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세계문화유산 - 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 장경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 유산인 고려 대장경판 8만여장을 보존하는 보고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장경판전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며 동쪽과 서쪽에 작은 규모의 동·서사간판전이 있다.
건물을 간결한 방식으로 처리하여 판전으로서 필요로 하는 기능만을 충족시켰을뿐 장식적 의장을 하지 않았으며, 전·후면 창호의 위치와 크기가 서로 다르다. 통풍의 원활, 방습의 효과, 실내 적정 온도의 유지, 판가의 진열 장치 등이 매우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되어 있는 점은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다.
장경판전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세조 3년(1457) 어명으로 판전 40여 칸을 중창하였고 성종 19년(1488)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30칸의 대장경 경각을 중건한 뒤 보안당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였다. 장경판전은 가야산 중턱의 해인사에 위치한 관계로 서기 1488년 조선 초기에 건립된 후 한번도 화재나 전란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보존 가치가 탁월한 팔만대장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장경판전은 세계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해인사의 건축기법은 조선 초기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양식을 보이는데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판전에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으며, 글자 수는 무려 5천2백만자로 추정되는데 이들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때 대장도감에서 새긴 목판이다.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으로서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이라 하며 또한 판수가 8만여 판에 이르고 8만4천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고려 현종(1009~1031, 재위) 때 새긴 초조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에 불타버려 다시 새겼다하여 재조대장경이라 일컫기도 한다. 이 대장경판은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기위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다시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대장경판은 당초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하여 강화도 대장경판당으로 옮기고 보관하였으나 고려말 왜구의 빈번한 침범으로 조선 태조 때인 1398년 현재의 해인사 장경판전에 옮겨 보관 중이다. 이 대장경판은 개태사의 승통인 수기(守其)가 북송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의 초조대장경을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은 대장경이다.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보면 현종 2년(1011)에 거란병의 침입때 대장경을 새겨 거란병이 물러갔음을 상고하고, 몽고의 침입으로 이 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기니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게 하여 달라는 염원을 기록하고 있다. 대장경판은 고종 24년(1237)부터 35년(1248)까지 12년 동안 판각하였는데 준비기간을 합치면 모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완성 된 것이다.
해인사 동·서사간판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교 경전은 국가에서 새긴 고려대장 경판과는 달리, 고려시대에 사찰에서 새긴 고려각판이다. 팔만대장경은 불교의 경·율·논 삼장을 집대성하였기에 세계불교연구의 귀중한 문헌으로, 이 대장경은 일본이 신수대장경을 만들때 표준으로 삼았으며, 중국에도 역수입되고,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 서구 선진국에도 전해져 세계불교 연구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서는 대장경판 81,258판(국보 제32호), 고려각판 2,725판(국보 제206호), 고려각판 110판(보물 제734호)이 있다.
세계유산 등재연도 : 1995년 12월
세계유산적 가치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그리고 고도로 정교한 인쇄술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세계 불교경전 중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경전이며, 장경판전은 대장경의 부식을 방지하고 온전한 보관을 위해 15세기경에 건축된 건축물로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보존과학 소산물로 높이 평가되고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Ⅳ), (Ⅵ)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Ⅵ) 역사적 중요성이나 함축성이 현저한 사상이나 신념, 사진이나 인물과 가장 중요한 연관이 있는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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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수다라장에서 약16미터 동북쪽에 떨어져 앞의 건물과 같은 규격으로 나란히 놓여 있고 중앙칸 위에 '법보전(法寶殿)'이란 현판을 달고 그 아래 분합 살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이 중앙칸은 안쪽 높은 기둥열이 있는 곳까지
- 벽을 쳐서 비로자나불상과 양측에 문수, 보현의 협시 보살을 봉안하여 예불을 드리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경판장에 출입하는 문은 수다라장과는 달리 분합문이 있는 칸의 좌우 양 협칸에 두 짝 판문으로 달아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건물의 규모나 가구 형식은 수다라장과 같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 익공 쇠서가 전면에서는 몽땅하게 부리가 잘렸고 측면에서는 쇠서부리가 남아 있었으며, 뒷면에서는 경사지게 직선으로 잘려 있어 수리할 때에 변형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또 붙박이 살창도 수다라장의 것과 비슷하였지만 그 규격은 약간 차이가 있었다.
2. 수다라장
수다라장은 정면 15칸 중 가운데칸에다 출입을 위한 개구부를 만들었는데 앞면에는 상하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곡선으로 된 판재를 고정시켜 마치 종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곡선의 뚫린 문틀이 아름답다. 그 안에 들어가면 좌우 양측으로 경판장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을 굳게 닫고 살틈으로 보면 경판을 판가(板架)에 잘 쌓아 보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물 후면의 개구부는 그냥 상하 인방과 문설주만을 짜아 둔 채 문은 달지 않고 있어 최대한의 통풍을 고려한 것 같다. 그리 높지 않은 기단 위에 대체로 네모지거나 자연석 위를 면바르게 한 초석을 두어 평면으로 보아 앞뒤에 갓기둥열과 중앙에 높은 기둥(高柱)열을 배치한 형식이다. 갓기둥은 두리기둥으로 약간의 배흘림을 두어 오래 된 시대의 형식을 보이고 있는데 높은 기둥은 네모 기둥으로 배흘림이 없다.
건물의 가구(架構)형식은 되도록 간략한 구조를 보여 보관 창고로서의 기능만을 충분히 발휘하려 한 것 같다. 곧 갓기둥 머리에는 간단한 초익공(初翼工)을 짜 대들보를 받치고 이 대들보는 중앙에 배열되어 있는 높은 기둥의 옆구리에 고정시켰다. 이와 같은 방법은 반대쪽에서도 같아 종단면으로 보아 대칭을 이룬다.
높은 기둥 좌우로 걸쳐 댄 대들보 위 가운데쯤에 각각 동자 기둥을 세워 종(宗)보를 받쳤는데 높은 기둥의 보머리가 이 종보 중앙 밑을 받치고 있어 구조는 더욱 견고함을 보인다. 높은 기둥 머리에는 주두(柱枓)와 첨차, 소로(小累)등이 간단히 짜여 장식을 이루고 동자 기둥 밑에는 복화반형의 받침재를 고정, 보강시켰으며 기둥 머리 부분에는 주두(柱枓)와 초공을 짜아 굴도리와 함께 종보머리를 받들었다. 모양은 약간 다르지만 이와 같은 형식은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대공에서도 흡사하다. 다만 여기서는 종도리를 받드는 솟을 합장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볼 수 있고 남아 있는 고려 및 조선 초기의 목조 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이렇게 보아 전체적인 가구 형식은 5량집 위에 짧은 서까래와 긴 처마서까래를 걸친 홑처마집의 우진각을 한 건물이다.
대적광전은 원래 화엄경에 나타나는 최고의 부처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불전으로 처음에는 비로전이라고 한 것을 1488년 학조 대사가 중창할 때 대적광전으로 개명한 것이라고 한다. 17, 18세기 겸재와 진재의 해인사 그림으로 보아 이 건물은 이때까지도 2층의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지금의 건물은 1817년에 제월 성안 스님이 중건한 것이라 하며 근래에 여러 번의 수리를 가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보존된 것이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안팎 두리 기둥을 배치한 다포형식의 팔작지붕을 한 단층집이다. 특히 10개의 안두리 높은 기둥이 배치되어 원래는 이것이 위층까지 연결되어 겸재 그림에 보이는 2층 정면 4칸의 주칸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지대석과 면석 그리고 밑 모서리에 내반곡 몰딩을 둔 갑석으로 반듯하게 짜인 기단 위에 다듬은 초석을 배치하고 그 위에 든든히 생긴 곧은 두리 기둥을 세워서 가구를 짜았다. 내부에는 마루 위에 짚 넣은 자리를 깔고 위에는 반자를 짰는데 고주의 안쪽은 우물반자를 가설하고 고주의 밖으로는 빗반자를 설치하여 여기에 여러 종류의 주악보살상을 그렸다. 기단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무지개형으로 굽은 소맷돌과 그 앞에 돌북형 조각을 하였는데 전면에 3개소, 측면에 각1개소씩 두었다. 특히 정면의 중앙 계단의 소맷돌에는 비늘 무늬를 조식한 용머리를 조각했다.
- 건물 정면에는 윗부분에 교창과 아랫부분에 분합문을 달고 측면 앞칸에는 각각 출입문을 두었고 뒷면의 중앙칸에는 분합문을 두어 대장경판전으로 통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서북측면 중앙부 창방위에는 '법보단', 동남측면 중앙에는 '금강계단', 뒷면에는 '대방광전'이란 편액이 각각 걸려 있다. 공포는 작은 외부로 2출목 5포작의 연봉 달린 쇠서와 내부로 3출목 7포작을 꾸미었는데 쇠서가 앙서와 같이 위로 뻗은 조선 후기형의 형식을 보이며 내부로도 살미 부분에 연화를 조각하고 정면4개의 기둥머리 위에는 용머리를 조각하는 등 비교적 화려한 장식으로 꾸미었으나 건물은 견실하고 장엄하게 보인다. 건물 내부 뒤쪽의 높은 기둥 사이에는 불벽(佛擘)을 치고 앞면에 탱화를 그렸으며 그 앞에는 3중의 불단을 나무로 짜 불상을 봉안하였는데 중앙에 비로자나불상과 그 좌우에 문수, 보현보살을 안치하였다.
이들은 원래 성주군 금당사에서 가야산 용기사(龍起寺)로 옮겨서 안치되었다가 차례로 절이 없어지면서 1897년 이곳에 옮겨 봉안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본존 불상이 옮겨 오기 전의 이곳에 봉안됐던 비로자나불도 왼편 문수보살상 사이에 봉안되어 있고 또 오른편 보현보살상 사이에는 지장보살이 놓였다. 그리고 이 불단 위 천장에는 닫집 대신 낙양(落陽)을 늘어뜨린 보개(寶蓋)를 장식하였다. 건물에는 금모루 단청을 화려하게 하였고 건물 외벽에는 팔상도 등의 벽화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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