헤드램프를 켜지 않고도 걷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 오히려 내 몸뚱이가 만드는 그림자가 걷기를 방해할 정도다. 뜻하지 않은 달빛 산행의 복을 누리며 1275m봉 아래 샘터에 배낭을 부린다. 약간의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밤새 안녕’을 묻는다. 예상을 넘어 안녕하다. 사실 한겨울 추위를 예상했으나 의외로 바람결이 맵지 않다.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1275m봉을 오른다. 멀리서 보면 토끼 귀처럼 뾰족하게 솟은 두 개의 바위가 마주한 1275m봉은 대간 종주자들에게는 아주 고마운 곳이다. 물과 잠자리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랜드마크의 구실까지 해 주기 때문에 운행속도 조절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단체 산행객들이 한꺼번에 쉴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넉넉하다. 가까운 시일 내 이름이 붙여져서 ‘1275m봉’ 식으로 삭막하게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1275m봉에서 마등령까지는 가파른 암반과 협곡 같은 바위벼랑 사이를 계속 오르내린다. 걷는 맛과 눈 맛이 좋아서 지루한 감은 없다. 특히 마등령을 1.1Km 앞둔 조망처는 공룡릉 동쪽 기슭의 바위 사이로 울산암의 풍광을 절대미감으로 부각시킨다. 저항령 너머 황철봉 기슭은 화채릉 같은 암봉군과 전혀 다른 울창한 숲으로 설악의 풍광에 깊이를 더해 준다.

백두대간 상 너덜의 대표적인 구간

마등령은 휴게소 같은 곳이다. 벤치도 마련돼 있고 동서쪽 기슭에 샘도 있다. 신흥사나 백담사로 내려서는 기점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다람쥐들이 사람들과 간식을 나눠먹는 곳인데 이번에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온 산에 도토리가 천지여서 그런 것 같다.
마등령에서 성큼 키를 높이면 1326.7m봉이다. 봉우리를 내려서면 너덜이다. 너덜은 너덜겅의 준말로 돌로 덮인 산기슭을 말한다. 작은 상자 크기에서 냉장고만한 바위들로만 뒤덮인 너덜은 백두대간에서는 설악산 일대가 대표적이다. 눈이 쌓인 계절에는 바위틈을 몰라서 스틱에 의존하지 않고는 걷기 어렵다. 특히 황철봉(1,318.8m)을 앞둔 저항령(1100m) 일대는 연이이서 너덜이 나타난다. 그렇지만 마치 바위로 된 사막을 연상시킬 정도로 장관을 이루는 너덜은 황철봉 아래다.

▲ 마등을 타고 넘어 황철봉으로 향하는 취재팀.


지리학에서는 너덜을 암괴원(岩塊原)이라 하고, 영어로는 block field라 일컫는 모양이다. 동글동글하거나 제멋대로 부서진 돌밭이 아니라 제법 크고 모난 돌덩이가 어느 정도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곳을 말한다고 보면 되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너덜과 지리학에서 말하는 너덜 즉 암괴원은 엄밀한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어쨌든 황철봉 일대의 너덜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으로 45억 년 지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여준다.

1275m봉에서 미시령까지는 실거리 약 11km인데 7시간 안팎의 시간이 소요된다. 너덜이 체력을 심각하게 떨어뜨리지는 않지만 시간은 상당이 삼킨다.

너덜 지대를 벗어나 울산암 갈림길 전부터 미시령까지는 편안한 내리막이다. 미시령 직전의 억새 능선은 강아지마냥 뒹굴고 싶을 정도로 시원하다. 열나흘 달빛을 등에 지고 그 길을 내려가노라니 월간山지 선배들과 에코로바 직원 분들이 마중을 나온다.

대간 종주 이후 최초로 누군가가 지어놓은 밥을 먹는 호사를 누린 다음 마지막 구간 종주 기념 케이크를 자른다. 촛불을 켜 보지만 불꽃은 1초도 타오르지 못한다. 미시령 큰 바람이 대신 꺼 준 셈이다. 대간 종주 기념으로는 제격이다.

마지막 날. 천둥을 동반한 비바람이 거세다. 비를 맞고서라도 마지막 날인 만큼 운행을 강행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정도가 좀 세다. 하지만 하늘은 우리 편인가 보다. 오전 8시부터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기 시작한다. 무거운 짐을 다 들어내고 간식과 물만으로 하루산행 채비를 갖춘 다음 마음도 가볍게 상봉을 향하는 능선에 몸을 세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가벼운 마음에 몸까지 가볍게 한 탓인가. 세상 모든 바람이 작당이라도 하고 한꺼번에 몰려드는 것 같다. 미시령을 넘을 때마다 예사롭지 않은 바람을 받아 봤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황동규 시인은 미시령의 바람을 이렇게 노래했다.

‘풍경 전체가 바람 속에 / 바람이 되어 흔들리고 / 설악산이 흔들리고 / 내 등뼈가 흔들리고 / 나는 나를 놓칠까봐 / 나를 품에 안고 마냥 허덕였다’(‘미시령 큰 바람’ 부분)

▲ 대간령을 지나 암봉에서 진부령 쪽으로 바라본 풍광. 수묵화 같은 첩첩 산줄기.


나는 정말 나를 놓칠까 봐 심각하게 허덕였다. 존재론적 허덕임과는 100% 무관하다. 만약 그 순간 마침 곁에 철기둥이 있어서 붙잡지 못했다면, 흔들릴 수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난생 처음 온몸으로 받아본 ‘큰 바람’이다. 한참을 철기둥에 의지해 있다가 한 순간 바람이 수굿해지는 틈을 이용하여 비칠비칠 기어가듯 바람의 손아귀를 벗어나 상봉 기슭으로 다가간다.

상봉 아래 샘터는 여전하다. 어느 여름날 이곳에서 물봉선, 동자꽃과 인사를 나눈 일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깊은 잠 속에 빠져 있다. 상봉 암릉 지대를 비껴 돌아 살짝 내려서자 화암재다. 신선봉(12,04m)을 오른쪽에 두고 곧장 대간령으로 향한다. 숲속으로 수굿한 내리막이 길게 이어진다.

대간령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다음 암봉을 오른다. 집채만한 바위들이 얼기설기 한 암봉에서부터는 고성군 토성면 일대와 동해가 눈에 들어온다. 일행들은 제각각의 속도로 마산을 향한다. 암봉에서 마산까지는 그리 힘든 길이 아니지만 앞에 제법 높은 봉우리를 앞두고 있어서 2시간은 족히 시간을 삼킨다.

마산봉(1,051.9m). 설악산 국립공원권역을 벗어난 마지막 봉우리다. 길게 휴식을 취한 다음, 알파인 스키어처럼 잰 걸음으로 알프스 스키장으로 내려선다. 사실상 종주의 끝이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 아니 마음보다는 몸으로 이 땅과 나눈 긴 대화에,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찍는다. 당분간 침묵하고 싶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허재성 기자 heophoto@chosun.com




이 땅의 지문이 내 몸에 DNA로 기억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어떤 장소에 대한 머릿속의 기억은 휘발성이 강합니다. 하지만 오감을 통해 각인된 기억은 여간해선 잊히지 않습니다.

백두대간 종주를 하면서 ‘몸’이야말로 가장 믿을 만한 인지수단이자 표현수단이란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본질적으로 허망한 육신에 대한 옹호가 아닙니다. 목숨 붙여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느 순간에도 정직한 반응을 보이는 몸의 건강성이 자연의 본성에 가까이 다가가기를 희망했다는 얘깁니다. 심신 중 어느 한쪽의 우열을 따지는 것도 이분법적 발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우리에게 ‘산수간을 노니는’ 풍류의 전통이 남아있다면 산행 문화가 바로 그것일 겁이다. 우리 백두대간 취재팀은 가장 느긋하게 산을 즐기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몸이 허락하는 만큼이었습니다.

2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백두대간과 보낸 것 같습니다. 워낙 빨리 변하는 세상이라 요즘은 2년 정도면 세대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한 소중한 인연들에 감사드립니다. 처음 종주를 함께 시작한 구인모 선생님, 사진가 손재식 선생님, 심산 작가를 비롯하여 이원영씨, 이동민 선배 등 힘이 되어준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멀리 진주에서 여러 번 참가한 조점선, 정인숙, 왕현수, 류육현, 강형복, 신동국씨 등 진서산악회 회원 여러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은 에코로바의 조병근 사장님과 정우동 이사님의 후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김종현형, 김석우 감독, 그리고 사진을 찍느라 고생을 한 허재성 기자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때론 거친 숨결까지 날것으로 보낸 글, 너그럽게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종주 팀의 ‘한 마디’

김종현-“네 번째 종주였지만, 산은 늘 다른 얼굴로 나를 유혹한다.”
김석우-“백두대간 종주가 아니었다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이름 없는 산들을 만나면서 인연의 소중함을 무겁게 느꼈다.”
허재성-“카메라 없이, 빈손으로 산으로 가고 싶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이 땅의 등뼈를 이루는 산줄기, 그것이 백두대간이다. 비유컨대, 뿌리를 백두산 ‘하늘연못’에 두고 지리산을 꽃피운 한 그루 커다란 나무가 바로 백두대간인 것이다. 이러한 국토관의 연원은 신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내력은 다음과 같다.

'옥룡기(玉龍記)에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지리산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의 뿌리는 물이요 줄기는 나무다.'

고려사의 기록이다. 여기서 옥룡기라 함은 신라 말 후삼국 격변기의 선사이자 한국 풍수의 비조로 불리는 도선(827-898) 스님의 비결서를 이른다. 뿌리인 물은 백두산 천지, 줄기인 나무는 백두대간을 일컫는다. 이러한 지리인식은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1690-1752)에 의해 체계화되고, 후대로 계승되어 신경준(1712-1781)의 산수고, 정약용(1762-1836)의 대동수경과 같은 지리서를 낳고, 정상기(1678-1752)의 동국지도를 이어 김정호(생몰 미상·1800-1864 사이로 추정)의 대동여지도로 꽃핀다. 조선 후기 실학의 빛나는 성취 가운데 하나가 백두대간의 발견인 것이다.

백두대간의 길이는 1,600Km로 추정한다. 그 중 남한 구간은 약 640km로 보는데, 포항 셀파산악회에서는 실측 거리가 734.65km라고 밝히고 있다.

백두대간이 이 땅의 줄기라면 당연히 가지가 있을 터, 그 가지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1개의 정간과 13개의 정맥이다. 그리고 정맥들 사이에는 반드시 강이 흐른다. 그래서 한강의 북쪽 산줄기는 한북정맥, 한강의 남쪽 산줄기는 한남정맥, 낙동강의 동쪽 산줄기는 낙동정맥(흔히 태백산맥이라 부르는 산줄기)이라 칭한다. 한강 수계니 낙동강 수계니 하는 지역 구분이 산줄기로 울타리 쳐진 강의 유역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백두대간의 지형은 지금으로부터 약 2,300만 년 전에서 1,500만 년 사이에 태평양 해저 지각판과 유라시아 대륙 지각판이 충돌, 동해의 해저 지각이 융기하며 형성된 것이라 한다. 이때 서해쪽은 동해에 비해 적게 융기함으로써 비대칭적인 동고서저의 경동(傾東) 지형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렇듯 백두대간을 이해하는 일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 경제, 예술, 종교를 이해하는 일이자 우리 삶의 실체를 성찰하는 일이다. 특히 생태축으로서 백두대간의 건강은 우리네 삶의 건강과 불가분의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