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노거수 예방기(禮訪記) (북구 국우동 탱자나무 / 느티나무)
◆ 촬영일 : 2017. 9..25(맑음)
◆ 촬영자 : 솔바람(정만순)
◆ 소재지도
'국우동'이라는 이름은 반포천(反甫川)에 흐르는 물이 인근의 들을 적시어 국가의 살림을 넉넉하게 한다는 '국우(國優)'라는 뜻을 담은 다음과 같은 한시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도덕산 적시며 반포천으로 흘러내린 물 (流川反甫於道德山)
먹고 먹여줌이 반포(反哺)새와 같네. (乳口乳臾如北反甫)
(이 물로)기름진 들, 나라 살림 주름살 펴주고 (濕野之比國優伸額)
나라 살림 넉넉하니 백성들 이마 태평해졌네. (國優則民泰平民額)
원래 ‘국우동’의 옛 이름은 ‘구우리’였는데 ‘구우리’라는 명칭은 이곳에 아홉 마을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탱자나무
탱자나무는 주로 경상·전라도 지방에 분포하며 일본·중국에서도 자란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나무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되며 줄기에 가시가 나 있어 울타리용으로 적합하다.
운향과의 갈잎떨기 탱자나무는 탱글탱글한 열매가 열려서 붙은 이름이다.
탱자나무의 열매는 지실(枳實)이라 부른다.
탱자나무의 열매는 같은 과의 귤이나 등자나무의 열매와 닮았다.
탱자나무의 열매는 약으로 사용한 탓에 조선시대 일부 지역에서는 조공(租貢)의 대상이었다.
조공에 지친 백성들은 탱자나무를 베어버리곤 했다.
탱자나무의 하얀 꽃은 잎보다 먼저 핀다.
다섯 장의 꽃잎은 가시의 보호를 받으면서 벌과 나비를 유혹한다.
탱자나무의 잎은 학명 중 종소명 ‘트리폴리아타(trifoliata)’에서 보듯이 세 개씩 달린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탱자나무를 ‘트라이폴리에이트 오렌지(Trifoliate orange)’라 부른다.
탱자나무의 가시는 이 나무를 울타리로 삼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탱자나무로 만든 울타리는 도적을 막거나 죄인을 가두는 데 이용했다.
조선시대 ‘관방집록(關防集錄)’과 ‘해동잡록(海東雜錄)’에서는 탱자나무를 이용한 목책(木柵)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강화도 역사박물관 옆에 살고 있는 갑곶리 탱자나무(천연기념물 제78호)와 강화도 명미당(明美堂) 이건창(李建昌) 생가 앞에 살고 있는 사기리 탱자나무(천연기념물 제79호)는 탱자나무 울타리로 몽골군을 방어한 역사 현장이자 우리나라에서 아주 귀한 탱자나무 천연기념물이다. 두 곳의 천연기념물 탱자나무는 모두 수령 400년 정도다.
탱자나무의 열매는 둥글면서 속이 꽉 차서 원만(圓滿)하다.
강판권 계명대 사학과 교수
● 명 칭: 국우동 탱자나무(시도기념물 제10호)
● 지정종목: 기념물
● 분 류: 자연유산 / 천연기념물 / 생물과학기념물 / 생물상
● 수 량: 3본
● 수 령 : 400년
● 지정일: 1992-09-08
● 소재지: 대구광역시 북구 국우동 685
● 소유자: 배종현
북구 읍내동에서 지방도를 따라 동북으로 약 3㎞가면 국우동에 이르는데 이 마을 685번지 배종현(裵宗鉉)씨 댁 뒷뜰에 그 옛날 생울타리로 심었던듯한 추정 수령 400년에 가까운 탱자나무 고목이 3그루 서 있었는데 근래에 서쪽 언덕배기의 1그루는 고사하여 현재 2그루만 생존하고 있다.
한편 맨 동쪽에 서 있는 1그루는 둥치 밑둘레 1.4m에, 지상 0.7m높이의 원둥치 둘레 0.65m이고 가지는 동으로 6m, 서로 2.3m, 남으로 6m, 북으로 4.4m뻗어 있다.
국우동의 탱자나무는 다른 천연기념물이나 기념물에 뒤지지 않는 크기와 수령의 것들로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느티나무
● 명 칭: 국우동 느티나무
● 지정종목: 보호수
● 수 량: 1본
● 지정일: 1982-10-30
● 소재지: 대구광역시 북구 국우동 산143
● 수 령 : 450년
● 수 고 : 18m
● 나무둘레 : 3.5m
사진첩
오늘도 대중교통인 도시철도 3호선과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노거수님을 배알하러 갑니다~~
대봉교역에서 탑승하여~~~
매천역에서 내립니다~~
매천정류장에서 시내버스 북구1번을 타고~~
칠곡주공그린빌1단지앞에서 내립니다~~
이제 국우동 노거수(탱자나무 느티나무)가 있는 도남길 45-10으로 걸어갑니다~~
예천참우마을을 지나~~
국우경로당 삼거리에 도착~~
왼쪽으로 가면 노거수길이요 오른쪽은 주차장입니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이 주자장을 이용하면 됩니다~~
80m를 걸어 들어가면 노거수를 뵐 수 있답니다~~
경로당앞 주차장~~
큰 감나무를 지나면~~
바로 노거수 탱자나무와 느티나무가 보이고~~
국우동 탱자나무 안네판~~
골목길 맞은 쪽에 있는 느티나무어린이집~~
텡자나무 안내표석~~
기념물 제 10호~~
탱자나무 전경~~
노구에도 불구하고 자손 번식을 위헤 많은 열매를 맺었군요~~
우람하면서도 골체미를 한껏드러냉 탱자나무~~
뒤펀으로 돌아가니~~
세월의 풍상을 입어 나무껍질이 벗겨진 부분이 군데군데 있어, 이런 부분엔 인공수피를 씌운 모습이다.
나무 속이 드러난 채로 방치하면 벌레가 침입, 물이 흘러들어가 부패가 일어나고, 나무 속에 빈공간이 만들어져서 심하면 나무 줄기가 자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게 된다.
그래서 드러난 목질부에 방부, 방수처리를 하고 인공수피를 씌우는데, 코르크 분말을 주재료로 해서 실리콘 실란트나 기타 등등을 섞어서 쓰는 모양이다.
기존의 수피와 이물감이 영 크지 않고 어울리는 편이다.
사람처럼 나무도 몸이 약해지면 외과수술을 받기도 한다는 것!
세월의 아픈 흔적들~~
청주인 양관 선생과 국우동 느티나무
청주 양씨(楊氏)의 시조는 암곡(巖谷) 양기(楊起)이다. 본래 원나라 사람으로 벼슬이 금자광록대부중서성정승이었다. 그 때 원(元)나라 수도 연경(현, 북경)에는 고려 제27대 충숙왕(忠肅王)의 둘째 아들 전(顓, 훗날 공민왕)이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22세 되던 해 전은 원나라 황족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와 결혼 하였다. 1351년 충정왕(忠定王)의 뒤를 이어 고려 제31대 왕위에 올라 고려로 돌아올 때 양기(楊起)는 그의 수행원 일원으로 왔다. 그 후 원나라로 다시 들어가 고려 조정에서 힘겹게 바쳐오든 4대 조공 즉 동녀(童女) 5천인, 준마 3만 필, 비단 3만 동, 저포 6만 필 등을 영구히 면제받고 돌아 왔다.
이에 공민왕은 높이 치하하며 삼중대광보국숭록대부 및 상당백(上黨伯)으로 봉하고 본관지를 청주(淸州)로 하사했다. 그 후 다시 벽상삼한창국공신에 오르고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1394年(조선 태조 3) 92세로 서거하니 시호를 충헌(忠憲)으로 내렸다.
이러한 화려한 경력을 가진 시조를 둔 청주 양문은 조선조에 와서도 청백리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지만 가장 회자되는 인물은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다. 안평대군, 김구(金絿), 한호(韓濩)와 더불어 조선 전기 사대명필로 일컬어졌다. 그는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강릉 부사와 함흥부윤 등 8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며 산수를 즐기고 시문에도 뛰어났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드라”
는 “태산가”가 대표작이다. 청주 양씨가 대구에 정착한 것은 경기도 포천 출신인 8세 남재(南齋) 양득효(楊得孝, 1572~1645)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용양위(龍讓衛) 병절교위였다. 대구진관(大丘鎭管)에 배속된 그는 부사과(副司果) 겸 훈련원 판관(判官)인 무관이었다.
이즈음 낙재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이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군무에 종사하면서도 유학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어 그 문하에 들어갔다. 남다른 총명함과 학문에 대한 노력은 “의심나고 어려운 것을 통쾌하게 강설(講說)하는 데는 양군(楊君)에 미치지 못 한다”라고 할 정도로 칭찬을 받았다.“ 이런 그의 공부하는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는 낙재는 흔쾌히 사위로 삼으니 처의 고향 다사 이천에 살게 되면서 대구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대구 칠곡 즉 퇴천방 자지미(紫地未)(현, 북구 국우동) 입향조는 남재의 손자 10세 거은(莒隱) 양관(楊綰, 1618~1680)이다. 부인은 거창인 부장(部將) 신눌(申訥)의 딸이다. 아호도 칠곡의 옛 이름 팔거(八莒)에 은거하면서 살겠다는 뜻으로 거은(莒隱)으로 하고 자식들의 교육과 선현들의 글을 읽는 것을 즐기며 새로운 땅을 일구며 살았다. 400여 년이 된 지금 관계, 금융계, 의료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인물이 있으나 선비집안답게 교육자가 많으니 일청(一靑) 양재하(楊在河, 1879~1945)와 그의 아들 지산(芝山) 양인석(楊麟錫, 1909~2003)박사, 은초(隱樵) 양재춘(楊在春,1876~1953), 그의 아들 양백석(楊百錫, 1914~1978)이 그들이다.
일청은 1908년 수창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28년간 교단을 지키며 1천여 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퇴직 후에도 야학당을 개설해 문맹퇴치운동을 벌리는 등 주민들의 교화에 힘썼다. 저서로 <일청문집>이 있고 1960년 교육공덕비가 칠곡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졌다.
아들 지산은 경북대학교 교수로 재임하면서 초대 도서관장, 대학원장을 역임하고 , 대구불교신도회장, 한국자연보존협회 이사장 등 교육행정과 제자양성, 자연보호에 일생을 바쳤다.
특히, 전국최초로 팔공산에 자연휴식년제를 도입하여 생태계보호에 새로운 모델을 개발했고, 희귀종 세뿔투구꽃을 발견해 세상에 알렸다. 국민훈장모란장, 동백장을 받았다.
연구서로 <식물학개론> <생물학개론> <한국식물검색편람> 등이 있으며 교양서로 <백화송> <우리 꽃 좋을시고> 등을 남겨 교육자로서 종교인으로서, 식물학자로서 다양한 분야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은초 양재춘(楊在春)은 양씨서당을 열고 죽림학숙재단(竹林學塾財團)을 설립하여 제자들을 길렀으며 그의 아들 양백석 (楊百錫)은 일제 강점기 마을회관에서 3년 여간 성인 야학을 개설하였고, 1946년 국우공민학교인가를 받아 교사로 재임하며 도남초등학교 신설을 위해 노력 했고, 교단생활 24년 중 도남초교 등 고향인 칠곡지역 내에서만 만20년 간 봉사했다.
그들의 본향 자지미 마을 거은재(莒隱齋) 앞에는 입향조 양관이 심은 느티나무가 온갖 풍상을 겪었으나 양문의 깊은 뿌리처럼 굳건하게 자라고 있다. 여름에는 그늘을 제공하고 추석에는 그네뛰기를 하여 주민들의 만남 장소이기도 했다.
탱자나무 바로 곁 오른쪽 작은 언덕위에 서있는 느티나무에게 다가갑니다~~
우람한 덩치~~
상처입은 몸체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세월의 흔적들~~
내려다본 탱자나무~~
느티나무 곁 양씨(陽氏)문중의 재실~~
볼수록 정겨워라~~
느티나무를 작별하고 다시금 탱자나무를 눈여겨 봅니다~~
도암길을 빠져나오면서 ~~
느티나무와 마지막 작별 인사~~
잘있어요 또올께~~
고마워요 대자연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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