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매원마을 해은(海隱)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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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왜관 매원마을의 해은고택. 사랑방과 사랑마루 사이의 뒤로는 가림담장을 설치해 내외의 공간을 분명하게 구분해 놓았다. 샛담이다. 예의를 중시하던 선비댁답다. 안채에 있는 여인네를 사랑채에서 쉽게 볼 수 없도록 했다. 사랑채에서 안채를 쉽게 볼 수 없도록 살짝 가리기 위해 담을 쌓은 것이다. 이처럼 해은고택은 담장 하나에도 은근한 매력이 숨어 있다.
◆500년 유서 깊은 매원마을 매원마을은 500년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선비의 고장이다. 경부고속도로 왜관IC를 통과해 왜관읍 쪽으로 가다 보면 매원네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파미힐스 골프장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5분도 채 못 미친 거리 왼쪽에 마을이 자리를 틀고 앉았다. 조선시대에는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칠곡 매원마을을 일컬어 영남의 3대 반촌으로 통했다. 매원마을에는 원래 야로 송씨가, 그 다음은 벽진 이씨가 주류를 이루고 살았다. 이어 1595년(선조27)경 매원마을은 광주(廣州) 이씨가 입촌하면서부터 집성촌을 이루게 된다. 1905년경에는 최대 번성기로 400여 가구가 살았다. 마을 맨 위쪽을 상매라 하고 중간을 중매, 아래를 서매(하매)라 부른다. 풍수 지리적으로는 매화낙지형(매화가 떨어진 모양)이라고 했다. 매원마을은 1950년 이전까지만 해도 300여 채의 기와집과 200여 채의 초가집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로 거의 소실되고 현재는 60여 채만 남아 있다. 이 가운데 해은고택만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됐는데, 이 밖에도 감호정사, 용산재, 중방댁 등 보존해야 할 고택이 수두룩하다. ◆해은고택(海隱故宅) 해은고택(경북문화재자료 제275호)은 매원마을의 여러 고택 중에서 건립 연대가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잘 갖추어진 집이다. 이동유가 정조 12년(1788)에 건립했고, 사랑채는 순조 16년(1816)에 건립,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해은고택의 3칸 규모 평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이 나온다. 사랑마당과 단을 달리해 안마당이 이어진다. 사랑채, 곳간채, 안채가 ‘ㄷ’자형으로 배치되고 안채 우측에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반, 측면 1칸 규모로 맞배기와집이다. 기단은 2척가량 높이로 자연석 기단을 설치한 후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사각기둥을 세웠다. 평면 구성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과 부엌을 연접시키고, 우측에 건넌방을 두었다. 대청 우측에 위치한 건넌방은 안사랑의 기능을 하고 있는데 전면에 퇴를 두고 측면으로도 3자 반 정도의 넓은 퇴를 설치하고 배면에는 2자 정도의 벽장을 설치했다. 안채는 3량가(대들보)인데 대량 위에는 제형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는 간결한 구조를 하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기단은 자연석 기단을 다소 높게 조성한 후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전면 좌측의 4본만 원주를 사용했다. 평면 구성은 좌로부터 2통간 대청, 2칸 사랑방, 문간방, 중문간 순으로 연접돼 있다. 대청과 사랑방 사이에는 4분합 들문을 달고, 2칸의 사랑방 사이에는 4짝 미서기문을 달아 필요에 따라 4칸을 통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꾸몄다. 사랑방 배면에는 출입문을 두어 안채와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감호당(鑑湖堂) 감호당은 조선시대 경성판관, 담양부사를 지내고 흥학에 힘쓴 석담 이윤우(1569~1634)가 매원마을의 자연 풍광에 매료돼 만년에 강학하며 거처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감호정사라고도 한다. 후에 아들인 이도장(1607~1690)에게 물려주게 된다. 이도장은 여기에서 거처하며 독서와 강도(講道)에 힘썼다. 감호당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10년(광해군 2) 이윤우가 사직 후 향리에 돌아온 때부터 1624년(인조 2) 담양부사로 도임한 시기인 1610~1624년 사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감호당 중수기문을 비추어 볼 때도 17세기 초에 건립되었으리라 추측된다. 그 후 두 차례 보수를 했고 1838년(헌종 4)에 크게 중수한 바 있다. 2002년에도 중수에 나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수 기문과 현존 건물을 볼 때 창건 당시 그대로 복원됐다. 서쪽에 일각문을 내고 방형으로 구획한 돌담 안에 ‘一’자형 건물을 남향으로 앉혀 배치했다. 감호당 뒤에는 우측에 직교하여 ‘一’자형의 부속건물이 있어 전체적으로 ‘ㄱ’자형을 취하고 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1칸이며 평면 형식은 중앙에 2통간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1칸 온돌방과 우측에 2칸 온돌방이 배열된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다. 양 온돌방 뒤에는 반침이 설치돼 있다. 청방간에는 2분합 들문이 있고 온돌방 전면에는 쌍여닫이와 외여닫이 띠살창, 측면에는 외여닫이 띠살창 구조이다. 대청 배면은 쌍여닫이 판장창(바라지창)으로 각각 구성돼 있다. 양 측면 박공쪽은 풍판을 달아냈다. 정자, 정사 등 강학지소 건물의 일반적 지붕 구조가 팔작지붕이 많은데 비해 보기 드문 형태다. ◆중방댁(中芳宅) 중방댁은 1860년에 건립된 상류주택으로 정침과 대문간채 일부가 남아 있다. 매원마을 해은고택 바로 앞집으로, 넓은 평지에 정침과 우익사`대문간채가 ‘ㄴ’자형으로 남아 있다. 대문간채 옆으로는 아래채, 아래채 전방에 부속채 1동이 있었으나 근년에 퇴락해 소실됐다. 정침은 정면 8칸, 측면 1.5칸 규모의 ‘一’자형 집이다. 평면 구성은 좌측부터 정지 2칸, 큰방 2통간, 대청 2칸, 아랫방 2칸을 배열하고 정지를 제외한 6칸 전방에는 툇마루를 갖췄다. 공간 구성을 보면, 먼저 2칸 규모로 널찍한 부엌과 2칸을 통간으로 개조한 큰방이 있다. 큰방 뒤로 벽장은 창호와 벽체를 없애 넓혔고, 정지 상부에는 큰방에서 이용하는 다락이 2칸에 걸쳐 축조돼 있다. 대청은 우물마루를 깐 2통간 규모이며, 전면에 유리문을 달아 내부화했다. 대문간채와 연결된 우익사는 방 3칸에 정지 1칸이 남북으로 연결된 ‘一’자형의 남단에 ‘마루방+사랑방+대문간’ 3칸의 ‘一’자형이 결합된 ‘T’자형이다. 구조는 시멘트로 마감한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전면 툇마루를 놓은 툇기둥에는 두리기둥을 사용했다. ◆풍각댁(대원군 벼루사건) 풍각댁은 매원마을에서 삼천 석의 부잣집으로 영남 일원에 소문이 나 있었다. 부자인 만큼 인색하지 않았다. 누구든 집에 찾아오는 손님은 식사 대접을 다 했다. 이래서 풍각댁 범절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주인은 이동형의 현손인 상림이었다. 상림의 집에는 수대를 내려온 보물인 벼루가 있었다. 먹물을 한번 적셔 편지를 한 장 정도는 쓸 수 있는 특이한 벼루였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대원군이 상림의 매제가 승지로 있을 때 수차 그 벼루를 가져와 달라는 부탁을 했다. 하지만 상림은 번번이 거절했다. 대원군이 과객 차림으로 직접 상림을 찾아와 마루에 앉자마자 민비에 대해 욕을 했다. 상림은 연유도 모르고 대원군과 동조해 욕을 하고 말았다. 보름쯤 지났을 무렵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상림을 붙잡아갔다. 그 후 상림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불귀의 객이 됐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헐리는 수모를 당하는 등 가세가 풍비박산했다고 한다. |
칠곡 매원마을 해은고택을 찿아서 ~~
매원마을은 안동 하회마을,경주 양동마을과 더불어
조선시대 영남 3대 양반촌으로 꼽혔던 곳이다~
1788년 건립된 해은고택,,경북 문화재자료(275호)로 지정된 고택이다 이곳 매원마을은
1905년 무렵 400여채의 가옥이 있었으나 6.25전쟁때 인민군이 이 마을에 지휘부를 설치하자
미군의 집중적인 폭격으로 300여채가 소실되고 지금은 60여채만 남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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