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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정족산 전등사 

초암 정만순 2017. 2. 24. 08:07



강화 정족산 전등사


 삼랑성에 피어난 4000년 전설 배낭에 담다               



                   

 

▲ 남문에서 서문을 향해 오르면 김포반도와 강화도를 가르는

강화해협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창틈으로 보인 산은 하늘에 닿았고 누각아래 부는 바람 물결로 여울지네"


정족산(鼎足山)! ‘솥발뫼’라니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멀리서 보면 솥뚜껑을 거꾸로 얹어 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 해서

‘솥’이라 하고, 솥을 받치는 세 개의 다리와 같다 하여 ‘족’이라 했다고 한다.

 마니산(摩尼山)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나가다 여기에 이르러 세 봉우리로

솟았으니 그렇게 이름 할만하다.

양양과 울산의 정족산 유래 또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 전등사 전경을 렌즈에 담고 싶다면 서문으로 향하는 내리막길

 직전 오른 쪽의 벼랑바위를 찾아라.


동문과 남문 중 어디로 들어서도 멋진 풍광을 보여주는 삼랑성(三郞城)이지만

 굳이 남문을 택해 서문으로 향하려는 건 이른 아침녘의 강화해협과 전등사

전경을 보고 싶어서다. 삼국시대 유행했던 토석 혼합양식도 보이고 저 만치

가다보면 회를 바른 조선 축조양식도 보인다. 막돌과 막돌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고졸미가 나그네를 4000년 이전의 시공간으로 이끈다.

단군은 세 아들 부루, 부소, 부여를 이곳에 보내 성을 쌓게 했다.

삼랑이란 단군의 세 아들을 일컫는 셈이다. 오늘,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그들의 정성 잊지 않으려 도량과 봉우리로 이어지는 길마다 ‘부루길’, ‘부소길’,

‘부여길’이라 이름 해두었다. 제사 올리는 참성단을 저 마니산에 두었음에도

굳이 여기에 산성을 쌓은 연유는 무엇일까?

소중한 그 무엇인가를 이 산 안에 담아두려 했던 건 아닐런지!


그렇다면 무려 1908년을 이 땅에 머물다 하늘 길에 오른

단군의 바람은 결실을 맺었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해진 건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년).

아도화상이 진종사(전등사 옛 이름)를 지은 건 381년. 불교 전래 9년만의 일이다.

 아도화상의 발길은 정족산이 품어내는 신령스러운 기운에 자연스럽게 이끌려

 정족산에 당도했을 게다. ‘아! 여기로구나. 부처님 숨결 천고에 전해줄 도량이다.’

 비탈바위에 오르니 그 산사 한 눈에 들어온다.

고려 충렬왕은 직계 9촌의 조카인 정화궁주와 결혼(1260년, 태자비)했더랬다.

고려침입에 대비해 진종사에 일찌감치 가궐(그 터, 지금도 남아 있다)을 지었던

그 때까지만 해도 정화궁주와 충렬왕은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원나라의 내정간섭과 침탈의 두려움에 떤 대신들은 충렬왕을 원나라에

볼모로 보내고 만다. 결국 그는 원나라 세조로 불리는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1274년)한 후 고려왕좌에 앉았다.

원나라의 부마국이요 속국으로 불리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14년 동안 태자비로 있었던 정화궁주는 왕비는 고사하고 후비로 내려앉아야 했다.

무릎 꿇고 공주에게 술잔을 올려야 했던 정화궁주. 궁중 암투 속에 보낸 인고의

세월만도 40년이다. 충렬왕과 다정히 걸었던 진종사가 그리웠을 것이다.

가슴 한 구석에 응어리진 한을 녹여야 했으니 그리움이란 절절했을 터인데,

마음대로 걸음할 수 없었으니 그리움은 처절함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부처님 법에 의지하고 싶었을 게다.

급기야, 정화궁주는 인기(印奇) 스님으로 하여금 중국 송나라의 대장경을 구해

 전등사에 보관(1282년)하게 하고는 옥등을 함께 전한다.

옥등을 전했기에 진종사에서 ‘전등사(傳燈寺)’로 바뀌었다 하는데 어설프다.

정화궁주가 들여온 송나라 대장경에는 과거 7불부터 인도 28대,

중국의 6대를 거쳐 깨달음에 이른 1701명의 스님 어록이 담겨 있는

 ‘전등록(傳燈錄)’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정화궁주는 이 세상에 깨달음에 이른 부처가 어서 빨리 많이 출현하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대자대비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사람 아닌가.

그 마음, 이색은 알았다.

‘… 창틈으로 보인 산은 하늘에 닿았고

 누각 아래 부는 바람 물결로 여울지네

… 정화공주 발원 누가 다시 세워주는가

먼지 찌든 벽 글을 보니 길손 가슴 아프구나.’

그러니 옥등 설화보다는 대장경 때문에 전등사로 개칭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육조의 의발을 상수(相授)하는 뜻에서 전등사’로 개칭했다는 전등사

대조루 모연문이 방증하고 있지 않은가.

북문 앞으로 난 산길을 따라 내려가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史庫)와

마주한다. 조선왕실은 실록 4부를 제작해 궁궐 내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각

사고에 보관 했지만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한 3개 사고가 전소됐다.

그 전주사고에 보관된 실록은 또 다시 4부로 제작되어 전등사를 비롯한

 봉화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 사고로 옮겨졌다.

조선왕실의 족보 ‘선원세보’를 보관한 곳도 전등사 사고다.

도량에서 만난 이용승 강화군문화관광해설사에 따르면 달맞이고개에서 보는

 저녁풍경은 일품이라고 한다. “바다에 비친 달빛에 눈이 부셨다는 이색의 시를

 음미해 보고 싶다면 늦은 저녁의 산사길을 걸어 보라” 한다.

 템플스테이에 참여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남문에서 도량으로 향할 때는 왼편의 부도전을 놓지지 마시라.

재가시절 파계사에서 정진한 후 ‘내가 청산과 백운 사이에 이르니

그림자와 실체는 물론 모양까지 없다’고 선언했던 서운 스님 부도전이다.

전등사 내에서도 가장 고즈넉한 길이다.

  
▲ 대웅전으로 오르는 가장 빠른 길로 들어서면 두 소나무가 반긴다.


언제 와 봐도 대웅전 나부상은 ‘까르르’ 웃게 한다.

대웅전 짓던 도편수가 말없이 떠난 애인에게 ‘깨알 같은 복수’를 하고자

 네 귀퉁이에 각기 다른 손 모양의 나부상을 조각해 두었다지!

 이 절 주지를 맡았던 고은의 시 한수가 떠오르니 또 한 번 웃는다.

‘강화 전등사는 거기 잘 있사옵니다.

 옛날 도편수께서 딴 사내와 달아난

 온수리 술집 애인을 새겨

냅다 대웅전 추녀 끝에 새겨놓고

네 이년 세세생생

 이렇게 벌 받으라고 한

 그 저주가

어느덧 하이얀 사랑으로 바뀌어

흐드러진 갈대꽃 바람 가운데

 까르르

까르르

 서로 웃어대는 사랑으로 바뀌어

거기 잘 있사옵니다.’

일각에서는 원숭이라는 설도 제기하지만 굳이 나부상 외의 설을 택한다면

 허균이 ‘사찰 100미 100선’에서 언급했던 ‘나찰상 설’을 꼽아야 한다.

 그에 따르면 지금은 확연하게 보이지 않지만 북서쪽 인물상이 파란 눈동자를

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파란 눈동자가 나찰만의 특징인가에 대한 연구는

조금 더 필요하지만 말이다.

하나의 산 안에 단 한 개의 산사가 자리하는 건 흔치 않다.

더욱이 영산을 안은 산사는 전등사가 유일하다.

고즈넉한 옛 산성 길을 따라 단군과 함께한 전설이 피었다.

한 여인의 사랑과 불심도 스며있고,

전란과 호국 그리고 왕조의 흥망성쇠 역사도 서려 있다.

  

▲ 한적한 길가에 전등사 찻집 죽림다원이 있고

 그 끝에 템플스테이 건물이 앉아있다.


  
▲ 죽림다원 앞에 봄이 피어나고 있다.


걸어보라. 전등사가 전하는 4000년의 환상 세계로!

꽃은 피나 열매만은 맺지 않는 은행나무 수수께끼도 풀어보고,

대조루에 올라 봄바람 안으며 꽃망울 터뜨리는 소리를 들어보라.

 대조루 주련에 새겨진 시 한수가 가슴에 담길 것이다.

‘백 길 폭포 자락

/ 엷은 구름은 바위 사이로 피어나고

/ 외로운 달은 파도에 일렁인다

/ 옷소매 자락에 동쪽 바다가 있고

/ 영마루에 흰 구름도 가득하여라

/ 푸른 산은 티끌 밖의 세상’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전등사 남문 주차장. 남문까지는 걸어서 10분. 삼랑산성 등산로를 따라

 서문과 북문, 동문을 거쳐 남문으로 회향. 총 거리는 2.15km. 쉬엄쉬엄 걸어도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남문이나 동문 어느 곳에서 출발해도 전등사

도량에 드는 산책길은 멋지다.

남문 주차장과 동문 주자창 거리는 약 600m.

전등사 032)937-0125


이것만은 꼭!

  
 

대웅보전(보물 제178호) :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이

일품이다. 불단위에 조성된 닫집은 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처마를 이고 있는 나부상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약사전(보물 제179호) :

조선 중기 다포계열의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건물.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았고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내부 천장은 중앙 부분에 우물천장을 두고 주위에 빗천장을 만들었다.



  
 

목조석가여래 삼존과 후불탱(보물 제785호) :

조선 광해군 15년(1623), 수연(守衍) 스님이 수화승(首畵僧, 우두머리 조각승)으로 참여해 조성한 불상. 우견편단의 법의를 걸치고, 가슴께에는 군의를 묶은 자락 위에 3개의 꽃잎이 새겨져 있다.



  
 

목조지장보살상과 시왕상(보물 제786호) :

조선 인조 14년(1636)에 조성. 시왕상의 모습이 독특하고,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이외에도 1097년 중국 하남성 숭명사에서 조성된 범종(보물 제393호)과  법화경판, 청동수조, 업경대, 대조루 등도 꼭 눈여겨 보아야 한다.


[1287호 / 2015년 3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