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林 江湖/백화쟁향

조선시대의 관모

초암 정만순 2021. 7. 12. 07:24

조선시대의 관모

 

 

조선시대의 관모는 유교의 지배를 받아 남성의 것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⑴ 면류관(冕旒冠, 冕冠):

고려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의 즉위식, 결혼식 등에 입는 대례복인 면복에 쓰는 관모로 곤복(袞服)과 함께 착용하였다. 면관의 기원은 중국 고대의 관모인 작변(爵弁)이 변하여 여러 장식이 더해진 것이다.

면관이란 명칭은 원래 앞이 뒤보다 1치[寸] 정도 앞으로 굽어 기울어지다[俛]는 데서 나온 말이다. 대체로 폭이 7치, 길이 1자[尺] 2치의 전원후방(前圓後方)의 평천판(平天板)에 앞 4치, 뒤 3치의 수류(垂旒)를 달고 면관의 좌우 양옆 귀쪽에 주광(黈纊)과 옥진(玉瑱)을 늘어뜨리고 굉(紘)과 담(紞)으로 장식되어 있다.

한국의 왕은 중국의 친왕례(親王禮)에 따라 구류면(九旒冕)이었고, 왕세자는 팔류면(八旒冕)이었으나 광무 원년(1897년)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고 십이류면(十二旒冕)이 되었고 황태자관은 구류면이 되었다.

 

⑵ 원유관(遠遊冠):

중국에서 들어온 관으로 고려 ·조선시대 왕의 조복(朝服)에 쓴 관모이며 중국의 친왕례에 준하여 사용했다. 이것은 회색의 나로 만든 구량(九梁)이며, 고려시대 공민왕 때 명(明)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것은 칠량(七梁)에 서잠도(犀簪導)를 꼽는 것이었다. 금잠(金簪)을 꽂았고, 황(黃) ·창(蒼) ·백(白) ·주(朱) ·흑(黑)의 차례로 5가지 색의 옥(玉)으로써 전후 9개씩 18개의 옥을 장식하였고 양 옆에 있는 2줄의 붉은색 끈[朱組]를 턱밑에서 매고 나머지는 늘어뜨렸다. 1897년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중국의 천자가 사용한 통천관(通天冠)으로 바꾸어 썼다.

 

⑶ 통천관:

통천관은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왕이 조하(朝賀)를 받을 때 입는 강사포와 함께 썼다. 오사모(烏紗帽)의 앞뒤에 각각 12량이 있고 청 ·황 ·홍 ·흑 ·백색의 오색 구슬 12개를 꿰었고 옥으로 된 비녀와 홍색 조영(組纓)을 달았다. 고종이 황제가 되기 전까지 조선의 왕은 9량의 원유관을 썼지만 광무 원년부터 통천관으로 바뀌었다.

 

⑷ 익선관(翼善冠):

조선시대 왕 ·왕세자의 상복(常服)에 곤룡포(袞龍袍)와 함께 쓰는 관이다. 익선관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복두에서 유래한다. 면류관의 평천판의 옷감과 같은 검은 사로 덮혀 있고 관 뒤에는 양각(兩角)이 위로 향하여 솟아 있다.

 

⑸ 양관(梁冠)과 금관:

양관은 백관(百官)의 제복(祭服) ·조복(朝服)의 관모이다. 이것은 앞면 윗쪽에서 꼭대기까지 있는 세로줄을 양(梁)이라고 하여 양관이란 명칭이 붙었다. 양관은 신분과 계급에 따라 양의 수가 달랐다. 제복에 쓰는 양관은 경건한 의미로 검정색이지만, 조복에 쓰는 양관은 당초문양과 목잠(木箴)이라는 비녀가 도금되어 있어 일명 금관이라고 한다. 여기서 금관조복(金冠朝服)이라는 말이 생겼다.

 

⑹ 동파관(東坡冠) ·

정자관(程子冠):동파관은 중국 북송(北宋)의 문인 소식(蘇軾)이 쓴 건이며, 명나라 때에도 널리 사인계층에서 사용한 것으로, 중국에서는 동파건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중국에서 들어와 동파관이라고 부르며 사대부들이 집안에서 썼다. 동파관은 주로 말총으로 짜지만 간혹 죽사(竹絲)를 곁들여 흑칠을 하였다. 정자관은 중국에서 정자건이라 하는 것으로 북송의 유학자인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이 관은 2층이나 3층으로 되어 전후좌우봉우리의 기복이 심하고 위는 터져 있다. 조선 중종 ·명종시대에 중국에서 들어와 한말까지 사대부와 유생들이 도포(道袍) ·창의(氅衣)와 함께 집안에서 착용하였다.

 

⑺ 사모(紗帽):

사모는 복두에서 생겨난 것으로 복두와 형태가 유사하나 대우가 복두는 모지고, 사모는 곡선으로 둥글렸다. 사모는 백관의 상복(常服)에 쓰는 관으로 고려말 우왕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조선 태종 때 상복의 관모가 되어 한말까지 사용하였다. 오늘날에는 전통혼례식에서 신랑의 사모로 사용된다. 사모의 형태는, 조선 전기에는 대우가 낮고 좌우 무각(無角)이며 흑각(黑脚)을 내려뜨렸고, 중기에는 대우가 높아지고 양각(兩脚)의 폭이 넓어지면서 평직(平直)으로 되었고, 후기에는 대우가 다시 낮아지면서 양각(兩脚)의 폭은 넓으나 길이가 짧아지고 앞으로 굽었다.

 

⑻ 건:

조선시대의 건은 한국 고유의 고깔 모양과 사대부 및 유가(儒家)에서 사용한 중국의 건의 2종류로 대별된다.

① 방건(方巾):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야인이나 사인들이 외출할 때나 집에서 쓴 사각형의 두건 형태이다.

② 복건:

송 ·명나라 때 유학자들 사이에 유행한 것으로 한국에 들어와 유생들이 썼다. 《경국대전》에 치포건(緇布巾)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이 복건이다. 복건은 검은색 증(繒) 6자를 사용하여 키 모양으로 만들며 머리에 쓰고 뒤로 보내어 내려뜨린 다음 옷단으로 머리를 동이고 그 뒤쪽의 끈으로 귀를 걸쳐 뒤통수에 잡아 매어 썼다.

③ 유건(儒巾):

유생이 평상시나 향교, 서원에 참배할 때, 제사드릴 때, 과거시험을 볼 때 쓴 관모이다. 이것은 검은색 베를 자루 모양으로 만들어 양 옆을 깊숙하게 접어 넣은 후 위솔기 부분을 뒤쪽으로 5 cm 정도 눕히면서 양귀를 자연스럽게 잡아 빼어 쓴다. ‘士’자 모양이다.

④ 망건(網巾):

상투를 틀고 머리를 가다듬기 위하여 이마에서 뒤통수에 걸쳐 두르는 그물처럼 생긴 것으로 그 위에 정식 관을 쓴다.

⑤ 탕건(宕巾):

사대부들이 망건의 덮개 및 관모의 밑바침으로 쓴 것으로 말총으로 엮어 만들며 양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턱이 져 있다. 기타 조선 후기부터 한말까지 하졸들은 자건(紫巾) ·청건(靑巾) ·조건(皁巾)을 썼는데 한국 고유의 고깔 모양이었다.

⑼ 입(笠):조선시대 입에는 평량자(平凉子)형의 평량자(패랭이) ·초립(草笠) ·흑립 ·옥로립(玉鷺笠) ·전립(氈笠, 戰笠) ·백립과 방립형의 방갓 ·삿갓 등이 있었다. 평량자는 대우와 양태가 있는 모자로 평량자(패랭이)는 후일 초립을 거쳐 흑립으로 이행한다. 초립은 평량자와 비슷하나 대우와 차양이 더욱 분명하여 대우도 평평해져 평량자보다 흑립과 더 비슷한 형태이다. 그러나 평량자와 흑립은 차양이 아래로 약간 처친 데 비해 초립은 위로 불룩하게 올라갔다.

초립동(草笠童)이란

양반계급의 새로 관례한 소년이 흑립을 쓸 때까지 이 초립을 썼기 때문에 초립동이란 말이 나왔다.

초립은 흑립이 생기면서 평량자와 함께 상민(常民)의 쓰개가 되었고 별감의 주황초립을 비롯해, 창우(倡優), 궁정의 세악수(細樂手) 등이 조선 후기까지 사용하였다.

 

흑립은

 

평량자 ·

초립을 거쳐 정착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모로, 갓이라 하면 곧 흑립을 가리킨다.

주로 양반계급에서 평상시에 쓴 모자로 조선 후기에는 귀천없이 남자가 썼다.
기본 형태는 대우와 양태가 있고, 양태는 약간 곡선을 이루며 대우는 원통이지만 위가 좁아지고 모정(帽頂)이 평평하였다. 광해군 때는 양태가 컸고 인조와 효종 때는 모체가 높았으며, 숙종 때는 한때 작아졌지만 대체로 양태는 크고 모체는 높았다. 흥선대원군 때 이르러 의관제도의 간소화로 큰 갓은 소립(小笠)으로 변하였다. 주립(朱笠)은 융복(戎服)을 입을 때 쓴 것으로 철릭을 입고 썼다. 융복도 문무백관이 몸을 경첩하기 위한 복장으로 왕이 행차시에 수행하거나 외국에 사신으로 갈 때, 국난을 당할 때 입는 것이다.

주립은

입에 주칠한 것으로 호수(虎鬚)를 꼽고 옥로(玉鷺)를 장식했다.

 

전립은

조선시대 하례(下隷) ·여정(輿丁)이 쓴 속칭 ‘벙거지’를 말한다.

전립은 원래 호복계통의 것으로 한국 고유의 입과는 계통이 다르다.

조선시대 군복은 구군복(具軍服)이라고 하는데 이 군복에는 협수(狹袖:동다리)와 전복(戰服)을 입고 전립을 썼다.

높은 무관이 쓰는 전립은 품질이 좋은 모제품으로 만든 것으로 ‘안올림벙거지’라고 하였는데, 공작미(孔雀尾) ·상모(象毛) ·정자(頂子)를 달고 양태 안쪽에는 감색운문단(籃色雲文緞)으로 꾸미고 밀화영(密花纓)을 달았다.

방립은

한국 관모의 기본 형태의 하나로 삿갓(農笠 ·雨笠 ·野笠 ·蘆笠)을 말하며 백제의 나제립에 이어 고려시대에도 썼다. 이것은 햇빛이나 비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방랑객이나 서민층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내외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쓰기도 했다. 갈대를 쪼개서 만든 ‘삿’으로 만들었다. 방립은 삿갓에서 변형된 형태로 끝은 가늘게 오린 댓가비로 되어 있고 안은 왕골속을 넣어 ‘삿갓’처럼 만들었으며 앞의 가장자리는 4개의 꽃잎형(四花瓣形)으로 되어 있다.

 

⑽ 여자관모:

 

적관 ·화관 ·족두리는 예장용이고 각종 난모(暖帽)는 방한용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내외가 심한 조선시대에 외출시에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사용한 것으로 입모(笠帽) ·너울 ·쓰개치마 ·장옷 ·천의가 있었다. 너울은 서아시아에서 들어와 고려시대 부녀자들이 쓴 몽수, 즉 개두의 조선시대 명칭이다. 이것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여성의 관모로 궁중 및 일부 귀족계급에서 사용했다.

형태는 자루처럼 생겼으며 얼굴에 위치하는 부분은 망사같은 것으로 되어 있어 밖에서는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이것을 쓴 사람은 밖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입모에는 너울 안에 쓴 너울립과 유지(油紙)로 만든 하류층의 쓰개인 전모(氈帽)라는 것도 있었다.

 

 

 

 

 

 

 

 

 

"한국은 모자의 왕국이다. 

세계 어디서도 이렇게 다양한 모자를 지니고 있는 나라를 본 적이 없다. 

공기와 빛이 알맞게 통하고 여러 용도에 따라 제작되는 한국의 모자 패션은 

파리인들이 꼭 알아 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시를르 비리, <뜨르 두 몽드>, 1892-

 

 

광화문 앞에 모인 군중들, <L'Illustration Journal>, 1894년 9월 1일, 명지대-LG연암문고 소장

 

조선 시대에는 모자를 쓰는 것이 의관을 갖춰 입는 것에 포함 되었던 것으로, 의복생활에 있어 중요했던 부분이었습니다. 매우 다양하고 각기 다른 쓰임을 가진 모자가 있어 조선을 찾은 외국인이 ‘모자의 왕국’이라고 표현할 정도죠. 여기서 말하는 ‘모자’는 신분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가지각색의 종류가 존재했습니다. 왕과 신하가 구분되고, 양반과 평민이 쓰는 모자가 달랐습니다. 결혼할 때, 喪중에 농사를 지을 때나 수공업용이 있었고, 여름용 겨울용처럼 처한 상황에 따라 사용하는 모자의 종류가 각각 있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모자만 보고도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나 현재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고 하네요.

 

잘 몰랐던 조선시대 모자의 세계! 성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총 3편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그 첫 번째 평상시 남성들은 어떤 모자를 썼을까요?

 

 

 

외출용 모자 방립형 ‘갓’

 

조선시대 모자라고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갓’이 있습니다. 갓은 조선시대 남자가 외출시 쓰던 관모로 매우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사극에서 많이 만나는 검은색 갓 외에도 다양한 형태로 나뉘었습니다.


갓의 최종단계 “흑립(黑笠)”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갓은 '흑립'입니다.  MBC <해를 품은 달> 이훤과 SBS <별에서 온 그대> 도민준 역의 김수현

(출처: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

흔히 알고 있는 것은 ‘흑립(黑笠)’입니다. 흑립은 검을 흑(黑)에 삿갓 립(笠)으로 글자 뜻 그대로 ‘검은색의 갓’을 뜻합니다. 흑립은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의 관습을 타파하고 고유의 의관체제를 갖추기 위해 관모로 제정이 되었지만, 잘 쓰이지 않다가 조선 후기에 가서야 일반화 되었다고 합니다.

국립민속박물관 2관-‘한국인의 일생’에서는 크기가 상당히 큰 흑립을 볼 수 있는데, 한 때 양태가 매우 널따란 흑립이 쓰여 방에 사람 2명이 대각선으로 마주보고서야 겨우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는 말도 전해져 내려옵니다. 흑립은 정조 때에 이르러야 적정한 크기가 자리 잡다고 하네요. 영화<군도>에서 조윤(강동원 分)도 쉽게 영화에서보던 흑립보다 큰 크기였습니다. 

 

 

소년이 쓰는 “초립(草笠)”

 

초립은 흑립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전에 주로 쓰인 모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 2관- ‘한국인의 일생’에서 볼 수 있듯, 초립은 만드는 재료가 대나무입니다.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 (經國大典)』에는 선비의 초립은 50죽, 서인의 초립은 30죽으로 서로 구별하여 쓰라고 명시하기도 했지만, 조선 후기에는 양반이 흑립을 쓰게 되면서, ‘초립’은 점차 관례를 치른 소년이 흑립을 쓸 때까지 관모로 쓰는 모자로 사용되게 되었다고 하며, 이에 ‘초립동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고 합니다. 신윤복의 풍속도에서도 흑립을 쓴 양반들 사이에 초립동이를 찾을 수 있지요.

신윤복,《혜원 전신첩》-주사거배 中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신분차별을 보여준 “패랭이”

 

패랭이는 다른 말로 ‘평량립’, ‘평량자’, ‘차양자’ 등으로 불리며 주로 천인계급이 쓴 모자라고 합니다. 딱 보았을 때 모양이 흑립과 많이 닮았는데, 이는 갓의 발달과정에서 패랭이가 흑립으로 가기 전 단계의 갓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흑립이 점차 선비의 관모로 정착함에 따라, 패랭이는 상(喪)을 치르는 기간 외에는 선비들은 잘 쓰지 않고, 역졸이나 보부상처럼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역졸은 패랭이를 검게 칠해 사용했고, 보부상은 큼직한 목화송이를 얹어서 썼다고 하네요.

 

MBC <이산>에 패랭이 쓰고 출연한 하하와 박명수 (출처 : 공식 홈페이지)

이처럼 패랭이는 주로 천인계급이 쓰던 모자로, 길거리에서 양반을 만나면 패랭이를 벗고 엎드리는 풍속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모자를 통해 신분이 구별되었기 때문에 1895년 갑오 농민 운동기에는 ‘백정이 쓰는 평량립을 없앤다.’라는 요구사항이 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집안에서 쓰는 일상 모자

 

방립형 갓은 가운데인 ‘대우’와 테를 두른 ‘양태’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양태가 있어 실내나 가정에서는 번거로움이 있죠. 이를 대신해 쓰는 모자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일까요?

 

 

5천원에서 보는 “정자관(程子冠)” 외

 

5천원에 율곡 이이가 쓴 모자가 정자관입니다. 원래 정자관은 중국의 관모 중에 하나였다고 하는데요. 조선시대에는 ‘정자관’ 이외에도 소동파가 썼던 관이라는 ‘동파관(東坡冠)’, 사면이 네모난 ‘사방관(四方冠)’, ‘충정관(冲正冠)’ 등이 있어 각자 원하는 대로 실내용 모자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재료는 말총을 사용하였고, 산(山) 모양의 단을 덧대어 2겹이나, 3겹의 층을 이루는 정자관도 널리 쓰였다고 합니다. 

 


5000원권의 율곡 이이와 정자관

 

충정관으로 추정하는 김만중과 동파관을 쓴 이채의 초상화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관직자만 쓸 수 있는 “탕건(宕巾)”

 

탕건은 오직 ‘관리자’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속칭 ‘감투’라고도 하는데, 탕건은 얼핏 보기에 감투와 비슷하지만, 감투는 탕건과 달리 턱이 없는 모양을 하고 있어 형태상에 차이를 보입니다. 원래 독립된 하나의 관모였으나 관직자가 평상시에 관을 대신하여 썼는데, 즉 집 안에서는 탕건만 쓰고 있다가 외출을 할 때에는 탕건 위에 갓을 썼던 것이지요. 벼슬을 하거나 지금도 어떤 직책을 맡으면 ‘감투쓴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감투는 관직의 표상인 ‘탕건’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탕건과 비슷하게 생긴 “감투”

 

일반 평민 중, 집안 재력이 넉넉했던 사람들이 쓰던 모자로는 ‘감투’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감투는 말총이나 가죽, 헝겊 등으로 차양 없이 만든 모자입니다. 다른 모자들과 달리 넓다란 챙이 없다 보니 간편하게 착용할 수 있었겠죠. 고려시대부터 낮은 계급이 착용하던 모자로, 보선시대에는 평민들이 사용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겨울에 솜을 넣어 방한의 기능을 갖춘 감투가 쓰이기도 했고, 제주도에서는 동물의 털로 감투를 만들어 겨울에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탕건과 비슷하게 생긴 감투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왕과 신하들의 모자

 

조선은 신분사회였고, 양반은 원칙적으로 관제상의 계층을 이릅니다. 왕을 중심으로 문반과 무반이 나라 일을 보는 체제였죠. 따라서 왕과 관료들에겐 업무를 보는 조정에서 쓰는 모자가 있었습니다.  

 

 

왕과 세자의 “익선관(翼善冠)”

 

조선시대 왕은 상복인 곤룡포를 입을 때 익선관을 썼습니다. 익선관은 모체와 뒤에 매미날개의 모양이 달려있는데, 이름에 ‘익선’이 이것을 뜻합니다. 매미처럼 청렴과 검소하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합니다. 

 


SBS <뿌리깊은 나무>의 어린 이도(송중기 分)과 어른 이도(한석규 分) (출처 : 공식 홈페이지)

 

혼례복이 된 문무백관의 “사모(紗帽)”

 

세종에 이르러 문관과 무관은 평상복에 갓을 벗고, 사모를 착용하게 했습니다. 문무백관이 평상시 집무를 볼 때 “사모관대(紗帽冠帶)”를 갖추었다 하는데, 이는 단령포와 가슴에 붙인 흉배, 허리띠 협금화 그리고 ‘사모’를 갖추어 입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던 것이 백성들의 혼례에도 허용되어 현재에도 전통혼례를 할 때에는 사모관대에 맞추어 의관을 갖춘다 합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사모'와 KBS <조선총잡이>에서 사모 쓴 관리들 (출처 : 공식 홈페이지)

 

 

군장에는 “전립(戰笠)” 

 

‘싸울 전(戰)’에 ‘삿갓 립(笠)’라는 이름을 가진 전립은 군장에 속합니다. 전립은 모립(毛笠)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전립을 만드는 재료가 짐승의 털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자는 원래 북방 호족의 것으로, 조선에서는 중엽 이후에 군사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정묘호란 때에는 군사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대부들 까지도 이 모자를 널리 통용했다고 하네요. 

사극에서 보면, 고위급 무관들은 이 모자에 화려한 장식을 더해 사용하고, 일반 포졸들은 평범한 전립을 착용하는 걸 볼 수 있는데요. 실제로, 품등이 높은 무관은 전립의 둥근 모자집 꼭대기에 금이나 은과 같은 보석으로 만든 장식을 달았고, 공작이나 꿩 같은 새들의 깃털을 달아 화려함을 더했다고 합니다. 

 

* 영화<명량>에서처럼 전쟁에서 이용하는 모자로 “투구가 따로 있었죠. 

 

 

유생들의 특별한 “유건(儒巾)”

 

KBS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서 쉽게 볼 수 있던 이 모자는 주로 성균관 유생들이 사용한 것입니다. 유생들이 도포나 창의를 입을 때 함께 쓰이는 ‘실내용’관모로, 성균관 안이나 집안에서만 사용했고, 외출시에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드라마에서도 외출을 하는 유생들은 흑립으로 모자를 바꾸었죠.



 

 KBS <성균관스캔들>에서 유건을 쓴 모습과 갓을 쓴 모습 (출처 : 공식 홈페이지)

 

 

보관함에 담아두는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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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소개된 모자는 남성들의 기본적인 모자들입니다. 모자를 그냥 두면 망가질 수 있어 담아두는 보관함이 따로 있었다고 하는데요. 알면 알수록 조선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모자를 중요하게 여겼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어떤 모자를 썼을까요?

 

 

 

 

 

 

 

“수화유문(水禾有紋) 초문(草紋) 장옷, 남방사 홑단치마 훨훨 벗어 걸어두고"

- 춘향가 中-

 

 

단오날 춘향이 그네를 타기 전 대목입니다. 장옷을 벗어 던진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조선시대 여성의 모자는 남자들의 것에 비하면 종류가 다양한 편이 아닙니다. 또한 모자가 신분과 직분을 나타내는 것이었기에, 여성들이 사용한 모자는 "쓰개"라는 명칭으로 나눕니다. ‘장옷’도 그 중 하나이지요.

 

모자의 나라, 조선의 여성들은 어떤 쓰개와 모자를 썼을까요? 평상시 내외용으로 사용된 쓰개 또는 모자와 겨울철 방한용으로 사용된 모자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남녀 사이 마주보는 것을 피하는 ‘내외’용

 

조선은 유교사회였기 때문에, 남녀 사이에 ‘내외(內外)’를 해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관념은 여성에게 많은 제한을 두는 쪽으로 구체화 되었는데, 머리에 쓰는 물건을 통칭하는 여성들의 ‘쓰개’도 내외법이 생활에 적용되어 나타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궁중에서 사용한 “너울”

 

주로 궁중이나 상류층 부녀자들이 외출시에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착용한 ‘너울’입니다. 너울은 고려 때 쓰이던 몽수(蒙首)가 그 기원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몽수는 얼굴뿐만 아니라 전신을 가리는 것이었는데, 또 다시 그 기원을 찾자면 당의 ‘멱리(冪䍦)’에서 유래됐다고 보거나 아랍과의 교류 과정에서 유행하게 되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너울 (경기도박물관 소장)

너울의 모양을 살펴보면, 갓 위에 사각형의 천을 씌운 것으로, 천의 길이는 어깨를 덮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때, 모자의 앞면, 즉, 얼굴이 있는 부분에는 항라 혹은 망사류를 덧대어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하네요. 이처럼 다소 불편해 보이는 너울을 외출시 마다 착용해야 했다니, 새삼 조선의 내외법(內外法)의 엄격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中 너울을 쓴 여인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반 부녀자가 사용한 “장옷”

 

조선시대에 일반인 부녀자가 사용한 내외용 쓰개입니다. 즉, 양반이나 궁중에서 사용하던 너울대신 간편하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죠. 

장옷 (박광훈 기증,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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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구가의 서>에서 장옷입은 담여울(수지 分) (출처: 공식홈페이지) /

​장옷을 입은 여인들 (헤르만 산더 기증,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장옷은 두루마기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고, 주로 겉감은 초록색, 안감은 자주색이 많이 쓰였다고 합니다. 옷감은 계절에 따라 명주, 모시, 삼팔, 항라, 숙고사 등 다양하게 사용했다고 하네요. 장옷에서 굳이 특별한 점을 찾아보자면, 고름을 이중으로 달았다는 것인데요. 이는 장옷을 착용할 때 속에서 고름을 두 번 잡아 단단히 여미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 한다면, 동정 대신에 넓직한 헝겊을 대어서 머리에 쓰기 편하게 디자인 되었다는 것이 있습니다. 

 

처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신윤복, <처네쓴女人>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편, 장옷보다 길이가 짧고 소매가 없는 것을 처네라고 불렀습니다. 주로 하급 부녀자나 행상하는 여인들이 즐겨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팔이 없는 “쓰개치마”

 

쓰개치마 역시 내외용 쓰개의 일종으로, 조선 중기 이후에 양반층 부녀자가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윤복, <월하정인>, 《혜원 전신첩》,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장옷과는 달리 치마와 같은 형태를 가졌으며, 끈이 달려있어 쓰개치마의 주름을 겹쳐 잡고 치마의 허리부분으로 얼굴을 둘러 싼 후, 턱 밑에서 끈을 맞물려 잡아 사용했다고 합니다. 쓰개치마도 계절에 따라 겨울에는 솜을 넣기도 하고 겹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하네요. 

 

 

손으로 쥐는 모자 “지삿갓”

지삿갓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지삿갓은 댓살을 둥글게 엮어 한지를 바르고 기름칠을 하여 만든 것으로, 비를 피하거나 햇볕을 가리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지삿갓 머리에 고정시키지 않고 손으로 쥐는 형태의 모자로 사용되었는데요, 이는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피해야 하는 경우 삿갓을 기울여 가리고자 하는 내외의 용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우동으로 유명한 “전모”

 

일명 ‘어우동 모자’로 알려져 있는 것이 바로 전모인데요. 전모는 하류층 여인들이 쓰던 것으로 지삿갓과 마찬가지로 한지를 사용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안에는 쓰기 편하도록 머리에 맞춘 테가 있고, 테 양쪽에 끈을 달아 턱밑에서 매면 얼굴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하네요.

​ 

신윤복, <전모 쓴 여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KBS 드라마 <황진이>에서 전모 쓴 (출처: 공식홈페이지)

​전모 중에는, 모자 가장자리에 수(壽), 복(福), 부(富), 귀(貴) 등 글자로 장식을 하거나 각종 무늬(주로 나비와 꽃)로 장식을 더한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추위도 막고, 멋도 내는 일석이조 ‘방한용’

 

겨울을 쓰는 방한모를 ‘난모(暖帽)’라고 하는데, 머리와 뺨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난모는 남녀 모두 착용했는데, 사극에서는 여성들이 착용한 모습이 익숙합니다. 정조대에는 난모를 착용하지 않아 벼슬이 달라졌다는 기록이 있어, 난모가 의례용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 아래 소개하는 것은 여성들이 쓰던 모자들로 따뜻하기도 하고, 모양도 예쁜 모자들입니다. 

 

 

아양 떨다를 낳은 “아얌”

 

아얌은 대표적인 여성 방한모로서, 남자들이 쓰던 이엄이 변하여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얌의 일반적인 형태는 머리에 쓰는 부분 ‘모부(帽部)’와 댕기모양의 기다란 ‘드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얌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아얌의 모부 중앙에 달린 술은 대부분 적색을 사용했고, 드림에는 자주색 댕기나 금으로 만든 매미를 군데군데 달아 장식을 했다고 합니다. 일부 기생들은 앞뒤로 술을 달고 화려한 보석 등을 부착해 쓰는 사치를 부리기도 했다고 하네요.

 

 


아얌 쓴 기생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현재 쓰이는 말 중, ‘아양 떨다.’라는 말이 바로 ‘아얌’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아얌은 이목을 끄는 장식용으로도 여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는데, 이 때문에 남에게 잘 보이려고 간사스럽게 군다는 뜻의 ‘아얌을 떨다’라는 말이 쓰였던 것이죠. 바로 이것이 이후에 변형되어 ‘아양 떨다.’ 라는 표현으로 굳혀졌다고 합니다.

 

 

지금도 사랑받는 “조바위”

 

조선 후기에 아얌이 사라지면서 양반층에서 서민층까지 가장 널리 사용된 방한모입니다. 아얌과는 달리 뒤에 붙은 기다란 드림이 없는 형태이며, 아얌에는 귀를 덮는 부분이 없었다면, 조바위에는 이 부분이 추가되어 방한의 기능이 훨씬 좋았다고 합니다. 

 

조바위(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조바위 쓴 모습의 그림, 엘리자베스키스, <민씨 가의 규수(1938)>,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조바위는 앞뒤로 술을 달고, 이마 위에 각종 보석을 달거나 글자를 새겨 장식했습니다. 또한, 모자의 겉면에는 ‘수복강녕(壽福康寧)’, ‘부귀다남(富貴多男)’ 등의 문자나 화문(花紋)을 금박으로 박아 넣기도 했다고 하네요. 이렇게 화려한 장식을 위해 수를 놓거나 금박을 새긴 것은 대부분 어린이용이었다고 합니다.

 

 

풍뎅이 닮은 “남바위”

 

풍뎅이를 닮았다하여 풍뎅이라고도 부른 남바위는 사실 여성용이 아니라, 남녀 공용으로 쓰인 겨울철 방한모입니다. 남바위가 처음 쓰일 때는 상류층에서 일상복에 착용했는데, 후기에 가서는 서민층이나 예복, 구군복의 벙거지 밑에도 방한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또한, 아이들의 장식적인 쓰개로 아이가 돌을 맞이했을 때 주로 쓴다고 하여 ‘돌모자’라는 이칭도 있습니다. 

남바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형태를 보면 조바위와 달리 아래쪽 구성이 3단계의 곡선 형태를 하고 있고, 그 곡선을 따라 털을 이어 붙였습니다. 주로 여자용 남바위에는 양옆에 볼과 턱을 가리기 위한 볼끼가 부착된 것도 있어 필요할 때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도록 제작하였다고 하네요. 남바위는 남녀공용이었지만, 남자는 주로 검은색을 썼고, 여성용은 자주색이나 남색의 비단을 사용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볼을 보호하는 볼끼달린 “풍차”

 

남바위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모자와 이어진 곳에 귀와 뺨, 턱을 가리는 ‘볼끼’가 달려있습니다. 볼끼는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뒤로 제쳐서 끈을 묶었다고 하네요.

 


풍차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풍차를 쓴 아이와 엄마, <보건>포스터 (국립민속박물고나 소장)

 

풍차는 원래 양반 계급에서 주로 썼으나, 후에 점차 평민들도 두루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바위처럼 남녀 공용이었는데요. 남자의 경우 위에 관이나 갓을 쓰기도 했고, 여성용의 경우 앞뒤에 봉술을 달고 산호와 비취등으로 장식을 더했다고 합니다. 겉감은 주로 흑색이나 자색, 남색을 썼으며, 안은 남색, 초록색의 견을 넣어 만들었습니다. 풍차의 가장자리에는 흑색이나 밤색의 토끼나 여우의 모피를 둘러서 마무리 했습니다.

 

 

여성들의 모자는 남자들의 것에 비해서는 그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당시 여자들도 사회생활을 했다면, 남성용 모자 못지않게 다양한 종류와 화려한 장식을 깃들이 모자들이 많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바깥외출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밖에 나갈 일이 생기더라도 내외법에 의하여 얼굴을 가리는 것이 예로 여겨졌기에 그저 얼굴을 가리는 용도의 쓰개가 발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쓰는 모자

 

유교사회에서 살면서 꼭 치러야 하는 의식, ‘관혼상제’입니다. 특별한 날인만큼 형식을 갖춘 모자를 썼는데요. 의례에서 쓰는 모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른이 되는 상징, 관례(冠禮)

 

관례는 성인이 되었다는 기념 의례로 남성들의 의식입니다. 15세가 넘은 남자아이들은 관례에서 상투를 틀고 어른의 관(冠)과 의복을 갖추어 입었습니다. 상투는 조선시대 남성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머리를 모두 올려 위로 잡아 맨 모양인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정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이때 사용되는 것이 ‘망건’과 ‘상투관’입니다. 

 

 

망건과 상투관

 

망건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상투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망건은 상투를 튼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머리에 두른 그물처럼 생긴 물건입니다. 관의 밑받침이 되기도 하죠. 상투 위에는 상투관을 쓰는데, 말 그대로 상투를 감싸는 관입니다. 즉, 상투를 틀고 그 위에 상투관을 올린 후, 그 위에 탕건까지 쓴 뒤에야 정자관이나 갓과 같은 모자를 착용할 수 있었던 것이죠.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망건과 상투관을 쓴 이훤(김수현 分)과 영화 <군도>의 조윤(강동원 分)
​(출처: 공식홈페이지)

반면, 여성의 성인식은 “계례(筓禮)”라 하여 쪽을 지고 비녀를 꽂습니다. 여자들의 경우 혼례전이나 혼례시에 관례를 치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비녀 이외에도 혼례 때 착용하였던 화관이나 족두리가 관례용 모자로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신부의 아름다움은 지켜져야 한다, 혼례(婚禮)

 

결혼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이고 싶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여성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때문에 혼례에서도 남성보다 여성들의 모자들이 두드러지는데요. 그렇다면 혼례에 쓰던 여성들의 모자는 무엇이 있을까요?

 

 

 

화관 

 

화관(花冠)은 이름처럼 꽃처럼 장식한 관입니다. 부녀자들이 예복에 갖추어 쓰는 관으로 궁중에서는 의식이나 경사가 있을 때 사용하였고, 양반집에서는 혼례와 같은 큰일에 관모로 가용되었다고 합니다. 

 


화관의 옆모습과 윗모습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개인소장)

화관은 크기가 작아 관모라기보다는 미적 장식품으로 사용되었는데, 영정조대에 가체를 금지하면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여성들의 머리모양이었던 가체로 인한 사치가 극에 달하자 가체를 금하고 쪽머리를 장려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혼례의 예관으로 크고 화려한 가체 대신 화관과 족두리를 사용하도록 한 것이지요. 가체가 없어진만큼 이때부터는 서민들도 혼례와 같은 특별한 날에 화관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족두리

 

화관과 함께 쓰던 것으로 ‘족두리’가 있는데요. 사실 족두리는 고려시대부터 예식용 관모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때는 조선시대보다 크기도 훨씬 컸다고 하는데요. 조선 후기 가체 사용을 규제하면서 크기도 작아지고 높이도 낮아진 것이지요. 조선 후기에 사용된 족두리 모양을 보면, 대게 검은 비단을 사용해 아래는 둥그스름하게, 윗 부분은 육각으로 만들어 안에 솜을 채워 만든 형태입니다. 이런 족두리는 영정조대에 가체를 금하면서 검소한 생활을 장려하기 위해 사용을 권했는데, 점차 족두리도 화관과 같은 화려한 장식들이 더해져 사치가 문제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각종 패물과 장식을 더한 족두리는 ‘꾸민 족두리’라고 하고, 아무 장식없이 밋밋한 족두리를 ‘민족두리’라고 칭합니다.


족두리와 민족두리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화관과 족두리는 혼례 때에 두루 쓰이다가 조선 말기에 가서는 정장할 때는 족두리를 쓰고 활옷이나 당의를 입고 화려하게 멋을 낼 때에는 화관을 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사모

 

일전에 “조선, 모자의 나라 -남성편-”에서 문무백관이 쓰는 ‘사모’를 소개했는데요. 양반 관리들이 집무를 볼 때 입는 의복에 갖춰 쓰는 모자이지만, 혼례에서는 서민들도 착용이 허용되어 두루 쓰였다고 합니다. 혼례에서도 사모관대에 맞춰 의관을 갖췄습니다.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 혼례식에서 화관을 쓴 경혜공주(호우현 分)과 사모관대를 갖춘 정종(이민우 分)

(출처: 공식홈페이지)​
 

 

망자를 보내는 예의, 상례(喪禮)

 

조선과 같은 유교 국가에서는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이 사망하였을 때 상복을 갖춰 입고 망자를 애도하는 것이 중요한 예절이자 풍습이었습니다. 이때의 의관은 흰색의 삼베로 만든 것이 대다수였지요. 

<내셔널 지오그래픽> (1910.11) '상여'에 보이는 모자​

 

백사모

 

 

이 모자는 喪을당했을 때 조선시대 문무백관이 착용했던 ‘백사모’입니다. 이는 문무백관이 평상시에 업무를 볼 때 쓰는 사모를 상중에 쓸 수 있도록 흰색의 대나무 실(竹絲)로 만든 것이라고 하네요. 

 

 

백립

 

 

한편, 백사모와 함께 상중의 모자로 쓰인 것이 바로 ‘백립’입니다. 백립 역시 흑립과 모양이 동일하며 상시(喪時)용이었기 때문에 색상만 흰색으로 한 것입니다. 백립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나무로 그 형체를 만든 후 위에 베를 얹어야 했기에 백립을 ‘백포립(白布笠)’이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백사모가 일반적으로 주로 쓰였다면 백립은 주로 국상이 있을 때나 부모상(父母喪)을 당했을 때 쓰던 모자라고 하네요. 또한 선비들의 경우 삼년상을 치르고 난 후, 대상 다음과 그 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까지 패랭이 대신 백포립을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백립은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상중에 쓰는 모자가 아닌 평시에 흔히 쓰이던 모자였는데요. 하지만 곧 흑립이 일반화 되면서 국가에서는 백립의 착용을 규제하였고, 이후부터는 상중에만 백립을 착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백전립

 

국상 때에 무관들이 쓰던 관모는 ‘백전립’이라는 것으로, 앞서 언급한 두 모자와 마찬가지로 전립의 기본적인 형태에 색상만 흰색으로 한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 때에는 베를 입히지 않고 주로 백색의 돼지털을 사용하여 흰색의 전립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굴건과 효건  

지금도 익숙한 굴건은 상주와 상제가 쓰던 남성용 건(巾)입니다. 주로 두건 위에다 덧쓰는 모자였는데요. 상례에 쓰이는 두건을 효건이라고 합니다.

​ 

굴건과 효건(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후지모토 다쿠미가 1972년 부산에서 찍은 상주

 

수질

남자가 효건 위에 굴건을 썼다면, 여자는 수질이라는 둥근테를 머리에 둘렀습니다. 수질은 삼과 짚을 꼬아서 둥근 테 모양으로 유교의 상례에는 복장을 나누는 ‘오복제’가 있었는데, 이에 따라 참최와 재최를 구분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방식은 여기에서는 소개하지 않겠지만, 오복제에 따라 꽤 복잡한 방식으로 차이를 두었고, 심지어 남자의 굴건과 더불어서 오복제에 따라 착용법에도 미미한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조상을 모시는 의식, 제례(祭禮)

 

조상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제례는 인간이 죽은 후에도 후손들과 교류한다는 믿음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와 형태는 다르지만, 제사는 거의 모든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지요.

 

 

유건

 

상례에서 의복을 입은 것처럼, 조상들은 시제(時祭)나 기일(忌日)과 같은 제삿날에 제례복을 갖추었는데요. 제례 때 쓰는 모자는 지방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주로 유건 또는 갓을 썼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은 흰색의 유건으로 유생들이 향교나 서원 등에 제사를 지낼 때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내외법의 영향으로 여자들은 제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따로 쓰던 쓰개가 전해지지는 않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무속신앙과 불교에서 사용된 모자

 

유교를 숭상한 조선이지만, 삼국시대부터 이어온 불교와 무속신앙은 여전히 우리문화에 산재해 있었습니다. 신앙처럼 이어졌기에 상황에 맞는 모자도 구분되었는데요.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화려한 무당의 모자

 

절제된 유교와 달리 무속신앙은 화려함이 있습니다. 의식도 타악기를 위주로 빠른 가락과 흥분된 무용이 이어지지요. 이런 특성을 담아 무당이 쓰던 모자도 특별한데요. 무당들의 모자는 갓이나 전립에 치장을 한 것이 많았습니다. 신윤복의 <무무도(巫舞圖>,《화첩(畵帖)》,(간송미술관 소장)에서도 무당이 쓰는 모자는 문무관의 모자와 기본 형태는 같습니다. 

 

 

왼쪽의 “전립”은 황해도 성수굿 무복에 갖추어 쓴 모자로 무관이 사용한 전립과 형태가 같으나, 종이 위에 흑색 융단을 바르고 주위에 진분홍색 종이꽃으로 장식을 하였죠. 오른쪽도“호수갓”은 황해도 무복에 갖추어 쓴 모자로, 갓 위에 호랑이 수염을 꼽아 만들었다고 합니다.

 


 

선비들이 집안에서 즐겨 쓰던 동파관이나 사방관과 흡사한 형태로 만든 ‘화관’이란 것도 있습니다. 화관은 종이를 사용하여 사각형 모양의 모자를 만든 후 각 면에 삼극태문, 卍자문, 용․학․봉황을 그려 넣거나, 수부강령(壽富康寧) 등의 글자를 적어 넣어 만든 것으로, 무복과 함께 착용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고깔”이 있는데, 고깔은 무당뿐만 아니라 승려나 농악대도 사용한 모자라고 합니다. 고깔은 ‘곳갈’이라고도 하였는데, ‘곳’은 뿔모양(角)을 뜻하고, ‘갈’은 관모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깔의 생김새를 잘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쓰던 고깔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고깔과 관련해서는 불교의식무용 중 법고(法鼓)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지는 ‘승무’가 유명한데요. 승무는 불교적인 색채가 강한 춤으로, 한국무용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정중동(靜中動’과 ‘동중정(動中靜)’을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이 승무를 출 때 입는 복식의 머리에 쓰던 것이 바로 고깔이라고 하네요.

 

 

 

승려의 모자

 

승무는 불교에서 유래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대표적인 민속춤으로 자리 잡았는데요. 이 외에 정식으로 불가에서 쓰는 모자를 살펴보겠습니다.

 

Angus Hamilton,『한국–동녘의 나라』,1904 에 보이는 승려모습​

왼쪽 사진에 승립을 쓰고 있는 승려와 오른쪽에 고깔을 쓴 승려들이 보인다.

 

옛날에는 승려가 쓰던 모자를 일컬어 ‘승립’이라고 칭하였는데요, 승립은 그 모양과 형태가 크게 5개(승관, 송락, 고깔, 굴갓, 대삿갓)로 구분되는데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드물다고 합니다. 

 

 

승립 또는 송라립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이것은 승립 중에서도 “송라립(松蘿笠)” 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승려가 평상시에 착용하던 모자 입니다. 이 모자는 소나무에 기생하는 송라를 엮어 만든 것으로, 윗 부분만 촘촘하게 엮고 아랫부분은 투박하게 그대로 두었으며, 정수리 부분이 뚫려있는 형태였습니다.  

 

이것은 조선 전기의 승려 문인이었던 김시습의 영정으로, 김시습이 쓰고 있는 승립이 바로 ‘굴갓’이었다고 하네요. 김시습은 세속을 떠나 무량사(無量寺)에서 마지막 거처를 정했다고 전해지죠. 

 

조선 전기의 승립의 모습은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3년 조의 기록, “성종은 갓 모양이 마루가 둥글고 차양이 넓은 것은 중의 갓을 본뜬 것 같다 하여 싫어하였다”를 통해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조선 전기의 승립은 김시습이 그림에서 쓰고 있는 모자와 같이 흑립과비슷한 형태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외에 “승관(僧冠)”은 현재에도 방한용으로 종종 사용되고 있는 모자이며, “대삿갓”은 ‘큰’ 삿갓이라는 뜻이 아니라, 대오리로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반 삿갓보다는 훨씬 작게 만들어 쓰던 것이라 합니다. 

 

 

 

Ernst Oppert, <A Forbidden Land : Voyages to the Corea>,1880  다양한 모자스케치

 

지금까지 조선의 대표적인 모자들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주로 많이 쓰이던 것만 대략적으로 살펴보았을 뿐인데도 그 종류가 매우 많다 보니 기사를 통해 다룬 양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조선의 모자에 대해 조사를 한 이후로, 조선시대의 풍속화나 사진 같은 것을 볼 때 사람들이 쓰고 있는 모자를 보면서 이게 과연 무슨 모자일까 맞춰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도 조선시대 풍속화나 사진, 혹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실 때 사람들이 쓰고 있는 모자가 어떤 것인지 맞춰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알면 알수록 재미는 배가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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