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의 對話/한국의 숲

사찰숲길을 거닐다] ① 양평 용문사 우국의 길 

초암 정만순 2018. 1. 5. 15:22




사찰숲길을 거닐다] ① 양평 용문사 우국의 길


‘양평의병’ 용문사 근거지 삼아 치열하게 항일민족 운동 전개

 

신라 마의태자도 나라 걱정하며 심었다는 은행나무 하늘 찌를 듯

 

나라 걱정하던 겨울 길섶에는 푸른 맥문동이 방문객 맞이해


 ‘여태동 기자의 사찰숲길을 거닐다’를 연재한다.

이 연재가 전국에 산재해 있는 천년고찰 숲길의 생생한 현장을 다양한 사진과 함께 게재해 독자 여러분들과 네티즌 독자들이

삶속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마음을 치유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천년 숲을 지켜 온 사찰이야기를 통해 우리 민족의 심성과 함께 해 온 불교의 가르침을 전해 맑고 아름다운 세상을

구현하는데도 일조하길 기원한다. 

 

  
① 일주문 지나 용문사로 오르는 길. 상처난 소나무는 민족의 독립을 지키는 의승군을 닮았다.

사찰 숲을 찾아가는 길은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그곳은 오랜 역사와 이야기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숲 가운데는 사찰의 이름이 늘상 올라 있다. 사찰 숲이 가지는 가치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절기로 소한(小寒)인 지난 6일, ‘사찰 숲 기행’의 첫 행선지로 양평 용문사 숲길을 찾았다. ‘대한(大寒)이 소한 집에 놀러 왔다가 감기가 걸려 돌아갔다’는 소한추위는 예년에 비해 매섭지 않았지만 겨울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용문사라는 사찰 이름을 부를 때면 의례히 천년이 넘는 은행나무를 연상한다.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이 거대한 힘을 뿜어내며 용문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은행나무는 ‘동양 최대’라는 수식어와 함께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세자였던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고 전해지니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일설에는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뿌리가 내려 자랐다고도 한다.)

  
②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

“용문사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의 전란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나무라고 하여 천왕목(天王木)이라고도 불렸으며, 조선 세종 때에는 정3품 이상에 해당하는 벼슬인 당상직첩을 하사받기도 했다. 정미년(1907년) 의병이 일어났을 때는 일본군이 절을 불태웠으나 이 나무만은 화를 면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는 순간 피가 쏟아지고 하늘에서는 천둥이 쳤다고 한다. 또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 나무가 소리를 내어 그것을 알렸으며, 조선 고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큰 가지 하나가 부러져 떨어졌다고 한다.”

은행나무를 소개하는 글에서 보이듯이 용문사 숲길은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憂國)의 길’이다. 비단 신라 마의태자의 나라걱정 뿐만 아니라 용문사가 우리 민족이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지키고, 국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음은 사찰 입구에 세워져 있는 비문이 대변해 준다. ‘한국 민족독립운동 발상지비, 화서연원독립운동기념비, 양평의병기념비, 용문항일투쟁기념비, 화서선생어록비(위정척사비)와 기념비에는 비문 세운 목적을 자세하게 새겨놓고 있다.

“역사적으로 양평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침략하였을 때 ‘국가의 원기’로서 한국근대민족운동의 발원지였음을 밝히는 것이다. 근대민족독립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던 화서연원과 양평군, 용문산을 근거지로 항일투쟁을 전개한 구국지사들을 기리고, 그 거룩한 독립정신을 선양하고자 함이다. 용문산과 용문사, 상원사, 사나사가 명실공히 외세침략기에 호국영산, 호국고찰의 기능을 하였음을 알리고자 함이다.”

  
③ 용문사 우회길인 오솔길에 자라고 있는 느티나무.

일주문에 든다. 겨울숲길이 싸늘하다. 소한 추위가 약하다고 하지만 산에서 내려오는 냉기는 겨울산행의 알싸한 맛을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용문사 일주문은 ‘용문(龍門)’이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 용들이 꿈틀거리며 노닐고 있었다. ‘웬 일주문에 용들이 노닐까’라고 의구심을 갖다가도 용문사라는 사찰 명을 한번 호명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국의 숲은 울울창창(鬱鬱蒼蒼)했다. 신라 신덕왕(913년) 때 대경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만큼 오랜 세월을 간직한 숲이니 그 이름만큼의 위용을 자랑한다. 숲을 구성하는 주요 수종은 소나무다. 그것도 외래종이 아닌 금강송이 빽빽하게 일주문에서부터 도열하듯 서 있다. 소나무와 더불어 활엽수종인 떡갈나무 신갈나무 참나무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중부지방에서도 북쪽에 속하지만 침엽수와 활엽수의 비중이 균등해 보인다.

용문사는 우리민족이 나라를 잃었을 때 분연히 일어난 ‘양평의병’의 근원지였다. 당시 일제는 대한제국의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키며 국권을 찬탈하려 했다. 이러한 시기에 양평의병은 대일항전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양평의병은 용문산 용문사를 비롯해 상원사와 사나사를 근거지로 활동했다.

권득수 의병장은 의병을 모집해 용문사에서 식량과 무기를 비축해 놓고 항일운동을 펼쳤다. 조인환 의병장은 용문사를 근거지로 삼아 인근 관아와 파출소, 우편소를 습격하여 일제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한때는 의병과 의승군이 연합군을 결성해 양평군 청운면 가현리 우벚고개에서 일본 정예군과 맞붙어 격퇴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많은 희생이 따르기도 했다. 이를 추모해 2010년에는 ‘만다라’소설의 저자인 김성동 작가가 천도재를 지내기도 했다.

숲길은 여러갈래다. 자동차와 사람이 다니는 큰 길이 주를 이루고 길 옆에는 산짐승들이 다닐법한 길들이 지난 가을 떨군 잎들을 품고 여기저기 나 있다. 그 뿐이 아니다.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이 얼음 사이로 유유히 흐른다. 차가운 얼음 꽃을 피워 겨울정취를 드러내어 보인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 두 개를 지나면 용유정(龍遊亭)에 이른다. 이름하여 ‘용들이 놀았다는 정자’에는 목각으로 다양한 문양을 새긴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산길 곳곳에는 마음을 맑게 해주는 경전구절이 나무판에 새겨져 있다. 오랜 세월로 색이 바래기도 한 문구는 애써 읽으려 해도 읽혀지지 않는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모든 것이 영원할 줄 알고 수행을 멀리 하느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나무에 새겨진 구절이 영원하지 않음을 스스로도 보여주는 듯하다.

용유정 건너편으로는 구름다리가 오솔길로 안내한다. 철재여서 경관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어 방문객들을 안심시킨다. 오솔길을 돌아 올라가면 보물로 지정돼 있는 정지국사 탑과 비가 80m 거리를 두고 자리하고 있다. 정지국사는 고려 말 스님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스님의 공덕을 기려 ‘국사’라는 칭호까지를 내렸다고 하니 이 스님 역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④ 용문사 입구에 도열하듯 서 있는 기념비들로 의병과 의승군의 항일행적이 기록돼 있다.

우국의 숲 정점은 용문사 경내에 서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다. 천년은 훌쩍 넘겼을 것 같은 고목의 위용은 주변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들의 삶을 수 없이 바라보며 무언의 설법을 해 온 은행나무는 지금도 무언의 설법을 하고 있는 중이다. 수없는 명언을 토해내도 저 은행나무의 무언설법만큼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의 위안이 되는 나무다.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그 은행나무 아래 저마다의 소원을 쪽지에 적어 달아 놓았다.

“가족 무사고와 건강, 우리누나 in 서울 대학가기, 컴퓨터 시간 늘이기, 공부 전교 19등 안에 들기….” 어느 청소년이 적어 놓은 듯한 소박한 서원을 은행나무는 들어줄까. 너무도 많은 뭇 사람들의 서원이 쪽지에 매달려 흔들린다. 그 흔들리는 서원 줄을 은행나무는 허리에 동여매 흔들리지 않게 붙잡고 있다. 반드시 발원 하나하나를 성취하게 해주겠다는 태세다.

전통찻집에서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시고 들어왔던 일주문을 나오니 6개의 기념비가 서 있다. 첫 번째 비문에는 가로로 커다랗게 위정척사(衛正斥邪)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이 문구는 조선 초 유교를 정통으로 하여 불교를 배척할 때 처음 등장했으니 사찰입구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문자대로 해석하자면 ‘정학을 지키고 이단인 사학을 배척하는 유교의 이념을 대변하는 사상’이지만 구한말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항일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하촌에서 산채비빕밥 한 그릇과 도토리묵을 한 접시 시켜 저녁요기를 한다. 어스름이 산 허리에 내리는 용문사 계곡을 바라보니 100여년 전 의병과 의승군들의 넋들이 용문사 우국의 숲길에서 어른거린다.

TIP 걷기 안내

  
 

 

‘우국의 길’은 용문사 입구 일주문에서 용문사까지 1km 정도 된다. 왕복으로 갔다오면 2km다. 일주문 다리를 건너기 전 기념비에 잠시 서서 기념비에 담긴 글귀를 읽고 산문에 들면 유익하다. 용들이 노니는 일주문을 지나면 구불구불한 도로와 마주한다. 자동차도 함께 다니는 길이므로 주변을 살펴야 한다. 겨울철이라 길 옆 도랑이 얼어 있지만 다른 계절이면 도랑길 물소리도 들을 수 있다. 계곡에 나 있는 물길에는 크고 작은 바위가 계곡과 조화를 이룬다. 요즘같은 겨울철에는 얼음으로 덮힌 경치도 관람할 수 있다.

일주문을 지난 다리를 건너면 산양삼 학습장이 보인다. 다시 다리를 건너면 용유정이 나오고 좌측 풀섶에는 맥문동이 겨울에도 푸른 색을 띠고 있다. 맥문동 길을 건너며 용문사 경내가 나오고 최근에 보수한 사천왕문을 지나면 은행나무와 마주할 수 있다. 거대한 은행나무 위 계단으로 용문사 대웅전이 있고, 은행나무 맞은 편에 템플스테이 건물이 들어서 있다. 템플스테이 건물 아래에는 전통찻집이 운치있게 자리하고 있다. 내려오는 오솔길을 이용하려면 템플스테이 관을 지나거나 다시 용유정으로 내려와 구름다리 건너 계곡 맞은편으로 내려오면 된다.

승용차로 용문사를 가려면 양평을 지나 용문으로 들어오면 된다. 요즘은 승용차 대신 지하철 경의중앙선이 개통되어 있어 용문역에 내려 버스를 많이 이용한다. 이왕 대중교통을 이용할 요량이면 사하촌 식당 승합차를 이용해 보라. 식사를 하면 왕복이 무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