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의 對話/숲 일반

식물과 열매의 생존 전략

초암 정만순 2017. 10. 15. 10:54


식물과 열매의 생존 전략


열매 함부로 따지 마라…동물과 ‘밀당’ 중이다



[애니멀피플] 추석특집-동물 vs 열매, 달콤쌉싸름한 ‘밀당’
익은 열매엔 식물 무관한 2차 대사물질 듬뿍
먹고 씨앗과 함께 배설만 노리는 건 아냐
멀리 보내려면 변비, 손상 피하려면 설사 성분
독성물질 넣어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기도
야생 열매는 과일 아냐, 함부로 먹었다간 큰 코

나무는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 열매를 맺지만, 누구에게나 다 베푸는 것은 아니다. 피라칸타 열매를 따먹는 직박구리. 연합뉴스
나무는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 열매를 맺지만, 누구에게나 다 베푸는 것은 아니다. 피라칸타 열매를 따먹는 직박구리. 연합뉴스
 
탐스럽고 먹음직하게 열린 사과나 감 같은 과일을 보면 누구나 ‘잘 익었네’ 하면서 딸 채비를 한다. 과일은 붉고 짙은 색깔로 수확할 때가 되었음을 알린다. 아직 푸른 과일이 시거나 떫어서 먹기 좋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마치 과일나무가 ‘이제 때가 되었으니 따 가시오’라고 수확 시점을 알려 주는 것 같다. 그렇다면 사람이 길들인 나무가 아닌 야생의 과일나무와 야생동물의 관계도 이럴까.

야생의 과일나무는 열매를 맺느라 많은 투자를 한다. 씨앗을 감싼 과육을 이용해 새나 포유류 등을 끌어들이고 열매를 먹은 동물이 배설하기까지 먼 거리를 이동해 씨앗을 ‘파종’하기를 기대한다. 그렇지만 자연계의 먹이그물은 과수와 농부의 관계처럼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속임수와 이를 되치는 전략이 수많은 이해당사자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있다. 오랜 진화과정에서 이런 군비경쟁의 결과는 과일을 먹는 동물의 유전자와 과일 속의 2차 대사물질이라는 화학물질로 남아있다.

굴거리나무의 열매. ‘한겨레’ 자료 사진.
굴거리나무의 열매. ‘한겨레’ 자료 사진.
열매 속의 2차 대사물질이란 식물의 생리기능에 직접 기여하지 않는 탄닌과 리그닌 같은 페놀화합물, 알칼로이드, 테르페노이드, 사포닌 등의 화학물질을 가리킨다. 식물이 자기 자신이 아닌 열매를 먹는 다른 동물을 위해 만든 물질이다. 식물이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화학물질을 만들었는지는 오랜 논란거리다. 몇 가지 주요 가설을 통해 그 달콤 쌉싸름한 관계의 비밀을 알아보자.

먼저, 열매를 먹는 동물에게 익었으니 어서 와서 먹으라는 단서를 제공하기 위해 2차 대사물질을 낸다는 설명이 있다. 색깔, 향기, 맛이 그런 단서이다. 안토시아닌 색소는 그런 예이다. 아직 씨앗이 영글지 않아 먹히면 곤란할 때 열매에는 맛이 없거나 심지어 독성을 나타내는 물질이 들어있다. 그러나 잘 익어 당분, 지질, 단백질, 비타민, 무기물 등이 풍부해지면 선명한 색깔과 향기, 맛으로 껄끄러운 화학물질이 사라졌다는 표시를 한다. 사람이 기르는 과일나무는 대부분 육종을 통해 이런 쪽으로 길들여졌다.

탐스러운 색깔로 익은 오미자나무 열매. 조홍섭 기자
탐스러운 색깔로 익은 오미자나무 열매. 조홍섭 기자
그러나 야생에서 식물이 늘 정직한 건 아니다. 많은 에너지를 들여 당분이 듬뿍 든 열매를 만드는 대신 그렇게 보이는 색깔과 향기만 띠도록 하면 어떤가. 식물로서는 열매를 먹고 씨앗만 잘 퍼뜨려주면 된다. 유명한 예가 가봉과 카메룬 등 서아프리카 정글에 사는 ‘오우블리’라는 덩굴식물(학명 Pentadiplandra brazzeana)이다. 오우블리란 말은 ‘잊다’는 뜻인데. 아이가 자두 비슷한 이 열매 맛을 보면 엄마 젖을 잊는다는 데서 유래했다. 과육에 든 ‘브라제인’이라는 단백질의 당도는 설탕보다 2000배나 높지만 칼로리는 거의 없다. 이 달콤한 열매를 맛본 동물은 다른 영양분도 많을 줄 알고 열심히 먹지만 실은 거의 얻는 것도 없이 씨앗만 퍼뜨릴 뿐이다. 식물로서는 들인 비용도 별로 없이 소기의 효과를 거두는 셈이다. 그러나 속임수가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영장류가 이 열매라면 정신을 못 차리지만 서부로랜드고릴라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오우블리의 단맛을 느끼지 못하도록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고릴라는 영장류를 씨앗 뿌리는 농부로 값싸게 부려 먹으려는 식물의 전략에 돌연변이로 반격했던 것이다(■ 관련 기사: 사람보다 나은 고릴라, 고당도 과일의 속임수 이겼다).

서아프리카에서 사람을 포함한 영장류가 즐겨 따먹는 고당도의 열매 펜타디플란드라. 토착 이름은 오우블리이다. 스캠퍼데일/플리커 제공
서아프리카에서 사람을 포함한 영장류가 즐겨 따먹는 고당도의 열매 펜타디플란드라. 토착 이름은 오우블리이다. 스캠퍼데일/플리커 제공
식물은 다 익은 열매 속의 2차 대사물질을 이용해 열매를 먹은 동물이 씨앗을 배설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조절한다는 가설도 있다. 만일 과육과 함께 삼켜진 씨앗이 장내에서 너무 오래 체류하면서 위산에 손상당할 우려가 있다면 과육이 장내에서 머무는 시간을 단축시키면 된다. 실제로 자두에 들어있는 소르비톨이나 갈매나무 열매에 들어있는 글루코사이드는 설사를 일으켜 장내 체류시간을 줄인다. 반대로 변비를 일으키는 물질도 잘 익은 열매에 종종 들어있다. 그런 열매를 삼킨 동물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말해 열매를 맺은 나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배설하기 마련이다. 씨앗의 확산이란 측면에서 좋은 전략이다. 가지과 식물의 열매에 흔히 들어있는 글리코알칼로이드는 새에게 변비를 일으킨다. 그렇다면 식물의 이런 전략에 맞서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쉬운 것은 변비를 일으키는 열매와 설사를 일으키는 열매를 적당히 섞어 먹는 것이다.

홍시를 파먹는 직박구리. 감의 탄닌 성분은 변비를 일으키기 위한 감나무의 전략일지 모른다. 연합뉴스
홍시를 파먹는 직박구리. 감의 탄닌 성분은 변비를 일으키기 위한 감나무의 전략일지 모른다. 연합뉴스
식물이 익은 열매에 2차 대사물질을 만드는 이유는 동물이 열매를 너무 오래 따먹지 않도록 제한하기 위해서라는 가설도 있다. 만일 어떤 동물이 잘 익은 열매가 열린 나무에 찾아와 열매를 모조리 먹으면서 체류한다면, 씨앗을 배설물과 함께 어미 나무 근처에 떨어뜨릴 것이다. 이런 일을 막으려면 화학물질로 동물이 열매를 조금만 먹고 떠나도록 이끄는 쪽이 씨앗 확산에 이로울 것이다. 실제로 새들은 한 나무에서 열매를 모조리 먹는 것이 아니라 한 나무에서 몇 개를 따먹고 곧 다른 나무로 이동해 또 다른 열매를 먹는 식으로 행동한다. 한 종류의 열매에서 과량의 화학물질을 섭취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아는지도 모른다. 변비와 설사의 사례처럼 여러 종류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부작용을 최소화할 가능성도 있다.

배풍등의 탐스런 열매. 가지과 덩굴식물인 배풍등의 열매는 약용성분과 독성성분이 함께 있다. 조홍섭 기자
배풍등의 탐스런 열매. 가지과 덩굴식물인 배풍등의 열매는 약용성분과 독성성분이 함께 있다. 조홍섭 기자
육종한 과일나무에 익숙한 우리는 잘 익은 열매에 치명적 독성이 포함된 식물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낯설 것이다. 씨앗 확산을 위해 열매를 선명한 색으로 ‘홍보’해 놓고 그 안에 독물을 집어넣는 것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가지 속 식물, 무환자나무, 미국자리공 등의 익은 열매에는 종종 치명적인 독성물질이 들어있다. 이런 물질은 열매를 먹는 특정한 부류의 동물을 겨냥해 만든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식물이 자기 열매를 새들이 먹었으면 좋겠지만, 포유동물이 먹는 건 싫다고 한다면 열매에 캡사이신, 곧 고추의 매운맛 성분을 넣으면 된다. 캡사이신은 포유동물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기지만 새들은 아무렇지도 않다. 고추 씨앗을 널어놓았다가 새들에게 잔치를 베풀 수도 있다. 육두구 열매는 원숭이는 떫어 도저히 먹을 수 없지만, 씨앗을 옮기는 새로 유명한 큰부리새에겐 괜찮은 먹이이다. 가지속의 벨라도나 열매에는 포유류에게 치명적인 아트로파인이란 독성물질이 들어있지만, 새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다. 과일을 먹는 새들은 독성물질을 중화시키기 위한 큰 간을 지닌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사실 잘 익은 열매에 든 독성물질은 씨앗 확산자가 아니라 미생물과 해충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나래회나무 열매. 조홍섭 기자
나래회나무 열매. 조홍섭 기자
이처럼 열매와 이를 먹는 동물 사이에는 복잡한 밀고 당기는 관계는 오랜 진화과정에서 형성됐다. 분명한 건, 열매를 먹어 식물의 씨앗을 퍼뜨리는 동물이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지리산의 반달가슴곰은 초여름 주식이던 버찌는 다 떨어졌지만 요즘 머루와 다래 열매를 따 먹느라 바쁠 것이다. 곧이어 도토리로 배를 채울 것이다. 반달가슴곰은 열매를 씹지 않고 다량 섭취한 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배설하기 때문에 씨앗을 곳곳에 뿌리는 ‘숲의 농부’이다. 반달가슴곰이 씨앗을 퍼뜨리는 데 그치지 않고 싹트기를 촉진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종복원기술원의 조사에서 반달곰 배설물 속에서 골라낸 산벚나무 씨앗의 발아율은 21%로 나무에서 직접 딴 버찌 씨앗의 발아율 12.5%보다 훨씬 높았다. 소화과정에서 씨앗의 휴면상태를 깨우고 씨앗 겉껍질에 영향을 주어 발아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에서의 연구에서도 반달가슴곰이 씨앗을 뱃속에서 15~20시간 보유하면서 장거리를 이동해 온대지역 척추동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씨앗 확산자 구실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반달가슴곰이 먹은 씨앗의 40%는 어미 나무에서 500m 떨어진 곳에 배설했고 가장 멀게는 22㎞밖에 뿌려지기도 했다.

버찌는 반달가슴곰이 가장 즐겨 먹는 열매의 하나다. 산 위로 오르며 버찌를 따먹는 행동이 결과적으로 산벚나무를 기후변화로부터 지켜준다. 포르모산n,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버찌는 반달가슴곰이 가장 즐겨 먹는 열매의 하나다. 산 위로 오르며 버찌를 따먹는 행동이 결과적으로 산벚나무를 기후변화로부터 지켜준다. 포르모산n,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똥 자리에서 되새김질을 하는 월악산 산양. 그 옆에 대형 헛개나무가 자란 것이 보인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제공.
똥 자리에서 되새김질을 하는 월악산 산양. 그 옆에 대형 헛개나무가 자란 것이 보인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제공.
산양도 반달가슴곰 못지않은 씨앗 확산 동물이다. 알코올성 간 손상을 개선하는 약용식물로 최근 인기가 높은 헛개나무가 산양의 똥 자리에서 주로 싹 튼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월악산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산양을 복원한 곳으로, 산양의 이동 경로와 배설물 기록이 남아있다. 이를 분석한 결과 산양이 주로 배설하는 장소마다 헛개나무가 많이 돋아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헛개나무는 씨앗이 두꺼워 싹이 잘 트지 않기로 유명하다. 시중에선 황산에 담가 씨앗의 겉껍질을 부식시키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산양은 헛개나무 열매를 먹고 되새김질을 하는 동안 씨앗의 두꺼운 껍질을 위산으로 분해해 발아를 촉진했을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사: 헛개나무는 산양이 ‘낳아’ 기른다).

가을철 숲에 가면 붉게 물든 열매를 많이 볼 수 있다. 위에서 보았듯이 다 익은 열매는 동물이 먹으라고 유인하는 것 같지만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그러니 재배종 과일나무 대하듯 아무 열매나 따서 입에 넣을 일은 아니다. 잘 알려진 머루나 다래, 으름, 오미자 등은 모르겠지만. 가을 열매는 봄의 꽃처럼 그저 보고 즐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