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의 對話/목본 일반

수피이야기

초암 정만순 2017. 3. 11. 16:46



                                                                                                수피이야기




겨울이 깊을수록 숲에 남아 있는 흔적은 빈 가지와 수피뿐이다.

모든 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가 드러나지만 밝은 햇살을 반사시키느라 정작 자신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지 그림자에 눈부심이 사라진 큰 나무는 이제까지 잎에 가려져 있던 수피들을 드러낸다. 가장 힘든 순간에 아름다운 것이 가장 아름답다.

수피는 겨울 나무의 숨겨진 진실 하나를 들추어낸다. 숲에서 살아가는 나무들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수피를 단단히 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수피란 겨울을 나기 위한 기본 조직이다.

토끼의 식탐과 멧돼지의 폭행과 불시에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위협적인 역사를 경험한 나무들은 수피를 만들어왔다.

산불이 잦은 곳에서 굴참나무는 수피를 아주 두텁게 만들어 조직을 보호한다.

풀이나 덤불들은 줄기도 수피도 만들지 않는다. 도시의 정원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분명 겨울을 염두에 둔 게 틀림없다.

배롱나무, 모과나무의 노란 얼룩무늬 수피는 겨울에 가장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저 남쪽 숲 노각나무의 수피는 개방된 겨울 숲에 보석처럼 빛난다.

그러나 숲의 나무들은 무늬나 색상으로 그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는다.

 

수피는 삶의 연장이다.

짙은 회갈색에 희끗희끗 줄무늬가 난 신갈나무 수피는 숲의 노장다운 엄격함이 있다.

습한 계곡의 버드나무의 수피는 가늘고 여린 이파리와 달리 둔탁하고 덕지덕지하다.

물의 오르고 내림에 익숙한 버드나무의 줄기에 핀 푸릇푸릇한 이끼가 고단함을 증명해준다.

서어나무의 푸르스름한 근육질 수피는 겨울 숲에서 푸르게 빛난다.

칙칙한 줄기들 가운데 유난히 흰빛을 발하는 거제수나무의 수피는 빛을 향한 거대한 열정을 반영한다.

 

눈이 오기시작하면 가지들은 눈을 이어 아름다운 눈꽃을 만들어낸다.

여름 녹음보다 아름다운 눈꽃. 때로는 소담스런 눈송이를 때로는 차가운 서리꽃을 만들어내는 정취는 뭐라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다.

가는 줄기에 흰 눈이 감겨 쌓이는 것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눈은 중력을 이겨내는 무엇인가에 의해 가지에 쌓여 있다.

하얗게 쌓인 눈, 아름답게 피어난 눈꽃, 그리고 겨울의 적막은 겨울 숲의 가장 큰 매력이다.

푹푹 빠지는 걸음으로 눈 숲을 헤쳐나가면 등줄기에 땀이 나고 다리는 후들거린다.

 아무 거침이 없는 숲, 바위도 잔 나무도 풀숲도 모두 눈에 덮여 한결같다.

휑한 숲, 가는 곳이 곧 길이 된다. 때로 가지에 쌓인 눈은 밤의 냉기에 얼어 투명한 얼음꽃을 만들곤 한다.

유리알 처럼 빛나는 얼음꽃은 햇빛에 녹아 눈물을 흘린다.

 

아무리 많은 눈이 내려도 큰 나무의 줄기는 눈을 담지 않는다.

눈은 줄기에 닿으면서 줄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어쩌면 저 북쪽 숲의 자작나무는 겨울 눈을 많이 먹어 흰 수피를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설원에 펼쳐진 하얀 자작나무 수피들, 북극곰의 흰색 털과  같이 자작나무의 흰색 수피는 보호색이며 보은색이다.

숲의 언저리에 자라난 자작나무의 흰 수피는 겨울을 숲을 북쪽 숲과 같이 장식한다.


(숲의 생활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