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먼저 봄을 물들인다는 화어(花魚)를 아십니까. 화어의 본산이라는 경남 사천으로 달렸습니다. 네, 예전의 삼천포죠. 전에는 이 표현을 지역 차별로 여겼다지만, 주말매거진은 삼천포의 매력과 맛에 빠졌습니다. 화려한 건어물인 화어 못지않게, 살아있는 봄 해산물에 흠뻑 반했거든요. 쑥뿐만 아니라 봄동과 냉이까지 봄을 알리는 도다리 쑥국, 3월이 제철이라는 털게와 새조개, 파릇파릇한 톳나물이 봄의 상륙을 선언합니다. '음식의 계보'를 연재 중인 칼럼니스트 박정배씨가 다녀왔습니다.
- 삼천포(三千浦)
- 경상남도 사천 지역에 있었던 지명. 본래 행정의 중심지로 발전한 곳이 아니고 포구였다. 고려 성종 때 조세미를 수송하기 위하여 이곳에 통양창(通陽倉)을 설치했는데 개성에서 수로 3,000리나 되는 먼 곳이라 하여 이러한 지명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남해를 잇는 삼천포대교가 지난 2003년 개설되면서 한려해상국립공원 관광이 더욱 용이해졌고 지금까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사천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해산물을 만날 수 있다.
사천(삼천포)은 해산물 천국이다. 1995년에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통합되어 사천시가 되었지만 삼천포란 이름은 여전히 강렬하다. 주변의 바다는 좁고 물살은 거세다. 다양한 해산물이 거친 물살에서 맛을 키운다. 봄기운을 받은 어물들은 한결같이 몸에 살이 오르고 달다.
사천의 봄은 먹을거리로 시작된다. 도다리 쑥국은 남해안 봄 음식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맘때 여기 어느 횟집이라도 도다리 쑥국을 취급한다. 팔포회타운의 '원조물회집'에서 도다리 쑥국을 시켰다. 40년 경력의 할머니 쉐프가 숙련된 솜씨로 살이 오른 두툼한 참도다리 한 마리를 숭덩숭덩 손질해 봄동, 냉이, 쑥, 된장을 넣어 단순하고 명쾌한 도다리 쑥국을 만든다.
도다리 쑥국을 한 숟가락 먹으면 구수한 된장 맛과 함께 향긋한 쑥 향이 은근하게 퍼진다. 참도다리의 보드라운 살점은 달고 순하다. 통영의 도다리 쑥국이 맑은 된장 국물에 쑥만을 넣는 반면에 삼천포의 도다리 쑥국은 된장을 직접 넣어 진한 맛이 나고 다양한 봄나물과 채소가 들어간다.
전국 9대 일몰지로 선정된 실안 해안도로의 일몰은 삼천포 출신 시인 박재삼의 시처럼 '울음이 타는' 바다. 거친 바다에는 참나무로 만든 죽방렴이 등대와 함께 서 있다.
4월이면 여기에 멸치가 든다. 삼천포대교가 시작되는 곳인 대방마을에는 유명한 횟집들과 삼천포 죽방 멸치 같은 건어물을 파는 가게가 있다.
3월이 제철인 새조개가 올해 부쩍 많이 잡히면서 식당들은 새조개 샤부샤부를 주력 메뉴로 내놓았다. 검은색 새부리 모양의 새조갯살을 살짝 데쳐 먹으면 졸깃한 식감 속에서 달보드레한 맛이 깊고 진하게 배어 나온다. 대방 앞바다의 죽방렴에서 잡은 은멸치와 건홍합, 삼천포 쥐치와 보리새우 같은 건어물들을 파는 가게도 몇 군데 있다.
1월에서 3월 사이가 제철인 검은색이 감도는 말린 보리새우는 천연 새우깡이다. 아삭거리는 식감과 한 몸처럼 붙은 살과 껍질이 만든 감칠맛은 술안주로 제격이다.
베트남산 쥐치포가 대세를 장악했지만 삼천포에는 여전히 국내산 쥐치로 만든 쥐치포를 만드는 공장이 몇 군데 있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성일산업'에 들어서자 40년 넘게 쥐치포를 만들어 온 여사장님과 대여섯 명의 아주머니가 손으로 쥐치포를 다듬고 있다. 외국산 쥐포는 얇고 하얗지만 국내산 쥐치포는 두껍고 붉다. 조리를 하지 않아도 단맛이 나는 쥐치에 설탕과 소금으로 조미해 말린 쥐치포는 달콤한 건어물의 대명사다. 완성된 쥐치포를 먹어보면 쫄깃한 식감과 어포의 감칠맛이 단맛과 함께 배어 나온다.
삼천포에는 건어물 문화가 깊고 넓게 퍼져 있다. 쥐치포의 탄생에 직접 영향을 미친 화어(花魚)는 삼천포 건어물의 꽃 중의 꽃이다.
은빛 찬란한 학꽁치와 화사한 홍매화 같은 새우, 진달래색 물을 들인 붉은메기와 개나리처럼 노란색 치자로 물들인 성대, 검은색 복어와 회색의 달고기로 만든 화어는 일제 강점기부터 최고급 건어물의 상징이었다. 봄꽃보다 먼저 화어가 삼천포를 꽃으로 물들인다.
일제 강점기부터 경상남도를 대표하던 삼천포수산시장은 2013년에 삼천포 용궁 수산시장으로 거듭났다. 잘 정비된 건물 안에는 남해에서 잡히는 대부분의 수산물이 가득한 살아있는 어류박물관이다.
이곳에서 어물을 사서 수산시장 맞은편에 있는 횟집들에 가면 몇천 원 정도의 초장비를 내고 회를 맛볼 수 있다. 횟집들 뒤쪽으로는 해산물 정식을 파는 밥집들이 특히 인기가 많다. 저녁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간 '파도식당'은 단체 손님들로 가득하다. 가자미구이와 새조개 데침과 병어회, 톳나물 무침 등 해산물로만 구성된 음식들을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구색을 갖춘 음식이 아니라 제대로 만든 것들이다.
식사를 마칠 때쯤인 여덟 시가 되자 그 많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해산물 정식집들은 점심 시간에 시작해서 저녁 여덟시면 약속처럼 문을 닫는다. 늦은 밤 술꾼들은 '실비집'이나 횟집으로 모여든다. 봄이면 이곳 특산물인 털게찜도 빼놓을 수 없고 계절 생선으로 만든 시원한 물회 한 그릇도 좋다. 삼천포, 아니 사천의 봄은 달다.
삼천포(사천)는 일제 강점기 때는 경남에서 어획고가 가장 많은 항이었다. 당시 삼천포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화어와 건멸치를 생산해 일본으로 수출했다. 화어는 학꽁치·홍감평·밀지어·바닥대구·쥐치·가오리·복어·새우 등 8종의 생선을 원료로 국화·해바라기·장미 등의 모양으로 만들어 일본인들이 선물용으로 수출하기 위해 개발한 것이다.
해방 이후 삼천포의 화어 문화는 한국인들에 의해 변화·발전한다. 1967년 삼천포의 명산물로 지정되었다. 1960년대 초반 남해안에서 쥐치가 대량으로 잡히면서 화어 어포(魚脯) 기술을 적용한 쥐치포가 이학조씨에 의해 만들어진다. 1960년대부터 남해안 일대에서 유행하던 쥐치포는 오징어와 대구포의 대체재로 떠오르면서 큰 인기를 얻는다.
1970년대 중반 쥐치가 대량으로 잡히기 시작하자 쥐치포는 전 국민의 간식으로 자리 잡는 한편 일본으로도 수출된다. 쥐치포의 발상지인 삼천포는 주로 내수를, 여수는 수출을 주력한 덕에 삼천포 쥐치포는 쥐치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쥐치의 남획으로 국내산 쥐치포가 줄어들면서 외국산 쥐치포로 상당량이 대체되었지만 두툼한 살집에서 나는 식감과 졸깃함의 삼천포 쥐치포는 수입산과 비교를 불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