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의 對話/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피서지의 여름식물들에게 사랑만 주세요

초암 정만순 2019. 8. 22. 10:44



피서지의 여름식물들에게 사랑만 주세요





무더위가 연일 머리 꼭대기에서 맹위를 떨칩니다.
그늘이 아닌 곳으로 다니면 얼마 못 가 숨이 턱턱 막힙니다.
시원한 곳이 아니면 오래 있기 싫어집니다.
이열치열도 좋지만 이런 정도의 무더위는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상책입니다.

피서지를 향해 떠나는 행렬이라고 해서 모두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처럼 식물 보러 먼 길을 가는 사람이 중간에 끼어 길이 왜 이리 막히느냐며 짜증 부리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강원도 홍천군 내면 방내리 풍혈지


안 녹는 게 이상한 아스팔트길을 달리고 달려서 간 곳은 강원도 홍천군 내면 방내리입니다.
국내 최대의 월귤 자생지인 이곳은 한여름에도 바위틈으로 서늘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풍혈지입니다.

더위에 약한 북방계 식물이 말도 안 되는 낮은 곳에서 자란다 싶으면 그곳이 풍혈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몇 개의 돌들로 이뤄진 듯하지만 그 밑으로 얼마나 많은 돌과 바위가 쌓여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풍혈이라고 불릴 정도면 아마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돌들이 깊숙한 곳에서부터 겹겹이 쌓여 있을 것이고, 공기뿐 아니라 그 밑으로 흐르는 지하수하고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겁니다.

월귤의 꽃


언뜻 보기에 월귤은 잎이 회양목처럼 생겼습니다. 잎의 생김새뿐 아니라 상록성이라는 점도 닮아서 회양목처럼 반짝이는 잎을 달고 그대로 겨울을 납니다.

이곳에 무리지어 자라면서 꽃 피기는 하지만 유전적 다양성이 떨어져서 그런지 아니면 생육 조건이 좋은 건 아니어서 그런지 홍천의 월귤에는 열매가 잘 달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추운 북쪽의 습지 주변에는 많지만 남한에서는 워낙 귀한 식물이라 펜스를 쳐서 보호합니다. 아래로는 물론이고 위쪽으로도 넘어 들어가기 어려운 거의 완벽한 펜스입니다. 그래서 홍천의 월귤을 보러 올 때면 수감자 면회를 온 듯한 기분입니다.

안쪽을 들여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숲이 우거진 풍혈지 모습


사람의 출입은 잘 막아 놓았으나 정작 이곳의 문제는 풍혈 기능의 약화와 주변 식생의 변화에 있습니다. 지금도 시원한 바람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언제부턴가 그 세기가 점점 약해지는 느낌입니다.

그 영향 때문인지 펜스 주변으로 숲이 우거지면서 쉬땅나무와 미역줄나무 같은 관목들이 마구 뒤덮이면서 전에 있던 과남풀이나 검은종덩굴 같은 것이 점점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펜스 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끼류가 너무 많이 번져 있고, 여러 식물들이 들어와 월귤의 자생지를 많이 빼앗아 자라는 모습은 월귤의 앞날을 염려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풍혈 기능을 강화시키기는 어렵겠지만, 그대로 내버려두느니 잡풀과 관목을 제거해 주는 정도의 인위적인 간섭이 오히려 필요한 시점이지 않나 싶습니다.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대덕사 계곡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도 좋은 피서지이자 여름 식물이 살기에 좋은 곳입니다.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의 대덕사 계곡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곳은 빨간 립스틱을 바른 듯한 물매화 자생지로 잘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높은 산에서나 볼 수 있는 왜솜다리나 사창분취 같은 것이 많은 점이 특이합니다. 설악산 외의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자생하는 연잎꿩의다리가 곳곳에 있고, 꽃과 열매가 예쁜 복사앵도나무가 몇 그루씩 있으며, 비교적 드문 편인 참골담초도 몇 곳에서 자라는 등 정말 다양한 식물이 한데 살아가는 곳입니다.

대덕사 계곡의 물매화는 빨간 립스틱을 칠한 듯한 꽃밥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많던 이곳의 식물도 점점 사라지는 추세입니다. 큰제비고깔 같은 건 이미 다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에 못 봤던 곳에서 여러 포기의 큰제비고깔이 보라색 고깔을 쓰고 나타나서 반가웠습니다.

비슷한 모습의 꽃인 투구꽃은 수분매개자인 벌이 들어가기에 딱 좋은 좌우상칭형의 꽃을 하고 있습니다. 큰제비고깔 역시 같은 좌우상칭형의 꽃이건만 이상하게도 암술과 수술이 꽃의 입구를 꽉 막다시피 하고 있고 꿀주머니가 뒤쪽으로 길게 뻗은 모양새입니다. 과연 어떻게 벌들을 받아들이려는 것인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큰제비고깔은 고깔 모양의 꽃이 핀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벌보다는 부리가 긴 꽃팔랑나비 같은 것들이 큰제비고깔의 꽃을 들락거렸습니다. 그런데 이 나비가 부리를 꽂고 꽃 속의 꿀을 원샷하는 게 아니라 머리를 넣었다 뺐다 하면서 꿀을 취하는 모습이어서 특이했습니다.

아마도 그러는 과정에서 꽃가루받이가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큰제비고깔이 그런 방식으로 꽃가루받이를 하려고 그런 특이한 형태의 꽃을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꽃가루받이는 해주지 않고 꿀만 훔쳐 먹고 가는 공짜 손님은 받지 않겠다는, 즉 꽃가루받이를 해주는 손님만 선별적으로 받겠다는 전략입니다.

고개를 깊숙이 들이민 꽃팔랑나비


고개를 넣었다 뺐다 하면서 꿀을 빠는 꽃팔랑나비


어떤 식물이 자라는지 다 알 수 없는 이 대덕사 계곡에 먼저 와 엎어져 사진 찍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자기 차로 돌아왔을 때 제가 지나가자 "이쁜 꽃 많이 찍으셨습니까?" 하고 물어오는데 약간 이상한 뉘앙스가 느껴졌습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질문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뭔가 좋은 걸 찍었으니까 저러는가 보다 싶어 그가 엎어져 있던 곳으로 가서 뒤져보니 나도씨눈란 몇 포기가 나왔습니다. 이미 열매가 되어가는 중이긴 해도 찍어놓고 능청을 떨 만하다 싶은 귀한 난초입니다.

비교적 귀한 편인 나도씨눈란


강원도 영월군 장릉습지


물기가 많은 습지도 피서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강원도 영월군의 장릉습지는 물무리골이라는 이름답게 드넓은 습지였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습지라고 할 만한 곳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이곳의 들머리에는 큰제비고깔과 처녀바디가 있었는데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전나무숲으로 가는 길을 다듬고 확장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습지 안쪽에 있던 산작약과 꽃꿩의다리도 이제는 거의 볼 수 없게 됐습니다. 그건 아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도 진퍼리잔대와 개잠자리난초가 불쑥불쑥 잘 올라오고 있더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말입니다.

습지에서만 자라는 진퍼리잔대


습지에서만 자라는 개잠자리난초


장소가 습지다 보니 데크 아래로 내려가 밟아대면 땅이 단단해져 습지의 기능을 잃기 십상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난 많은 발자국들로 인해 길이 나 버렸습니다. 아직 꽃이 제대로 피기 전인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한쪽 데크의 가이드라인이 잘려져 있고 그리로 내려간 듯해서 놀랐습니다. 만약 누군가 일 부러 그런 것이라면 해도해도 정말 너무한다 싶은 일입니다. 피서지보다는 자연학습장이 더 어울리는 곳이니 그런 짓을 해서도 안 되겠고, 또 그런 모습이 계속 방치되어 있어도 안 되겠습니다.

무더위 속에서도 잘 견뎌내고 있는데 우리의 욕심 때문에 식물이 올 여름을 못 넘길까 걱정입니다. 높고 푸른 가을이 올 때까지 서로가 감시자가 되어 잘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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