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의 對話/한국의 숲

생명의 숲을 거닐다 <2> 경주 삼릉 소나무숲

초암 정만순 2018. 1. 19. 14:09



생명의 숲을 거닐다

<2> 경주 삼릉 소나무숲


철갑 두른 ‘왕릉 호위무사’ 삭풍에도 꿋꿋한 기상

- 숲 초입부터 청량한 솔향기 솔솔
- 소나무 사이 햇살 신비하고 오묘
- 배병우 사진작가 작품으로 유명
- 아첨 떨 듯 너무 굽힌 몇 그루
- 인공지지대에 몸 맡긴 신세

- 탐방지원센터서 숲 해설 듣고
- 평탄한 흙길 가볍게 걷기 제격




삼릉의 가운데 있는 신덕왕릉은 두 차례에 걸쳐 내부가 조사됐는데, 조사 결과 굴식돌방무덤으로서 돌방 벽면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었다. 신라 무덤으로는 처음 발견된 것으로 주목받았다. 사적 222호인 경애왕릉은 제55대 경애왕이 잠든 곳이다.

삼릉의 소나무 군락을 전 세계에 알린 배병우 사진작가는 “경주의 소나무는 경배를 위한 것이다. 천년 신라 왕들의 무덤가에는 늘 솔밭이 있다. 무덤가에 심는 소나무를 도리솔이라고 하는데, 소나무는 땅과 하늘을 연결해 주는 영혼의 매개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경주 소나무 중에서도 삼릉 소나무 군락은 남산과 네 왕릉의 정기를 고스란히 받고 있다. 한낱 소나무 군락으로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어쩌면 애국가에 등장하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의 남산을 서울이 아닌 경주로 해석해도 충분할지 모르겠다.

미로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소나무가 빽빽하고 촘촘하게 이어진 군락에서 휘어지고 구부려져 뒤틀렸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서로 엉켜 상대를 옭아매는 비정한 소나무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삼릉 숲이 주는 큰 교훈이었다.


겨울의 숲은 언제나 쓸쓸하다. 옷이 다 벗겨진 채 메말라 버린 수목 아래에서 차디찬 바람에 불려가는 나뭇잎을 밟고 지나가면 때로는 황망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겨울 숲에 소나무가 있다면 사정은 다르다. 흙빛으로 변해버린 숲속에서 푸른 기상을 뽐내며 우뚝 서 있는 푸른 소나무는 애국가 가사처럼 철갑을 두르고 숲을 지키고 있다. 전국 최고의 소나무 숲 출사지로 주목받는 경북 경주 남산 아래 ‘삼릉 숲’에서 겨울의 상징이자 한민족의 기상, 소나무를 만났다.

■신비와 오묘, 왕릉 호위하는 松

   
겨울의 상징, 소나무의 진가를 보여주는 경북 경주 삼릉 소나무 숲. 빽빽하게 우거진 솔밭 사이로 햇볕이 파고 들면서 온 숲이 장관을 이룬다. 곽재훈 전문기자 kwakjh@kookje.co.kr

경주의 중심인 남산의 서쪽에 자리한 삼릉 숲은 배병우 사진작가의 작품 배경으로 이름을 떨친 명소다. ‘카메라로 소나무를 그린’ 배 작가의 소나무 사진 작품이 2005년 영국 런던 경매에서 가수 엘튼 존에게 팔리면서 작품의 촬영지인 이곳은 전국 사진작가들의 출사지로 압도적인 명성을 갖고 있다.

삼릉 숲이 눈앞에 보이자 청량한 솔 향기가 인사를 하듯 코끝을 건드린다. 삼릉 숲의 소나무들이 초입부터 위용을 뽐낸다. 머리를 꺾어 하늘을 올려봐도 끝은 보이지 않는 올곧은 소나무와 굽은 소나무, 서로가 엉켜 몸을 지탱하는 소나무까지 카메라 셔터를 눌러야 할 포인트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겨울바람이 한바탕 몰아치고 잦아들더니 새로운 숲의 모습이 드러났다. 왕릉의 정면에서 뒤로 남산이 보인다는 것도 모를 만큼 울창한 소나무 숲이었다. 구름이 잔뜩 낀 날씨였지만 순간 해가 얼굴을 내밀었고 굽이굽이 허리를 숙여 삼릉을 보호하는 소나무 사이로 햇살이 들어왔다. 그늘과 그늘 사이로 햇살이 비치자 마치 ‘롱핀’ 조명을 여러 개 내려놓은 무대와 같았다. 흙먼지와 솔가루는 롱핀 조명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신비함과 오묘함이 엄습해오는,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이었다. 한 발자국만 걸으면 음지가 양지가 되고, 양지가 음지가 됐다. 마음먹기에 따라 따스함과 스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소나무의 갑옷 껍데기 틈새에 낀 이끼도 보기엔 애처로웠지만 그 자체로 출사 대상이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삼릉과 돌다리로 연결된 솔밭은 경애왕릉을 호위하는 형상이었다. 천년 고도 경주의 한 부분을 보여주듯 돌다리에는 이끼와 검은 떼가 잔뜩 끼어 있다. 삼릉과 경애왕릉은 한겨울 추위가 무색하게 양기를 한껏 받고 있었고, 왕릉을 4면으로 에워싼 소나무들은 그 양기를 받아보려고 능으로 허리를 숙이고 있다. 이곳의 소나무들은 왕을 지키는 군사와 다름없었다. 몇 그루의 ‘호위무사’들은 왕에게 지나친 아첨을 떨었는지, 왕릉으로 자신을 너무 굽힌 나머지 인공 지지대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뭐든 정도껏 해야 한다는 진리를 보여주듯 말이다.

■오르막 없는 숲길과 3대 장관

   
삼릉 옆 경애왕릉. 울창한 소나무 숲이 왕릉을 호위하고 있다. 곽재훈 전문기자

삼릉 숲은 경주에서도 최고로 친다. 숲의 매력도 압권이지만 무엇보다 접근성이 아주 좋다. 서남산주차장에 차를 세우고(2000원 정기요금) 길을 건너면 탐방지원센터가 있다. 탐방지원센터에서 숲 해설 등 설명도 들을 수 있다. 삼릉 숲은 남산 금오봉(468m)으로 가는 산행로의 시작이기도 하다. 탐방지원센터에서 2~3분 걸으면 오른쪽으로 촘촘히 들어선 소나무 숲을 만날 수 있다. 뒷짐을 하고 걸어도, 구두를 신고 걸어도 될 만큼 평탄하다. 발걸음을 옮기는 데 유일한 걸림돌은 흙 위로 거칠게 솟아 적나라하게 속살을 드러난 소나무 뿌리뿐이었다. 물론 땅을 뚫고 나온 이 뿌리들은 소나무의 장엄함과 역동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사실 이 숲에서 가장 좋은 사진 명소를 꼽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른 아침 숲을 가득 메운 짙은 안개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는 일출 때, 해 질 녘 주황빛으로 온 숲이 물드는 일몰 때, 그리고 한낮 햇살이 소나무 사이로 내리쬘 때 등이 삼릉 숲이 우리에게 허락한 3대 장관으로 꼽힌다. 하지만 아무 때나 이런 환상적인 장면을 볼 순 없다. 모든 자연이 그렇듯 이곳에서도 날씨는 항상 변수다. 그중에서도 숲의 습도가 장관 연출의 결정적 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