仙道 丹功 佛敎/韓國 禪 思想史

[인물로 읽는 한국 禪사상사] <7> 도의국사

초암 정만순 2018. 7. 4. 21:16



[인물로 읽는 한국 禪사상사] <7> 도의국사



최상승 선사상 바탕…조계종 시발점 ‘가지산문’ 열어


서당법맥 받은 中 개원사에는 ‘조계종조 도의 입당구법비’… 
백장에겐 ‘선지식’ 인정받아

화엄 익하고 입당했던 구법승  선종 우세 당나라서 禪 공부  신라 입국하며 선사로서 활동

새로운 사회건설 원하는 정국  심성 닦는데 힘쓰는 禪 수행법 혁신성 띠고 있어 호족들 환영


일전에 어느 학술 모임에 참가했는데, 필자 옆자리에 퇴임한 한국불교 전공 교수님이 앉아 있었다. 

교수님과 대화를 하는 와중에 이런 질문을 했다. “교수님께서는 한국불교사에서 최고의 고승이 누구라고 보십니까?” 

“의상대사와 원효스님입니다.” 잠깐 숨도 고르지 않고 말씀하신 답변에 놀라지 않았다. 

개인마다 의견 차이가 있지만, 불교학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분들이 원효와 의상이기 때문이다. 


신라말 선종 발전한 이유 

신라의 원효(617˜686년)와 의상(625˜702년)대사는 출발점이 같다. 

두 분이 함께 당나라 현장법사의 유식을 배우기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 

당항성에서 한밤중에 해골물을 마신 원효는 다음날에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왔고, 의상은 입당했다. 

한분은 뒷걸음질, 한분은 전진해 나아갔다. 

과정상 해탈의 길이 다르고, 중생교화 방편이 다를 뿐, 두 분에 대해 어떤 저울질에 의미가 없다고 본다.

원효는 귀족적인 불교에서 탈피해 양반의 전유물로 여기던 불교를 노비와 서민층도 공유할 수 있다는 평등의식을 부여했다. 

원효에게서 화엄과 유식 사상에서 화해(和解)와 회통(會通)의 논리체계인 화쟁(和諍) 사상 등이 도출됐다. 

또 원효처럼 동시대 민중들에게 불교를 대중화한 대안(大安) 혜숙(惠宿) 혜공(惠空) 등이 있다. 


조계종은 종헌에 종조는 혜능의 증법손 서당지장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은 도의국사로 명문화했다. 

서당지장 선사의 법맥을 받은 중국 강서성 남창 우민사(당시 개원사)의 ‘도의조사 입당구법기념비’.

의상은 입당해 화엄종의 2조 지엄(602˜668년) 문하에서 법장(643˜712년)과 함께 동문수학했다. 

의상은 귀국 후 영주 부석사에 화엄도량을 건립했다. 

<화엄경>을 강설하고, 10여 곳에 화엄종 사찰을 창건한 의상대사는 곧 해동 화엄종의 개조(開祖)가 된다. 

이후 의상과 그 제자들에 의해 화엄사상은 신라 사회에 널리 확산되고, 신라 하대에 선종과 대립 혹은 공존했다.

신라 중기에서 말기로 넘어오기까지 주류 불교학은 의상의 화엄학과 유식학이다. 

그런데 화엄종은 의상대사와 그 직제자에 이르는 시기까지 실천적 성격이 강했으나 8세기 이후로는 지나치게 학문적인 경향으로 흘러갔다. 

한편 유식은 원측법사의 서명학파가 신라에 유입되어 유식학이 잠깐 유행하였으나 8세기 중엽부터 쇠퇴하였고, 진표율사에 의한 법상종은 실천적 종교운동으로 전환했다. 


우리나라에 선(禪)이 유입되기 전, 신라 말기는 화엄사상이 팽배했다. 

전반적으로 당시 구법승들은 화엄학을 공부하고 입당(入唐)했다. 

대부분의 선사들이 교를 익히기 위해 입당하지만, 당시 당나라에서는 화엄종은 규봉 종밀(780˜841년)로 단절되었고, 더 이상 화엄학이 크게 발전되지 못했다. 

즉 8세기 중반 무렵부터 중국은 선종이 우세하였으므로 우리나라 구법승들은 자연스럽게 선(禪)을 하였고, 신라로 입국할 때는 선종의 선사로서 활동하게 된다. 


신라 사회는 경덕왕(742˜764 재위)이 서거한 이후, 신라 하대로 접어들면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사회변동을 여러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새로운 사회체제의 전환점이 필요했다. 

신라 말기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되었는데, 정치적 혼란기임을 드러낸다. 

그 원인은 골품체제의 모순에서 비롯된 붕괴현상에서 사회 분열로 이어진 것이다. 

첫째, 골품체제의 모순에서 진골 귀족끼리 치열한 왕위 다툼이 있었다. 

중앙왕실에서는 방계(傍系) 김씨 왕실이 등장하여 치열한 왕권 투쟁이 있었다. 

둘째, 중앙의 하급 귀족인 6두품은 진골 귀족의 출세에 제약을 느끼고 이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또한 골품제도의 모순으로 경제 체제까지 붕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렇게 두 원인으로 해서 중앙정치가 혼미해지자, 지방과 해상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다. 

곧 지방의 호족들은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그 지방의 백성들을 독자적으로 지배하였고, 어떤 호족은 해외 해상활동을 하여 해외무역을 시도했다. 

이런 와중에 농민들은 지배층의 가혹한 착취에 저항하는 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구족계를 받은 광동성 광주 대감선사(당시 보단사),

이와 같이 불교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대에 새로운 이념이 요구되었다. 

이런 사회 모순에 신라 말기에 선종이 발전하는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고 본다. 

첫째는 복잡한 교리를 떠나 심성을 닦는데 힘쓰는 선종의 수행 방법이 호족들에게 호감을 샀다. 

둘째는 선종 자체가 혁신성을 띠고 있어서 새로운 사회 건설을 원하는 6두품과 호족의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즉 개인적인 수행을 강조하는 선종은 호족들이 중앙왕실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는 것과 맞물려 선종을 선호한 것이다. 


서당 법맥 잇고 백장도 인정

현재 조계종 종헌 제2장 6조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본종(本宗)은 신라 헌덕왕 5년(813년)에 조계 혜능의 증법손 서당지장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은 도의(道義)국사를 종조(宗祖)로 하고, 고려의 태고 보우국사를 중흥조로 하여 청허와 부휴 양 법맥을 계승한다.” 

또한 조계종 종헌 서문에도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우리 종조 도의국사께서 조계의 정통법인을 사승하사 가지 영역에서 종당을 게양함으로부터…”


9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 도의국사는 현 조계종의 조사로서 조계종에는 6조 혜능을 비롯해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년)·서당지장(西堂地藏)의 선풍(禪風)이 그대로 전해 오고 있다. 

도의(?˜825년)선사는 북한군(北韓郡, 현 서울) 사람으로 성이 왕씨였다. 

신라 선덕여왕 때(784년) 당나라로 들어갔다. 

입당(入唐)하여 바로 오대산(문수보살 성지, 현 山西省)으로 가서 기도를 하였는데, 이곳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감응을 받아 공중에서 종소리가 들려오고 신령스러운 새가 날아오는 신이한 일이 있었다. 

이후 <조당집>에 도의선사의 중국 행적이 나온다. 

도의 선사는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 <육조단경>의 설법 장소인 보단사(寶壇寺, 현 大鑑禪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훗날 조계산(현 廣東省 韶關 南華寺)으로 옮겨갔다. 

도의선사는 6조 혜능을 모신 조사당에 이르러 참배를 하려고 하는데, 조사당의 문이 저절로 열렸고, 3배를 올리고 나오니 또한 문이 닫혔다는 신이한 고사가 전한다. 

물론 이런 고사는 진위 여부를 논하기에 앞서, 도의가 당시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미친 법력과 영향력이 반영되어 후대 요청에 의해 만들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즉 도의를 통해 혜능의 선법과 정통성을 연계하면서 스승과 제자의 이심전심(以心傳心) 법맥을 상징한 것이라고 사료된다. 

이후 도의는 강서성(江西省)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 현 佑民寺)에서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년)을 참알하고 의심하고 있던 바를 물어 그 의문점을 풀었다. 

서당은 마치 돌더미에서 아름다운 옥(玉)을 얻은 듯 하고 조개 속에서 진주를 주워낸 것처럼 기뻐하며 말했다. 

“진실로 법(法)을 전한다면 이런 사람이 아니고 누구에게 전하랴.”

백장회해 선사로부터 심인을 얻은 강서성 봉신 백장사 전경.

서당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도의는 깨달음을 얻었고, 명적(明寂)에서 도의(道義)라는 호를 받았다. 

도의선사가 개원사에서 스승 서당을 만나고 법맥을 받은 장소라고 해서 2008년 조계종 총무원에서는 개원사 도량에 ‘조계종 종조(宗祖) 도의조사 입당(入唐) 구법기념비’를 세웠다. 

도의는 서당 문하에서 수행한 뒤, 백장청규를 제정한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년)선사가 살고 있는 백장산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도의는 서당을 모시는 것과 똑같이 백장회해를 스승으로 섬겼다. 

어느 날, 백장이 도의의 정진력에 감화를 받아 선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강서의 선맥(禪脈)이 모두 동국(東國)의 승려에게 넘어가는구나.” (<조당집> 중)

도의선사는 마조 문하의 제자인 서당에게서 법맥을 받고, 백장에게서도 인정을 받아 대선지식으로서의 법력에 바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오래 불경 읽어도  심인(心印)을 얻지 못하며
무수한 세월 닦는다고 해도  끝내 얻기 어려울 것”

선교융합 꾀하던 당시
무위임운지종·무념무수 ‘교외별전’…禪우위성 주장

불성론 처음 주장한 도생 중국에 禪전한 달마와 유사
설악산 진전사 은거 정진  염거-보조체징에게 전법 

“나의 조사가 전한 법외에  더 이상 구할 것이 없구나”
가지산 보림사에 뿌리 내려


조계종의 시발점이 된 가지산문 선사상의 바탕은 도의선사에게 있어 그를 1조, 

염거선사를 2조, 보조체징을 3조로 부르기도 한다. 

사진은 장흥 보림사 도의국사 진영.

도의선사는 37년 동안 당나라에 거주하며 법을 구한 뒤, 821년 귀국했다. 

선사상의 신라 전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도의선사는 입국한 이래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는다. 

당시 교종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는데 그의 설법을 마어(魔語)라고 비난했다. 

당시 교종이 풍미했던지라 도의선사의 선사상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의의 대표적인 선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무위(無爲)사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신라에 돌아와 선리를 설했다. 그

때 사람들은 오직 경교(經敎)와 습존관심(習存觀心)의 법을 숭상하여 아직 무위임운지종(無爲任運之宗)의 선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황당한 소리라고 하며 그를 존중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양무제가 달마의 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무주 가지산 보림사 보조선사 탑명) 


도의국사 수행도량 양양 진전사.

귀국 후 행적과 선사상 

여기서 ‘무위임운’이라는 말은 조사선의 사상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이다. 

굳이 수행을 하지 않아도 본래 성불된 깨달아 있는, 본각(本覺) 사상의 입장에서 언급하는 것이다. 

곧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인 불성(佛性)에 입각해 있는 사상이다. 

그래서 무수무증(無修無證), 닦을 필요도 없고 증득할 것조차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웬만한 불자라면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단어는 알고 있으며, 어느 정도 수긍하는 용어이다. 

그런데 중국에서 돈오불성론(頓悟佛性論)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거의 이단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바로 구마라집(344˜413년)의 제자인 도생(道生, 360?˜434년)이다. 

당시 도생은 이 불성론 주장에 거센 반박을 받았고,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선종이 부상하면서 그의 사상은 300여 년 후에 인정을 받게 됐다. 


도의국사 부도탑(보물439호).

도의선사와 유사한 분이 또 한 분 있다. 

바로 중국 선종의 시조인 보리 달마이다. 

달마가 520년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양무제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는데, 양무제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양무제와의 대담은 후대 만들어진 가설). 

이에 달마는 북쪽으로 올라가 하남성(河南省) 소림사에서 은거한다. 

당시 교학중심으로 발달해 있던 중국의 불교는 서천 땅에서 온 달마가 그리 반갑지 않았다. 

오직 마음만을 강조했던 그에게 현세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황제나 왕권과 밀착해있던 승려들과의 마찰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래서 달마에 관한 일화에는 ‘달마가 광통율사(468~537년)에게 독살을 당했다?’, ‘달마가 관속에 신발 한 짝만을 남겨두고 짚신 한 짝만 들고 총령을 넘어 서천으로 돌아갔다’는 등 신이적인 일화가 등장한다. 

아무튼 달마의 애달픔이라는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아시아에 선(禪)의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 지금의 한국불교를 이루고 있다. 

이와같이 불성론을 처음 주장한 도생, 고국을 버리고 중국에 선법을 전하러 온 달마가 우리나라 도의선사의 행적과 유사하다. 

그래서 선각자는 외로운 법인가 보다. 

도의선사가 당나라에서 37년간을 수행해 마치고 돌아온 고국에서는 그를 쓰잘 데 없는 말을 하는 마구니 같이 취급했다는 점이다. 

당시 화엄종의 승통(僧統)과 나누었던 대담이 고려시대 천책의 <선문보장록>에 언급되어 있다. 

화엄종의 승통 지원(智遠)이 도의에게 물었다. 

“화엄의 4종법계(四種法界) 이외 어떤 법계가 있으며, 55선지식의 항포법문(行布法門) 이외 다시 어떤 법문이 있습니까?” 

“지원스님이 알고 있는 4종법계는 조사선문(祖師禪門)에서는 이체(理體)를 바로 들어 일체의 정리(正理)를 영멸(永滅)시키므로 법계상(法界相)도 오히려 얻을 수 없습니다. 

본래 행(行)과 지(智)가 없는 조사선에서는 문수, 보현의 상(相)도 오히려 볼 수 없는 것입니다. 

55선지식의 항포법문은 물거품과 같음이요, 4지보리(四智菩提) 등도 또한 금의 광석과 같을 뿐이다. 

교리 속에 혼잡 되어 있어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원이 또 물었다. 

“그렇다면 교리행과(敎理行果)와 신해행증(信解行證)은 어디에 해당되며 어떤 불과(佛果)를 성취합니까?”


염거선사 부도탑(국보104호).

“무념무수(無念無修)의 이성(理性)이 신해행증일 따름이며 조사께서 보이신 가르침은 부처와 중생을 따로 얻을 수 없고, 곧 도(道)의 성품을 바로 나타낼 뿐입니다. 

그러므로 5교(五敎) 밖에 별도로 조사의 심인법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도의선사는 화엄종의 지원스님에게 “아무리 오랫동안 불경을 읽어도 심인(心印)을 얻지 못하며, 무수한 세월을 닦는다고 해도 끝내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라며 선(禪)은 교종(敎宗)과는 감히 비교될 수도 없는 최상승법이라고 했다. 

곧 선종의 우위성을 강조하면서 교종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도의선사의 말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러하다.

 <화엄경>에서는 수행과위를 55위로 하는데, 이는 점차적인 수행법(漸修)에 해당한다. 

돈오의 수행법은 교리를 통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의 깨달음 법은 교(敎) 밖에 달리 전한다고 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이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인 것임을 드러낸다. 

우리나라의 선수행자들이 애독하는 어록이 황벽희운(?˜856년)의 <전심법요>이다. 

이 어록은 돈오돈수 사상의 대표적인 어록이요, 조사선의 정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의 도의선사가 언급한 교리행과로는 깨달을 수 없다고 했듯이 황벽도 어록에서 ‘성문·연각 및 십지·등각·묘각조차도 방편’이라고 하면서 오롯이 돈오를 강조한다. 

성철스님도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했다. 

물론 우리나라 선법이 보조선사 이후 돈오점수(頓悟漸修)적인 측면이지만, 돈오돈수가 우리나라 선의 종풍이라고 본다. 


보조체징선사 창성탑(보물157호).

800여 수행자 보림사 운집

도의의 선사상은 ‘무위임운지종(無爲任運之宗)’ ‘무념무수(無念無修)’를 중시하며 철저하게 조사선을 강조했다. 

당시 선사들이 선(禪)과 교(敎)의 융합을 꾀한 반면 도의 선사는 교외별전, 선의 우위성을 주장했다. 

도의선사는 자신의 선사상을 신라 사회에서 펼칠 수 없음을 직감하고, 마치 달마가 소림사로 들어가 면벽수행 했듯이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했다. 

이곳에 거주할 때, 염거(廉居, ?˜844년)가 찾아와 도의로부터 법을 전해 받았다. 

염거스님 탑명에도 ‘조사선을 전하고, 사교를 멀리한다(傳祖心闢邪敎)’라는 내용이 있는데, 염거 또한 스승의 가르침에 철저한 선자(禪者)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염거는 설악산 억성사에 머물며, 법을 보조체징(普照體澄, 803˜880년)에게 전했다. 

보조체징은 염거로부터 법을 받은 뒤, 837년 당나라에 들어갔다. 

보조는 여러 곳을 행각하며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수행하다가 이런 결론을 내린다.

 “나의 조사가 전한 법 이외에 더 이상 구할 것이 별도로 없구나(我祖師說 無以爲加).” 

이후 당나라에 머문 지 3년 만에 신라로 돌아왔다. 

체징이 스승으로부터 공부한 사상이 후대에 온전히 전하지는 않지만, 신라 산문에 이정표를 세우는데 큰 이정표 역할을 하였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이후 체징은 전남 장흥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에서 산문을 열었다. 

이후 이 산문에는 800여 명의 승려들이 운집해 수행했다고 하니, 당시 도의선사의 선법이 신라 선종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말기 여러 산문 가운데 오로지 가지산문만 흥성했다. 

고려 때 <삼국유사>로 유명한 일연이 바로 가지산문 승려이다. 

이렇게 볼 때, 산문은 분명히 3조 보조체징이 열었지만, 가지산문은 도의선사의 선사상을 바탕으로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조계종의 시발점이다.

보림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