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巨樹 保護樹 記念物/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평광동 해방기념소나무

초암 정만순 2018. 9. 11. 19:18



평광동 해방기념소나무



민초들의 나라사랑 증표

          
 
 





































대구의 동북쪽 끝자락에 있는 평광동은 광리, 시량, 큰마을, 당남 등 몇 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곳이다.
군에서 제대한 후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첫 발령받은 곳이 동촌 출장소였다.
40여 년 전 당시 동구청은 관할구역이 넓어 금호강 건너편의 방촌, 둔산, 부동, 신평, 지저, 불로, 도동 등 12개 동을 별도로 관리하는 출장소를 두고 있을 때였다.  

당시에는 기본 업무 이외 별도로 산하 동별로 담당 공무원을 지정하여 못자리 설치, 모내기, 퇴비증산, 하곡`추곡수매, 쥐잡기 등을 독려했었다. 그때 평광동을 담당했었다.

출장소가 있던 검사동에서 평광동까지는 노선버스도 없었고 도로 역시 비포장이었으므로 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주위를 산이 에워싸고 있어 몇 굽이를 돌아야 마을이 나타난다.

협곡을 지나면 예상외로 넓은 들이 펼쳐져 ‘여기가 바로 별유천지(別有天地)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유럽의 어느 산골마을이 독자적으로 외교권을 행사하는 나라가 있듯이 이곳 역시 평광공화국(?)으로 부르는 것이 어떠냐고 농담한 일도 있었다.

도연명(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과 마을 이름도 비슷했다.

다시 수십 보 더 들어가니 넓고 확 트여 밝아 보였다. 땅은 넓고 평평했으며 집들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기름진 땅과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즉 ‘복행수십보(復行數十步), 활연개랑(豁然開朗), 토지평광(土地平曠), 옥사엄연(屋舍儼然), 유양전(有良田)으로’라고 하여 도화원기가 평평할 평(平)자와 빌 광(曠)자를 써서 평광(平曠)이라고 한 데 비해 이곳 평광은 들 평(坪)과 넓을 광(廣)자를 써서 평광(坪廣)이라 한 점이 다르다.

마을을 개척한 사람은 단양 사람 우익신(禹翊臣`1532~1604)이라고 한다.

경기도 여주에 살고 있었는데 임란의 피화(被禍)가 그곳까지 미치자 남하하다가 정착했다고 한다.

그분 역시 아름답고 기름진 땅에 놀라, 스스로 소도원(小桃源)이라 했다고 한다.

그분이 이곳에서 터를 일구고 산 지 어언 4세기를 넘었다.

따라서 마을의 대다수 사람들 또한 그분의 후손들이고 그 외 몇몇 타성바지들이 있으나 그분들 역시 외손이거나 특별한 연비로 이곳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다.

소위 크게 출세한 분은 없으나 효열(孝烈)만은 남달라 효자와 열녀를 많이 배출했다.

마을 곳곳에 있는 재실과 효열비가 이를 대변한다.

마을 입구에서 첫 번째로 만나는 것이 큰 왕버들이고 이어 나타나는 큰 건물이 학교다.

그러나 이곳도 젊은이들이 떠나면서 이제는 아예 문을 닫았다.

더 올라가 버스 종점 조금 위가 동네 한복판이자 다른 마을로 갈라지는 길목이다.

효자비, 열녀비 등은 이곳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큰 마을 제일 끝부분에 1896년(고종 33년)에 세워진 첨백당(瞻栢堂`대구시 문화재자료 제13호)이 있다.

아버지가 병이 들자 손가락 셋을 차례로 끊어 수혈해 14년을 더 살게 해 동몽교관(童蒙敎官)이라는 벼슬이 내려졌다는 효자 우효중(禹孝重)과 조선 말 나라가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은거한 절의의 선비 우명식(禹命植)을 기리고 후손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이곳 마당 한가운데 우채정(禹蔡禎), 우하정(禹夏禎) 등 마을 청년 5명이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나라가 해방된 것을 기념해서 심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유일한 생존자인 우하정 씨에 의하면 3그루를 심고 물꼬를 조절하는 돌을 가지고 와서 해방기념(解放記念)이라고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1그루만 살아남았다.

압제(壓制)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뻐한 국민의 함성이 방방곡곡 메아리쳤겠지만 이렇게 나무를 심어 그 의미를 더 깊이 새기고자 한 사람은 이 마을 청년들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할 때 더 존경스러운 마음이 든다.

특히 요즘 풍토는 조그마한 공적만 있어도 기념식수를 해서 크게 생색내는데 좋은 일을 하고도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들의 태도가 더 숭고하게 다가온다.  

마을 일대는 국내 최고령 홍옥이 있는 등 온통 사과 밭이다.

한때 전국에 명성을 날렸던 ‘대구사과’가 지구 온난화와 도시화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은 이 마을이 유일하다.

또한 주변에 영국의 물리학자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사과나무의 후손목도 심어 놓아 미래 사회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의 탐구심을 길러주고자 하고 있다.

이곳은 고려 태조가 견훤에게 포위되어 목숨이 위태로울 때 대신 나가 싸우다가 전사한 장절공 신숭겸(申崇謙) 장군의 영정을 모신 모영재가 있다.

광복절을 맞아 자녀들과 함께 가볼 만한 곳으로 추천하고 싶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