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穴學/혈자리 서당

태충, 하초를 세우다

초암 정만순 2016. 9. 16. 17:04



태충, 하초를 세우다



이립(而立) 혹은 서른 즈음에


나이 서른. 계란 한판. 저질체력. 솔로. 백수신세. 참 처량한 스펙이 아닐 수 없다. 요즘 백수들 신세가 대~충 이렇다. 학벌은 빵빵하고 온갖 자격증은 죄다 갖고 있는데도 백수다. 거기다 연애도 잘 안 된다. 비참(?)하지만 현실이다. 원조 백수, 공자(孔子). 그의 상황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몇몇 말단직(인턴)을 거치긴 했지만 변변한 직업도 수입도 없는 백수였다.


하지만 공자는 이 백수-시절을 이립(而立)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스스로 세상을 향해 떳떳이 설 수 있었던 시기라는 뜻이다. 립(立)은 그 청춘의 환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글자였다. 가진 것 하나 없이도 두 팔과 두 다리를 크게 벌리고(大) 대지(一) 위에 당당히 서는 것. 그것이 선다(立)는 글자의 의미였다. 참, 천하의 백수신세라고는 믿기지 않는 자화상이다. 하여, 혹자는 길바닥(一)에 대(大)자로 널브러진 형국(立)이 아니냐고 되묻기도 한다. 곧 길바닥에 나앉게 생긴 우리 시대의 백수들에겐 이 해석이 더 어울릴 듯하다.^^


이립은 15살에 학문에 뜻을 두고 공부한 결과 자신만의 ‘텃밭’ 하나를 갖게 되었다는 의미다. 이제 이 텃밭을 기반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땅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게 무려 15년 공부의 결과다. 여기가 참 놀라운 대목이다. 15년 공부의 대가가 대단한 명성을 준 것도,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가져다 준 것도 아니다. 고작 자기 뜻을 펼칠 장(場) 하나를 갖게 된 것이 전부다.


공자에게 백수의 시절은 이립의 시기!


그런데도 공자는 그것이야말로 청춘의 기쁨이었다고 회고했다. 이것이 그가 존경받는 이유일 것이다. 사실 요즘으로 치면 공자는 둔재나 무능력자에 가깝다. 한 우물을 15년이나 팠는데도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는커녕 돈벌이도 변변치 못한 백수였다. 그럼에도 공자는 15년 공부하고 나서 당당하게 선언했다. 이제 내 힘으로 내 길을 갈 때가 되었노라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그렇다. 청춘이란 그런 기운이다. 그들은 황무지에서도 축제를 벌인다. 황무지에 길을 낸다. 그게 청춘 혹은 봄의 생명력이다.


이립. 서른 즈음에. 이쯤 우리 몸 또한 축제의 장이 된다. 동양의학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때 몸은 완성(?)된다. 스펙은 딸릴지라도 몸에 혈기가 왕성해진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가장 바닥을 칠 때도 거기에 오롯한 충만함이 동시에 있다. “여자는 28살이 되면 뼈와 근육이 단단해지고 머리털의 생장이 극에 달하며 신체가 강성해진다.” “남자는 32살이 되면 전신의 발육이 정점에 달하여 뼈와 근육이 더욱 단단해지고 기육(肌肉)이 풍만하고 견실해진다.”(『동의보감』) 남자건 여자건 서른을 전후로 몸의 이립이 완성된다. 그럼 이 이립의 동력이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동력은 하초로부터, 선천과 후천의 조화로부터 생성된다.


원리는 간단하다. 우선 자기 힘으로 서기 위해선 무엇보다 하초의 힘이 절대적이다. 아기들이 제 발로 서기 위해 다리에 짱짱하게 힘을 주는 것을 떠올려보라. 그 하초의 힘이 밑거름이 되어야 서고 걷고 달리게 된다. 또한 선천과 후천의 균형을 맞추는 것도 필요하다. 선천이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기운이다. 반대로 후천은 태어나서 호흡하고 먹는 음식을 통해 얻어지는 기운이다. 곧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기질과 후천적으로 자신이 처한 조건으로부터 얻는 것. 이 두 항이 적절히 균형을 이룰 때 우리 몸은 완성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이 서른 즈음에 우리 몸에서 벌어지는 일이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요컨대, 몸이 서른에 이립한다는 것은 그 하초의 힘과 균형의 지혜를 생리적으로 터득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자 또한 이 몸의 지혜, 몸의 시간성 위에서 자신의 청춘을 회고했다. 이제 이 몸으로 자신의 길을 가면 된다. 그것만큼 즐겁고 즐거운 일이 또 있겠는가. 공자의 후배 연암 박지원은 좁은 조선 땅을 벗어나 드넓은 요동벌판 앞에 섰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는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 나와서 손도 펴 보고 발도 펴 보니 마음이 참으로 시원했겠지. 어찌 참된 소리를 내어 자기 마음을 크게 한번 펼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열하일기』) 태어나 30년. 서른 즈음에 우리 몸은 또 한 번의 환희와 벅참으로 가득 찬 우주가 된다. 자기 마음을 크게 펼칠 때가, 그런 몸의 조건이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 시대의 청춘들에겐 그런 느낌을 조금도 받기 어려운 것일까?



젊은 날의 초상


요즘 난 백수들과 공부한다. 이들과 함께 있노라면 하루도 사건사고에 치이지 않는 날이 없다. 연애사건이 터지고 그것이 잠잠해질 무렵이면 또 다른 사건사고들이 연달아 터진다. 혈기방장한 몸이 그 기운을 쓰느라 좌충우돌하는 것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청춘의 몸은 달리거나 뛰기에 적합한 몸이다. “20세가 되면 혈기가 왕성해지고 근육이 고르게 자라기 때문에 뛰기를 좋아한다.” 그런 몸을 공부하겠다고 책상에 앉혀두려니 기운이 여기로 삐죽, 저기로 삐죽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놀라웠던 건 그런 사건사고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 혈기방장한 젊은이들의 맥없는 목소리와 의존성이 나를 더 놀라게 했다. 남이 겨우 알아들을만한 개미-목소리에 자신이 무언가를 결정하고 선택해야 할 때 그것마저도 남이 대신 해줬으면 하는 태도. 박력도 없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질 용기도 없는 존재들. 이게 우리 시대 이립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의 현주소다. 



“얘네들은 왜 이렇게 자기 삶의 주도권을 하나도 가지지 않을까요? 아니, 가지고 싶지도 않은가 봐요.” 답답해서 주변 매니저들에게 하소연했더니 다들 들고 일어난다. “야야, 그게 청춘들만의 문제인 줄 아냐? 다 늙어서도 그래. 애들부터 어른까지 할 것 없이 의존적이고 생기가 없어. 아파. 그냥 아파.” 참, 무슨 세대풍자 노래 같다. ‘다 바꿔!’도 아니고 ‘다 아파!’ 그런데 왜 사람들은 여기에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까. 사실 난 이게 참 궁금하다.


자기 삶을 자기 스스로 주도하지 못할 때 맥이 빠진다. 흥조차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사람들을 그렇게 작동하게 하는 배치가 있는 걸까. 제도 때문에? 사회 때문에?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중심에 두려움이라는 원초적 감정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청춘들을 상담하면서 느낀 것. 그것 또한 이 원초적 두려움이었다.


청춘들은 두려워한다. 사회가 두렵고, 비참해질 것 같은 미래가 두렵고, 백수인 지금이 두렵다. 그래서 집에 콕 박혀 있거나 미래를 담보삼아 현실을 회피한다. 자신의 미래로부터도 자립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노예상태다.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미래에 붙들려 사는 삶. 그게 어찌 자립일 수 있겠는가. 한편으론 출구를 찾는다. 시험에 붙기만 하면, 스펙 좋은 이성을 만나기만 하면 그 원초적 두려움이 해소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그 기대도 망상에 불과하다. 그런 젊은 시절을 지나온 어른들의 상태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은 정말 망상일 뿐이다.


두려움은 몸의 신(腎)이 관장하는 감정이다. 생명의 원초적 토대가 되는 신(腎)이 병들거나 이상이 생겼을 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찾아온다. 곧 몸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럼 우리 청춘들은 모두 신(腎)에 이상이 있는 것인가.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청춘들이나 백수들 아니 우리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패턴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온갖 향락과 지나친 음주가무, 밤에도 꺼질 줄 모르는 마음의 불안,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화려한 불빛들. 불타는 금요일이나 불타는 목요일. 아니 불타는 일주일. 이런 것들이 지금 우리 삶의 한 단면이다. 사람들은 보통 이런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잘 안다. ‘나 업(up) 됐어.’ 혹은 ‘나 상기(上氣)됐어.’ 업 되고 상기되지 않는 것들은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다.


몸의 차원에서 보면 그런 것들은 다 신수(腎水)를 말린다. 위로 뜨고 기분이 들뜨고 미친 듯이 뛰고 싶고. 그런 건 다 화기(火氣)에 해당한다. 이게 조금만 심해지면 옷을 다 벗고 거리를 활보하거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술을 먹은 뒤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은 지금 술의 화기(火氣)를 밖으로 발산중이시다. 약간의 이해와 관용을 베푸시길.^^ 사실 청춘들이나 백수들이 정규직이 되고 돈을 벌어도 저런 현대적 삶의 패턴을 따라가지 않기란 참 쉽지 않다.


아니 그런 삶을 지독하게 원하고 있기에 정규직에 목을 매고 돈에 목을 매는지도 모른다. 그런 집착과 고착 또한 화기(火氣)다. 몸 이곳저곳을 흘러 다녀야 하는 기(氣)가 어딘가에 맺혀 있는 상태. 하나의 감정에 매여 있고 하나의 생각에 붙들려 있는 상태. 그러면 거기로부터 열이 발생하고 불이 만들어진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온통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불의 기운이 신수(腎水)를 바짝 말린다.


몸안의 신수가 바짝 마르면 두려움은 커진다.


주목해야할 것은 두려움이 불러오는 것들이다. 이 두려움은 결단을 내리거나 시세(時勢)를 파악하는 안목을 원천적으로 봉쇄시킨다. 결단의 힘은 담(膽)에서 나온다. 그 결단에 앞서 상황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시세를 읽는 것은 간(肝)의 역할이다. 담이 장비와 같이 버럭 화를 내며 전장으로 달려 나가는 기운의 형상이라면 간은 전장을 읽는 눈으로 전쟁을 이끄는 총사령관에 해당한다. 싸움의 기술 혹은 싸움의 지략은 모두 간담(肝膽), 목(木)의 기운을 타고 나온다는 뜻이다. 두려움은 이 용맹한 목의 기운마저도 잠식해버린다. 두려움은 청춘을 잠식한다. 썩은 물(水)이 나무(木)를 죽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두려움을 뚫고 나갈 용기마저도 병들게 하는 것. 그게 지금 우리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청춘들의 개미-목소리, 선택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것. 모두 몸에서 만들어내는 신호들일 뿐이다.


두렵고 불안한 이 마음을 가라앉혀준다는 마음-산업이 번창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 몸과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다. 사실 이것만 깨달아도 마음이 오히려 편해진다.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를 묵묵히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이 상승과 하강의 리듬 자체가 현대인들에겐 잊혀졌다.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것.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것. 그렇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것. 그것이 뿌리 깊은 두려움의 근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음 안엔 다른 감정들이 생발(生發)할 자리가 없다.


그래서일까. 마음수련을 한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더 못 읽는다. 오히려 아주 폐쇄적인 경우도 적지 않다.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두려움과 대면하지 않은 탓이다. 그런 경우엔 마음수련 또한 그냥 진통제나 다름없다. 치유는 원리와 접속하고 대면할 때 만들어지는 힘이다. 사람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몸 또한 불안해 보인다. 시대의 아이콘, 연예인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린아이 같은 얼굴에 엄청나게 큰 가슴과 잘록한 허리, 나무젓가락 같은 다리. 여자연예인뿐만 아니라 남자연예인들도 비슷하다. 마치 상체로 기운이 쏠려 있는 듯한 신체들. 왠지 모르게 균형감이 없어 보이는 몸들. 그것이 ‘더 높이’ 오르고자 하는 우리들의 욕망과 무관할까. 욕망이 곧 그 사람의 몸이 된다. 



사관혈(四關穴), 사해와 접속하라!


동양의학에서 보면 위와 같은 상태를 상기(上氣)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 사실은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병적 증후와 맞닿아 있는 셈이다. 상기란 기(氣)가 몸 위쪽에 몰려 있다는 뜻이다.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기가 상초에 머물러 내려오지 않으니 하초엔 당연히 힘이 없다. 이렇게 하초에 힘이 없으니 자연스레 걷기를 싫어한다. 달리고 뛰기에 적합한 청춘들이지만 걷기조차 죽기보다 싫어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야말로 공중부양족으로 살아가는 것.


요즘은 각선미를 위해서 조그만 언덕이라도 탈 것을 타고 넘어가야 한다니 이만하면 정말 걷기란 쉽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하초를 쓰지 않고 상초에 기가 몰려 있는 상태가 오래 되면 호흡이 짧아지고 얕아진다. “상기라는 것은 내쉬는 숨이 많고 들이쉬는 숨은 적어서 숨이 몹시 가쁜 것이다.(『동의보감』)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걷는 청춘들. 짧은 호흡으로 조금만 움직여도 헉헉 되는 청춘들. 그게 우리들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그런데 이 짧은 호흡은 실제의 삶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긴 호흡을 가지고 해야 하는 일이나 공부의 영역에서는 아예 초장부터 떨어져나간다. 몸의 호흡이 그대로 삶의 호흡이 되어버린 것이다.


짧은 호흡, 거친 숨소리 우리는 공중부양족?


상초와 하초가 서로 따로 노는 이 상황. 이 상황이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근원이자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경락적으로 보면 하초에 해당하는 다리엔 비경과 신경 그리고 간경이 흘러간다. 비(脾)가 음식물의 소화와 몸의 수승화강을 담당한다면 신(腎)은 선천의 기운을 저장하고 정(精)을 보관한다. 간(肝)은 혈을 저장하고 몸에서 막혀 있는 곳을 뚫는 기능을 담당한다. 이 장부들을 원활히 작동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하초다.


곧 소화시키고 선천의 기운을 원활하게 쓰고 몸의 영양분을 공급하는 혈을 저장하는 창고가 모두 하초에 의해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앞서 하초의 힘이 이립을 가능하게 한다는 건 이런 맥락이다. 하초가 제대로 작동해야 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천과 후천의 기운 또한 조율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리는 그냥 다리가 아니다. 그 안엔 자립의 힘이 흘러 다닌다.


그럼 상초에 몰려 있는 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밑으로 내려야 한다. 이때는 걷기가 최고의 운동이다. 걸으면 자연스레 위로 올라갔던 기운이 아래로 내려간다. 이 걷기만큼이나 훌륭한 효과를 보여주는 혈자리들도 있다. 그게 바로 합곡(合谷)과 태충(太衝)이다. 합곡과 태충은 사관혈(四關穴)이라고 불리는 세트다. 좌우에 2개씩 있기에 사(四)라는 숫자를 붙였다. 관(關)은 관문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사관혈이란 네 개의 관문이 되는 혈자리라는 뜻이다.


사관혈의 합곡은 하늘과 통하는 문, 천문(天門)이다. 반대로 태충은 땅과 통하는 문, 지문(地門)에 해당한다. 곧 천지와 통하는 네 개의 문. 그것이 사관혈인 셈이다. 사실 이 두 혈자리는 걷기만큼이나 베이스 중 베이스가 되는 혈자리다. 경혈의 차원에서 보면 공기와 물 같은 혈자리라고나 할까. 어느 때건 일단 이곳을 만져주면 웬만한 병은 치료할 수 있다.


먼저 합곡은 엄지와 검지손가락 사이에 위치하는 혈자리다. 아마도 많이들 아는 혈자리일 것이다. 보통 갑자기 체했을 때나 의식이 혼미할 때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주던 그곳. 심하게 누르면 극렬한 통증이 전해져 오는 곳. 여기가 합곡이다. 합곡은 상부에 몰려 있는 기를 흩어버리고 열을 내린다. 막혀 있는 경락을 통하게 함은 물론이다. 하여 어딘가 꽉 막힌 것 같을 때는 이 합곡만 잘 눌러줘도 금방 시원해진다.


반면 태충은 발에 있다.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에 있는 혈자리. 태충은 간열을 내려주고 상초에 뜬 기를 밑으로 내린다. 태충 또한 기혈이 막힌 곳을 뚫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하여, 어떤 의사는 이 합곡과 태충만으로 환자들을 치료하기도 한단다. 그만큼 효과가 좋은 혈자리라는 뜻이다.


사관혈은 사해(四海)와 통해 있다. 몸을 둘러싸고 있는 동서남북. 기의 바다. 그게 곧 사해(四海)다. 사관혈에 침을 놓는다는 건 이 사해의 기운을 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연다는 뜻이다. 이 천지와 서로 접속할 때 몸에서 흐름이 생겨난다. 천지가 한 순간도 멈춰있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상기를 치료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상기는 위아래로 흘러야 하는 기운이 멈춰 있고 정체되어 있는 상태다. 그 정체를 흐름으로, 멈춤을 운동으로 만들어내는 기본혈이 합곡과 태충이다. 동양의학에서 정체는 만병의 근원에 해당한다. 이 정체를 해소하는 기본 혈자리인 합곡과 태충만으로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본 것도 이 때문이다.



태충, 혈맥이 모이는 요충지


이 가운데 태충(太衝)은 족궐음간경의 수혈(兪穴)이자 토혈(土穴)이다. 태충이라고 이름이 붙은 사연도 흥미롭다. 태(太)는 크다는 뜻이고 충(衝)은 요충지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큰 요충지라는 게 태충의 뜻이다. 왜 크고도 큰 요충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까. 태충은 우리 몸에서 신맥(腎脈)과 충맥(衝脈)이 만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맥이란 신경을 뜻하고 충맥은 12경맥이 아닌 경맥들, 즉 기경팔맥 가운데 하나다.


신경이 앞서 살펴봤듯이 정을 저장하고 선천의 기운을 관장하는 신을 움직인다면 충맥은 우리 몸의 혈을 움직이는 중요한 경맥이다. 실제로 충맥을 혈(血)의 바다라고 하는데 이 충맥이 여자의 월경을 관장한다. 하여, 고전에서는 ‘12경맥의 혈이 모두 충맥으로 모인다’라고 할 정도로 충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혈을 관장하고 몸의 정을 관장하는 경맥들이 모두 이 태충을 지나고 있다는 뜻이다. 거기다 간 또한 혈을 저장하고 있는 장부이니 태충은 그야말로 혈(血)을 움직이는 혈자리라고도 할 수 있다. 태충은 이 혈로 하초를 튼튼하게 만든다.


그럼 태충은 어디에 있을까. 태충은 행간혈 위쪽에 있다.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를 누르면서 올라가보면 맥이 뛰는 것이 느껴진다. 거기가 태충이다. 간혹 맥이 미약해서 도저히 맥이 느껴지지 않을 때는 눌렀을 때 가장 많이 들어가는 곳을 혈자리로 삼으면 된다. 태충은 과거엔 환자의 생사를 예측하는 혈자리로도 쓰였다. 환자의 태충에서 뛰는 맥이 힘이 있으면 살 수 있지만 힘이 없거나 약하면 살기가 어렵다고 봤다.


태충은 현대인들에게도 필수혈에 해당한다. 스트레스가 모든 병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지금, 그 스트레스는 모두 간을 열 받게 만든다.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 다몽(多夢) 등도 간열에 의해서 생기는 증상들이다. 태충은 이 간열을 식혀주는 혈자리다. 화가 나거나 극심한 스트레스가 찾아올 때면 태충을 빙글빙글 눌러보시라. 한결 나아질 거다.


태충은 또한 간경의 원혈(原穴)이다. 간의 기운을 북돋아주는데 태충만한 혈자리도 없다는 뜻이다. 간은 파극지본(罷極之本)이라고 불리는 장부다. 피로를 능히 이겨내는 근본이 되는 장부라는 뜻이다. 우리가 잠을 자고 있을 때 몸 안의 피를 모아서 깨끗이 청소하는 것도 이 간의 역할이다. 태충은 이런 간의 기능을 활성화시킨다. 하여 하루 일과가 끝나고 자기 전에 태충만 100번 정도 마사지해주면 피로가 쫙 풀린다. 또한 눈이 아픈 사람들에게도 태충은 명혈로 알려져 있다. 간의 구멍에 해당하는 눈의 열을 빼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 밖에 태충의 용법은 셀 수 없이 많다. 두통(頭痛)과 갑자기 놀라는 증상. 목구멍이 아프고 갈증이 나는 증상. 생식기 질환은 물론 여성들의 월경통, 생리불순 등을 총망라한다. 헌데 한 가지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이런 증상들의 공통점이 바로 상기(上氣)에 있다는 점이다. 태충은 하초의 힘으로 이 상초의 어지러움을 바로잡는다.


공자 왈 : 제자들아 하초가 튼튼해야 백수도 할 수 있는 법이란다!


이립(而立)하고 10년이 지난 후. 공자는 자신의 마흔 살을 불혹(不惑)이라고 정의했다. 불혹이란 어디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몸에선 그 불혹의 힘 또한 하초에서 나온다. 땅에 단단하게 뿌리박은 나무처럼 말이다. 그 후 10년이 지나 공자는 지천명(知天命)했다고 스스로의 삶을 정리했다. 지천명이란 하늘이 자신에게 명한 바를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곧 스스로에게 주어진 운명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이립에서 지천명으로. 그 평정심과 흔들림 없는 중심은 하초에서 만들어진다. 우리들의 두 다리에서 말이다.



'經穴學 > 혈자리 서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려라, 규음!  (0) 2016.09.16
대돈(大敦), 산통(疝痛)을 깨다  (0) 2016.09.16
중봉, 피로야 가라  (0) 2016.09.16
곡천(曲泉), 근기(根氣)의 샘물  (0) 2016.09.16
매침 내관혈 연구  (0) 2016.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