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의
동작을 전하는 검결(劍訣)은 흔히 노래로 되어 있다. 이를 가결(歌訣)이라고 한다. 적을 죽이거나 상해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무예이긴 하지만
살벌함을 부드러운 노래로 부드럽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또 비전의 검법을 남이 쉽게 해독하지 못하도록 숨기고자 함이다. 검결을 보면 어느
유명한 시인이나 선사나 도사들이 지은 게송과 같다. 검법은 예나 지금이나 구전심수(口傳心授)의 대상이다. 따라서 같은 문중에서 실제로 익히지
않은 사람은 그 비결을 보고도 동작을 제대로 흉내 낼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같은 문파 사람끼리는 한두 초식만 보고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무예는 국가든, 문중이든, 개인이든 쉽게 외부에 그 비법을 노출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남에게 자랑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세한 동작설명을
남기지도 않는다.
◇칼과 칼의 교전 장면. 상대가 표두세(豹頭勢)로 정수리를 치고 들어오면 거정세(擧鼎勢)로 들어올려 막는다. |
개산권의 첫 구절은 쌍비거정상운단(雙臂擧鼎上雲端?일명 覇王擧鼎), 양수탁평늑하천(兩手托平肋下穿?일명 雙手托塔)이다. 이것의 뜻은 “두 팔 들기를 구름 끝에 솥을 올리듯이 하고, 양손으로 평평하게 뻗기를 늑골 아래 구멍을 뚫듯이 한다”이다. 이것은 일명 “패왕이 큰 솥을 들듯이 하라”, “두 손으로 무거운 탑을 밀듯이 하라”는 뜻이다. 소림 무승이 아니고는 도대체 이 시구절로 구체적인 동작을 떠올리기 어렵다.
창결의 경우에도 용이나 호랑이 등 짐승의 움직임에 비유한 세명(勢名)을 많이 쓰기도 하는데, 그 동작의 요점을 표현하기 위해 때로는 다소 과장되고 현란한 시적 미사여구를 덧붙이기도 한다. ‘창룡파미(蒼龍擺尾?푸른 용이 꼬리를 흔들어 헤치는 세)’ 또한 ‘태공조어(太公釣魚?강태공이 낚시를 드리우는 세)’ ‘진왕마기(秦王磨旗?진왕이 기를 쓸어제치는 세)’ ‘한신점기(韓信點旗?한신장군이 기로 점하는 세)’ 등 옛 고사에서도 따온 세명도 있다.
각 문중에서 독창적으로 붙인 세명은 타인들이 해석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대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본적인 세명은 얼마만큼 요령과 깊이가 있는 사람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간혹 무학(武學)이 없는 문외한이 이런 세명의 특징을 모르고 엉뚱하게 글자 그대로 뜻풀이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무결은 아무리 시적으로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그 동작이 구체적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한시 중에 나오는 고사나 고유명사를 모르고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전혀 다른 뜻이 되는 것과 같다.
만약 무예인이 아닌 사람이 창법인 ‘미인인침(美人認針?미인이 능숙한 자세로 바늘에 실을 꿰는 자세)’ ‘단봉무풍(丹鳳舞風?붉은 봉황새가 바람결에 춤을 추는 자세)’을 순전히 한자의 뜻대로 세를 풀어내면 어떤 모양이 되겠는가. 문외한에게는 뭔지 모를 황홀한 무희의 춤을 연상케 하지만, 세명으로서는 엄격하고 정확한 공방(攻防)의 동작을 나타낼 뿐이다. 춤은 자신의 감정(흥)을 나타내기 때문에 자유스럽지만, 무예는 자신과 상대의 목숨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동작의 목적과 움직임이 지극히 세밀하고 엄격하다. 따라서 그 실기는 구전심수의 전승이 아니고선 어떤 세명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무예에서 결(訣)이란 비결(秘訣), 요점(要點), 규문(竅門?핵심내용), 묘법(妙法) 등으로 표현된다. 세(勢)의 의미나 이치 또는 동작의 요령을 농축(濃縮)하여 명쾌(明快)하게 표현한 간략한 문자(文字)나 자구(字句)를 말한다. 결(訣)에는 자결(字訣), 가결(歌訣), 구결(口訣), 요결(要訣), 심결(心訣), 권결(拳訣), 검결(劍訣) 등이 있다. 권결(拳訣)을 가결(歌訣)로 표현한 것을 요결(要訣)이라고도 한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점검세. |
중국 무술의 세명은 특히 과장이 심하다. 그러나 조선세법의 세명은 실지로 동작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도 조선세법의 세명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조선세법을 베꼈다는 얘기이다. 십팔기의 조선세법과 권법 32세의 세명과 기법은 동아시아의 천하가 전국시대(戰國時代), 즉 패권시대(覇權時代)로 접어들기 시작한 시점, 즉 우리로서는 단군조선 시대에 우리 선조들에 의해 만들어진 문서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문서를 만든 이유는 첫째로 전쟁에 대비하여 겨레의 생명줄을 지키려 한 것이고, 둘째는 심신을 단련하여 승화된 인간을 길러내려는, 신불(神佛)의 경지에 있던 조상이 내린 법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문서는 설계가 되지 않았고 우리 선조들의 문서는 집을 지을 때처럼 철저한 설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중엽 이후 중국의 과거제도를 도입하면서부터 숭문언무(崇文偃武?문을 숭상하고 무를 억누르다)의 정책을 쓰면서 중국에 동화되어 버렸다. 만주의 고구려 땅이 중국에 편입되었고, 통일신라 이후 한반도에 고립되다 보니 한민족의 문물 전반이 중국식으로 되어 버렸다. 문화라는 것은 왕래하는 것이어서 때때로 준 곳에서 도로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그 과정에서 조금의 변형이 있을 수 있고, 드물지만 환골탈태도 있긴 하다. 조선검법과 권법이 실려 있는 ‘무예도보통지’의 성립은 중국의 ‘기효신서’나 ‘무비지’보다도 늦긴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우리의 무학(武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권법은 검법뿐만 아니라 모든 무예의 입문(入門)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조선세법 가운데의 검세 중에서 중국무술의 권법에 쓰며 들어간 예가 상당히 많다. 앞에서 예를 든, 조선검법 24세 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거정세(擧鼎勢)는 소림권법의 패왕거정세(覇王擧鼎勢)로 권법과 검법에 모두 들어 있다. 소림은 덕건 스님이 정리한 소림무술 계열서적과 정종유가 지은 ‘소림곤창도천종’ 등의 서적에 이런 예가 많다.
조선검법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격자격세(擊刺格洗?치고 찌르고 막고 베는 것)는 중국의 ‘무당검술’에서는 그들의 모법(母法)이라고 하고 있으며, 무당검이나 태극검에서는 흔하게 점검(點劍?검으로 점 찍듯이 씀)의 기법이 등장한다. 이는 조선검법의 점검세(點劍勢)와 한치도 다르지 않다. 발초심사세(撥艸尋蛇勢?숲을 헤치고 뱀을 찾듯이 하는 자세)는 무릎 높이로 정면 공격하는 세로서 소림무술의 곤법이나 검법에 모두 등장하고 태극검에도 등장한다. 직부송서세(直符送書勢?서류를 바로 보내듯이 상대방의 공격을 감아서 다시 보내는 자세) 역시 소림곤에 등장하고, 태산압정세(泰山壓頂勢?태산의 힘으로 상대의 정수리를 압박하듯이 정면으로 강하게 찔러 나아가는 자세) 역시 어딘가에 등장한다. 요략세(?掠勢: 상하 혹은 하상으로 씻어 베는 자세)는 어느 무술에서나 등장하는 세명으로 태극검이나 소림검의 단골 메뉴이다.
충봉(衝鋒?칼끝을 솟아 올림) 역시 소림과 태극검의 주요 기법이다. 백원출동세(白猿出洞勢?하얀 원숭이가 동굴을 나가면서 좌우를 살피듯이 나아가는 자세)는 소림무술과 당랑권에서 많이 등장한다. 참사세(斬蛇勢?뱀의 머리를 비켜서 치듯이 하는 자세)는 소림검에 나온 적이 있고, 수두세(獸頭勢?짐승머리를 치듯이 가슴 높이로 치는 자세)는 소림검에도 나오지만 태극권법의 중요한 기법이다. 조천세(朝天勢?하늘을 향하듯이 칼을 세우는 자세)는 소림곤과 소림검술의 조천일주향(朝天一柱香?하늘을 향하듯이 향을 세우는 자세)이라는 세명으로 많이 등장한다.
권법의 경우도 동일한 세명이 많다. 권법 32세를 장권(長拳?물 흐르듯이 끊어지지 않는 자세)이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우슈에서 말하는 소림이나 사권(査拳) 계통의 장권류와는 개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옛날에 장권이라고 한 것은 도도불절(滔滔不絶), 다시 말하면 길고 길어서 끊어지지 않게 수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 무예도보통지에 전하는 32세 장권은 오늘날 태극권법이 성립된 기본자료였던 것으로 보인다. 진씨 9대손이라는 진왕정(陳王庭)이 태극권(당시는 태극권이라 하지 않았고 그냥 장권(長拳) 또는 화권(化拳?상대의 힘을 흘려보내고 변화시키는 자세)이라 불렸다는 설도 있다)을 만들 당시에 진씨족들이 보유하고 있던 권법이 바로 권법 32세(장권)이다. 진씨족이 명(明)나라의 유신(遺臣)이었다는 설을 감안하면 역시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귀착될 수밖에 없다. 진가태극권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진왕정이 남긴 ‘권경총가’는 이 32세의 가결을 기반으로 지어진 것이다.
검의 세를 말하는 검결도 있지만 한 시대의 성인이나 영웅의 의지가 검결 속에 짧게 표현되기도 한다. 가장 역사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동학을 창도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의 검결(劍訣)이다. 수운은 유학을 정통으로 배운 선비였지만 무예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듯하다. 바로 문무를 겸전한 수운이었기에 한 시대를 풍미하는 혁명가가 되었을 것이다. 수운은 죽음을 미리 예감하고 남원 은적사(隱寂寺)에서 1861년 검결을 지어 미래 동학혁명을 준비하고 마음을 다졌다. 그리고 “이제 내가 할 일은 거진 이루었다. 무엇이 두려우랴” 하였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
시호시호 이내 시호 부재패지 시호로다(때로다, 때로다, 이내 때로다. 다시 오지 않을 때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수만년에 날까말까, 남아장부 오만년의 운수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칼저칼 넌즛 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비껴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우주)에 덮여 있네/ 만고명장 어디 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수운은 바로 이 검결 때문에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도를 그릇되게 하고 바름을 어지럽게 하는 법률)이라는 죄목에 걸려 참형을 당하게 된다. 이 검결의 노래 속에 비수를 숨기고 있는 까닭이다. 검결 속에 한 시대의 운명과 흥망의 정기가 숨어 있었던 셈이다. 갑오농민전쟁 때 이 검결은 군가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변혁의지가 잘 나타난 작품이다.
박정진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