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林 江湖/조선권

[스크랩] 선무도

초암 정만순 2014. 3. 22. 10:38

한국 불교사의 호국사상과 선무도 

 불교의 전래(傳來)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삼국시대로서,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 진왕부견(秦王符堅)의 명에 따라 순도(順道) 내한 (來韓)하고 2년 뒤에 아도(阿道)가 온 것이 한국불교의 공식적인 시작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전에 이미 민간의 왕래를 통해 불교가 들어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백제는 침류왕(枕流王) 원년(384)에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으로부터 들 어 왔고 신라는 제 19대 눌지왕 때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신라의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선산)에 들어온 것이 처음이다.

이와 같이 한반도에 불교가 유입된 경로는 사기(史記)에 의하면 고구려는 화북(華北)의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불교가 육로로 따라 들어오고 백제는 중국 강남 (江南) 동진에서 해로를 따라 전래되었다는 학설이 지배적이나 가야국의 불교처럼 해로를 따라 동해 남부 지역으로 유입되었다는 설이 있다.

특히 필자가 상주하는 골굴사(骨窟寺)와 인근의 기림사(祈林寺)의 창건 설화는 인도에서 온 광유성인(光有聖人) 일행이 창건하였으며, 광유성인은 오늘날의 미얀마 지역(옛인도)의 전설 속에 전해지는 역대 조사중의 한분이다. 자국의 사원 양식을 본따 만든 석굴사원 골굴사는 티벳의 돈황이나 인도 아잔타, 엘로라 석굴사원의 축소판이며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곳이다.

그 시대 삼국에 불교를 전래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천축(天竺, 인도)에서 온 승려들이다.

특히 신라불교의 전래에 관해서는 학자들의 상세한 연구와 몇가지의 학설이 있다. 그중에 삼국사기(三國史記) , 신라본기에 의하며 눌지왕때 사문(沙門) 묵호자가 신라의 일선군에 들어 왔을 때 군인 (君人)중에 모례(毛禮)라는 자가 집안에 토굴을 만들어 그를 살게 했다.

그때 마침 중국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의물(依物)과 향(香)을 헌상했다.

임금과 신하들은 향의 이름과 그 사용법을 몰라서 묻고 다니던 중 묵호자가 그 이름을 가르쳐 주면서 "이것을 태우면 꽃다 운 향기가 나고 정성으로 신성(神聖)에게 통할 수가 있다.

신성으로서는 삼보(三寶)에 더할 것이 없으니 삼보란 불(佛), 법(法), 승(僧)이다.

만약 향을 태워 발원한다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때 왕녀(王女)가 병이 들어 위급한 상태이므로 그는 향을 태워 축원하니 쾌유되었다.

왕은 매우 기뻐서 예물을 하사하였다.

묵호자는 받은 물건을 모례에게 모두 주고 떠났는데 그 후로는 행방을 알 수 없었다고 전한다. 또 하나의 전래설은 삼국유사 권3, 아도기라(阿道基羅)조에 인용된 아도본비의 설이다.

아도는 고구려에서 왔으며 미추왕2년 계림(鷄林)에 와서 불법 (佛法)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지만 허용받지 못하고 해침을 받으므로 일선 모례의 집으로 숨었다.

여기에 은신하기를 3년, 성국공주의 병을 고쳐 왕은 기뻐하여 절을 지을 것을 허락했다.

이것이 흥륜사(興輪寺)이고 다시 삼천기(三川支) 영흥사(永興寺)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가 신라에게 정식으로 공인되어 흥포되기는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의 의해서이다.

 

화랑도에 끼친 선무도의 사상과 수행

그후 많은 고승들이 출현하여 신라의 정치와 문화에 영향을 끼친다. 특히 불교의 사상과 수행법이 동인이 되어 크게 발전된 화랑도의 전기는 빼놓을 수 가 없다.

호국불교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 정신은 세속오계로 유명한 원광법사(圓光法師)로

부터 그 뿌리를 내린다. 원광법사의 전기는 '삼국사기'와 중국의 '속고승전', '삼국유사' 등에 전하고 있다. 일찌기 중국에 유학 하였으며 중국 장안에 명성을 떨칠만큼 도를 얻음으로써 신라 국왕의 명을 받아 서기 600년에 귀국한 뒤 왕을 도우며 불법홍포에 힘썻다.

한때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수(隋)에 원병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작성하라는 진평왕의 명에 "자기가 있기 위해 타를 멸하게 하는 것은 사문의 행위가 아닙니다.

빈도가 대왕의 국토에 있으면서 대왕의 수초(水草)를 먹습니다. 감히 유명(惟命)을 따르지 않으오리까?" 하며 그 명을 받 들었다.

한때, 기산(箕山)등 2인의 무사가 찾아와서 평생동안 지켜 나아갈 종신계(終身戒)를 구하고자 하였을 때 비로서 세속오계 (世俗五戒)를 내리게 된다.

이것은 불교도로서,

"첫째 나라에 충성하고,

둘째 부모에 효도하며,

셋째 벗을 믿음으로 사귀고,

넷째 싸움터에서 물러서지 않으며

다섯째 살생을 가려서 하라" 이다.

훗날 이 두사람은 전쟁터에서 백제군에 포위 당했을 때 "싸움터에서 물러서지 말라"는 교훈을 생각해서 적진으로 돌진해 분투 했다.

이로 인해 신라군의 사기가 충천하여 결국 전쟁에서 이겼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신에 상처를 입고 돌아오는 길에 도중 에서 죽었다.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보낸 표문을 제작한 것도 진평왕의 왕사(王師)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고, 그의 세속오계 에서 "나라 (임금)에 충성하라"는 충성심과, "싸움에서 물러서지 말라"는 임전무퇴의 사상은 불교의 호국사상의 토대가 된다.

그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나타난 승병들의 구국정신이 곧 호국불교 사상이 역사적으로 실현된 결과인 것이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신라는 진평왕대에 이르러 화랑도 운동이 크게 일어 났으며, 많을 때는 7개 이상의 화랑집단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 집단을 지도하고 통솔하는 제도가 있었으니 화랑집단은 각기 대표자인 화랑 한명과 이들의 교학과 무예를 지도하는 약간의 승려들과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낭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낭도의 수는 일정하지 않으나 많을 때는 천명이 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3년 동안의 수련기간을 통해 주로 경주 인근의 남산과 함월산, 금강산, 지리산등 명산을 찾아 자연과 접하여 국토에 대한 애착심과 호연지기를 익히고 교양과 무예를 수련하였으니 사찰이 곧 그 역할을 한 수도장이며 승려들이 오늘날 의 교관과 같은 임무를 수행했었다.

그 시대에 창건된 크고 작은 사찰들 중 특히 저자가 주지로 역임한 바 있는 함월산(含月山) 기림사(祈林寺)는 화랑도들의 수도장으로써 크게 활용되었으며 그 뒤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승병들이 주석했던 대표적인 호국도량이다.

화랑도 정신은 불교의 미륵신앙(彌勒信仰)이 그 중심사상이다.

그 수령인 화랑은 도솔천에서 하생한 미륵으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그 집단 자체가 미륵을 쫓는 무리로 일컬어 졌다 화랑 김유신의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는

것이라든지, 화랑 죽지랑(竹旨郞)의 탄생설화에 미륵이 등장하고 있는 점, 또한 진지왕때에 승려 진자(眞慈)가 항상 당주(當主)인 미륵상 앞에 나아가 대성(大聖)이 화랑으로 화신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기를 빌었다는 미륵선화(彌勒仙花)의 이야기들은 모두 화랑도의 미륵신앙과 깊은 관계를 암시하는 실례들이다.

이와 같이 화랑도는 불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승려들로부터 교학과 무술을 배우며 장래 국가에 제목으로 성장 하여 필경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역사 속의 승군(僧軍)으로 꽃핀 선무도

 

신라의 화랑도 정신을 배양한 불교의 호국사상은 근본 불교의 실천 수행법인 선무도의 수련이 그 바탕이 된다. 말하자면, 아무리 사상이 훌륭하고 이론이 논리정연 하다고 하나 그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실천적 수련이 없이는 사실적 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밀교의 고승들이 기기묘묘한 신통술을 구사한 것은 차치 하더라도 승려들 개개인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련이나 선무도에서 말하는 무술적인 동공(動功)을 평소에 연마해 왔기 때문에 유사시에 승군(僧軍)으로 출전이 가능했을 것이란 짐작을 뛰어넘은 역사적 사실이 조선말기 갑오경장(1894)때 승군제도가 폐지될 때 까지 수없이 기록되어 왔다.

세기를 초월한 호국 불교 정신은 선무도와 함께 그 맥을 영원히 이어갈 것이다.

나라의 위난을 구하기 위해 승려들이 자진해서 조직한 군대, 중국에서는 명나라때 승군이 생겨났다는 기록이 있지만 개별적인 무승(武僧)들의 전기는 중국의 역사소설 속에 꽤 많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때부터 승군의 활동을 살필 수 있으니 그 역사적 사실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승군 편을 열거해 본다. "승군(僧軍):나라의 위난을 구하기 위하여 승려들이 조직한 군대. 중국에서는 명나라 때 처음으로 승군이 생겨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때부터 승군의 활동을 살필 수 있다. 수나라의 백만대군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을지문덕은 살수의 강물을 막아 적병으로 하여금 강을 건너오도록 유도하였으나 그들이 믿지 않았다.

이때 가사(架娑)를 입은 7명의 승려가 나타나서 발을 걷고 강을 건넜으므로 적병들이 속아서 강을 건너게 되어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신라의 승려 도옥 (道玉)은 백제가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했을 때 결사대를 조직하여 적진에 들어가서 기습공격을 하여신라군에게 승리의 계기를 만들어준 뒤 전사하였다.

백제의 도침(道琛)은 나라가 망하자 복신(福信)등과 함께 백제부흥운동에 힘쓰는 한편 임존성(任存城)을 중심으로 패잔병을 재조직하였고, 신라 및 당나라 군사와 싸워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복신이 보낸 자객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또 통일신라 말기의 난세에는 해인사에서 승군을 조직하여 난도(亂徒)들의 공격으로부터 사찰의 식량과 재산을 자체적으로 방위하였다.

고려시대에도 국가에 위난이 있을 때에는 승려들이 승군을 조직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다.

고려에서 승군에 관하여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104(숙종 9)에 항마군(降魔軍)이라는 명칭으로 정규군에 편입된 때부터이다. 그뒤 어려운 상황이 있을 때마다 승군을 차출하게 되었다.

1010년(현종 1)에 거란의 침략으로 서경이 위기에 놓였을 때 승장 법언(法言)은 사정(思政)등과 함께 9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원역(林原驛)에 진을 치고 거란병을 공격하여 적병 수천명을 살상하는 큰 전과를 올렸으나 법언은 순국하였다.

인종 때에는 관선(冠宣)과 상숭(尙崇)등이 묘청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1174년(명종 4)1월 이의방(李義方) 이 난을 일으켰을 때 중흥사(重興寺) 승군 2000여명과 의승병들은 이의방을 죽이고 나머지 역도들을 모두 섬멸하였다.

또 1176년 공주에서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가 난을 일으켰을 때에도 승군의 활동이 컸으며, 1182년 죽동(竹同)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안찰사 박유보(朴惟甫)가 이끈 관군은 죽동에게 패하였으나 승군이 출병하여 그 난을 진압하였다.

 

1216년(고종 3) 8월에 거란이 우리나라 서북쪽 국경을 침범하자 조정에서 군대를 파

견하여 적을 막게 하였는데, 이때 승군 수백명이 참가하였다.

특히 몽고의 침략 때에는 김윤후(金允侯 )의 활약이 뛰어났다.

원나라가 살례탑(撒禮塔)을 도원수로 삼 아2차 침략을 하여 처인성을 공격하였을 때 승려였던 김윤후는 활을 쏘아 살례탑을 죽였고, 원나라가 4차 침략을 하였을 때에

는 충주산성 방호병감(傍護兵監)이 되어 70여일 동안 산성을 수호하여 적군을 물러

가게 하였으며, 1254년의 제5차 침략 때에 도충주성의 함락을 막았다.

이 5차 침략 때 상주산성을 지키고 있던 승장 홍지(洪之)는 백발백중의 실력으로

적의 지휘관을 사살하고 사기를 꺾었으며,여러 차례의 공방전으로 적의 병력 반이상을 살상하여 적을 물리쳤는데, 이 5차 침략 때 함락되지 않은 성은 충주성과 상주성뿐이었다.

고려 후기에는 승군의 세력이 매우 강성하였다.

1359년(공민왕 8년) 12월에 홍건적의 침입이 있게 되자 선교양종의 승려들이 참여하여 이들을 막았고 전국의 사찰에 있던 말을 군용으로 보충시켰다. 1377년(우왕 3)에 화통도감(火通都監)을 세우고 화약제조술을 중국에서 도입하였을 때, 1급의 비밀에 속한 기술 요원은 승군에서 충당하였고, 화통을 쏘는 포군(砲軍)은 서울과 각 지방의 사찰에 인원수를 할당하여 조직하였다.

1378년 3월에는 대마도의 왜구와 강화도 인근의 왜구가 개경의 함락을 목적으로 대거 침략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경상도와 양광도에서 1000인의 승군과 교주, 서해, 평안도에서 각 500인의 승군을 차출하여 병선을 제조하고 화약병기를 사용하여 적을 물리치게 하였으며, 1388년 4월에는 승군들이 왜구의 침략을 막았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승려 자체의 군사조직을 만들 수 가 없었다.

오히려 무도첩승(無度牒僧)을 환속 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때를 같이하여 승군의 조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선초기에는 무도첩승을 승군으로 동원하여 일정기간 성곽 또는 요새를 수축하게 한 뒤 그 대가로써 호패(號牌)를 급여하고 신분을 보장해주었으나 그뒤의 무도첩승을 가리지 않고 모두 승군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왜변이 끝난 뒤에도 수년동안 에 걸쳐서 배를 만들거나 성을 쌓는일에 나라를 구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보냈고, 전국 각지에서는 의승군(義僧軍)이 궐기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싸움은 영규(靈圭)의 청주성발성(淸州城拔城), 처영(處英)의 형주산성대첩을 비롯하여 유정(惟政)의 지휘 아래에서 이루어진 평양탈환 때의 모란봉전투(牡丹峰戰鬪)와 도성 수복 때의 수락산전투, 노원평전투, 송교전투 등 을 들 수 있다.

유정이 의주에서 조정으로부터 도총섭(都摠攝)의 직첩을 받은 것은 1592년 7월이었는데, 휴정은 그 이전부터 600명의 승군을 조직하여 평양 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 승군은 뒷날에 조직된 법흥진(法興鎭) 승군의 모체가 되었다. 유정은 강원도에서 귈기한 150명의 승군을 이끌고 황해도를 거쳐서 1592년 10월에 평양성 동쪽에 이르렀는데 이때의 수는700여명이 넘었다. 다시 그들이 법흥진으로 갔을 때 법흥진의 총 승군병력은 5000명에 이르렀다.

평양탈환 직전인 11월부터 평양과 중화지방의 적군을 차단하는 작전에 임했던 법흥진승군은 평양탈환전에서도 유정의 지휘 아래 난공지점인 모란봉 방면을 담당하여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산악지대의 지세와 지형을 평소 잘 숙지하고 있었던 승군이었으므로 평양탈환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북관(北關)에서의 적의 동태를 정찰하는 임무도 담당하였다.

승군은 의병과는 달리 끝까지 관으로부터 해체를 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군의 재정비와 명나라 군사가 온 뒤부터는 한편으로 싸움에 임하면서 한편으로는 군량미 수송도 담당하게 되었다.

또 한양의 수복후 에는 성을 쌓는 일을 담당하는 등 준 관군의 형태로 변하여 갔다.

전후 7년 동안에 걸쳐서 전국 각지에서 승군의 활동이 전개 되었는데, 전라도 무주지방에서의 공방전과 경기도에서의 죽산 전투 등도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유정은 한양 수복 후에도 영남지방에서 왜구들과 싸우는 한편 성을 쌓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일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도산성공격(島山城功擊) 과 예교총공격(曳橋總功擊)에도 참가하였다.

그리고 휴정의 뒤를 이어 직첩 없이 도총섭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대표적인 승병장으로는 휴정, 유정 ,영규, 처영 밖에도 <선조실록>에는 많은 승려들 의 기록이 있다. 무기를 만들고 성을 쌓는데 공이 컸던 법견(法堅),

정보를 담당했던 행사(行思), 죽산성을 쌓았고 그 성의 수비대장을 겸했던 영주(靈珠), 담양 옥천사 에서 봉기한 인준(引俊), 용진의 월계산성(月溪産城)수축의 책임을 맡았던 견우(見宇), 경상도에서 봉기하여 전공을 많이 세운 인오(印悟)와 천연(天淵),평안도, 황해도 일대의 수비대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법정(法正), 여천일대의 무기고 수비에 공이 컸던 혜희(惠熙), 이순신의 해군에 편입되어 작전을 편 의능(義能), 해전에 참여한 삼혜 (三惠), 서산대사의 뒤를 이어 도총섭이 되었고 파상성(婆娑城)을 쌓았던 의엄(義嚴), 충청도 부여 출신으로 의승을 모집 하여 권율의 휘하에서 적을 맞아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한 설미(雪尾), 경상우도총섭이 되어 군량미의 자급자족을 위해 농사를 짓는 한편 해인사에서 활과 화살, 화약을 만들어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의승군에게 보급하고 처음의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신열(信悅)등이 있다.

또 1605년(선조 38) 4월에는 임진왜란 때의 군공(軍功)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녹공이 있었는데, 이때 공신 이 된 승군은 34명 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에서는 승군 동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1593년 8월에 도총섭 밑에 각 도마다 총섭 2명씩을 두게 하여 조직을 일원화 하였다.

그러나 16종총섭의 제도는 한정된 지역에서나마 실제로 선교양종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양상을 나타내게 되었으므로 각 도의 2명씩을 1명씩으로 줄였다.

북상할 기세를 보였던 1593년에는 경상도에 한해서 다시 2명을 두게 함으로써 유신들의 자가당착적인 정책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 병자호란 때에는 각성(覺性)과 명조(明照)등의 의승군이 활약하였다. 각성은 1624년(인조 2)에 팔도도총섭이 되어 남한산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였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왕이 남한산성으 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중지하였다.

명조는 1627년 후금이 침략해오자 의승군 4000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진을 쳐서 크게 전공을 세웠고, 병자호란 후에 승군들은 산성의 수축 및 수호에 주력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곳으로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두었던 남한치영(南漢緇營)과북한치영(北漢緇營)을 들 수 있다. 각성이 감독하여 쌓은 남한 산성 안의 남한치영은 각 도에서 의승을 불러서 번을 서게 하였고, 성안의 9개 사찰승군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게 하였으며, 도총섭 1인 밑에 중군(中軍) 1인, 교령관 1인, 초관(哨官)3인, 기패관(旗牌官)1인, 상 안팎 10개 사찰의 원거승군(原居僧軍) 138명, 의승(義僧) 356인을 두었다. 북한치영은 1711년에 북한산성을 쌓음으로써 생겨나게 되었다. 주위 7620보에 장대(將臺) 3곳, 대문 4곳, 암문(暗門) 10곳을 비롯하여 도총섭이 있는 중흥사(重興寺)를 중심으로 태고사, 노적사, 서암사, 경흥사, 국영사, 원각사, 부황사, 보광사, 보국사, 용암사, 봉성암 등의 사찰이 있었으며, 이들 사찰에 승군들이 머무르면서 산성을 수호하였다. 승영에는 도총섭 1인과 중군. 좌별장. 우별장. 천총(千摠), 파총(把聰), 좌병방(左兵房), 우병방 각 1인, 교련관, 기패관, 중군병방(中軍兵房), 각 2인, 오기차지(五旗次知) 1인, 도훈도(都訓導), 별고감관(別庫監官) 각 1인, 사료군(射料軍) 10인, 서기 2인, 통인(通引) 2인, 고직(庫直) 3인, 책장무(冊掌務), 판장무(板掌務) 각 1인 취수(吹手) 2인, 각사승장(各寺僧將) 11인, 수승(首僧) 11인, 의승 350인을 두었다.

이들 치영 외에도 역대왕조실록을 둔 곳 가까이의 사찰인 강릉 월정사, 무주 적상산성, 봉화 각화사, 강화 전등사에 수호승군을 두어 실록 수호의 임무를다하게 하였다.

이 승군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다.

 

밀교의 전래와 선무도

 

삼국시대 불교가 처음으로 유입될 때는 밀교적 형태를 띠고 들어왔다.

당시 인도에서 온 승려들은 거의가 정통 밀교의 대가들이며 그들의 교화방편 또한 즉신성불 (卽身成佛)의 수행과 다라니(진언)를 외우는 주술적 행위를 통해 많은 이적을 나타낸다.

나중에 교학과 선(禪)불교가 들어와 혼합되었으며 종파의 개념으로 볼 때 이들을 유가종(瑜伽宗)으로 분류된다.

선무도의 원천이 되는 불교의 실천 수행법인 밀교(密敎)의 고승(高僧)들 중에는 신라에 신인종(神印宗)을 일으킨 명랑(明朗)법사를 들 수가 있다. 선덕여왕 원년(632) 명랑은 당나라로 가서 4년 동안 밀교를 배우고 돌아 왔다. 귀국길에 바다의 용을 만나 그의 청으로 용

궁으로 가서 비법을 전하고 황금 천냥을 받아 땅 밑으로 잠적해서 자기 집 우물 밑 바닥으로 나왔다고 한다.

자기 집을 절로 만들고 용왕이 준 황금으로 탑을 세우니 그 광채가 빛나 그 절은 금광사(金光寺)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삼국유사 권2 기이(奇異) 제 2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조의 기록에 의하면, 당(唐) 고종이 십만대군을 보내어 신라를 침범하려 했다. 이 사실을 김인문(金仁問)으로부터 들은 의상대사가 속히 귀국하여 문무왕에게 보고했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방위책을 논의한 즉, 한 신하로부터 '명랑법사가 신통한 비법을 배워 왔다',는 얘기를 듣고 하문했다.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을 개설했다. 그때 이미 당의 군사들은 바다로 육박해 오고 있었다. 명랑은 오색이 찬란한 천으로 임시로 절을 짓고 잡초로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 유가종(瑜伽宗)의 승려 12인과 함께 문두루(文豆婁, mantra)를 외워 기도한즉 풍랑이 일어나 당의 배가 모두 침몰했다.

이 절을 후일 다시 창건하여 사천왕사라 했다.

명랑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밀본(密本)화상이 있다 . 약사경(藥師經)을 읽어 신통을 부려서 선덕여왕의 병을 치유한 기록은 유사 권5(신형神兄 제6)에 전하며 많은 기적을 타내어 민중들이 귀의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당나라에서 무외삼장(無畏三藏)에게 밀교를 수학하여 인결(印訣)를 전수받은 혜통(惠通)이란 스님이 있다. 또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한 혜초 스님을 빼 놓을 수 없다.

인도를 두루 여행하고 중국 장안으로 돌아와(733) 금강지(金剛智)삼장에게 입실하여 8년간 밀교를 배운다. 나중에 불공(不空)삼장이 당으로 와서 활약할 때 수법제자 6인 중에 한 사람으로서 후에 수법제자가 된다. 당나라에서 입적한 것으로 추측되는 혜초스님의 밀교경전은 신라에 전해져 금강지, 불공삼장의 정통밀교를 받아들이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이러한 정통 밀교적 수행은 고려시대까지 종파를 형성하며 계승되어 전반적인 불교의 수행과 민간신앙에 널리 수용되어 왔다.

진언(眞言, 다라니)을 외우고 수인(手印)을 지어 작법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신라 후반기에 중국으로부터 선불교(禪佛敎)가 유입되면서 한국불교의 선종사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밀교적 수행은 북종선인 묵조선(黙照禪)과 더불어 수행체계를 이루며 그 맥을 이어 왔으나 한국불교는 남종선의 영향을 크게 받아 발전한 간화선(看話禪) 위주의 조계종이 주류를 이룸에 따라 밀교는 그 뒤로 면면히 전해져 오늘날에는 통불교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필자가 포교의 방편으로 지도하는 선무도의 본래 명칭은 불교

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이라고 한다. 스승이신 양익(兩翼)대종사께서 일찍이 득도하시어 관법을 통해 깨달음을 증득 하시고, 한국불교에 전래하는 관법류의 수행법을 집대성하여 1960년대 초에 부산 범어사에서 연수원(鍊修院)를 개설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심에 필자도 은혜를 입어 수학한 뒤 스승으로부터 대금강문(大金剛門)이란 문호(門號)를 하사받고 1984년부터 대중 포교에 임하게 되었으니 곧 오늘의 "선무도 대금강문"이다.

관법수행에 대한 개념이 대중화 되지 못하고 금강영관이란 명칭에 모두가 난해함을 느껴 현대인들의 언어감각에 맞게 "선무도"로 개칭하여 골굴사에 총 본원을 두고 2000년 현재 국내외에 20여개의 지원 지부를 개설했다.

 

 

 선무도 수행관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법 가운데 밀교(密敎)의 일종인 관법(觀法)이란 수행 이 있다. 고대 중국의 천태산 수선사(修禪寺)의 지의조사가 저술한 수습지 관좌선법요(修習止觀坐禪法要)란 책에 의하면 "대저 열반에 이르는 방법은 여러 길이 있으나 가장 핵심적인 것은 지(止)와 관(觀) 두 방법밖에 없다." 고 전하고 있다.

육조 혜능대사 이후로 체계적인 선의 개념으로 발전되어 우리나라로 전래 된 오늘날의 선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이 관법은 원래, 고대인도의 선주민 (先住民)들에 의해 베다사상과 더불어 발전된 요가(Yoga)적인 수행방법으로서 당시 인도의 바라문 수행자들에겐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후, 불타의 출현과 함께 새로운 사상과 철학이 정립되면서 불교적인 독특한 형태의 수행방법으로 발전되어 왔다.

이러한 밀교적인 관법이 오늘날 한국 불교의 전반적인 의식이나 수행법에 도 짙게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선무도(禪武道-불교 무술)의 핵심은 바로 이 러한 관법을 토대로 이루어져 있다.

 

선무도 또는 불무도(佛武道)라고 하면 흔히들 TV나 저자거리에서 약장수들 이 떠벌리는 괴상한 묘기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미지이 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며 일부 지각없는 무술인들이 개인의 과시나 장사의 수단으로 불교를 빙자하는 사이비 행각에 불과하며, 아울러 필자는 이 기회를 통해서 선무도가 단순한 무술의 차원을 넘어서서 깨달음 을 구하기 위한 수행의 한 방편임을 밝히고, 아울러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 떠한 연관성을 이루며 그 사상적 배경과 수행법으로 전해져 왔는지를 경전 과 그와 관련된 문헌을 토대로 기술해 보고자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현교(顯敎)와 밀교의 두 가지 방편이 있다.

현교는 나타내서 설(說)해진 가르침인데 비해서 밀교는 비빌로 설해진 가르 침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법신불(法身佛)인 大日如來(비로자나불)가 깨달은 내용을 스스로 비추어 보면서 즐기는 자수자락(自受自樂) 삼밀(三密)의 가르침을 밀교라 고하며 범어로는 구흐야나(guhyana)라는 말에 해당된다.

이러한 밀교적인 측면에서 유통된 불교의 역사를 보면 원시불교에서 대승 과 소승의 부파시대를 거쳐서 힌두교에서 파생된 탄트라교와 불교가 합일 하는 대승으로서의 탄트라 불교를 생각할 수 가 있다.

불교가 발생할 당시 인도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선주민들에 의해 전통적인 수행방법이 요가와 같은 형태로 성행되고 있었으며인도의 모든 종교나 철학파에 보편적으로 수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도 출가 후, 당시의 일반적인 수행법인 요가와 같은 고행으로 6년을 바라문 수행자들과 같이 생활을 했지만 결국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그러한 육체 본위만의 고행 이 올바른 길이 아님을 느끼고 나란쟈라 강가에서 소녀가 공양 하는 우유죽을 받아 먹고 심신의 안정을 취한 후 선정에 드신뒤 드디어 대해탈의 깨달음을 얻으신 바와 같이 깨달음을 구하는수행의 길은 몸과 마음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도 안되며 오직 둘의 적절한조화를 통해서만이 삼매(三昧)를 이룰 수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말하는 조화란 몸과 마음은 물론 강(剛)과 유(柔), 동(動)과 정(靜), 주관과 객관, 나와 너 나아가서 우주와 나의조화인 것이다. 이는 곧 부처님의 중도사상(中道思想)이 라 말할 수 있으며 바로 관법수행의 핵심적인 요지라고 본다.

이러한 관법, 즉 밀교는 소승적인 수행방법에서 점차적으로 대승적인 형이상학이 가미되어 7C 후반에 서쪽 인도에서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頂經)등이 만들어지면서 불교의 정통적인 지위를 주장하게 된다.

인도에서 불법이 쇠퇴할 무렵 중국으로 건너온 달마대사와 같은 인도의 고승들은 거의가 밀교의 달인들로서 이들은 「금강승(金剛乘)」으로 불려졌다한다.

이러한 금강승 계통의 승려들이 불법을 홍포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러 가지 신통자재한 묘술을 나투어 중생들을 감화했다는 전설은 우리나의 초기불교사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가 있다. 특히 달마대사가 창안한 나한공(羅漢功)과 역근경 (易筋經)은 후세에 무술과 건강법에 공헌하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최초 설법인 고(苦), 집(集), 멸(滅), 도(道) 사성제중에서 도제의 구체적인 수행덕목인 팔정도(八正道)의 정정(正定)은 관법의 생명이라고 불 려지는 요가법으로 불타(佛陀)도 이 요가의 삼매를 수행의 근본으로 삼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관 번수행의 요지는 신(身), 구(口), 의(意) 삼밀(三密)을 구하고자 하는 데 있다.

여기서 삼밀이라 함은 우리가 흔히 삼업(三業)이 리고 할 때 이른바 업의 구 성 조건이되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몸과 마음과 입을 말한다.

윤회의 동인(動因)이 되는 신, 구, 의 삼업을 정화하고 조화를 이룸으로서 과거의 업장을 소멸하고 현세에서 보리를 증득할 수 있는 방편이 되리라 확신 한다.

이를 천태소지관(天台小止觀)에서는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이 라고 하는데, 조신이란 몸을 고르게 한다는 뜻으로서 신체적인 단련을 뜻한 다.

인도의 요가나 중국의 선도법(仙道法)등에서는 정적(靜的)인 수련에서부터 강하고 동적(動的)인 갖가지 동작을 통해서 유연성과 탄력, 근력이나 균형을 발달시킴으로써 신체를 고르게 발달시키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앉아서 하는 좌관(坐觀), 서서하는 입관(立觀), 움직이면서 하는 행관법(行觀法)등으로, 행(行), 주(住), 좌(坐 ), 와(臥), 어(語), 묵(黙), 동(動), 정(靜)의 전반적인 행위 일체를 수행적 차원에서 합리적인 조건과 방법으로 조화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행법(行法)을 선무도(禪武道:불교무술)의 측면에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신체를 팔, 다리, 배, 등, 머리의

다섯 부 분으로 보고 이를 부드럽게 풀고 탄력을 키움으로서 이미 퇴화되거나 기형화된 골(骨), 관절과 근육을 이완하고 교정하여, 신 체의 균형을 바로 잡아 수행의 기본적 체질을 갖추고자 하는 요가와 같은 형식의 오체조관이란 운동법이 있다.

 

오늘날, 물질문명이 만연된 이른바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편의주의적 사고방식에 의해서 지나치게 편리한 주거환경 을 꾸미고, 또한 여러형태의 분업화된 직업에 종사하는 가운데 자신들도 모르게 신체적인 불균형(기형, 퇴화)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는 해부․생리학적인 측면에서도 물론이겠지만 보다 다 정신적인 (심리학) 차원에서 분석해 보면 대다수가 심리적 불안에서 오는 신경성 질병을 앓고 있거나 심신의 불안정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에서 번민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관법수행은 이러한 현대인들의 정신적 고뇌와 신체적 질병을 가져올 수 있는 불합리한 사고와 타성적 행위를 스스로의 수련 을 통하여 정화하고 조화할 수 있는 수행의지를 체득케 함으로써 올바른 수행과 건강한 사회생활의 자세를 갖추게 해 주리라 본다.

다음으로 선무도 수련법중 앉아서 수행하는 좌관법을 예를 들면, 가부좌를 취하고 깊은 호흡의 조화와 더불어 여러 형태의 수인(手印)을 연결 동작하여 심리적인 상태를 조작함으로서 삼매에 들고자 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수인 또는 인계(印契)라고 함은 몸가짐으로서 부처의 세계를 계합하는 것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동작의 형식으로 범어로는 무드라(mudra)라고 하는 것이다. 보통 인(印)이라고 하기도 하고 인상(印相)이라고 하는데, 반지의 모양 으로 만든 도장이나 흔적을 뜻하는 것으로서 부처님의 깨달으신 내용을 법인(法印)이라고 하여 삼법인(三法印)이 있게 되었으니 인장과 같 은 진실한 것이요 허망하지 않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인계라고 할 경우에 일차적으로 수인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나아가서는 수인과 계인을 모두 가리키기도 한다.

다시 더 나아가서 수인이나 계인 외에 불상(佛像)이나 진언(眞言)을 얘기하기도 한다. 이것은 금강정경에 설(說)해진 것이지만 대일경소(大日經疏)에서는 좁은 뜻으로 여러 성존의 삼매야신(三昧耶身)을 가리키기도 한다.

관법수행에서는 이와 같은 인계를 채응하게된 동기는 무엇인가? 앞에서도 말한 바가 있으나 밀교는 요가와 깊은 관계 가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계도 요가와 관련지어서 마음을 한 곳에 머무르게 하여 유상요가의 삼매를 성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유상요가의 삼매라고 하는 것은 우파니샤드와 원시불교의 수정파(修定派) 계통을 이은 것으로써 유상관(有相觀)을 통해서 무상관(無相觀)으로 간다.

우리가 흔히,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과 보살상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대체로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다시 말해서 앉거나 선 자세와 손의 수인이 각기 다른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3천분의 불보살이 있으니 각기 명호가 다르고 모습(印相) 또한 달라서, 이는 불보살님 마다의 서원과 이상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처님의 형상 즉 인계를 우리의 인체와 연관 지어서 생각해보면 그 무수한 수인의 동작에 따라서 심리적인 상태나 생리적인 기능이 다르게 변화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합리적인 조건에 맞추어 동작으로 연결시키므로써 몸과 마음과 호흡이 조화를 이루게 됨으로 곧 바로 삼매를 이루게 된 다고 보는 것이다.

 

선무도란?

 

선무도는 흔히 위빠사나라고도 불리는 수행법으로 불교의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에 전하는 전통수행법입니다. 본래는 불교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이라고 해서 달마대사로부터 선가에 비밀리 전수되어 온 수행법입니다. 선무도는 깨달음을 위한 실천적 방편으로서, 우리에게 익숙한 요가나 명상을 아우르는 관법수행법입니다. 선무도는 위빠사나 혹은 요가처럼 인도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수행법으로서 참선의 원류에 해당하며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배워 익힐 수 있는 수련법입니다.

현대인들의 정신적 고뇌와 신체적 질병을 가져 올 수 있는 갖가지 스트레스와 육체의 불균형을, 선무도 수련을 통하여 건강한 몸과 마음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즉, 몸과 말과 사유,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 -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 - 을 잘 살피고 정화하여 조화롭게 이끌어나감으로써 도를 이룰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선무도를 통해 누구나, 몸과 마음이 활짝 열린 대자유인을 염원하며, 우주와의 일체를 이루는 세계로 나아가고자 함입니다.

 

출처 : 三流人生
글쓴이 : 醉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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