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동네 중 하나인 강남구 삼성동. 지하철역을 내려 북적거리는 쇼핑몰 인파에 휩쓸려 걷기를 10여분. 횡단보도를 건너면 어느새 사찰의 커다란 문 앞에 서게 된다.

‘진여문(眞如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이 문을 들어선다는 것은 절대불변의 진리를 찾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바로 봉은사의 일주문에 도착한 것이다.

문을 지나 완만한 경사를 오른다. 좀전의 소란스러움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북새통이 컸던 까닭인지 거대한 법왕루를 향한 길은 더욱 고요하게 느껴진다.

봉은사는 신라 원성왕 10년(794년) 연회국사가 창건한 천년이 넘는 고찰이다. 이런 오랜 역사의 절이 도심 한복판에 온전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아마도 삼성동이라는 곳은 불과 수십 년 전 광복이 되고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시골길을 걸어야 당도할 수 있었던 한적한 곳이었으리라.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득한 시간

경내를 돌며 추사 김정희가 죽기 3일전 마지막으로 썼다는 봉은사의 도서관 격인 ‘판전’이라 씌어진 편액을 보고, 바로 옆에 높이 23m의 거대한 미륵대불을 만났다. 미륵신앙의 중심지였던 익산에서 직접 가져온 화강암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세심한 정성을 쏟아 불사한 미륵불이다.

뒷편 작은 동산의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미륵대불 뒷편에서 삼성동의 마천루들을 볼 수 있다. 미륵불이 보고 있는 바로 그 풍경이다. 사라져 버린 숲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빌딩 숲은 봉은사 가람과 겹쳐 더없이 생경해보였다. 그 풍경은 마치 다른 세상의 모습처럼 아른 거렸다.

미륵은 56억년 후 석가모니부처님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신다고 예언되어 있는 부처님이다. 그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득한 시간. 과연 그 날 이 풍경들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우리들의 존재는 이 우주 속에 티끌로라도 남아 있기는 할까.

진여문을 통과하며 구하려 했던 절대불변의 진리는 오로지 내가 이 곳에 있었던 존재감 그 뿐만은 아닐까.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어떤 모습으로든 존재하리라…

그 때 가벼운 바람이 나를 스쳤다. 미륵대불이 쓰고 있는 사각모 끝에 걸린 풍경들도 일제히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 소리는 오랫동안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석가모니가 태어나기 전부터 미륵불이 올 먼 미래의 이후까지.

가만히 앉아 바라보는 삼성동의 저녁에 하나둘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다. 영겁의 시간 사이를 비집고 찰나의 밝음이 내가 이 곳에 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분명하게 일깨워 준다.

문득 미륵불이 오는 그 미래에도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들은 세상 속에 존재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건 절대불변의 진리. 바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진여’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