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活의 發見/생활의 지혜

제사 - 가가례(家家禮)

초암 정만순 2017. 3. 16. 07:57



제사 - 가가례(家家禮)

 

제사 절차가 저마다 달라 골치 아프다,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 가지는 편이 낫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족끼리 단란하게 지낸다거나, 신앙 때문에 못 지낸다면 할 말 없지만,

절차가 다 달라 이해하기 곤란하여 못 지낸다는 것은 사실과 멀다.

 

그 정도로 다르지 않다.

가가례(家家禮)라고하여 집집마다 다른 점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차이는 매우 미미하다.

 

조선 왕조는 이념이 주자학 하나로 통일되어,

이설(異說)이 살아 남지 못할 정도로 숨막히던 시대로,

그 예법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주자가례(朱子家禮) 였다.

 

어떤 음식을 제상에 올리느냐, 또는 진설(陳設)은 어떻게 하느냐

따위 사소한 부분이 다를 수 있고, 또한 체제에 편입 된 정도

곧 중국 예법에 얽매인 정도에 따라, 약간 더 차이날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비슷하다. 단조로울 정도로 획일화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제사 절차를 요약하는데, 차례(茶禮),묘사(墓祀),기일제사(忌日祭祀)

등이 기본은 다 같으니, 기제사(忌祭祀) 중심으로 써 보기로 한다.

 

 

제사 드는 날(入祭)과 파하는 날 (罷祭)

 

옛날 제사는 돌아가시기 전날, 이걸 제사드는 날(入祭날)이라 하는데

이날 모두 모여 준비하다가, 자정이 넘으면 올렸다.

 

바쁜 현대에 이렇게 하기 어려워, 요즘 대개 초저녁에 드린다.

입제(入祭)날로 잡아 초저녁에 드리면서 돌아가기 하루 전이 된다.

따라서 제사 끝나는-파제(罷祭) 날로 잡을 수 밖에 없다.

하루 차이 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같은 날짜-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것이다.

 

재계(齋戒)

 

옛날 제사(祭祀)는 당일 덜렁 절하고 음복 먹고 치우는 것이 아니었다.

사흘 전부터 마음과 주변을 청결히 하고, 잡사를 끊고 돌아가신 분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조상이 눈 앞에 보일 정도가 되어야, 신(神)이 강림한다고 믿었다.

 

요즘 이럴 사람 없고, 하라고 해도 못하고, 그런다고 신(神)이 내리겠는가?

그러나 생업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제사 드리기 직전까지 이히히히

하고 웃고 다니는 것은 뭘하지 않나 해서 몇 자 쓴 것이다.

 

 

신위(神位)

 

제사에는 당연히 조상을 대표하는 신위(神位)가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 전통에 신위는 신주(神主), 위패(位牌) 또는 지방(紙榜)이다.

 

신주나 위패는 모시는 사당(祠堂) 또는 감실(龕室)이 있어야 하는데

그 옛날이라고 집집마다 그런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사당을 세우려면 내력이 대단하고, 재력도 있어야 했다.

따라서 대개는 종이에 쓴 지방으로 신위(神位)를 대신했다.

 

이제는 종이 지방이나마 쓸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인터넷을 보니 한글로 어떻게 쓰라는 설명이 있다.

한글이라지만 그걸 컴퓨터로 출력할 것인가, 매직으로 쓸 것인가?

 

또 지방에 쓰는 문자, 예를 들어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는

단순한 글자의 나열이 아니다. 한자란 출발이 주술문자(呪術文字)였다.

그런데 한글로 써놓고 나서, 마법성이 깃들기를 바라겠나?

 

정 서운하면 사진으로 대신하거나, 사진도 남기지 않았다면

마음 속으로 그리고 있으면 될 것이다.

 

묘사(墓祀-지금 통상 시사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묘사다)는

조상 산소 앞이니 만큼 신위가 따로 필요없다.

 

 

 

양위합설(兩位合設)

 

기일제사(忌日祭祀)는 원칙적으로 그날 돌아가신 분을 모시는 제사다.

중국에서는 그렇게 해 왔다고 들었다.

 

사실 기제사는 고대에 있던 제사가 아니다.

송나라 때 성리학자들이 주도하며 기일날 제사드리는 관행이 생겼다.

옛날 기일제사는 극진한 슬픔으로 지내야 한다며 (哭)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곡사(哭祀)를 드리는 집안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돌아가신 분의 배우자까지 합설한다.

아마도 한 분만 모시면 다른 분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떠나 보낸 다음 새로 장가들었다면,

초취(初娶), 재취(再娶)할머니 모두, 따라서 세 분을 모셨다.

자신들이 비록 재취댁 후손이라도 초취 할머니 모셔야 했다.

 

 

 

사대봉사(四代奉祀)가 과연 예법인가?

 

우리는 아직도 4대를 모셔. 아휴 죽겠어 하면서

은연중 자기 집안 양반 자랑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조상 4대(고조, 증조, 조부, 아버지) 제사를 모시는

이른바 사대봉사(四代奉祀)가 과연 예법에 맞을까?

 

예서(禮書)에 천자는 7대, 제후는 5대, 경대부(卿大夫)는 4대,

사서인(士庶人)은 2대 (또는 兩代)를 모신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서인은 2대-할아버지와 아버지 제사만 모시면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사대봉사(四代奉祀) 전통이 생겼나?

 

어느 분야나 상방경직성(上方硬直性)이라는 것이 있다.

세월이 지날수록 경비는 더 나가고, 공무원은 늘어만 가고,

의식은 뭘 자꾸 더 붙이는 쪽으로 진화한다.

 

족보를 위조(표현이 너무 심하면 윤색)했던지, 무슨 수가 있었지,

우리나라에서 조상이 경대부(卿大夫) 못 해보았다는 사람이 없다.

 

경대부들만 자손을 낳고 그 이하는 단종되었단 말인가?

 

(王)을 해 본 집안만 따져도 박씨, 경주 김씨, 김해 김씨, 전주 이씨에,

모두 합하면 전 인구의 몇 프로가 될까?

 

자기는 사서인(士庶人)이지만 조상이 경대부였으니 4대 모시고,

워낙 훌륭해서 제사를 없애지 못하는 불천위(不遷位)에,

장손으로 따지면 제사 폐해야 하지만, 지차 집안-막내 삼촌이나

작은 할아버지 살아 계실 동안 그냥 둔다고 2대 정도 더 붙으면

7-8대 봉사 쉽게 된다.

 

이것은 옛날 예법으로 따져도 참람(僭濫)한 일이었다.

 

이제는 마땅히 할아버지와 아버지만 모시는 2대 봉사가 마땅하고,

그것도 웬만하면 부부 당 일년에 한 번-어차피 합설하니-으로 줄여서,

지내는 제사나마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진설(陳設)

제물(祭物)을 상 위에 차려 놓는 것을 말한다.

 

일단 상을 차려야 할 것 아닌가?

 

조율이시(棗栗梨枾), 좌포우혜(左脯右醯), 어동육서(魚東肉西),

두동미서(頭東尾西), 서반동갱(西飯東羹)이라지만 별 중요치 않고,

이 부분이야말로 가가례(家家禮)로 각자 하던대로 하면 된다.

 

조율이시(棗栗梨枾)는 각각 대추, 밤, 배, 감이니, 이 순서 대로

제사 상 (제관이 보는 위치에서)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올려 놓는다.

사과, 복숭아는 맛있지만 제사에 꼭 필요한 과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제사에서는 대추를 제일 중요하게 친다.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枾)이라지만,

붉은 과일을 (*)동,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 집도 있다.

 

(*) 위 동서남북(東西南北)은 나침반 가지고 잰 것이 아니다.

제사는 남면(南面)이 원칙으로, 조상이 북에서 남을 바라 볼 때

오른 쪽(후손 쪽에서는 왼 쪽)이 동(東)이고, 그 반대가 서(西)쪽이다.

형편 상 제상을 예컨대 동쪽을 보게 하더라도, 남면(南面)한다고 가정한다.

 

좌우(左右)는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니, 좋은 용어가 아니다.

성균관 홈페이지를 보니, 좌우(左右)는 헷갈리니, 동서(東西)로 통일하자는

이야기가 있다. 영감님들이 얼마나 골치 아팠으면 그럴까?

 

 

좌포우혜(左脯右醯)

(左)에 북어 등 생선 포를 놓고, 우(右)에 식혜를 놓는다.

여기서도 좌우가 헷갈린다.

원칙으로는 조상 기준으로 좌우를 따져야 하나

좌포우혜의 좌우는 제사 드리는 사람이 볼 때다.

서쪽에 포를 놓고, 동쪽에 혜를 놓는다.

 

 

어동육서(魚東肉西)는 물고기는 동쪽, 육고기는 서쪽

대개 고기를 익혀 올리나, 종묘(宗廟)나 큰 종가는 생고기를 올린다.

고대에는 제사에 생고기를 썼다고 한다.

 

 

옛날 짐승-희생(犧牲)을 잡기전 검사하여 흠이 있으면 제사에 쓰지 못했다.

희생(犧牲)의 희(犧)자는 흠이 없다는 뜻이다.

만일 희생에 흠결이 있으면 담당 관리가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위 사진은 종묘 정전 동쪽 문 앞이다. 전돌을 쌓아 돋운 부분에

제사에 쓸 짐승을 올려 놓고 담당 관리가 흠이 있나 검사하였다.

 

요즘은 다 정육점에서 파니 알 수 없지만, 조금의 신경은 쓸 수 있을 것이다.

 

두동미서(頭東尾西)는 물고기의 머리는 동, 꼬리는 서,

 

서반동갱(西飯東羹)은 메(밥)는 서쪽, 갱(국)은 동쪽에 놓으라는 뜻이다.

 

(밥)가 서쪽-제사받는 조상 오른 쪽이면, 통상 상 차릴 때와 반대다.

그건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면 좌우가 바뀐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좌우가 왜 바뀌는 지는 나에게 따질 일이 아니다.

 

이상 진설을 그림으로 본다.

 

 

 

 

제상을 다 차렸으면 이제 제사를 시작한다.

처음은 강신(降神) 과 참신(參神)이다.

 

강신(降神)은 신(神)을 내리는 절차로,

제사 주인은 향불을 피우고, 집사가 따라주는 술잔을 받아,

그릇에 담긴 모사(茅沙-모래)에 씻어 내린다.

 

향불을 피움은 하늘에 있는 혼(魂)을 부름이요,

모사(茅沙)에 술을 붓는 것은 땅에 있는 백(魄)을 부른다는 의미다.

 

제사 주인은 향을 피우고 모사에 술을 부은 뒤 두번 절하는데(再拜),

이때 다른 제관은 하지 않는다.

 

 

참신(參神)은 제사에 참여한 사람 모두 두 번 절하여 (一同再拜) 

(神)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는 절차다.

 

강신(降神)이 먼저라고도 하고, 참신(參神)이 먼저라고도 한다.

내 생각엔 제사엔 신령이 있어야 하니, 강신(降神)이 먼저일 것 같다.

 

 

절 반 번과 읍(揖)

 

자주 듣는 질문에 절을 두번 하느냐 두번 반 하느냐다.

번이라면 절을 하다가 만다는 말인가?

하지를 말지, 하다가 마는 절은 또 뭔가?

 

통상 반 번으로 아는 절, 곧 두 손을 맞잡아 앞으로 들어 올리고,

허리를 앞으로 구부렸다가 몸을 펴면서 손을 내리는 동작은 (揖)이다.

절 두 번-재배(再拜)하면 소위 반 번 곧 읍(揖)도 해야 한다.

 

 

재배(再拜)와 사배(四拜)

 

옛날에는 제사 때 남자는 절 두 번, 여자는 네 번을 했다.

왜 그런 지 잘 모르나, 남자는 절 두 번을 군주, 두 번을 조상에게 하는데,

여자는 군주를 섬기지 않으니 조상에게 네 번 한다 라는 설명을 들었다.

 

말이 어쩐지 옹색하다. 옛날 군주를 도저히 섬길 수 없는 신분이 있었는데

그럼 그 사람들은 조상에게 절 네 번 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닌 듯 하다.

 

아직 여자에게 절 네 번 시키며, 그래야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텐데, 이제는 남녀 공(共)히 재배(再拜)함이 좋을 것 같다.

 

 

헌작(獻酌)과 독축(讀祝)

 

강신(降神)과 참신(參神)을 하고 나면 술잔을 올린다.

이 잔 올리는 것이 헌작(獻酌)인데, 유교 예법은 세 차례만 드린다.

 

제사에 참가한 사람 수대로 모두 잔 올리는 것은

유교 예법이 아니라, 불교 또는 다른 계통일 것이다.

 

산우회 시산제나 개업 고사(告祀) 같은 데 보면 잔을 전원이 올린다.

이 글을 쓰는 내가 순서를 짜 보았지만, 세 번만 드리자고 할 수 없었다.

보통 잔 올리며 돼지 주둥이나 콧 구멍에 돈봉투 꽂는데,

그건 돼지가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최측 수입으로 잡힌다.

잔은 못 드리지만 돈은 그래도 내야 하거든 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잔 빙빙 돌리기

 

잔 올릴 때 앞에 놓인 향로 위에 빙빙 돌리는데, 그것도 방향이 있어

시계 방향으로 돌려야지, 아니면 상놈이다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많이 하지만, 필자 집안은 그런 동작 자체를 되게 웃긴다고 여긴다.

잔을 향불 위에 빙빙 돌리지 않는다고 상놈까지 갈 일은 아닐 것이다.

 

세 번 잔 드리는 절차를 각각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이라고 한다.

 

 

초헌(初獻)은 반드시 제사 주인 곧 직장자(直長子) 종손(宗孫)이 올려야 한다.

장자(長子)가 아무리 어리더라도 누가 대신 할 수 없다.

 

 

 

독축(讀祝 : 축문 읽기)

 

초헌관(初獻官)이 초헌을 올리고 (절하지 말고) 꿇어 앉으면,

축관(祝官)이 (헌관) 왼편에서 축문(祝文)을 읽는다.

그러나 요즈음 대부분 축문 생략할 것이다.

 

축문 읽기를 (讀祝) 마치면, 초헌관은 재배(再拜)후 제자리에 가 선다.

 

다른 제관은 절 하지 있고, 헌관만 재배한다.

잔 올리고 바로 절이 아니라 독축 후 재배다.

그러나 독축이 없다면 바로 절한다.

(*) 그리고 다른 글에서 썼듯이 추석이나 설날 차례 때는 축문이 없다.

 

 

아헌(亞獻)-두번 째 술잔을 올리는 순서다.

 

아헌은 주부(主婦)-맏며느리가 올린다고 옛날 중국 예법에 나온다.

부부공제(夫婦共祭)-제사는 부부가 같이 받든다는 정신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대개 (제사 주인의) 형제들이 아헌을 드려 왔지만,

더러 주부(主婦)가 올리는 경우도 있다.

 

잔을 올린 다음 아헌관만 재배하고 물러난다. (다른 이는 그냥 있는다)

 

 

종헌(終獻)-세번 째 그러니까 마지막 술잔을 드린다.

일정한 규칙이 없는데 대개 집안 어른이 올린다.

잔을 올린 다음 역시 종헌관만 재배하고 물러난다.

 

 

 

유식(侑食)

는 권할 유니 유식은 식사를 권한다는 뜻이다.

 

술잔을 가득 채우는 첨잔(添盞), 젓가락을 집어 시접기(匙楪器: 수저

놓는 그릇)위에 가지런히 놓고, 숟가락을 메 가운데 꼽는 삽시저(揷匙著)다.

 

 

합문( 閤門 또는 闔門)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가 조상이 식사를 마치도록 기다린다.

집 구조 상 나갈 형편이 되지 않으면 그 자리에 부복(俯伏)-엎드린다.

 

 

계문(啓門)

니 문을 연다는 뜻이다.

 

문을 불쑥 여는 것은 예절이 아니다.

서양에서는 노크를 하지만, 동양은 헛기침이다.

 

대략 조상이 아홉 술 뜰 정도 (九食頃) 기다렸다가

에헴 에헴 에헴 세번 기침(용어: 희흠(噫歆)하며

지금부터 문을 열거나, (부복했다면) 일어나겠노라고 신호를 보낸다.

 

 

진다(進茶)

 

(茶)를 올리는 순서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숭늉을 쓴다.

(羹) 즉 국을 내리고 숭늉으로 바꾼 다음 메를 조금씩 세번 떠 만다.

제관 일동은 잠시 허리를 굽힌 다음, 이번엔 에헴 한번(一噫歆)에 평신(平身)한다.

 

 

철시복반(撤匙復飯)

 

숟갈을 거두어 수저 놓던 그릇(시접기: 匙楪器)에 돌려 놓고,

메를 담은 그릇은 뚜껑을 덮는다.

 

 

사신(辭神)

제관 모두(一同) 두 번 절하여(再拜) 귀신을 보내 드리는 절차다.

 

지방과 축문을 썼다면 밖에 나가 태우는데, 아무렇게나 하면 곤란하다.


 

 

 

위 사진은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 영릉의 예감(묻을 예에 구덩이 감-坎)으로,

축문을 태우던 곳이다. 영릉 뿐 아니라 모든 능에 이런 설비가 정자각 뒤

왼쪽으로 있고, 종묘 정전 뒤에는 훨씬 본격적인 시설이 있어,

축문을 태우고 또 감독관이 입회하였다. 민가에서야 이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조심해서 태워야 할 것이다.

 

 

철상(撤床)

 

제물을 물린다.

철상 할 때 아무렇게나 손으로 집어 나르면 보기 사납다.

소반에 담아 날라야 할 것이다.

 

 

음복(飮福)

 

상을 물린 다음 제관들이 제사에 쓴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철상(撤床)도 하지 않고 상 위 음식을 그냥 집어 먹으면 본 데 없는 짓이다.

첫 술잔은 나이에 관계없이 반드시 제사 주인-주손에게 권해야 한다.

 

세계 어느 문화에서나 제사 음식이란 반드시 나누어 먹어야 했다.

즉 일종의 사회적 재분배 기능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은 동네에 조금씩, 특히 노인 있는 집은 꼭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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