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타협척혈과 척수신경절
침구학의 핵심이론은 경락이론이다.
경락이론은 동양철학의 음양오행론을 근거로 하는 유기체적 이론체계로 이루어졌다.
경락이론에서의 경락이란 형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기능적으로만 작용하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인체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경락이론을 냉소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인체과학, 즉 서양의학은 실증주의에 입각한 구체적인 이론체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양의학자들의 경락이론에 대한 냉소적인 반응은 당연하다.
반면, 동양의학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인체의 신비를 설명할 수 없다면서 동양철학의 근간이 되는 음양오행론의 신비하고 오묘한 이치만이 인체의 신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을 한다.
이와 같이 서양의학자들의 경락이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세나, 동양의학자들의 과학적 이론을 저평가하려는 자세는 모두 바람직스럽지는 않다.
동양의학의 대부분이 형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형이상학적이라고는 하지만,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형이상학적인 많은 부분이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라는 것을 규명해 냈기 때문에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은 서로 보완의 관계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14경락 중 방광경에 속한 배유혈(背兪穴)과 임맥, 위경, 비경, 담경 등에 속한 복모혈(腹募穴)이 있다.
배유혈은 등허리 쪽으로 유주하는 제1방광경락상에 오장육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경혈을 말하며, 복모혈은 가슴이나 복부 쪽으로 유주하는 경락상에 속해 있는 경혈을 말한다.
복모혈은 경락의 기가 집결되는 곳이며, 배유혈은 경락의 기를 수송하는 곳이라 하여 복모혈이나 배유혈에서 오장육부의 병적인 반응이 압통, 경결, 근의 강직과 같은 과민증상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곳이다.
실제로 내장의 어떤 장기가 병적인 상태에 있을 때 그 반응이 복모혈이나 배유혈 중 어느 곳에 나타나기도 하여 전통의학자들이나 침술사들의 진단처 내지는 치료처로 삼는 것이다.
복모혈이나 배유혈이 전통의학자들의 진단처나 치료처로 중요하게 여기게 된 데에는 수천 년의 경험에 의해서이다.
동양의학에서의 축적된 경험에 의해 정립된 이론들은 훗날 과학자들에 의해 입증된 사례들이 한두 건이 아니다.
이렇듯이 여러 세월을 거치면서 축적된 경험은 대단한 힘과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복모혈이나 배유혈에서 나타나는 병적인 반응은 축적된 경험에 의해서인데, 이와 같은 현상을 19세기말 영국의 신경학자인 헤드와 영국의 의사인 맥켄지가 내장체성반사론으로 입증을 하게 되었다.
내장체성반사이론이란 오장육부 중 어느 한 장기가 병변을 일으켰을 때 척수신경을 통해 등 쪽이나 복부 쪽에서 압통, 경결, 근의 강직과 같은 과민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그 병적인 반응이 나타나는 배유혈이나 복모혈을 발견했던 동양의 선지자들을 두고 어떤 서양의학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의학의 경락설이 완벽하게 과학적으로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동양의학의 경락설에서는 내장의 병적 반응이 종적인 경락상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서양의학에서 설명하는 병적인 반응이 횡적인 척수분절상에서 나타난다고 하는 점과는 배치되는 견해이다.
서양의학, 즉 신경해부생리학에서 설명하는 힁적인 척수분절이란 등줄기의 뇌에서 허리로 연결되어 있는 척수라는 중추신경에서 좌우로 빗살처럼 뻗어나간 척수신경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 척수신경은 위로부터 경추에서 유래된 8개의 경신경과 흉추에서 유래된 12개의 흉신경, 요추에서 유래한 5개의 요신경, 천골에서 유래한 5개의 천골신경, 그리고 미골의 1개의 신경 등 모두 31개의 말초신경들로 구성되어 있다.
31개의 척수신경들은 밖으로는 피부 및 사지의 근육과 뼈와 같은 조직과 연결되어 있고, 안으로는 혈관이나 오장육부와 연결돼 있어 중추신경인 척수와 의사소통을 한다.
그러니까 31개의 척수신경은 경추에서부터 꼬리뼈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가로로 뻗어 있는 해부학적인 형태를 이루며, 이러한 형태를 척수분절이라고 하는 것이다.
경추에서 가로로 뻗어 나간 8개의 신경들의 숫자 앞에 목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C1~C8, 흉추신경은 T1~T12, 요신경은 L1~L5, 천골신경은 S1~S5, 미골신경은 Co1라고 표기하며, 척수분절을 인체의 체표에다 표시를 하여 신경전문의사들이 중요한 임상의 지침서로 삼기도 한다.
만약에 손가락이 저리는 증상이 있다면 경신경으로부터 유래되는 척수신경의 이상에 의한 것인데, 5개의 손가락이 지배 받는 척수신경은 동일하지가 않다.
엄지는 경신경 6번 째 척수분절, 즉 C6의 지배를 받으며, 식지와 중지는 C7, 무명지와 새끼 손가락은 C8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식지나 중지가 저리다면 C7의 척수신경에 병변이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31개의 척수신경들이 뇌에서 꼬리까지 내려간 척수에서 양 쪽으로 빗살처럼 가로로 뻗어 있기 때문에 횡적인 척수분절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경락은 모두가 세로로 뻗어 있으므로 종적인 경락체계라고 한다.
경락설과 척수신경절을 비교 연구하는 어떤 연구자에 따르면 오장육부에 병변이 있게 되면 반응이 체표로 압통, 경결, 근의 강직 등으로 나타난다고 한다는 점에서는 동서의학이 같은 견해를 갖고 있으나 경락설에서는 병적 반응이 종적인 경락상에서, 척수신경절 이론에서는 횡적인 척수분절상에서 나타난다는 상반된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병적 반응이 종적인 경락상에 나타난다는 이론이나 또는 횡적인 척수분절상에 나타난다는 두 이론 모두 동일한 인체를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동일한 인체가 서로 상반되는 이론체계로 설명되고 있다는 것은 어느 한 쪽에서 인체의 생리적, 병리적 현상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경락설에서 오장육부의 병적 반응이 나타나는 곳은 배유혈이며 이를 진단과 치료의 기준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배유혈은 척수신경의 신경절이 있는 동일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경락은 형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기능적으로만 작용한다는 형이상학적인 존재이며, 신경은 해부생리학적으로 존재하는 실제의 조직으로서 인체의 감각과 운동을 지배하는 주체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배유혈의 병적인 반응은 형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경락의 병변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척수신경절의 병변으로 보아야 마땅한 것이다.
오장육부의 어느 장기가 병적인 상태가 되었을 때 그 반응은 통증이나 경결, 근의 강직과 같은 현상으로 해당 척수신경으로 연결된 척수분절상의 등이나 복부에서 나타나게 된다.
전통의학자들은 많은 경험에 의해 오장육부의 병변이 나타나는 곳을 배유혈로 정했다.
그 병변은 종적인 경락상을 타고 전해진다는 이론을 확립했으나 서양의학은 그 이론이 오류임을 규명해 낸 것이다.
사지말단에 있는 경혈들은 종적인 경락이론에 의해 생겨난 것들이며, 위장병이 있을 때 종적인 경락상에 존재하는 족삼리를 자침하는 것보다 횡적인 척수분절상에 있는 위유나 중완을 자침하는 것이 효과가 더 좋은 것은 실제적으로 척수분절상에 위와 연결된 척수신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연구자에 의하면 모든 병리의 주요 원인은 대뇌로부터 척수신경분절에 도달된 흥분성 신호에 의한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유전적으로 중추신경계의 어떤 부분에 결함을 갖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여러 환경적인 요인과 생활습관에 의한 중추신경계의 결함은 가중되게 되는데, 결함을 가진 중추신경계의 어떤 부분이 체절신경계를 지속적으로 흥분을 시킨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체절신경 중 T3, T4의 흉신경을 지배하는 결함을 가진 중추신경인 대뇌로부터 지속적인 흥분의 신호가 전도되면 이들 신경이 가로로 뻗어 있는 피부나 근육은 물론, 이들 신경과 연결되어 있는 내장, 즉 폐나 심장이 병적인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럴 때 그 병적 반응은 척수신경절인 T3나 T4에서 나타나고 그 척수신경절이 있는 곳이 다름 아닌 배유혈인 페유나 심유 또는 궐음유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T3, T4의 척수분절이 횡으로 뻗어 있는 복부의 옥당과 단중 또는 거궐에서 반응이 나타난다고 한다.
지금까지 경락이론과 척수분절이론을 비교하면서 병적인 반응이 나타나는 기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침으로 질병을 치료하려는 서양의사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경락이론에 근거하여 침을 놓기보다는 신경학에 입각하여 침을 놓는다.
더구나 침을 놓는 의사가 신경전문의라면 말할 것도 없다.
신경학적인 척수분절 이론에 근거하여 침을 놓는다는 것은 경락상의 종적으로 위치한 원격혈에 자침하는 것이 아니라, 횡적인 척수분절상에 위치한 국소혈이나 압통점에 바로 자침하는 것을 말한다.
형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기능적으로만 작용한다는 형이상학적인 경락이론을 근거로 침 놓는 일이 막연한 상황이라면, 해부생리학적으로 확실히 규명되고 실제로 존재하는 신경학적인 이론을 근거로 침을 놓는 일은 확연한 상황이다.
등허리에는 방광경의 배유혈뿐만 아니라 경외기혈로 화타협척혈이 있다.
화타협척혈은 척추뼈에서 양방으로 1cm 나간 자리로서 경추에서부터 요추까지 이어져 있다.
이들 협척혈에 화타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은 중국 고대의 명의였던 화타처럼 병을 잘 고친다는 특징 때문이다.
지방의 어느 곳에 침을 잘 놓기로 소문난 할아버지의 비방은 바로 화타협척혈에만 침을 놓는다는 것이다.
이 화타협척혈은 신경학에서 말하는 척수신경절이 있는 곳으로서 배유혈보다 더 정확하게 일치하는 곳이다.
이침저침을 다해 보아도 발전의 기미가 안 보이는 침쟁이들은 화타협척혈에 침 놓는 것을 제대로 익혀두면 명의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다만 배유혈이나 화타협척혈이 있는 내부에는 장기가 들어 있기 때문에 자침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동양의학의 경락이 종적으로 이루어졌고 종적인 경락상에 있는 사지말단에서 자침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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