仙道 丹功 佛敎/氣天門

기천(氣天)의 역사

초암 정만순 2019. 5. 2. 08:52




기천(氣天)의 역사

 

 

원혜상인 이전

 

기천이 언제 어디서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전해지는 것이 없다.

본디 이름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기천이라 했다는 대양진인의 말씀에 따르면 기천이란 이름도 그 유래를 알 수 없다. 

실체가 분명한 것이 이름이 있고 없고가 무엇이 중요하라마는 오늘날에는 실체 없이 이름만으로 행세하기도 하고 외래가 토종으로 둔갑하기도 하는 터여서 안타까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름이 있고 없고는 실체를 분별해내고 알아보는 일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수천 년 동안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온 든든한 실체가 있는데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우리는 기천의 몸짓과 그것이 품고 있는 또한 이루어내는 도에 더욱 감탄하고 젖어들 뿐이다.

  

기천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가늠해 볼만한 자료로는‘천선녀 이야기’와 '연개소문 이야기’그리고「흐름의 역사」라는 대양진인의 글에 나오는‘개천 성조’와 ‘대국가적 혈맥’이라는 구절 등이 있다

.‘천선녀 이야기’는 달마 조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시대가 고구려 전성기 6세기 전후(단기 29세기)라고 짐작할 수 있으며‘연개소문 이야기’는 7세기 때 일이다(단기 30세기),

개천 성조는 초대 단군의 이름인데 이때부터 수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면 기천은 적어도 4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다 할 수 있다. 

  


다음으로‘대국가적 혈맥(大國家的 血脈)’이라는 대양진인의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국가’라는 말이 우리 민족국가 역사상 전 민족과 영토를 사실상 통일한 국가를 의미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역사상 고조선, 고구려, 발해만이 이 범주에 해당한다.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분명히 내외에 공표했고, 고구려도 고조선의 후예를 자임했다.

발해 이후에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했지만, 영토, 백성, 국력 등으로 보아 실질적으로 계승했다고 보기 어렵고, 조선은 고조선의 후예를 자임했지만 역시 인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대한제국은 식민지로 전략하기 직전이므로 결국‘대국가적 혈맥’이란 말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혈맥을 잇는다는 말이 된다.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는 역사상 우리 민족이 최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의 국가들이고 만주대륙을 호령하는 기마민족으로서 호탕하고 진취적이고 상무적인 특성이 만연했던 전형적인 대국가들이었다.

기천무(氣天武)에 ‘대국가적 혈맥’이 포함되어 있다는 진인의 말씀은 기천무가 바로 고구려나 발해와 같은 기마민족의 대국가적 생명력을 면면히 계승하고 있음을 뜻한다 하겠다.

고구려 안악 3호 고분의 벽화나 집안의 광개토대왕비, 동모산 주변의 발해 유적 등이‘죽어서 고형화된 혈맥’이라면 기천 수련은 살아 숨 쉬면서 민족의 숨결을 지키고 이어가는‘살아 있는 혈맥’으로서 생명력 그 자체인 것이다.

  

대양진인은 기천인들에게 우선 민족의 얼을 지킨다는 높은 사명감과 책임의식으로 정신무장할 것을 요구하신다.

수련을 통해 무인으로서의 인격과 높은 경지의 공을 쌓은 다음, 마지막으로 지킴으로서의 삶을 살고 나서 이름 없이 사라져가는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알고 실천하도록 가르치시는 것이다.

 

정신무장과 뼈를 깎는 혹독한 수련, 그리고 지킴이로서 책임을 다하는 삶이야말로 대양진인의 가르침에 의해 기천인들의 뼈와 살 속에 녹아들고 유전자에까지 심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살아 숨쉬는‘대국가적 혈맥’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이유로 고조선, 고구려, 발해라는 국가는 망해도 그 혈맥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가서는 필요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이러한 기천인의 모습은 과거 고구려의 조의선의(早衣仙人), 신라의 화랑제도, 백제 계백장군의 무사정신, 발해인의 용맹함(발해인은 용맹하기 이를 데 없어서 남자 셋이 모이면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고 한다)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서 산중비전(山中秘傳)의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전수된 것이다.

  

기천문의 세상에 알려진 것은 대양진인의 하산에 의해서다.

대양진인은 원혜상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원혜상인은 또 누군가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원혜상인 이전의 역사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다.

대양진인께서는 자주 할아버지(원혜상인)께 들은 이야기를 회고하는 가운데 독립군 이야기가 적지 않았다.

이 이야기들은 적어도 할아버지(원혜상인) 때이거나 그 이전일 가능성이 있다


원혜상인

 

  원혜상인은 최근세에 있어서 무예분야는 물론 모든 면에서 당대 최고의 도인(道人)으로 알려져 있다.

원혜상인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고 도력이 매우 높은 몇몇 스님들에게만 알려져 있었는데 도인의 세계에서 원혜상인의 배분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탄허스님원혜상인을 만날 때는 원혜상인에게 3배를 올렸다고 한다.

대양진인이 나중에 하산하여,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계엄령이 발포하였을 때에, 대양진인은 호적도 없고 신분이 불확실하여 간첩으로 잡혔는데, 원혜상인을 잘 아는 탄허스님이 대양진인이 그분의 제자임을 증명하는 보증서를 써줌으로써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대양진인은 설악산에서 하산한 후 약 30년간 많은 무술가와 도인들을 만났지만 원혜상인 만큼 훌륭하고 깊이와 높이를 따를 만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원혜상인의 무공은 대단했다고 한다.

큰 나무 한 그루를‘솔장법’으로 내리치면 벼락을 맞은 듯 재가 되었으며 쌀 한 가마니정도는 공기돌 처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또한‘돌단장’으로 집채 만한 바위를 축구공같이 발로 차 버릴 수 있었으며, 발뒤꿈치로 가볍게 치면 바위가 연탄재처럼 부서졌다. 축지법(縮地法)’을 구사했으며 수십미터 절벽을 마음대로 뛰어내리고 올라가는‘경공법’도 구사했다.

그리고‘진법’을 펼칠 수 있어, 대양진인이 수련 중 힘들어 도망치려 해도‘진법’때문에 수련지역 바깥으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원혜상인의 겉모습은 평범한 동네 할아버지처럼 특이한 데가 없었으며 체격은 대양진인보다 약간 크고 일반인보다는 약간 작았다고 하지만, 그 힘은 어떤 장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대양진인이 어렸을 때 보광사의 할아버지 스님이 원혜상인에게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대양진인이 이상하여 그 이유를 묻자 그 할아버지 스님은“원혜상인은 내가 너만큼 어렸을 때에도 할아버지였다”고 할 만큼 대단한 나이와 도력을 갖춘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원혜상인은 대양진인이 하산한 지 3년 후인 1973년 162세의 일기로 돌아가셨으며 옛 선인들처럼 그 자취는 찾을 수 없다.


대양진인

 

진인은 기천의 법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전에 이것을 전통무예로서 세상에 알렸다.

진인이 하산할 즈음은 일본과 중국의 무술들이 한국의 무술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틈바구니를 뚫고 전통무예의 씨를 뿌리고 토대를 쌓아올린 것은 당시로서는 무모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그렇지만 진인은 그러한 역할을 해냈다.

  

해방 후 한국의 무술계는 일본계인 당수도(공수도 혹은 가라데), 합기도(혹은 유술), 검도와 중국계인 당랑권, 태극권, 소림권 등이 세를 양분하여 장악하고 있었다.

국기로 일컬어지던 태권도는 60년대에 만들어져 겨우 이름이 정착된 정도였고 정도술, 정각도, 수박도 등이 순수 고유무술로서 고군분투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민족전통을 내세우는 것은 전혀 대접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외국 어느 문파의 누구에게서 배웠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내세우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일본 검도의 누구에게서 직접 전수받았다거나 중국인 누구에게서 전수받은 것을 자랑삼아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때에 진인은 민족의 전통무예를 내세웠고 많은 압력과 회유를 뿌리치며 기천의 대의를 지켜나갔다.

  

진인은 기천무예를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차츰 기천무예 담긴 기천의 본령을 소개하여 주었다.

진인은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 먼저 민족의 얼을 강조했고, 나라와 민족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수련에 임하라는 말을 무수히 반복해 주입하였다.

또한 참다운 삶과 바른 자세를 지킴은 기천인의 목표이고 그것이 지킴이라는 것을 일러주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고 기존의 무예인들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무예인들은 무예의 위력이나 비교우위, 정교성 등에만 빠져 있을 뿐 그 뿌리나 정신을 힘들여 찾으려 하지 않았다.

수는 많지 않았지만 제자들이 진인의 그러한 가르침에 깊이 감복하였고 수련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으며 기천과 배달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슴에 새겨 넣었다.

마침내 진정한 지킴이로서 다시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 수련계, 무예계, 학술계, 무용계 등에서 지도자로서 지킴이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진인의 세상사는 현대적 민족 지킴이로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산한 지 30년, 자식들을 두고 가정을 이루었건만 아직도 현세에 적응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경고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잘못된 이치와 타협하고 그릇된 흐름을 추구하는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볼 뿐이다.

자신이 해야 할 책임을 다했으나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때는 다가오는 안타까움에 진인은 타는 듯한 목마름을 느낄 뿐이다.

  

진인은 우리에게 전통무예를 소개하였다.

달마대사의 고사를 참고하면 진인의 참뜻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 할 수 있다.

달마는 중국에 선종(禪宗)을 알리기 위해 먼저 무예부터 보급하였다.

그렇지만 이를 깨닫지 못하고 무예만을 전부로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진인의 참뜻은 무예의 기(技)와 수(手)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진인의 참뜻은 무예 속에 담겨진 정신이요 얼이었으며 혈맥이었다.

그러지만 사람들은 수와 기의 화려함에 반하고 권(拳)과 검(劍)의 위력에 혹해서 그것에만 집착하려 할 뿐 그것에 담겨 있는 정신과 얼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진인에게 있어서 기와 수는 한낱 재주에 불과한 것이고 그가 정작 전하고자 한 것은 다른 것이건만 이를 제대로 깨닫는 사람이 없었다.

일반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나 분명 진인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武藝의 技術로써만 말하고 氣天武는 手法, 身法, 步法 등의 術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이 技法은 深淵한 道義를 근본으로 하는 바, 이 道義가 없이는 功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기천무에 담겨있는 도의란 무엇이고 도의에 의해 쌓아지는 공이란 또한 무엇인가?

그동안 제자들은 이러한 의문이 있으되 묻거나 내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말이나 글에 집착하지 말고 몸으로만 수행하라”는 진인의 가르침 때문이다.

듣거나 보아서 쉽게 알려 하지 말고 수행에 의해서 스스로 깨우치라는 가르침으로 알고 더욱 부지런한 수행으로 문제를 풀고자 하였다.

  

기천의 힘든 고행을 이겨내면서 몇몇 제자들이 깨달음을 얻었다.

빨리는 수개월에서 늦게는 십 수년에 걸친 수련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때까지 많은 우여곡절과 환난을 겪었고 그것들을 딛고 일어나서 비로소 그것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깨달음을 얻고서야 기천문에 담긴 도의와 진인의 참뜻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조용히 지킴이로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진인은 기천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대단히 함축적으로 전하고 있다.

  

“어떠한 기법이든지 정신을 넣지 않는 기법은 생명력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기천무는 기법의 생명력뿐만 아니라 무도인의 인격과 배달민족적 정신을 기초로‘대국가적 혈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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