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감기(感氣)하고 싶은 여자
코피, 느낌 아니까?!
귀뚜라미가 밤마다 우는 선선한 가을로 들어서고 있는 신월(申月:8월)의 끝자락이다. 아직 여름의 열기가 남아있어 낮 동안은 덥지만,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산들대는 기분 좋은 계절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이 절기에 우리의 몸은 어떻게 가을과 만나 변하게 되는지 내 몸을 관찰해보면 어떨까? 이름하야 ‘계몸프로젝트!’
여기 한 여자에게는 고독(孤獨)이 아니라 고독(苦毒)과 조우하게 되는 계절이 초가을이다. 낭만적으로 우아하게 가을을 즐기기에는…그 느낌 모르니까! 내가 느끼는 가을은 재채기, 콧물, 감기 그리고 살지지는 냄새다. 그런데 가을이 되면 찾아오는 이것들은 언제부터 나에게 왔던가? 물 좋고 산 좋은 강원도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호흡기 질환인 감기와 콧물은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로 데면데면하던 사이였다. 하지만 5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와 1년이 지나고 나서부터 급 친분(?)을 쌓게 되었다. 처음엔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 곤란하더니 어느 정도 서울 생활이 익숙해 질 때쯤 갑자기 코피의 징~한 맛(응?)을 보게 되었다. 그 코피가 나에게 가을이라는 계절을 새롭게 인식시켜준 출발점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밤새워서 논 것도 아닌데 하루에 한 번꼴로 오른쪽 콧구멍에서 뻘건 선지 같은 피가 쭈르륵 흘렀다. 코피가 계속 터지자 코가 건조하고 괴로워서 엄마와 손을 잡고 대학병원엘 갔다. 난생처음 이비인후과에 들어선 나는 좀 긴장했다. 의자에 앉아 뒤로 벌러덩 누워 있는데 의사 선생님이 오셨다. 그리고 뜨거운 냄비를 잡을 때 쓰는 집게 같은 걸로 내 코를 잡더니 유심히 바라보셨다. 나도 잘 들여다보지 않는 콧구멍을. 누워있는 난 왠~지 부끄럽소!! (^^;) 의사 선생님이 나에게 물어본다.
의사 샘 : 혹시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벼 팠니?
나 : 아니요~~.
의사 샘 : 그럼 지우개나 콩 같은 것을 넣었다 뺐어?
나 : 아니요~~. 코가 간지러워서 문질렀는데 코피가 계속 나요.
의사 샘 : 그렇구나. 너는 딴 사람보다 코점막이 얇은데 가을이 되면 예민한 콧속의 살이 땅겨져서 피가 나는 것 같구나. 큰 병은 아니니 걱정 마라. 코 안에서 더는 피 안 나게 치료해줄게. 그런데 좀 따끔하기도 하고, 이상한 냄새도 날 거야. 시작한다!
나 : 응?!....
콧구멍에 벌건 약을 바르고 나서 찌지직--찌지직--. 헛뜨!! 이거슨 살타는 냄새?! 벌건 약은 소독 겸 마취제 역할을 하는 듯했다. 생각보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콧구멍 속에서 도구가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란….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건 머리카락 타는 것 같은 단백질타는 냄새! 가을이면 남들은 고기를 구워 먹으며 몸보신 한다는데, 난 약 냄새 풀풀 나는 이비인후과에서 괴기한(?) 냄새를 맡으며 가을을 연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왔을까? 가을에 단풍 구경하고, 맛난 거 먹으러 다니기는커녕 요상한 코피 맛과 살타는 냄새로 가을 구경이라니. 흐흑~.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다. 그래, 결심했어! 나 다시 돌아갈래~. 가을을 느끼는 여자로~~.
가을, 모든 것을 거두어들이는 계절
가을을 느끼려면 가을이란 녀석의 모습을 한번 봐야할 터. 이 녀석의 속살은 어떤 모습일지, 왜 그토록 나를 괴롭히는 건지. 혹 이런 스토리가 있는 건 아닐까? 초딩 시절 고무줄놀이를 할 때면 남자아이가 와서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던 생각이 난다. 그 아이는 나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서 일부러 짓궂은 장난을 치곤 했다. “가을 너도 그런 거니?! 너도 날 몹시 사랑하는구나! 그대는 개구쟁~이, 우후훗!”
그렇다. 개구쟁이 녀석, 가을. 가을은 한자로 추(秋)다. 추(秋)는 햇볕(火)에 고개 숙인 벼(禾)를 거두는 때라는 의미다. 갑골문을 보면 메뚜기를 그린 형상인데 가을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메뚜기를 잡기 위해 불(火)을 피운 모습이란다. 가을이 무르익기 전, 그 길목에는 처서와 백로가 있다. 처서가 자리 잡고 있는 신월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이다. 여름 무더위가 서늘한 가을로 급격하게 전환되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여름 열기가 남아있어 낮에는 여전히 뜨겁다. 그러나 백로가 되는 유월(酉月:9월)은 완연한 가을이 된다. 그때 세상은 서늘함이 감돌기 시작한다. 기온이 뚝 떨어지고 차가운 이슬은 흰빛을 띠며 맺힌다. 하여 하얀 이슬, 백로(白露)다. 벼 이삭 또한 무르익는다. 맑은 날이 계속되고 기온도 알맞아 온갖 열매가 여무는 데 더없이 좋다. 더 이상의 성장을 멈추고 속을 꽉꽉 채우는 계절이다.
가을은 조금(燥金) 또는 추금(秋金)의 계절이다. “조(燥)는 가을을 주관하는 기로서, 천지의 기를 끊임없이 수렴하여 공기 중의 수분을 부족하게 하므로 서늘하고 건조한 기후가 나타난다.”(배병철,『기초한의학』, 성보사, 361쪽)고 하였다. 금(金)은 수장하는 기운, 거두어들이는(收) 기운이다. 하여, 그동안 밖으로 뻗치는 기운을 내던 오곡백과가 수렴하는 기운으로 급격히 전환하면서 제 속을 채운다. 하지만 가을의 수렴 기운이 약한 열매는 속이 알차지 못하고 부실하다. 또한, 농부들도 풍성한 가을 곡식을 거두고 한해의 일을 마무리한다는 뜻에서 금 기운을 쓴다.
앞에서 살펴봤듯 수렴작용은 공기 중의 수분을 부족하게 함으로써 일어난다. 팽창하는 기운에서 수축하는 기운으로 돌아서려면 그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하여 하늘은 높아지고 땅은 건조해지면서 건어물처럼 마른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 이때는 우리 몸 안의 수분도 같이 마른다. 따라서 천기와 교류하며 우리 몸의 호흡을 담당하는 폐와 몸의 가장자리에서 전체호흡을 하는 피부가 가을 기운을 가장 먼저 감지한다. 다음으로 폐와 연결되어 있는 코가 가을 기운과 민감하게 접촉하는 곳이다.
가을은 천고마비! 나는 천코마비!
가을은 이처럼 건조한 계절이다. 천기와 지기도 말라가는데 사람이라고 별다를까. 당연히 우리 몸도 마른다. 계절이 바뀌면서 건조해졌다는 걸 몸으로 실감할 수 있는 곳은 피부다. 여름 동안 세수를 하고 굳이 뭘 안 발라도 땅기지 않던 얼굴이 가을바람이 불면서 조금씩 땅기기 시작한다. 이처럼 계절이 바뀌면서 천지의 기운도 바뀌고 사람의 몸과 마음도 달라진다. 하늘은 높아만 가고 먹을 것은 넘쳐나고 말은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이 도래한 것. 그러나 가을을 느끼지 못하는 나의 코는 천코마비! 하늘은 높아가지만, 나의 코는 마비를 일으킨다는 것. 훌쩍~훌쩍, 팽팽~, 에~~취, 맹맹….
코와 관련된 모든 것은 폐에 속한다. 폐는 코와 피부를 관장한다. 그러므로 초가을 찬바람에 피부의 주리가 제대로 열고 닫히지 않으면 한사(寒邪)가 들어오게 된다. 그렇게 되면 코가 막혀서 냄새를 못 맡거나, 목소리가 가라앉거나, 콧물이 흐르고 재채기를 하게 된다. 콧물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끈적이는 것, 짙은 노란 것, 코피가 살짝 섞인 것, 맑은 물 같은 것. 등등 가을에 흐르는 콧물은 대개 맑은 콧물이다. 이는 급격한 온도변화에 폐가 차가워진 탓이다.
건조해 죽어봐야 정신차리지!! 좋다~ 딱 좋다~
또한, 가을은 조금(燥金)의 계절이라고 했다. 조(燥)는 『내경』에 “깔깔한 것, 마른 것, 뻣뻣한 것, 터져서 벗겨지는 것은 모두 조(燥)에 속하고 또 화열(火熱)이 지나치면 금기(金氣)가 쇠하여 풍(風)이 생긴다. 풍은 습(濕)을 누르기 때문에 열이 진액을 소모하여 마르게 된다.”라고 하였다. 화가 금을 극하고 금이 목을 극하는 ‘화극금’, ‘금극목’의 메커니즘은 화가 치성하면 금이 녹아내리고, 금이 약하면 목기를 누르는 힘이 약해진다는 말이다. 몸속에 찬바람이 들어와도 이를 저지할 금 기운이 약하니 찬바람을 막을 힘이 없는 것이다.
내가 여름과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에 자주 코피를 쏟은 이유, 이제 좀 알겠다. 그 메커니즘은 이렇다. 아침에 세수를 하고나면 피부가 땅겨지듯이 코점막에 있는 수분이 마르면서 점막이 당겨진다. 그러면 가장 예민하고 약한 코점막에 균열이 가면서 코피가 터진다. 코피를 안 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비인후과 의사 선생님은 코의 점막을 무디게 하셨지만, 그건 그야말로 임시처방이다. 우리 몸은 코 따로, 입 따로, 다리 따로, 팔 따로 있지 않다. 몸은 신체의 각 부위가 합쳐진 하나의 집합체다 그래서 몸 전체를 하나로 꿰는 원리가 요청된다. 코는 폐와 연결되어 있다. 코피가 나지 않으려면 코에서 치료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폐를 살펴봐야 한다.
잘 알고 있듯이 폐(肺)는 기와 호흡을 주관한다. 기와 호흡으로 폐는 비(脾)가 운송해준 정미 물질을 몸 구석구석에 퍼트려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 기능에 장애가 생기면 기가 막혀서 코막힘, 재채기, 해수천식이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음식물의 기운이 잘 돌지 않아서 담(痰)이 되고, 심하면 몸이 붓기도 한다. 그 결과, 계절변화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밖에서 들어오는 사기인 외사(外邪)에 취약한 몸. 이것과 싸울 수 있는 배짱과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밥이 보약이다
건조하고 기온이 급격하게 변하는 가을을 즐기면서 잘 넘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의 몸이 가을에 적응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가장 좋은 처방은 무엇일까? 내 경험상 아침밥을 먹고 나면 안 먹을 때보다 콧속의 건조함이나 재채기, 콧물이 덜 나왔다. 왜 그럴까? 『동의보감』에서 “밥의 성질은 화평(和平)하고 달고 위장을 편안하게 하고 살을 오르게 하고 뱃속을 따뜻하게 하고 설사를 그치게 하며 기운을 북돋워 주고 마음을 안정시킨다.”고 나온다. 아하~ 음식물을 통한 기의 작용이 기운을 북돋워 주는구나! 그 기운이 온몸 구석구석 진액을 전달하고 자칫 건조해질 수 있는 가을 타는 몸을 윤택하게 만드는구나! 그렇게 윤택해진 몸은 가을 찬바람도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는구나! 이 기특한 밥의 작용~ 왜 나는 그걸 몰랐던가! 밥의 소중함을 깨닫고 보니 과거, 나의 10대와 20대가 생각난다.
청소년기와 청년 시절, 나는 밥을 제대로 챙겨 먹은 적이 없었다. 집안 사정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살다 보니 제때 밥을 하고 반찬을 하기도 어려웠지만, 밥을 챙겨 먹기가 귀찮았다. 그래서 자의적인 단식(굶는 것^^;)을 이삼일에 한번 꼴로 했다. 그러다 보니 먹을 기회가 있으면 잔뜩 먹고 저장하는 스타일로 어느 샌가 변신해 있었다. 생각해보니 몸을 너무 방목해 놓은 것이 환절기 증상들을 키우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가을뿐 아니라 사시사철 감기, 콧물, 재채기, 코피를 달고 사니 말이다. 어렸을 때 울 이모에게 귀가 따갑게 듣던 말. ‘밥 그렇게 안 챙겨 먹으면 나이 들어 골골한다. 골골하면 약도 없어 이것아!’
예로부터 ‘밥이 보약’이라고 했다. 이 말은 밥만 잘 먹으면 몸의 기나 혈을 보하기 위해 먹는 보약의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밥은 약 중의 약인 상약(上藥)으로 분류하는데 사시사철 언제 먹어도 좋고 독이 없으니 그렇게 불렸다. 지금부터라도 밥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생활 리듬을 바꾸어 천코마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천고마비의 계절을 느낄 수 있는 여자가 되고 싶다. 밥으로 보약을 챙겼으니 이제 혈자리로 기(氣)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보자.
볕 좋은 가을, 햇볕을 받으며 걷고 쉬면서 마사지해주면 좋은 혈자리. 바로 인당혈(印堂穴)과 영향혈(迎香穴)이다. 인당혈은 양 눈썹 사이의 정 가운데 있다. 콧물, 코막힘 같은 비염이나 감기 등에도 쓰지만, 정신을 잃었을 때도 쓰는 혈자리다. 양쪽 검지를 이용해 둥글게 마사지를 해준다. 마사지하는 동안 코가 시원하고 콧물 나오는 것도 적어진다. 또 한 곳은 ‘향기를 반가이 맞이한다’는 영향혈이다. 양쪽 콧방울 바로 옆에 있다. 비염이나 감기로 인한 코막힘, 콧물 나는데도 좋지만 코피에도 잘 듣는다. 중지로 콧마루 양쪽을 20~30번 문질러 겉과 속이 모두 열이 나게 한다. 이것을 ‘중악(中岳)에 물을 댄다.’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폐가 윤택해 진다고 『동의보감』에 나온다. 나도 콧속이 답답하거나 콧물이 줄줄 나오고 코피가 나올 때, 코가 시뻘게지도록 문질러 주는 곳이다. 그렇게 문지르고 나면 콧속이 따뜻해지면서 맹맹한 코도 뚫리고 콧물도 마른다.
밥도 챙기고 혈자리도 챙겼으니 이제 꾸준히 실천할 일만 남았다. 제때 밥 든든히 먹고 두 다리로 햇살 샤워 산책하고 내 몸과 계절을 관찰하자. 그러면 한계절 한계절 변할 때마다 그 기운을 내 몸이 느낄 것이다. 하여 나도 가을을 감기(感氣)하는 여자가 되고 싶다. 가을을 느끼고 가을과 놀 줄 아는 여자. 그래서 그 어떤 기운과도 접속할 수 있는 튼튼한 여자가 되고 싶다. 가을 여자여, 밥부터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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