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의 對話/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향기로 만나는 나무꽃

초암 정만순 2019. 11. 29. 18:35



향기로 만나는 나무꽃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로 시작되는 이문세의 히트곡이 있습니다.
흔히 도입부에 있는 꽃이름을 제목으로 기억하지만 실제 제목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입니다.
가사 내용을 보면 라일락 꽃향기가 왜 잊을 수 없는 기억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건지 알 수 없습니다.

다소 상투적인 내용의 그 가사에는 갑자기 ‘가로수’가 등장하고 ‘가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라일락이 가로수로 심는 나무도 아니고 가을에 피는 나무도 아닌데 말입니다.
무명의 이문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작곡가 이영훈이 작사도 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향기가 진한 꽃으로 라일락이 생각나서 가사에 넣지 않았나 싶습니다.

라일락


어쨌거나 강렬한 인상의 도입부를 듣게 되면 4월 말경에 사랑한 얘기인가 보다 하게 됩니다.
4월 말이면 누구나 사랑에 빠지기 좋은 시기 아니겠습니까?
‘보리피리’로 유명한 문둥병 시인 한하운도 자신을 간호하던 간호사와 4월 말경에 사랑에 빠졌었나 봅니다.

뜨거운 편지로 구애하던 그녀의 사랑을 허락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쓴가 바로 ‘리라꽃 던지고’라는 시입니다.
그 시에 등장하는 리라(꽃)가 라일락의 프랑스 말입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좋아했다는 ‘베사메무쵸’에도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하고 리라꽃이 등장합니다.

라일락이나 리라꽃이나 참 아름다운 어감의 이름입니다.
식물학계에서 라일락의 정식명칭은 ‘서양수수꽃다리’입니다.
누가 정한 건지 모르겠으나 낭만과는 담을 쌓은 분들이 분명합니다.

라일락의 꽃


진동하던 라일락 향기에 뒤이어 피어나는 5월의 꽃은 아까시나무입니다.
아까시나무! 혹시 아카시아가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하지만 아까시나무라고 해야 올바릅니다.
아카시아는 호주의 사막이나 아프리카 같은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라 우리나라에서는 온실에 심은 것 외에는 자라지 않습니다.

동구 밖 과수원 길에 활짝 피어 있는 나무도 아카시아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씹는다는 껌도 아카시아고, 배고픈 시절에 따서 먹던 추억 속의 꽃도 아카시아입니다만 정식 명칭이 아까시나무인 걸 어쩌겠습니까?

아까시나무의 꽃


아까시나무는 학명의 종소명이 pseudoacasia로, 여기서 슈도(pseudo)가 가짜라는 뜻입니다.
즉, 종소명 역시 가짜 아카시아라는 뜻에서 붙여졌습니다.
일본인들 역시 가짜 아카시아라는 뜻으로 ‘니세 아카시아’라고 불렀으나 우리나라 사람들 귀에는 아카시아만 들렸던 모양입니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학자들이 새로이 아까시나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가시가 많기 때문에 붙인 이름 같습니다만 날카로운 가시만 느껴지고 아름다운 향기는 느껴지지 않는 이름이라 아쉽습니다.
우리나라의 식물학자들은 정말 낭만과는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 분들이 분명합니다.

아까시나무는 황폐했던 우리 국토를 푸르게 뒤덮어준 일등공신으로, 전국에 퍼져 자랍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경위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1890년대에 일본인에 의해 중국을 거쳐 인천으로 들여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미지역이 원산지인 나무가 우리나라 전역에 퍼져 자라고 있으니 귀화식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저절로 들어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들여온 나무이기 때문에 귀화식물로 보지 않기도 합니다.
인왕산 자락의 선바위로 가는 길에도 아까시나무가 많습니다.
무악재에서 능안정 지나 충정로역에 이르는 안산자락길에도 밑동 굵은 아까시나무가 큰 키로 서서 등산객들을 호위합니다.

인왕산 자락의 아까시나무


안산자락길의 아까시나무


아까시나무에 뒤이어 5월 말경에 후각세포를 어지럽히는 것은 때죽나무 향기입니다.
아래를 향해 주렁주렁 매달린 은종 모양의 꽃에서 코를 마취시킬 듯한 향기가 납니다.
이상 고온이 정상 고온처럼 계속되다 보니 평창동 북한산 둘레길에서도 이미 때죽나무 꽃이 피어 등산객들의 발걸음을 붙듭니다.

때죽나무의 꽃


때죽나무의 꽃향기를 설명할 때 ‘코를 마취시킬 것 같다’라고 표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때죽나무의 열매를 찧어 물에 풀면 물고기가 기절해서 둥둥 떠오릅니다.
그래서 때죽나무 열매는 물고기 잡는 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약간의 독성분으로 물고기를 마취시키는 것이죠. 어쩌면 그것이 계면활성제 성분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빨랫비누가 없던 시절에는 때죽나무의 열매에 들어 있는 계면활성제 성분을 이용해 빨래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때죽나무의 이름을 놓고 ‘물고기를 떼로 죽이는 나무’ 또는 ‘빨래의 때를 빼주는 나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건 너무 억지스럽습니다.
그보다는 나무껍질이 검어서 때가 많은 나무처럼 보여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때죽나무의 열매


이맘때 도심에서는 때죽나무의 향기가 1등이지만 조금만 깊은 산에 가면 2등으로 떨어집입니다.
때죽나무와 비슷하면서 향기가 더욱 좋은 라이벌 나무로 ‘쪽동백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향기로 따지면 때죽나무가 쪽동백나무한테 집니다.

꽃의 아름다움도 때죽나무가 쪽동백나무를 이길 수 없으니 스코어는 0 : 2가 됩니다.
쪽동백나무는 약간 깊은 산 계곡 주변에서 자라는 나무라 멀게 느껴지지만 남양주시나 안성시 같은 수도권 지역의 산에서 얼마든지 만나볼 수 있습니다.

쪽동백나무의 꽃


5월의 꽃향기를 지우며 나타나는 건 6월의 밤꽃 향기입니다.
구수한 밤꽃 향기는 꿀로도 만들 정도로 진합니다.
하지만 소설가 이외수가 ‘봄의 바람에’라는 시에서 밤꽃 향기를 요상한 것에 비유하는 바람에 소개하기 민망해서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밤나무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밤나무의 수꽃


이동혁 풀꽃나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