仙道 丹功 佛敎/韓國 禪 思想史

[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4> 정중무상(淨衆無相)

초암 정만순 2018. 6. 27. 08:19




[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4> 정중무상(淨衆無相)


  - 입당 구법시기한 번 선정에 들면 5일…초기선종사 대선지식


신라 성덕왕의 셋째 왕자 출신  누나 불심에 감화 군남사 출가 
禪 유포 전 당나라로 간 선사
唐 현종이 주선 선종사 머물다
소지공양ㆍ천곡산 두타행 끝에  처적 선사 가사와 법 이어받아 

깊은산 먹이 찾던 짐승도 감화
송고승전 등에 “신이한 고승…” 무덤 가 사찰 지어 보시하기도  


신라 성덕왕의 셋째 왕자로 치열한 수행과 덕화로 당나라에서 널리 칭송받은 무상대사는 깊은 산속에서 음식이 없어지면 흙을 먹을 정도로 수행했다. 맹수들조차 감화를 받아 그를 호위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여러 서적에 전해지고 있다. 사진은 그가 처적 선사로로부터 법을 받고 수행한 덕순사(현 寧國寺) 보리도량 당우 내부 그의 행적이 그려진 벽화.

대한불교조계종의 연원은 9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서도 가지산문이다. 이 가지산문을 포함한 아홉 산문, 그리고 여러 산문이 신라 말부터 고려 초인 821~932년에 개산(開山)됐다. 이렇게 선(禪)의 산문을 연 스님들은 당나라로 유학 가서 최소한 7년에서 30여 년간 수행한 뒤 스승에게 법을 받아왔다. 그런데 신라 땅 곳곳에서 선이 유포되기 이전, 당나라로 건너간 구법승 중에 선사가 된 분이 있다. 바로 정중무상(淨衆無相, 684˜762)대사이다. 무상대사는 현종(712˜756년 재위) 때 입당하여 중국 선종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곳에서 입적한 선사이다. 무상은 비록 중국에서 활동했지만, 한국선사상 입장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역대 왕족들의 출가 

<유마경> 13품 ‘법공양품’에는 보개왕의 아들 출가이야기가 나온다. 신심 깊은 보개왕에게 아들이 1000명인데, 이들은 모두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데 극진했다. 왕자 가운데 월개 왕자는 신심이 가장 뛰어나 약왕여래께 수기를 받고 출가해 비구가 된다. 또 <법화경> 27품 ‘묘장엄왕본사품’에는 두 왕자가 부모를 부처님께 귀의시키는 이야기가 있다. 운뢰음숙왕화지부처님 때 정장과 정안 왕자는 신심이 극진했다. 두 왕자가 출가하고자 할 때, 왕비는 왕자들에게 ‘부처님 시대에 태어나기 어려운데 출가하는 것이 기특하다’며 적극적으로 권유한다. 이후 두 왕자가 출가하였고, 부친인 묘장엄왕과 모친을 부처님께 인도하여 이들도 모두 출가토록 한다. 

경전에 왕족들의 출가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도 왕족이었고, 부처님 재세 시 육사외도 가운데 하나인 자이나교의 마하비라도 왕족 출신이다. 이런 영향인지 <해동고승전>에 신라에 불교 수입을 공인시킨 법흥왕(514˜539년 재위)도 출가해 법명을 ‘법운’이라고 했고 왕비도 비구니가 되어 ‘묘법’이라 불렸다. 또 ‘순치황제(順治皇帝) 출가 시(詩)’로 유명한 청나라 3대 황제인 순치제(1643˜1662년 재위)도 있다. 

우리나라도 왕자 출신 승려가 매우 많다. 심지(心地)는 신라 41대 헌안왕의 아들로서 15세에 대구 팔공산에서 출가했는데 훗날 동화사의 창건주이다. 원측도 신라 왕손이며, 무루는 신라 어느 왕의 왕자로 당나라에서 활동하다 그곳에서 입적했다. 고려 때는 삼국시대보다 왕손 출가자가 더 많다. 의천(1055˜1101년)은 문종의 넷째 왕자로서 11세에 출가했고, 징엄(1090˜1141년)은 숙종의 넷째 왕자로서 의천을 스승으로 출가했다. 종린(1127˜1179년)은 인종의 아들로서 징엄을 스승으로 출가했고, 이어서 충희(?˜1182년)는 인종의 넷째 왕자로서 종린의 제자이다. 각응(?˜1250년)은 희종의 다섯 째 왕자이고, 현응(?˜1139년)은 숙종의 아들이며, 요일은 명종의 숙부이다. 증통은 태조 왕건의 다섯 째 왕자이다. 도생은 문종의 여섯 째 왕자이고, 각관도 왕실 출신이고, 지인(之印, 1102˜1158년)은 예종의 왕자이다. 

왕족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삶의 고뇌에서 해탈하고자 출가했다. 그런데 모든 왕족들의 출가가 부처님과 같지 않다. 우리나라 왕족들의 출가 경향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경전 내용처럼 순수함으로 출가한 경우이고, 둘째는 왕족으로 태어나 왕이 되지 못하는 비운을 극복코자 출가를 선택하는 경우이다. 셋째는 왕권 강화를 위해 왕자 출신 승려가 필요해 그 요건에 부응해 출가한 경우이다. 고려 때 왕자 출신 승려들이 대부분 승통이나 왕사, 국사를 역임한 점을 볼 때,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무상대사는 어떤 마음으로 출가했을까? 필자의 추측이지만, 첫째인 신심적인 면도 있지만, 두 번째인 왕족으로서 태어난 운명에 대한 도피성도 없지 않다. <송고승전>에 신라 사신이 무상을 해하려고 했던 내용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덕순사(현 寧國寺) .

무상대사의 행적 

무상대사는 신라 성덕왕(702˜737년 재위)의 셋째 왕자이다. 성덕왕(?˜737년)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친동생이다.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타계하자, 성덕왕은 화백회의에서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은 재위 기간 중 당나라에 사신을 약 43회 정도 파견할 정도로 당나라의 신진문화를 받아들였던 뛰어난 개혁 군주였다. 

<역대법보기>에 대사의 출가에 대해 이런 내용이 전한다. “무상대사가 어릴 적, 바로 손위 누나가 출가하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왕가에서는 그녀를 억지로 시집보내려고 했다. 누나는 칼로 본인의 얼굴을 찔러 자해하면서까지 출가코자 하는 굳은 의지를 사람들에게 보였다. 무상은 출가하고자 하는 누나의 간절한 불심(佛心)을 지켜보면서 ‘여린 여자도 저런 마음을 갖고 출가하고자 하는데, 사내대장부인 내가 출가해 어찌 법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강한 의지를 품었다.” 이후 성인이 된 무상대사는 군남사(群南寺)로 출가하였고, 얼마 후 728년(성덕왕 27) 44세에 당나라로 건너갔다.

무상이 당나라에 들어가 여러 곳을 다니며 수행하다가 현종(712˜756 재위)을 알현했다. 현종은 무상에게 섬서성 장안(현 西安)에 위치한 선정사에 머물도록 했다. 대사는 현종의 지시대로 선정사에 머물다 사천성으로 옮겨갔다. 대사는 당대에 선의 위상을 떨치고 있던 자주(資州)의 덕순사(德純寺) 당화상(唐和尙, 성이 ‘당’씨)이라고 불리는 처적(處寂) 선사를 찾아갔다(법맥을 보면, 4조 도신-5조 홍인-자주 지선-처적이다). 처적의 생몰연대는 대략 669˜736년, 648˜734년 등 정확하지 않다.

무상이 덕순사(현 寧國寺)로 찾아가 처적선사 뵙기를 간곡히 청했으나 처적은 병을 핑계로 무상을 만나주지 않았다. 무상은 며칠 동안 제자로 받아들여줄 것을 스승에게 간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무상은 자신의 구법 의지를 보여주고자 소지공양(손가락을 태우는 것인데, 수행의 의지를 보이는 뜻)을 감행했다.

무상은 2년간 덕순사에 머물며, 처적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무상은 가르침을 받는 와중에 더욱 정진하기 위해 천곡산(天谷山, 현 四川省 靑城山)으로 들어가 두타행을 하다가 다시 덕순사로 돌아와 처적으로부터 가사와 법을 받고 ‘무상(無相)’이라는 호를 받았다. 

무상대사가 처적선사에게 가사를 받고 다시 천곡산으로 돌아가 수행하였는데, 이 부분에 대해 <역대법보기>에 이렇게 전한다. “김화상은 가사를 받고 천곡산 바위굴에 숨어 버렸다. 풀을 엮어 옷으로 삼고 음식을 줄였으며, 음식이 없어지면 흙을 먹을 정도로 수행했다. 맹수들이 무상대사에게 감화를 받아 그를 호위해주었다. 무상대사는 이런 신이한 영험이 있었다.” 

또 <송고승전>에는 무상대사의 수행에 관해 이렇게 전한다. “무상대사는 한번 선정에 들 때마다 5일간 삼매에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많이 내렸는데, 두 마리의 짐승들이 먹을 것을 찾아 무상대사 앞에 나타났다. 무상대사는 벌거벗은 채로 짐승들에게 보시하려 하였으나 짐승들은 무상대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냄새를 맡으며 둘레를 돌다가 돌아갔다. 대사가 밤중에 좌선하는 와중에 호랑이의 수염과 털을 눌러 손에 잡히기도 할 정도였다. 무상대사의 산 속 수행이 오래되어 갈수록 옷이 다 헤지고 머리가 길어 사냥꾼들이 그를 이상한 짐승으로 여기고 활을 쏘려다가 그만두기도 했다. 무상대사는 마을 부근 성에 들어와서도 낮에는 무덤 사이에 머물렀고, 밤이면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는 등 두타행을 했다. 이에 대사를 존경하며 섬기는 이들이 점차 많아졌다. 또 어떤 사람은 대사를 위해 무덤 옆에 사찰을 지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역대법보기>와 <송고승전>에서는 무상을 신이한 고승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점은 무상이 중국인들에게 미친 영향이 매우 컸음을 반증하는 부분이다. 


사천성 34년 두타행과 감화  민중의 희망…수행자 의지처 
서남유일 선종 ‘정중종 개조’ 

“무억은 계(戒) 무념은 정(定) 망념이 없는 것은 혜(慧)이니 이 3구가 바로 ‘총지문’이라” 

‘무념’ 선지 강조위해 제시한 3구 설법과 3학 실천케 하는 수단으로 ‘인성염불’도 도입


중국에서 무상스님의 존재는 나한상 순번에서 육조 혜능을 앞설 정도이다. 사진

① 사천성 성도 대성자사에 모셔진 벽화 

②운남성 대리 숭성사 오백나한전 

③사천성 시방현 나한사 오백나한전(오른쪽) 

④사천성 시방시 나한사 오백나한전 

⑤사천성 신도현 보광사 오백나한전 

⑥절강성 항주 영은사 오백나한전 

⑦운남성 서산 화정사 오백나한전 

⑧아미산 복호사 나한전의 무상스님.

정중무상(684˜762)은 10여 년간 스승 문하에서 수행한 후, 성도의 절도사 장구대부(章仇大夫, 739년)의 요청에 의해 성도 정중사(淨衆寺)에 주석했다. 이에 대해 <송고승전>에서는 ‘무상대사가 두타행으로 일관되게 수행하는 모습에 감화를 받아 정중사에 머물도록 했다’고 한다. 또한 성도의 많은 사람들이 대사에게 귀의하며 존경했다. 

점차 무상대사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성도의 관리였던 양익은 ‘사람을 현혹시키는 요사한 승려’로 의심하고, 병사 20여명을 이끌고 무상대사를 찾아왔다. 병사들이 무상대사를 보자마자 심신이 전율되어 벌벌 떨었고, 큰 바람이 불어와 모래와 돌이 날아왔다. 양익은 이때서야 머리를 조아리고 무상대사 앞에 무릎을 꿇고 귀의해 참회하자, 회오리바람이 멎었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무상대사에게 귀의하면서 보리사(菩提寺), 영국사(寧國寺) 등 사찰을 보시하였고, 대사가 그곳에 머물기를 권청했다. 당시 성도 밖 지역에서는 무상대사를 위해 창건한 사찰이나 종과 탑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여러 사찰 가운데 무상대사는 정중사에 오래 머물렀다. 


무상대사의 선사상

나이 72세 무렵 무상이 사천성 성도에 머물며 수행할 때 당시 현종이 안사의 난(755˜763년)을 피해 섬서성 장안(현 西安)에서 이 곳으로 피신 왔다. 이 무렵 현종은 성도에 머물고 있는 무상 대사에게 ‘대성자사(大聖慈寺)’라는 현판을 하사하고, 이 사찰을 중건 불사해 머물도록 했다. 당시 대성자사는 96개의 정원과 1000여 폭의 벽화가 있을 정도로 성도에서 가장 큰 도량이었고, 진단제일총림(震旦第一叢林)이라고 불리었다. 절 주변은 당시 외국인들이 교류하는 국제시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대사는 말년에 정중사에 머물며 제자를 지도했다. 762년 5월19일, 제자들에게 “나에게 깨끗한 새 옷을 주어라. 목욕하고 싶다”고 말한 뒤, 자시(子時)가 되자, 좌선한 모습으로 입적했다. <역대법보기>에는 무상대사 열반 후에 신이한 모습을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해와 달은 빛을 잃고, 천지는 백색으로 변했다. 법의 깃대는 부러지고, 니련선하의 강물이 말랐으며, 사람들은 희망을 잃어버렸고, 수행자들에게는 의지처가 끊어졌다.” 무상이 사천성에 머문 지 34년째, 세속 나이 79세로 고국이 아닌 타향에서 입적했다. 

무상의 대표적인 선사상은 인성염불과 3구설법(三句說法)이다. <역대법보기>에 전하는 내용을 보자. “무상대사는 매년 12월과 정월에 사부대중 백천만인에게 계를 주었다. 그는 엄숙하게 도량을 시설하고 스스로 단상에 올라가 설법했다. (제자들과 불자들에게) 먼저 소리를 내어 염불하도록 하고(引聲念佛), 마음을 다하여 집중해 소리가 가늘어지면서 끊어지려는 무렵,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억(無憶), 무념(無念) 막망(莫妄)하라’”

첫째, 무상대사가 대중들에게 ‘소리를 내어 염불하도록 하였다’는 것이 바로 인성염불을 말한다. 무상대사는 염불행자이거나 정토행자는 아니다. 다만 삼매(선정)에 쉽게 들기 위한 방편으로 염불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단지 부처를 염함으로써 자신의 청정한 자성 자리에 입각한 본성을 자각하기 위한 것이 무상 대사가 활용한 인성염불의 의미이다. 

둘째, 원문 마지막의 무억·무념·막망을 3구설법이라고 한다. 무억은 생각으로 억측하거나 번뇌가 만든 상(相)을 떠나는 것이고, 무념은 일체 번뇌로운 생각인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며, 막망은 어떤 것이든 허망한 생각이 없이 본성에 입각해 올바르게 사유하는 것이다. 무념의 선지를 강조하기 위해 제시하는 3구설법과 3학(三學)을 구체적으로 실천케 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인성염불을 도입한 것이다. 무상대사는 앞에 전개한 3구를 수행차원에서 계·정·혜 3학에 배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억은 계(戒)이고, 무념은 정(定)이며, 망념이 없는 것은 혜(慧)라고 한다. 이 3구가 총지문(摠持門)이다.” 

규봉 종밀은 <원각경대소초>에서 무상대사의 3구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억은 지나간 과거에 대해 집착하거나 추억하지 않는 것이고, 무념은 미래의 일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 것이며, 막망은 현재의 일에 대해 지혜와 상응해 잡되거나 혼란스럽지 않은 것이다.”

육조혜능보다 높은 지위

중국의 오백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해 부처님의 첫 제자들 5비구 가운데 한 사람인 교진여가 포함되고, 선종 초조 달마대사는 307번째 나한이다. 반면 6조 혜능과 임제 의현이 제외될 정도이다. 사진은 베이징 홍라사에 모셔진 오백나한 중 455번째 무상대사. 하단에 대사의 행적이 쓰인 안내판도 보인다.

첫째, 무상은 사천성 성도 정중사에서 20여년을 머물며 수행했는데, 사찰 이름을 따서 그를 ‘정중종의 개조(開祖)’라고 한다. 무상대사가 활동하던 무렵, 선종은 특히 양자강 이남인 남방에서 발달하였고, 남방을 중심으로 선수행자가 많았다. 혜능이 열반하고(713년),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들이 활동하는 시기이다. 이때는 선종도 여러 파가 있었고, 선사들이 자파의 선을 정립하려는 시기이다. 정중종은 남방이 아닌 서남 지역의 유일한 선종으로서 중국 초기 선종사에 미친 영향이 결코 적지 아니하다. 

둘째, 무상의 선(정중종)이 티베트 불교에 최초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원래는 선종사에서 치손데첸왕 때 북종선(北宗禪)의 마하연(摩訶衍) 선사가 781년  수도 라싸에 들어가 티베트에 선을 전한 최초의 선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중국의 북쪽 돈황에서 고대의 유물과 경전이 출토되어 <역대법보기>가 발견되면서 이전의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무상의 모습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즉, 돈황의 자료가 발견됨으로써 티베트에 최초 선 전래자는 무상대사로 재평가되었다. 또한 티베트의 고사서(古史書) <바세>에도 이 점이 드러나 있다.

“치덱첸왕은 왕자 치손데첸(742˜797년)을 위해 불교를 들여오려고 산시(Sangshi) 등 4인을 중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산시는 중국황제를 알현하고 1000권의 경전을 가지고 돌아가는 도중 김화상(金和尙)을 만났다. 김화상은 티베트의 사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부왕은 이미 죽었고, 불교를 배척하는 대신들에 의해 파불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앞으로 왕자가 왕이 되어 불교교리에 대해 물을 때, 신왕(新王)에게 해설해주면, 왕은 신심이 일어날 것이다.’ 무상은 산시에게 불법을 가르치고 3경(三經, 十善經·金剛經·滔竿經)을 주었다. 이후 산시 일행은 두 달 동안 김화상 곁에 머물다 티베트로 돌아갔다. 이들이 귀국해보니, 김화상의 예언대로였다. 산시는 가지고 간 경전을 보호하기 위해 땅에 파묻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 왕자가 치손데첸왕이 되어 불법을 물을 때, 산시는 ‘이전의 조상들께서는 <노자경>에 따랐으나 나라에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며 산시는 땅에 파묻었던 3경을 꺼내어 차례로 읽어주었다.” 

셋째, 무상에 관해서는 10여 년 전부터 밝혀진 바지만, 무상은 중국불교에서 공인한 오백나한 가운데 455번째 나한으로 모셔져 있다. 중국의 오백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해 부처님의 첫 제자들 5비구 가운데 한 사람인 교진여가 포함되고, 선종 초조(初祖)인 달마대사는 307번째 나한이다. 반면 6조 혜능과 임제 의현이 제외될 정도이다. 무상대사가 나한으로 모셔져 있는 사실도 우리나라에서는 20여 년 전에 알려졌다. 

넷째, 동아시아 선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선사가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년)인데, 이 마조가 무상의 제자라는 내용이다. 처음 주장한 승려는 규봉 종밀(780˜841년)이다. 선교일치를 주장한 강사이자 선사인 종밀은 <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와 <원각경대소초>, <송고승전>에 무상대사와 마조가 사제관계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후 근ㆍ현대에 들어 중국 사학자인 호적(胡適, 1891˜1962년) 박사가 주장했다. 호적 박사는 이 내용을 민영규 연세대 교수에게 전했고, 민 교수는 제자들과 함께 무상대사의 행적을 연구했다.