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林 江湖/백화쟁향

육의전(六矣廛) / 난전[ 亂廛 ]

초암 정만순 2021. 7. 12. 11:26

육의전(六矣廛) / 난전[ 亂廛 ]

 

 

나라가 세금받고 내주는 점포 '시전'… 무허가 상점 단속·독점 판매권 가져
조선후기 '난전' 늘자 시전 횡포 커져… 폐해 심해지며 갑오개혁 때 몰락했죠

오늘은 조선시대 종로거리 양편에 자리를 잡았던 상점인 육의전에 대해 알아볼게요.

◇한양에 시전을 설치하다

조선 왕조는 새 나라 기틀을 다지기 위해 도읍지를 고려 개경(현재 개성)에서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겼어요. 궁궐을 짓고 성곽을 쌓으며 도읍지로서 모습을 갖추어 나갔지요.


1399년 제2대 임금인 정종이 시전(市廛)을 세우려는 계획을 만들었어요.

시전은 고을이나 도읍지에 세운 가게를 가리키는 말로, 고대국가인 삼국시대부터 생겨나 주로 관청이나 정부에서 관리·감독해왔지요.

하지만 태조(제1대 임금)의 아들 이방원(훗날 제3대 임금 태종)이 왕위 계승권을 차지하기 위해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태종 때인 1410년에야 본격적인 계획이 정해졌답니다.

 

조선시대 가장 큰 규모의 시전은 장통방, 그러니까 지금의 종로 일대에 해당하는 장교동·관철동 지역에 있었어요.

곡식이나 잡다한 물품을 파는 가게는 지금의 연지동, 저동, 안국동, 광교 등에 세웠고, 작은 규모의 상점은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두기로 했지요.

1412년 2월부터 시작된 건물 공사는 2년에 걸쳐 네 차례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 시전 규모가 2700여 칸에 이르렀답니다.

나라에서는 시전을 설치해 상인들에게 장사를 할 수 있는 장소를 빌려주는 대가로 일정한 세금을 거둬들였고, 왕실이나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도 공급받았어요.

따라서 시전에는 정부가 허가를 내 준 상인들만 들어와 장사할 수 있었지요.

조선 중기가 되자 시전 가운데 장사가 잘되고 좋은 물품을 공급해 유명세를 떨치는 큰 상점들이 생겨났어요.

주로 비단을 파는 '선전', 명주를 파는 '면주전', 무명을 파는 '면포전', 모시를 파는 '저포전', 종이를 파는

'지전', 생선 등을 파는 '내외어물전' 점포였는데 이러한 여섯 종류의 물품을 파는 큰 상점을 가리켜 '육의전'이라고 불렀답니다.

한양 시전의 여러 상점들 가운데 으뜸가는 여섯 전이라는 뜻이지요.

◇육의전과 금난전권

정부는 육의전 상인들에게 장사할 수 있는 권리뿐 아니라 특정 상품을 오직 그 점포에서만 팔 수 있도록 독점권도 줬어요.

또 정부에 허가받지 않고 물건을 파는 상점인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권리도 줬지요.

이를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고 해요.

조선 중기 이후 한양 곳곳에는 시전 외에 많은 시장이 생겼어요.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이 늘었고, 한양 인구가 증가하면서 지금의 서소문, 종로4가 부근에 관청 허가 없이 물건을 파는 가게인 난전이 크게 늘어난 것이지요.

이에 시전 상인들이 '난전을 금지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도성 안팎에서 난전을 금지하고 시전 상인들에게 '금난전권'을 주게 됐답니다.

하지만 금난전권이 확대되면서 특정 물건을 파는 사람은 적은데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많아지자 물건 값이 크게 올라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어요. 시전 상인들은 금난전권을 마구 휘두르며 난전 상인들을 상대로 심한 행패를 부렸지요.

1791년 22대 임금 정조에게 좌의정 채제공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어요.

"전하, 시전 상인들이 난전을 무리하게 단속해 억울한 피해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금난전권 때문이니 금난전권을 폐지해야 하옵니다."

그러자 정조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어요. "지금부터 시전에 육의전만 빼고 금난전권을 없애 누구나 물건을 팔 수 있도록 하라!"

이처럼 정조가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다른 상인들에게도 상업 활동을 허용한 조치를 '신해통공(신해년에 내린 결정)'이라고 해요.

그런데 어째서 육의전만은 금난전권을 빼앗지 않았을까요?

당시 왕실과 정부에 물건을 싸게 납품해 온 육의전의 영향력과 역할이 워낙 크고 중요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육의전의 특권도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 무너지기 시작했답니다.

청나라와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 대거 들어오면서 육의전 상인들이 사실상 판매 독점권을 잃었고 근대화에 앞선 나라들이 만든 값싼 상품이 물밀 듯 들어오자 결국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지요.

1895년 갑오개혁으로 누구나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할 수 있도록 보장되자 육의전과 시전 체제는 붕괴하고 말았어요.


[지방에 들어선 '장문']

지방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상업 행위가 '장문'이라는 장터에서 이뤄졌어요.

15세기 후반 등장한 장문은 충청도·경상도·전라도 모든 지역에 퍼져 나갔지요. 처음에는 10일이나 15일 간격으로 사람들이 길가나 공터에 모여 곡물, 채소, 약재, 농기구, 그릇 등을 사고팔았는데,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날짜 간격을 좁혀 5일마다 여는 '5일장'이 되었답니다. 이런 지방 장터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전문 상인들을 '보부상'이라고 해요.

 

난전[ 亂廛 ]

 

 

 

조선 후기 전안(廛案:숙종 32년부터 실시한 제도로, 시전에서 취급하는 물종과 상인의 주소, 성명을 등록한 행위자의 臺帳)에 등록되지 않거나, 허가된 상품 이외의 것을 몰래 파는 행위 또는 가게.

 

조선 후기 상업발전과 더불어 성장한 비시전계(非市廛系) 사상인(私商人)이 상행위를 하여 봉건적 상업구조를 어지럽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은 초기부터 국역(國役)을 부담하는 육의전(六矣廛)과 시전상인에게 그 보상으로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고, 이 규정을 어기고 마음대로 상행위를 하면 난전이라 하여 금지시켰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서울의 경우 시전상가 외에 남대문 밖의 칠패(七牌)와 동대문 근처의 이현(梨峴) 등에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고 거리마다 난전이 생겨 시전의 전매품을 매매하게 되었다.

또한 비교적 큰 자본을 가진 사상도고(私商都賈)가 서울 외곽의 송파 ·동작진 ·누원점 ·송우점 등에서, 삼남 ·동북지방에서 올라온 상품을 매점하여 서울 성안의 난전상인에게 넘김으로써 난전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이러한 난전의 주체는 주로 서울의 권세가와 그들의 가복(家僕), 각 관아의 저리(邸吏), 호위청(扈衛廳) 산하의 군병(軍兵)과 각 영문의 수공업자, 서울과 개성의 부상(富商) ·도고(都賈)나 중도아(中都兒) 등이었다.

 

이들은 대개 봉건 특권층과 결탁하여 관부에 일정한 사업세를 내고 자신의 상권을 확보함으로써 육의전과 같은 특권적 시전상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은 한때 정부로부터 난전을 금지하는 금난전권을 얻어 난전에 압박을 가하였지만, 18세기 후반 금난전권의 폐지로 사상인층에 의해 주도된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막을 수 없었다.

이처럼 난전의 발전은 조선 후기 성장한 비특권적인 수공업자와 상인에 의해 봉건적인 상업 구조가 허물어지던 도시상업 발전의 반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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