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의 對話/한국의 숲

논산 성동 개척리 전우치 은행나무

초암 정만순 2017. 10. 27. 08:58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논산 성동 개척리 전우치 은행나무



선비가 꽂아 둔 지팡이에 500년 전설이 ‘주렁주렁’

비를 머금은 먹구름 사이로 높은 가을 하늘이 생긋 미소를 던진다. 바람 따라 먹구름이 푸른 하늘을 온통 덮었다가 열기를 되풀이하며 무시로 둔갑술을 부린다. 어두워지며 소낙비를 쏟아내다가 금세 맑은 해가 얼굴을 내민다.

하늘 끝까지 닿을 듯 높지거니 솟아오른 큰 나무도 햇살 따라 표정을 바꾼다. 무성한 은행잎이 지어낸 나무 그늘 안쪽에 음험한 검은 빛이 드리우는 듯싶더니, 이내 삽상한 초록 빛으로 바뀐다. 

언덕 마루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늠름하게 서 있는 전우치 은행나무. 그 옛날 그러했던 것처럼 여전히 지나는 나그네의 쉼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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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덕 마루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늠름하게 서 있는 전우치 은행나무. 그 옛날 그러했던 것처럼 여전히 지나는 나그네의 쉼터가 되고 있다.



●바람따라 하늘따라 둔갑술을 부리는 나무 

충남 논산 성동면 개척리 언덕 마루에 서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는 500년 동안 숱하게 많은 계절을 배웅도 했고, 앞장서 마중하기도 했다. 바람 안에 든 계절의 향기를 누구보다 앞서서 감지하는 은행나무는 이제 초록 잎을 노란색으로 둔갑할 채비까지 마쳤다. 

중년의 중장비 노동자들이 길을 멈추고 은행나무 그늘에 들어섰다. 누군가 마련해둔 평상이 하루의 노동에 지친 그들의 방문을 반긴다. 나무 앞의 안내판을 바라보던 사내들이 가볍게 이야기를 나눈다. 

“500년이나 된 나무라네.” 
“여기는 490년으로 돼 있는데?” 
“간판 세우고 10년 지난 거지, 뭐.” 

오래된 나무의 나이를 헤아리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이테를 세어 정확히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래된 나무는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나이테를 관찰하려면 줄기에 가느다란 구멍을 뚫어 나이테가 남아 있는 조직을 뽑아내 헤아린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나이가 들면서 나무의 안쪽이 썩어들어, 뽑아낸 줄기 조직의 가운데가 텅 비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사오백년 이상 살아온 노거수(巨樹)는 대부분 그렇다. 

결국 나무의 나이를 알기 위해서는 나무와 관련한 기록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헌에 기록이 남아있는 노거수는 그리 많지 않다. 기록이 있다 해도, 처음 심었을 때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이미 큰 나무로 자란 뒤에 나무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록이기 십상이다. 이럴 때 가장 요긴한 것은 나무와 더불어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다. 

●500년 세월의 신비를 간직해 

논산 개척리의 은행나무를 ‘전우치 은행나무’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것도 그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다. 충청남도기념물 제152호로 지정해 보호하는 이 은행나무는 올해 정확히 492살이다. 지금부터 492년 전에 기인(奇人) 전우치(田禹治)가 심었다는 이야기에 근거한 나이다. 

조선 중종 때에 활동하던 전우치는 문장이 뛰어난 선비였다. 귀신을 다스리는 도술과 둔갑술에 능한 기인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죽은 뒤에 살아 있는 사람에게 책을 빌려갔다는가 하면, 입에 물고 있던 밥을 내뿜어 하얀 나비 떼를 만들기도 했다고 하며, 천도(天桃)를 따기 위해 새끼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모두가 믿기 어려운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다. 최근 영화의 소재가 되는 것도 그런 이야기들 때문이겠다. 

●키 25m·줄기둘레 8m 큰 나무로 우뚝 

그가 서울을 떠나 이곳을 지나게 된 것은 기묘사화에 연루된 때문이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길을 떠난 그는 이 언덕을 지나면서 잠시 다리쉼을 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마을 풍경은 자신의 다급한 처지와 달리 평화로워 보였다. 평화로운 마을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를 표시하기 위해 그는 지팡이를 꽂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 지팡이가 살아서 오래도록 잘 자라면 전씨 가문이 번창할 것이고, 죽으면 전씨 가문이 모두 남의 그늘에 묻혀 참담하게 살 것이라는 이야기를 남겼다. 사화(士禍)를 피해 도망해야 했던 선비의 미래를 향한 염원이 담긴 메시지였다.

지팡이는 그 뒤로 500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며 이제 키 25m, 줄기둘레 8m의 큰 나무로 우뚝 섰다. 바람막이 하나 없는 언덕 위에 홀로 선 나무는 한 가문의 안녕, 혹은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며 긴 세월을 살았다. 

평상의 사내들에게 이 은행나무는 언제 누가 심었는지 알려져서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하자, 넉살좋은 대거리가 이어진다. 

“나무를 심은 게 아니라, 지팡이를 꽂은 거라잖아요.”

사람 좋아보이는 다른 사내가 곧바로 덧붙인다.

“옛날 사람들이 꽂아둔 지팡이는 죄다 큰 나무로 자라는 법이야.”

●사람살이의 평화를 기원하는 상징 

우스개로 던진 이야기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의 노거수 가운데에는 옛 사람의 지팡이가 자랐다는 전설을 가진 나무가 셀 수 없이 많다. 이른바 삽목(揷木)설화다. 대개는 학식이 높은 학자라든가, 덕이 높은 큰 스님, 나라를 지켜낸 장군과 같은 선각자들의 지팡이다. 최치원을 비롯해, 원효·의상·자장 스님, 강감찬 장군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설화일 뿐이지만, 설화 안에는 선조들이 이루고자 한 사람살이의 평화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후손들이 지팡이 나무를 정성껏 지켜온 것 역시 그 염원을 따르는 때문이다. 

전우치 은행나무 역시 정의로운 세상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조선의 선비 전우치의 절박한 희망과 염원이 담긴 나무다. 그의 소망에 화답하듯 나무는 융융하게 자랐지만, 나무 안에 담긴 옛 선비의 마음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안하지만은 않다. 우리 사는 세상에 온전한 정의를 이루기에는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은 까닭이지 싶다.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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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가는 길  

천안논산고속국도의 서논산나들목으로 나가서 국도 4호선으로 갈아타고 1.8㎞쯤 부여 방향으로 간다. 부여시내로 들어서는 사비문을 지나 고가도로 아래에서 좌회전하여 7.4㎞ 가면 언덕 마루에 우뚝 선 큰 나무가 나타난다. 나무 바로 옆에 병촌성결교회가 있다. 주차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아서, 자동차는 나무가 서 있는 돌 축대 옆의 빈 자리나, 나무를 조금 지나서 나오는 마을 안에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